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여섯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때만해도 한 집에 아이가 보통 네댓은 됐으므로 골목길 안에만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줄잡아 열 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은 시끌벅적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방과 후 골목길에 아이들이 모일 때쯤이면 대문 앞 계단에 작은 방석을 깔고 나를 거기에 앉히셨다.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딱히 놀이기구가 없던 그때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하고 놀았지만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그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골목 안 친구들은 나를 위해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내게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겼다. 그뿐인가 술래잡기를 할 때는 한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답답해 할까봐 어디에 숨을지 미리 말해주고 숨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은 골목에서 중앙이 아니라 모퉁이 쪽이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이 늘 친구들에 놀이무대였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나는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봐 친구들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 골목에서의 일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반이 좀 일찍 끝나서 나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던 깨엿 장수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목발을 옆에 두고 대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흘낏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더니 리어카를 두고 다시 돌아와 내게 깨엿 두개를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집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 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전 학교 친구를 찾아 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번은 가수 김현철이 나와서 초등학교 때 친구를 찾았는데,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허리가 36인치일 정도로 뚱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뚱뚱해서 잘 뛰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끼워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김현철이 나서서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 얜 골키퍼를 시키면 우리 함께 놀수 있잖아!"
그래서 그 친구는 골키퍼를 맡아 함께 축구를 했고,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김현철의 따뜻한 말과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 난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찡해진다.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독일에게 졌을 때 관중들은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 "괜찮아! 괜찮아!“
혼자 남아 문제를 풀다가 결국 골든벨을 울리지 못하면 친구들이 얼싸안고 말해 준다.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참 잘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너라면 뭐든지 다 눈감아 주겠다'는 용서의 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니 넌 절대 외롭지 않아'는 격려의 말, '지금은 아파도 슬퍼하지 말라'는 나눔의 말, 그리고 마음으로 일으켜 주는 부축의 말, 괜찮아.
참으로 신기하게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난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아, 그래서 '괜찮아' 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재벌 사업가로 알려진 미국의 톰 설리번은 자기의 인생을 바꾼 말은 딱 세 단어. "What to play(함께 놀래)?" 라고 했다. 어렸을 때 실명하고 절망과 좌절감에 빠져 고립된 생활을 할 때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야말로 자기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스펀지같이 무엇이든 흡수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마음을 정해 버린다. 기준은 '함께'이다. 세상이 친구가 되어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볼 때 힘들지만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든지 아니면 세상은 너무 무서운 곳이라든지 결정해 버린다. 새삼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정붙이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옛날 나와 함께하기를 거절하지 않은 골목길 친구들이다.
첫댓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에너지 100%, 만땅인말 " 토닥토닥 괜찮아"
활보는 '이용자'의 골목길 친구 ... 괜찮겠지요?
저녁 어스름 쯤. 가난한 골목길에도 밥 냄새와 연기는 피어오르고....아련한 한 시절의 풍경입니다. 언제나 생각해도, 배 고팠지만 그래도 정이 많았던 시절 같습니다.
맹초 님의 댓글이 한 편의 서정시처럼 편하게 다가옵니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느껴진다는 뜻이지요. ^^
70년대 초반 쯤인가, 김수영 시인의 참여문학론과 이어령 평론가의 순수문학론이 부딛친 적이 있었지요. 이후 김수영 시인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이후 세월이 흘러 이어령이 인정했죠. 김수영의 말이 맞았다고!! 저는 서정도 아름답지만 힘찬 서사를 좋아 합답니다.~~ 오름님의 글 재미지게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