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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비밀 1 -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교정과 정서: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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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공부 하는데만 사용해 주십시요.
고려사의 왜곡과정과 조선왕실 최대의 왜곡비밀 즉 조선왕조 최대 최고의 극비 아킬레스는
무엇인가. 이는 사서 왜곡과 고의적 정책적 인멸로 인한 사료빈곤으로 완전 폭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필자도 이에 대한 것을 가급적 소상히 알고 싶었으나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조선시대 태종의 역사수탈과 왜곡인멸이 김부식의 수탈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많았으며 김부식의 역사수탈이 조선총독부의 20만 부 역사수탈에 못지 않았다는
연장선에서 실로 충격적인 조선왕조의 최고의 아킬레스건에 대한 윤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불가분 가야사 문제와 근자에 재야사학자 오재성, 이중재 2인이 주장하고 있는
대륙 백제, 대륙신라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대륙 고려사와 조선왕조의 비밀 등이 맞물려 있다.
여기서는 많은 부분 오재성 이중재의 쟁점을 그대로 소개하려 하며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려 한다. 또 세종 충녕의 죽마고우이자 절친한 학우로 신료로서 세종의 명을 받고 함경도
자신의 선산에서 대대적으로 사료를 소각처분하고 조선왕실의 비밀을 세조에게 밝히려 했다가
세조에게 죽은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고 있는 조선왕실의 비밀과 유훈을 그대로 가감 없이 인용
소개하려 한다.
따라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줄 이 부분은 일반 독자여러분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독자여러분께서는 얼핏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적지 않은 곁가지들은 잠시 덮어두고
역사왜곡의 전체 대강만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이는 몇몇 곁가지 때문에 대강의 본질이
훼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본래 본서의 의도가 아니다.
필자는 본래 해와 달을 그리고 우주 대자연과 함께 인류사가 어우러져 돌아가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려 했다. 본서가 의도하는 전체 그림 중에 이 부분은 사실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한 것이며
정묘한 묘사라기 보다는 크로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정도의 차원으로 소개하는데
그치려 함을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역사왜곡의 전체 대강만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김수로 가야사의 역사를 신라가 왜곡하고, 신라를 비롯한 3국사를 고려가 왜곡하고,
고려사를 조선이 비틀며 왜곡한 물고 물리는 왜곡과 인멸의 역사를 생각하면, 존주 화하사관을
세우기 위해 공자가 동이족의 영적 문서 사서삼경을 위조 개찬한 것과, 사마천이 역사 왜곡을
통해 화하주의의 뼈대를 세우려 한 것과, 일본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위조해 2600년 천황 만세일계의 역사를 드러내려 한 것을 우리의 왜곡사와 연관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의 비밀은 어느 정도씩 있는 법이며, 역사는 정통과 이단의 역사며
강자만이 스스로를 정통화 시킬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패권논리는 제민혁세(濟民革世)의
선천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지나사의 왜곡이 그들 민족에게 가려져 있고 일본 천황가의
왜곡이 그들 민족에겐 철저히 가려져 있다. 우리의 고려사와 조선사의 역사왜곡 또한 철저히
가려져 있다면 이 또한 과장이 될 것인가?
왜왕 아키히토가 「속일본기」를 거론하며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실의 후예로 무령왕의 자식이
일본천황이 되었다는 발표를 했다. 왜곡된 일본사에서는 사실 엄청난 충격일텐데도 일본인들은
별로 피부에 안 닿는지 시큰둥한 표정이다.(관련기사 아래참조)
관련기사1.
"백제왕 자손이 옛 천황 생모"
[도쿄=오대영 특파원]아키히토(明仁.사진) 일본 국왕이 고대 한.일간의 교류사실을 강조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은 23일 가진
특별 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의 인적.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일 국왕이 직접 일 왕실과 백제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과 한국민 간에는 예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나와 있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초빙돼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양국의 문화교류는 훗날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면서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당시 일본에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초빙됐으며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궁내청 악사(樂師) 중 당시 한국에서 이주해온 사람의 자손도 있으며, 대를 이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그러한 (긍정적인)
교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면서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양국민의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dayyoung@joongang.co.kr>
관련기사2.
[시론] 일왕가(日王家) 백제 유래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720년)나 고사기(712년)등 고대 사서를 근거로 고대부터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왕(日王)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로부터 한계통으로
계승된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한 군주라고 전해지고 믿어져 왔다.
*萬世一系의 군주라 믿어 2차 세계대전 전이나 전쟁 중에는 절정에 다다라서 1억 신민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만세일계의 일왕에 의해 통치되는 국체를 자찬하고 국가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황통사상에 대한 비판은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왕조가 몇
번인가 바뀌었고, 왕실이 백제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패전 후 학문의 자유가 허용되자 1952년 와세다대학의 미즈노 유(水野祐)교수가 일본에서
왕실은 만세일계가 아니고 세번 교체되었으며 현 일왕가는 만세일계 중의 26대 일왕으로 되어
있는 게이타이 일왕에서 시작되는 세번째 왕조에 속한다는 소위 삼왕조 교체설을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설은 우익들의 테러 위협과 반론 속에서도 큰 줄거리는 학문적으로도
정착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인지돼 있다.
그러나 현 일왕가가 백제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확산돼 갔다. 심증은 있으나 아직까지도
학자들은 연구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일왕이 23일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간무(桓武)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왕실이 백제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계(母系)의 백제설을 제기해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와 장래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방한 등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내지는 일본 왕실과의 우호관계를 환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왕의 발언은 그 의도와는 달리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묵시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공론화하기를 꺼리던 일왕가의 백제유래설에 대해 금기시돼온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학문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고, 공론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아키히토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한.일 양국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만세일계의 황통사상에 대한 금기 중의 금기의 일부를 일왕이 앞장서서 깨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아사히(朝日)신문만이 이 사실을 보도하고 여타 신문들은
한국신문의 보도를 인용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일왕가는 물론이고 모계가 백제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조차도 매스컴이 직접 공론화 하기를 꺼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을 각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학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바탕으로 간무(桓武)일왕(737~806)의 어머니는
물론이고 15대 오닌(應神)일왕 (5세기 초)이나 26대 게이타이(繼體)일왕 (507~531), 35대 및
37대의 사이메이(齊明)일왕(642~645, 655~661)등의 백제인설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일선동조론 등 경계해야
한국의 매스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왕가가 백제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의
매스컴은 한국에 대한 고대의 콤플렉스를 공론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한국의 매스컴은 일본에
대한 근대에서의 콤플렉스를 고대에서의 우월성을 통해 해소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한국의 매스컴이 주의해야 할 점은 과거 한일합방의 역사적 근거도 양민족의 조상이
같다는 설을 배경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대에 백제와 일본이 어떠한 틀속에서
왕가간의 특수한 관계가 생겨났는지를 밝혀야지 단순히 양국 왕실 사이의 특수한 혈연관계만을
강조한다면 또다시 일선동조론과 같이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이론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김현구(고려대 교수 ㆍ일본고대사)-자료3.
자료 1,2의 기록보다 약간 업그레이드 된 최근의 기사를 보자.
<imgsrc=http://www.nwj.ne.jp/public/toppage/20020320/images/tophyoushi.gif></imgsrc=
내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간무 천황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 후손 충격 발언.
일본인은 민족-문화 형성에 미친 한국 유산을 바로보기 시작했다.
(George Wehrfritz 도쿄지국장, Hideko Takayama 기자)
-일본 왕자 시라카베(白壁)의 둘째 부인은 백제 왕족의 후손이었다. 다카노노 가사(高野新笠)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여인은 남편이 서기 770년 고닌(光仁)천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살아 남았다. 그런데 황후와 태자가 천황을 해치는 주문을 걸었다는
죄로 투옥되자, 다카노노 니가사의 아들이 태자가 되고 781년 일본의 50대 천황으로 등극했다.
그가 바로 간무(桓武) 천황이다. 생물학적으로 간무 천황의 절반은 한국인이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일본인들은 왕실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이 사실을 숨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역사적ㆍ 문화적ㆍ 혈통적 증거도
감추었다. 일본이 이처럼 한국과 공유한 역사를 부인하는 태도는 양국 관계에 계속 악영향을
미쳤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사 망각증을 일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수탈과 강제노역ㆍ
종군위안부 등 한반도 강점기에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과거에 너무 집착한다고 못마땅해한다. 이렇게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오는 6월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는 것은 매우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양국의 오랜
긴장관계를 해소하려고 시도한 인물은 뜻밖에도 일왕 자신이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지난해
12월 68회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과 관련해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緣을 느낀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왕실이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시기로 봐서도 다분히 계산적인 듯하다. 일본 왕실 관측통에 따르면
아키히토는 지난해 일본의 전시 만행 부분을 왜곡한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던 우익들의
목소리를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잠재우려 했다. 아키히토가 한국인들의 對일본 기여를 인정한
것은(음악ㆍ 유교ㆍ 불교 3가지를 언급했다)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달래려는 노력이었다.
왕실의 한 측근은 천황은 진심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하길 원한다.
그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13년 재위
기간 중 가장 의미심장하며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지난 50년간 일본이
전쟁기록을 숨긴다고 비난해온 한국과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일왕 자신이 이 오랜 설전을 끝내기 위해 직접 나서서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전략은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명이 이웃 나라, 특히 한반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함으로써 주변국의 신뢰를 얻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한 젊은 역사학자는
아키히토가 한국과의 혈연을 언급하자 충격을 받았다며 일본의 현재 분위기에서 그 문제는
금기시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 궁내청은 왕가의 무덤 2백30개를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며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계속
거부해왔다. 학자들은 궁내청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왕실의 한인 혈통에 관한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일본 교과서는 한인들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실과 관련된 소문을 즐겨 보도하는 TV의 낮 프로그램도 아키히토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주류 언론조차 그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한국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학자들이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최근부터다. 이것은 문화교류가
늘어나면서 양국의 연관성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제 인류학자들은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1세기 초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생각한다. 언어학자들은 일본 왕실 의식에서
사용되는 말이 신라어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니가사 황후가 살던 시기에
교토(京都) 주변에서 사는 사람 중 백제 유민이 약 30%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교토大우에다 마사키(上田正昭ㆍ74) 명예교수는 지금도 이와 관련된 연구의 가장 큰 결점이
기술ㆍ 사상의 전래에만 집중하고 사람에 관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키히토의 발언은 백제의 여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누구였던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녀의 가족은 왜 일본으로 왔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 사람들의
생애가 들어가야 역사가 흥미로워진다.
일본의 건국신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쪽의 규슈(九州)섬 다카치호(高千穗)라는 마을
아래에 골짜기가 있었고,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사악한 남동생과 싸운 후
그 골짜기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추방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후 아마테라스는 쌀의 신 니니기(瓊瓊杵)를 비롯한 자신의 자손들이 땅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神道)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으며, 그녀의 5대손
진무(神武)는 일본의 초대 천황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규슈의 이 골짜기에 내려가
시냇가에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돌멩이에 적은 다음 돌탑을 쌓는다. 2차대전 전에 발간된 한
여행 안내책자에는 일본 제국의 왕실은 세계 여느 나라와 달리 하늘과 땅에서 시작해 영원히
계속된다고 서술돼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전후에 제기됐다. 이 신화는 이민족의 침입을 뜻하거나, 이민족이 갖고 온
것이라는 설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東京)大교수는 1967년에 이 가능성을 연구했다.
이것은 2천년 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에서 호전적인 몽골리안 기마민족이 규슈로 건너 왔으며
이들이 일본인의 지배층을 이룬 덴손(天孫)족이라는 연구에 근거한 이론이다. 최근에는 저명한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가 이 이론을 연구했다. 그는 쌀의 신 니니기가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온 덴손족으로 쌀 재배법과 새로운 문화를 도입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그 영향으로 원시적인 조몬(繩文) 부족시대를 끝내고 야요이(彌生)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일본에 온 도래인들이 다카치호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서기 300년 이후에는
사이토바루(西都原)에서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는 수백개의 열쇠구멍 모양의 무덤이 있다. 가장 큰
무덤은 한반도ㆍ만주에서 발견된 왕가의 무덤과 비슷하다. 그보다 작은 무덤 몇개는 1910년에
발굴됐고, 여기서 진흙으로 만든 고대 중국식 배 모형과 한국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금동제
말안장이 발견됐다. 우메하라는 쌀을 재배하는 지식을 갖고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조몬인과
섞여서 지금의 일본인이 탄생했다고 결론지었다.
7세기 일본 제국의 형성에서도 그와 비슷한 한국인들의 영향이 밝혀졌다. 교토大우에다 교수는
이것을 언급한 최초의 학자다. 1965년 그는 백제인 니가사가 간무 천황의 어머니이며,
나라(奈良)의 거대한 동불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료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으며, 극우주의자들은 수차례 그를 협박했다. 그는 한 우익 인사는
나에게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장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최근 들어 여러가지 발굴이 이뤄지면서 한반도의 이주민ㆍ 기술ㆍ 문화가 그 시대 문명의 중심을
형성했다는 그의 이론이 지지를 얻고 있다. 660년께 백제 유민 10만명이 야마토(大和)에
들어오면서 불교ㆍ 한자ㆍ 도자기 제조술ㆍ 주조술을 전래했다. 일본 문명화의 중심지로 묘사되는
7세기의 아스카(飛鳥)는 여러 민족ㆍ문화가 하나로 융화된 국제도시였다.__
이 지역의 무덤은 한반도식이다. 1972년 발굴된 다카마쓰즈카(古松塚) 고분에는 고구려의 복장을
한 남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 가이드는 이 무덤 주인인 이름 없는 귀족은 한국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런 사실이 논란을 일으켰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만 말했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사실은 한반도가 일본에
끼친 영향 중 주된 것이 바로 인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은 17세기 들어 나타난
일본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300년부터 이주가
있음을 확인했고,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의 3분의 1에서 많으면 절반까지가 어느 정도는
한인의 피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고 1604년 수도를 에도(江戶)로 옮긴 뒤 쇄국정책을
썼던 시절에도 한인들은 계속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다. 무관ㆍ 유학자ㆍ 화가ㆍ
악사ㆍ 의관들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배로 도착한 뒤 말을 타고 6개월 이상 걸려 에도에
도착하곤 했다. 조선통신사는 약 2백년 동안 모두 12차례 일본에 파견됐다. 그러나 모든 교류가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한반도를 침략해 해변 마을을
약탈하고 도공(陶工)들을 납치해갔다. 모두 합해 5만여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그중
도공들은 일본 엘리트층을 위해 도자기를 제조했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작은 마을 히가시이치키(東市來)에 가마를 가진 도예가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사쓰마(薩摩) 도기를 창시한 심당길(沈當吉)의
14대손이다. 사쓰마란 이름은 그 선조들을 납치한 군벌이 살았던 고을의 이름(현지명은
가고시마)이다. 아직도 한국 姓을 지키고 있는 그는 우리의 역사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인내심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재일동포들은 그들이 일본에 도착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런 강인한 의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했다.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강제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백50만명의 한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끌고가 광산ㆍ 농장ㆍ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현재 재일동포의 대다수는 종속된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60만명에 이르는 강제 노역자와 그들의
후손들은 거주권을 갖고 있지만 선거권이 없다. 40대의 한 저명한 재일교포 학자는 학교를
마치고 취직이 안돼 야쿠자냐 교수냐 둘 가운데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한 젊은 재일동포(35ㆍ웹 디자이너)는 마늘 냄새가 난다고 멸시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일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출신을 숨기기 위해 일본 이름을 쓴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이런 피해의식은 월드컵과 관련해서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겉으로는 협력을 내세운 공동
개최이지만 결국은 누가 앞서는지를 가리는 시험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서로 경쟁했으며 공동개최로 결정이 난 뒤에도 서로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유지했고
대회 타이틀 표시에서 어느 나라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하는지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결국 결승전을 일본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Korea-Japan으로 결정났다).
네덜란드인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일본팀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프랑스에 4-0으로 지고, 일본이
그 얼마 전에 프랑스에 5-0으로 졌다면 우리 선수들은 프랑스에 진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은 세계의 이목을 의식해 월드컵 대회 시작 전에 양국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주 양국은 한ㆍ일 관계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달 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일본
왕실에서 누가 참석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일본 궁내청은
일왕의 방한계획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외국어大에서 일본문화사를 가르치는
홍윤기(洪潤基) 교수는 아키히토 일왕이 개막식에 참석하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한국으로서는 어쩌면 아키히토의 방문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보다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여러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가사의 능이 있는 교토의 한 지역에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가사 황후는 1천2백년 전에 만들어진 그녀의 능 곁에 살고 있는 이웃 주민들에게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산꼭대기의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어 꾸불꾸불한 산길로 접근할 수 있는 그 능은
등산객들과 개를 데리고 산책나온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행 기점의 표지판은 간무 천황
모친의 묘로 표시돼 있다. 꼭대기에 도달하면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이라는 표지판이
그녀의 이름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없다. 이 지역에서
30년 이상 거주해온 한 주부는 그녀가 한인이라고? 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제는
일본인들이 한인 황후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시기가 왔다.-
(With B. J. Lee in Seoul)
韓-日고대사의 비밀
일본 천황의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일본의 옛 문헌들에 나타나 있다.
홍 윤 기(한국외국어대 일본문화사 교수ㆍfor NWK)
*일본 천황이 한국인임을 밝혀주는 일본 고대의 문헌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서기 815년 편찬)에 그 사실이 나와 있다. 신찬성씨록은 9세기 초 일본 왕실에서
만든 일종의 왕실 족보로, 이 고대사 책을 보면 제30대 비타쓰(敏達) 천황(572∼585년 재위)이
바로 백제 왕족이란 기록이 나타난다. 그 왕실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간무(桓武) 천황으로, 비타쓰 천황은 간무 천황의 6대조이기도 하다. 여기서 간무 천황의 친어머니인 백제여인 화신립(和新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신립이란 여인은 8세기 당시 일본 왕실의 조신이었던 백제 왕족 화을계(和乙繼)의 딸이다.
그 무렵 일본 왕실의 시라카베(白壁) 왕자와 화신립 낭자가 결혼했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바로 야마베(山部) 왕자이며 그가 바로 훗날의 간무 천황이다. 화신립의 부군인 시라카베
왕자는 나이 61세에 비로소 왕위에 등극한 고닌(光仁)천황(770∼781년 재위)이다.
고닌 천황은 제49대 왕이고 그의 아들인 간무 천황은 제50대 왕이다. 고닌 천황의 황후 화신립의
姓은 고닌 천황에 의해 뒷날 백제식 복성을 사용해 고야신립(高野新笠ㆍ다카노노 니가사)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 왕족과 귀족들은 당시 대개 복성을 썼는데 이것은 본국 백제에서 상류 계층이
흔히 복성을 썼기 때문이다. 간무 천황의 아버지 고닌도 백제인이라는 내용이 담긴 고대 문헌이
있다. 서기 1157년께 일본 왕실의 조신이었던 후지와라노 기요스케(藤原淸輔ㆍ1104∼77년)가 쓴 책
대초자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 신찬성씨록은 간무 천황이 쓰기 시작하다 세상을 뜨자 그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萬多親王ㆍ
788∼830년)이 완성한 책이다. 이 왕실 족보를 보면 일본 왕실에 고대 한국인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특히 백제 왕족인 비타쓰 천황은 나라(奈良) 땅에서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또 비타쓰의 친손자인 제33대 조메이(舒明) 천황도
나라땅의 백제강(百濟川) 옆에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세웠으며, 백제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백제대빈(백제왕실의 3년상)으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일본서기ㆍ720)이
나온다.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는 조메이 천황은 백제천황
(百濟天皇)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천황들이 백제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일본 왕실 문서가 있다. 서기 927년 모두 50권으로
편찬한 연희식이 바로 그것으로, 그 책엔 일본 천황궁에서만 제사를 지내는 신주(神主)인
제신(祭神) 세분이 등장한다. 한분은 신라신(園神)이고, 두분은 백제신(韓神)이다. 이 제사는 천황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왕궁 안의 신전에서 직접 제사를 지낸다. 무엇 때문에 일본 천황들이
신라신과 백제신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인가. 그들 천황의 조상이 고대 한국인임은
이 왕실 제사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주축문의 제목도 바로 한신(韓神)이다. 특히 백제인인 간무 천황은 서기
794년에 오늘의 교토(京都)땅으로 천도해 헤이안궁을 세웠다. 그리곤 궁전의 북쪽 땅에 백제왕
사당인 평야신사(平野神社)를 짓고 제사를 올렸다. 이 사당에선 백제 제26대 성왕을 비롯해
구도왕ㆍ비류왕ㆍ근초고왕 등 네명의 왕과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화신립 황후(히매신)까지 모두
다섯분의 백제 왕족들을 제사지냈다. 그 제삿날은 해마다 4월 2일이며 이를 평야제(平野祭)라고
부른다는 것도 일본 왕실 법도로 전해 내려온다.
아키히토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 등에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나 초대받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문화며 기술이
전수됐습니다. 아키히토의 이같은 발언은 자못 진지하기까지 하다. 한편 도쿄大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가 천황씨 자신이 조선에서 온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을 조정에 등용한 것이라고 밝힌 것도 진솔한 연구 결과로 판단된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아직 완전히 시정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그같은 언명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기서 논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언론보도를 잠시
스케치하고 넘어가자.
-아시아는 원래 우리 땅? 한국고대史새로 쓰는 사람들… 그 깜짝主張즐거운 想像
참 당혹스런 역사해석을 듣자. 고구려ㆍ 백제ㆍ 신라 삼국과 가야는 중국에 있었다. 왜(倭)는 원래
대만에 있다가 열도로 자리를 옮겨 일본이 됐다. 이성계(李成桂)의 부모는 여진인으로 출생지
함주는 함흥이 아니고 하남성(河南省) 통허현이다. 이성계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1427년 황해도
해주로 들어와 한반도에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는 재야사학자 이중재(66ㆍ한국상고사학회장)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시 그의 말-. "그때 한반도는
국가체제도, 지방행정도 없는 황무지, 즉 평민들이 살던 구석 땅이었다. 중국에 남은 고려는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했다."
박용숙(62ㆍ동덕여대 회화과)교수의 가설을 대하면 더 숨이 가쁘다. 한민족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개막한 수메르족이다. 그들은 1천8백년간 환인시대를 유지하다 기원전 2333년 침공해온
아카드의 사르곤과 결합한다. 사르곤은 수메르의 여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그 후손은 제국의
최고 지배계층이 된다. 이 사르곤이 곧 환웅(桓雄)이며 중국역사의 황제(黃帝)와 동일 인물이다.
한민족의 일부는 서쪽으로 가 미케네 문명을 일으키고 원래 땅에 남은 사르곤의 연합제국은
고조선과 부여(페르시아 제국)로 이어져 기원전 7세기까지 계속된다. 이후 부여 태자 고열가가
지금의 이란 땅 하그마다나에 북부여(메디아 제국)을 세우고 자칭 천제 해모수(解慕漱)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 동부여(일명 부여별종)를 세운다.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나타나며 여기서
다시 백제ㆍ신라로 이어진다. 朴교수의 말대로라도 한반도는 역시 공백이다. <관계기사 35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이들의 역사확장은 끝이 없어 보인다. 본의 아니게 고대 한반도가 역사의
완전한 변방으로 몰리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또 대부분의 경우 역사의 단절된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드는데는 허술하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의 말처럼 이들을 일단 가상(假想)학파(might-have-been school)라고 부르면 어떨지.
이중재씨와 비슷한 역사관을 펴고 있는 재야사학자 정용석(44)씨를 통해 새로운 역사해석의
의미를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세들이 자존심 충만한 후예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확장정신 또는 광역정신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지금의 정사(正)에 부정(反)의 역사논리를
들이댐으로써 나중 합(合)의 새로운 역사관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간혹 이런 파괴론을 '세기말'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재야 또는 비주류 사학들의 입장은
다르다. '바로잡아 달라'는 역사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말을 되살리면 어떨까. "착잡한 현실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준 안락한
공식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새 디딤돌을 찾아낼 때까지 마치 사실(事實)의 대해(大海)에 빠진
것과 같다."
사실(史實)도 그렇다. 역사해석의 열망은 사실적 총체로서의 역사와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자칫 신비주의ㆍ냉소주의의 양극단을 오갈 우려를 낳는다.
게다가 어느 시대건 위서(僞書)파문이 있어 역사를 제대로 읽기가 난망하다.
내친 김에 더 달리자. 역사의 '지평 넓히기'가 뭐 나쁘랴. 박용숙교수는 한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이라크ㆍ터키ㆍ시리아ㆍ레바논 등이 자리잡고 있는 서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한다. 고구려는
서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리디아ㆍ페르시아 제국, 백제는 이란동부의 파르티아 왕국, 신라는
파키스탄 인근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가야는 인더스강 하류에 자리잡았다.
이중재ㆍ정용석씨의 경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를 시간적으로는 1만년 이상,
공간적으로는 중국대륙 전체와 서역ㆍ몽골ㆍ바이칼호 지역과 동남아가지 옮긴다. 문헌대조와 해석을
통한 한국ㆍ 중국 지명의 1대1 대응은 꽤나 현란하다. 예컨대 이중재씨 주장대로라면 신라의
경주는 중국 간쑤(甘肅)성 경양현이며 백제의 공주는 허난성 웅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와
김유신(金庾信) 묘는 장쑤(江蘇)성 오현에 있다. 의주는 허난성 급현이며 압록강은 여기에 흐르고
있다.
현직 국사교사 이희옥(李熙玉ㆍ60ㆍ서울 중앙중학교)씨의 입장은 좀 다르다.
두 번의 역사날조로 한민족의 무대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를 편찬(1145년)했던 김부식(金富軾)이 고의로 BC.3000년이던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3년, 기원전 2∼3세기에 세워진 백제를 BC.18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6세기 이후 국가모습을 갖춘 신라는 뒤늦게 중심에 위치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또 한번의 결정적인 역사왜곡은 8∼10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진행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멸망한 가야ㆍ 백제ㆍ 고구려계 영주ㆍ 호족들이 대대적인 '역사만들기'작업에
나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없던 '일본'이 소설처럼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백제의 사서(史書)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의 사례 한토막-. 그는 요즘 하루 18시간씩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입수한
'고려도경(高麗圖經)'(중국 북송 휘종시대 徐兢저)을 번역하면서 가벼운 흥분 상태다.
고려로 가는 북송의 사신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마카오 쪽으로 가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를 발판으로 일본정벌에 나선 중국 원나라의 출병 근거지도 광시(廣西)성 합포로
그려져 있다. 하루빨리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게 그들의 세계다.
역사는 말이 없고 오직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오랜 논란거리였다. 심지어 역사가가
갖춰야할 제일의 덕목은 무지라는 야유도 있다. 그래야 사안을 단순화하고 선택ㆍ생략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은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한다는 논리를 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한마디로 글을 맺자.
"그것이 진정 어떠했는가"(Wie eigentlich gewesen).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커버 스토리≫
한민족은 인류조상인 삼묘족의 후예
▶재야사학자 이중재씨
상고사학회 이중재 회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과 2년 수료의 학력 소유자다. 51년째 한문 서적을
독파하면서 한민족 역사를 연구해 왔다. '한민족사' '상고사의 새발견' '한민족 우주 철학사상'
'새 고려사의 탄생' 등의 저서에 이어 최근 '고대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펴냈다.
그의 주장 한토막―"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인 삼묘족 후예로 기원전 8936년에 반고환인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ㆍ요순(堯舜)이 모두 우리 조상이며
주나라까지도 한민족의 나라다. 삼국은 주나라의 봉토국인 진(晋)이 분열된 한ㆍ위ㆍ조(韓ㆍ魏ㆍ趙)
세 나라에서 비롯됐다."
일본에 대한 역사해석도 특이하다. 중국의 위(魏)나라가 망한 후 흩어지면서 작은 위란 뜻으로
왜(倭)라고 불렸는데 신라와 백제에 흡수됐다는 것. 이들은 나중에 백제 유민과 손잡고 대만에서
나라를 세운 후 섬을 따라 이동해 지금의 일본땅으로 나라를 옮겼다.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로마군이었다
▶미술사 전공 대학교수 박용숙씨
동덕여대 회화과 박용숙교수는 고대 한민족의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우리
고대문명은 지중해 문명과 관련 깊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그는 이를 최근 펴낸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수메르 신화에서 알타이 신화까지'라는 책에 담았다. 박교수는 '삼국유사'등에 기록된
백제를 공격한 말갈군'을 파르티아를 공락한 로마군이라고 추정한다. 로마군의 공격에 밀려
고구려와 백제는 육로로, 신라와 가야는 해로로 한반도로 이동했다. 인근에 있던 중국도 이때
함께 옮겨와 역사를 현재의 중국땅에서 벌어진 것처럼 재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바로 삼국의 멸망
▶국사교사 이희옥씨
중앙중학교 국사교사 이희옥씨에게는 학교가 좁다. 교과서는 '오류투성이'건만 학생들에게 자신의
역사시각을 일방적으로 일러주기 곤란한 탓이다. 혼란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항의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 대신 삼국멸망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통일신라 역시 중국 당의 지배에 놓였기 때문이다. 고대 우리민족의 영토는 고구려와 부여가
만리장성 동북쪽 중국대륙을 전부 차지했고 한반도는 마한ㆍ진한ㆍ변한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이후 백제왕국은 마한지역을 재통일하며 등장했고 진한과 변한지역엔 가야왕국이 세워졌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역사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교사의 독특한 역사관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
정용석시는 기상청에서 21년을 근무한 경력자다. 남들과는 달리 기상ㆍ 지리ㆍ 지질 등을 역사의
보조과학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ㆍ 백제ㆍ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참과 거짓의 역사 1ㆍ2ㆍ3'에 이어 최근 '일본은 열도에 없었다'를 펴냈다. '기후 현상으로 본 삼국의
역사' '지각운동으로 고찰한 삼국역사'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진실과 왜의 비밀' 등 특이한 논문도
있다.
흥미있는 주장 하나 "경주라는 이름 자체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의
경주시가 신라의 천년고도라니!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토함산은 어디 있어야
하는가. 화산이 폭발한 산이면서 휴화산이니 자연이 함산(含山)인데 그것은 대륙의 양자강 북쪽
안휘성 남부 함산현에 있다."
"史料비판 없는 我田引水해석 일본 황국사관과 뭐가 다르냐"
조인성 교수의 매운 反論
경희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사 시민강좌' 제20집에서 '국수주의 사학과
현대의 한국사학'이라는 글을 통해 특히 고조선사를 둘러싼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고조선의 강역을 넓히고 건국연대를 수천 년 당기는 것은
비학문적이라는 게 그의 지적. 다음은 조교수 글의 주요 대목이다(특별히 위 4인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님).
◇재야 학자들이 사료로 제시하는 8세기초의 '단기고사(檀奇古史)'. 17세기 중엽의 '규원사화
(揆園史話)', 공민왕 12년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이들을 참조해 나온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은
1920년대 후반에야 나온 위서(僞書)다.
◇5공 출범 당시 일부 재야 역사학자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을 제5조국으로 이름했다.
환인의 나라 환국, 환웅의 나라,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각각 제1ㆍ2ㆍ3 조국이며 부여ㆍ삼국ㆍ고려가
제4조국이고 조선과 1∼4공화국은 무조국(無祖國)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는 정통성 확보를 위한
극단적 민족주의의 발로다.
◇강역과 건국연대의 비과학적 확장은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신화ㆍ전설을 갖고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일ㆍ선(日ㆍ鮮)동조론을 들고 나와 침략을 고대사 복구라고 호도했던 일제
황국사관과 맥이 통한다.
◇지난 82년 일본 극우 사학자 가시마 노바리(鹿島昇)가 번역한 일본어 번역본 '환단고기'에 대한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의 평가-환단고기는 조선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만몽ㆍ중국에서
서역까지를 무대로 한 상고사로 고대 일본민족의 걸음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육군본부 발간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83년) 중 한토막-"통일ㆍ번영을 위한 민족의
웅비(…)드넓은 만주벌판을 수복하는 일이다(…)대륙 수복 의지가 담긴 진취적 통일 지향의
민족사관을 정립해야겠다." 이는 역사인식 왜곡의 우려를 남긴다.
[1997년 5월 31일, 중앙일보]<허의도ㆍ채인택ㆍ강주안 기자>-
현재 고려왕건의 왕릉인 영릉은 사천성 성도 영릉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그 비문과 함께 있다.
http://chinatour.co.kr/gallery/siquan/chengdu_wnagjianmiao.jpg>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개성에 있는 왕건 왕릉은 가짜로 후대에 역사
왜곡으로 꾸며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생각하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인근 소도시
마리(Muree>Mari) 市에 안치된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묘소를 파키스탄인들은 모두 평범한
일로 알고 있어도 막상 왜곡된 성서를 믿는 크리스챤들은 이를 사실로 믿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
김문기 가문의 조선왕실의 비밀에 의하면 심지어 왕건은 대륙의 왕건을 흉내냈다고 한다.
그럴 경우 대륙의 왕건 고려와 한반도의 왕건 고려는 별개의 것으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단지 이와 관련해 왕릉에 대한 문제 몇 개를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즉, 1958년 공산당
대약진의 해와 1968년 문화혁명
당시 조상숭배, 사유재산과 유적지, 묘, 유물, 역사를 모조리 정리시키고 조상의 묘를 비롯 모든
왕릉이 모두 파헤쳐졌다는 사실이다.
(「새高麗史」李重宰著)
이 때 몇 몇 파헤쳐지지 않은 묘가 있으니 이것이 공자묘와 소호금천 씨 묘 및 진시황릉이다.
이들을 파헤치지 않은 것은 마치 천황 가의 역사를 왜곡한 일본이 다까마쓰 총을 발견하고도
그들 황실의 뿌리가 송두리째 언론에 공개될 것을 두려워해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고분을 지금까지 발굴중단상태로 밀봉하고 발굴을 중단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야 패망하고 끌려가서 북경근처에 누워있다 하지만 신라 41대 헌덕 왕릉이 산동성 곡부
동쪽 사수현 50리 지점에 있다는 사실은 대륙사 시대를 보여주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다.
「해동역사(海東繹史)」<원사고려전(元史高麗傳)>에 오대(五代) 시대에 이르러 고려 임금이 송악(崧岳: 개성 松嶽이 결코 아니다)에 천도하니 성은 왕(王)씨요 이름은 건(建)이라 하고,
동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개성부는 조선국 성(城)의 서남쪽 2백 리(80km)에 고려가
설치한 주(州)라 하고, 좌측엔 계곡, 우측엔 산이 있어 칭하기를 험고(險固)하다 하고(판문점위의
개성은 평평한 분지) , 또한 이르기를 송악(崧岳)은 당(唐) 천우(天祐) 초에 애꾸눈 승려 궁예가
이곳에 의지해 주량 정명(朱梁貞明) 5년 회남양륭연(淮南楊隆演)에 입공(入貢)하고, 후당(後唐)
청태(淸泰) 말 왕건이 궁예를 시해하고 대를 이어 거듭 이를 도읍으로 삼았으니, 이를 일러
동경(東京)이라 하고 또한 개경(開京)이라 하니 지금 이르기를 개경부라 한다.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咸興府) 서북에 있으니 요지(遼志)에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라 했다.
(지금의 개경이 함경도 함흥의 서북에 있나? 한반도 함흥이 아니고 한반도 개경이 아니다.
대륙 사천성의 개경이요 함흥으로 반도의 지명은 고려 초중반 때 반도로 옮긴 것으로
고려사는 조선초에 철저히 왜곡, 개찬되었다) 고려는 경주발해(慶州渤海)를 두어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삼고 요(遼)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으로 삼았으며 요(遼) 말에 고려
수중으로 들어가 혹 이를 이르기를 촉막군(蜀莫郡)이라 했으니 도경군(圖經郡)이 개주(開州)의
동쪽에 있다. 명사에는 송악이 동경이자 평양(한반도 평양이 아님)이며 서경이라 나오고, 25사 중
교정보기 전 송사 고려전에는 개주는 촉막군이자 개성부로 하고 신라때 동주(東州)라 했으며
낙랑부(樂浪府)이자 호를 동경이라 하여 사천성 성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개성의 동쪽에 도경군의 이력을 가진 지명은 없다.
고려사 왜곡과 조선왕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한 역사왜곡의 중심 축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그리고 세종 이충녕이 자리잡고 있으며 조역에는 태종이 아들 충녕의 영원한 보필자 겸
친구요 신하로 낙점해 벼슬을 하게된 김 문기(金文起)를 비롯해 태조 때의 정도전으로 해서
하륜(윤), 정인지 등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사서 편찬자들이 개입되어 있다. 특히 개국초 이성계의
개국명분을 합리화시켜주고 왜곡사서 고려사 편찬의 주역인 정도전을 보면, 1395년 1월 25일
삼사판사 정도전이 정당문학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지어 바치자 이성계가 이를 치하하며
정도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했다.
「삼봉집」에 의하면,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 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고 여말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친다. 당시 권세를 잡은 이인임 일파의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친명 사대주의자 정 도전은 마침내 개경에서 쫓겨나 고달픈
유적(流謫)의 길에 오르게 된다. 처음에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 간 복거한 뒤 다시 삼각산(三角山)ㆍ 부평ㆍ 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한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성계와 만날 때까지 10 년간에 걸친 유배ㆍ 유랑생활이
정도전에게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셈이다. 회진현에서 소재동(消災洞)의
천민 부곡민(部曲民)과 생활하면서 그는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많은 시문(時文)
으로 남겨 놓았다. 금남잡영(錦南雜詠). 금남잡제(錦南雜題), 심문천답(心問天答)ㆍ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와 같은 성리학 관계 저서,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ㆍ
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 병서(兵書)가 저술된 것도 10년 간에 걸친 유배 시기였다.
이로 보면 같은 친명 사대주의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연이은 이신벌군(以臣伐君)은
정도전에게는 유교의 명분론을 토대로 친명 사대주의로 전환해 권력을 분점할 호기로 다가온
것이었다.
「삼봉집」에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 주도한 조선왕실의 개국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온다.
즉, 10년간에 걸친 유배ㆍ독서생활을 청산하고 우왕 9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건국사(建國史)로 이어진다. 당시 동북면도지휘사 (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간다.
조선 왕조 개창의 사상적 지주는 정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계 휘하에는 정도전 이외에
많은 문사(文士)들이 결집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정도전이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의하면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가 군기가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 듯 못하겠읍니까?’라고 찬탄하여
혁명의 뜻이 이미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이성계의 만난 다음 해에 그는 서장관으로 정몽주와
더불어 명 나라에 다녀오고, 성균관 제주(祭酒)와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거쳐 우왕 14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한다. 그의 승진에는 이성계의 도움이 컸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밀직부사
(密直副使)로서 전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그는 전제 개혁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며, 그는 전제 개혁을 실천하는 제조관(提調官)의 자리에서 조 준(趙浚)ㆍ 윤소종(尹紹宗)
등을 시켜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다.
1389년 11월에는 이성계ㆍ 조준과 협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피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한다. 이어 공양왕 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명 나라에 성절사로 가서
이성계의 공양왕을 세운 사실을 비호한 바 있으며, 공양왕 3년(1391)에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하게 하여 이 성계가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도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그는 조선 왕조 개창 후에 3군 도총제부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자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한때 반대파인 이색(李穡)ㆍ 우 현보 (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마침내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몽주를 죽이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권력을 거머쥔 정도전은 조선왕실의
정통성과 혈통을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려사를 새로 써서 바친 것이고
이에 이성계는 술만 거나하게 취하면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자화자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찬대로 건국후 태조 3년에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을, 태조 4년에 「감사요약」 (監司要約)과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태조 6년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각각 저술하고
한양 천도를 관철시켜 무학대사와의 좌향논쟁을 승리로 이끌고 궁전과 궁문, 그리고 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도성 내외의 49방(坊)의 이름도 지었으며, 아울러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바치는 한편, 이성계의 창업을 기리기 위해 문덕곡(文德曲)ㆍ 몽금척(夢金尺)ㆍ 수보록(受寶籙) 등
악사를 지어바쳤으며, 태조가 사랑하는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도록 전의하고 그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요동공벌을 둘러싸고 급진개혁을 반대하여 왕자들의 사병혁파를
유도해 방원의 무장을 해제하여 방석의 왕위계승을 하려는 온건개혁 성향의 고려 구신(舊臣)세력
변계량(卞季良)ㆍ 하륜(河崙)ㆍ 권근(權近)등이 옹립한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의해 죽고 만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도전은 이같이 이성계를 만나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역사를 왜곡,
개찬하면서까지 권력을 오로지 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후계구도까지 관여해 다루기 힘든 방원을
철저히 배제하고 다루기 쉬운 상대인 방석으로 후계를 있게 사주하다가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려사는 정도전 뿐 아니라 수 없는 개찬 과정을 거쳤으므로 향후 역사개혁시대를 맞이해
이에 대한 연구가 국내 사학계에 점화될 것으로 믿는다. 조선왕실의 혈통을 숨기고 정통성을
위해 고려사는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철저히 조작되었으며,
문종이 김종서에 의해 독살되고, 노산군은 왕위에 오르지도 손위도 하지 않았으며, 사육신은
철저히 조작된 것으로 시작되는 조선왕실의 비밀이 그 핵이다. 이러한 역사 비밀은 대륙 내
3국의 대륙사와 대륙 내 동이 제 족의 상고사 은폐 및 왜곡과 불가불 관계가 있다.
먼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대강을 정리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고려사는 북벌파
최영을 거꾸러뜨리고 위화도회군을 통해 이신벌군(以臣伐君)한 반역(反逆)정권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임의로 위조한 왜곡역사다. 그것은 「고려사」가 태조, 태종, 세종 때 (정도전, 하륜,
정인지 등이 주관) 주로 편찬된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거니와 단재 신채호가
지적했듯이 태종, 세종 때 역사에 유례 없는 역사수탈이 이루어진 것 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단재는 태종 때의 역사수탈 소각이 김부식의 역사수탈과 맞먹으며 김부식의
역사수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괴수 이마니시류(금서룡)의 20만 부
민족사서 수탈을 능가한다 했다.
선천 역사는 어차피 이단과 배반의 역사다. 또 약육강식의 영웅패권시대로 강자는 약자를 역적과
사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행적을 정의로 기록한다. 지나족의 역사가 공자와 사마천으로
역사가 왜곡되고 일본의 역사가 「일본서기」, 「고사기」로부터 위조되어 일본의 천황가로부터
줄줄이 위조 왜곡된다. 그리하여 중국정사 「춘추」를 편찬한 공자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수치스런 역사는 피한다는 필법으로 지나의 뿌리와 동이 제 족인 소위 주변 이방 오랑캐
민족에게 얻어맞은 역사를 수치스럽다하여 모조리 삭제했다.
그리하여 근대중국의 유명한 문사이자 역사가 량치챠오(梁啓超)는 “모든 역사는 자민족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중심으로 위조하여 사가(史家)의 신용이 떨어졌다. 이 악습이 공자에게서 시작되어
2천년 동안 유전되었다” 말하고 “적(狄:흉노 예맥의 동이족)이 위(衛)를 멸한 대사건을 삭제하여
기록치 아니하고 송태종이 거란병의 화살에 맞아죽은 것을 삭제했다”고 했다(「중국역사연구법」
3장, 5장) 어느 시대건 새로운 역사시대에는 대대적인 역사수탈과 왜곡이 벌어지는 법이다.
가까이는 고려와 조선이 그랬듯이, 대륙의 지나족은 화하(華夏)족에서 오늘날 한(漢)족이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처음 시작된 진한(秦漢)시대에 가장 심했다. 이것이 분서갱유였다. 그리하여
량치챠오는 동서에서 전국시대, 진한시대는 일대 위서(僞書)가 출현한 시대라 말하고 “글을
그대로 믿는 것은 글을 보지 아니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사의 위조를
비판했다. 오죽하면 량치챠오는 대만의 사부아(謝扶雅)가 “기록한 원인은 있으나 실증이 없는
것이 중국사의 특징이니 역사를 연구하는 자는 주의하라” 한 말을 재삼 상기시켰겠는가.
(見韓國의 再發見伏草崔仁)
상고사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하나의 종족명도 다양하게 변천해 나아간데다가
설령 동시대라 해도 다양한 이름을 가진 다양한 부족국가들이 혼재해 있었던 연고로 이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사관이 부족하면 이방민족으로 바라보기가 아주 쉽게 되어있다.
다음에 등장하는 생소한 이름들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이름이니 독자들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후일 다양한 역사서를 보면 역사이해를 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우리민족은 환단 9려(九黎: 배달 환웅국을 각종 지나사서는 구려국으로 칭함), 단군조선 및
험윤(玁狁)- 훈죽(薰鬻)- 귀방(鬼方)- 견융(犬戎) - 북적(北狄)- 흉노의 동이족 맥과 험윤이
진한(秦漢) 시대의 호족(胡族), 맥족(貉族), 흉노족(匈奴族)이 되었으며, 위진(魏晉) 시대에는
오환(烏桓), 선비(鮮卑)의 원 씨족이 되어(오환, 선비는 유연, 거란과 함께 크게 보아
동호계(東胡系)에 속함) 읍루, 물길 혹 말갈로(읍루, 물길 혹 말갈은 숙신계(肅愼系)에 속함) 벌어져
나아간 동이 북방 세력권과 산동, 산서, 호북, 호남, 사천, 절강, 광동 등 양자강을 중심한
형오(荊吳系), 백월계(百越系), 묘요계(苗猺系) 및 왜를 포함한 동이 9족 등의 양자강 동이
남방세력권과 부여족과 예맥족 및 단군조선 계열의 마한계 및 동이족 소호금천씨 후예인 가야족
등의 한반도 동방세력권으로 되어 있었으며 북방 세력권과 남방세력권이 유입된 동방 세력권이
가장 늦다.(위의 각 종족명이 바로 상고시대 우리 겨레의 다양한 이름이다. 사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보면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름으로 스쳐가기 아주 쉬운 이름이다)
그러나 북방세력권이 멸망하고 남방세력권이 한(漢)으로 하이브리드 잡종화되면서 점점
이질화되어 갔으며 북방세력권을 끊임없이 회복하려 했던 것이 바로 고토 회복정신인
따무르자(다물) 정신이었다.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남방세력권이 독자적 세력으로
화하는 과정에 인멸, 왜곡되었으므로 근자에 대륙 3국설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동방세력권 반도사는 공자와 사마천에 짓눌려 대륙사를 왜곡하여 허공에 날린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고려의 김부식과 존명 사대주의자 조선의 이성계 일가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어
잊혀진 것이다. 여기에 멋진 역사왜곡의 인테리어를 한 것이 바로 이마니시류(琴西龍)의
조선사편수회에 의한 20만 부 사료수탈이다.
단재는 「동국거걸 최도통전에서」공민왕을 무어라 평가했느냐 하면 “일개 흐리멍덩한 녀석”이라
폄하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고려 말은 일제 식민지 치하처럼 왕조의 형세만 유지하고 있어서
원나라의 속국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고려의 왕들이 원나라 왕실에 의해 결혼하라하면 하고,
왕 노릇 그만두어라 하면 그만두고, 죽어라 하면 죽어야 했던 철저한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면은 의엿하게 고려왕조가 있고 3천리의 땅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른바
국왕은 적국이 마음대로 내쫓고 앉혔으며 소위 토지는 적국이 멋대로 갈라 빼앗았으니,
이 때는 국가가 망한 지 이미 오래였다. 이제 그 떼어준 토지를 말하건대 아래와 같다.
1은 서해도니(현 평양 이북일대) 원종때 떼어주고
2는 함길도니(현 함경도 절반)충렬왕때 떼어 주었으며
3은 제주인데 원종때 떼어준 것이다.
또 적국의 내쫓김을 당한 임금을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1.충렬왕 2.충선왕 3.충혜왕 4.충숙왕 5.충목왕-
그러나 최영 장군을 만난 공민왕때 비로소 강서 여덟 병참을 공격 파괴하여 토지를 수복하고
북쪽 원의 적을 격퇴하여 주권을 완전히 돌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벌파 인당이 간신들의
참소로 죽고 최영은 쫓겨났으며, 홍건적 중 가장 강한 주원장마저 단기필마로 도망가게 한
최영 주위의 북벌파를 용렬한 공민왕이 모두 이 잡듯이 제거했으니 단재는 “고찰하건대 최영,
정총 양공이 현린의 말을 받아들여 정부를 개혁한 뒤에(반 북벌파 제거) 그 군사를 북쪽으로
향하였거나 또 (간신) 김용이 속인 밀지의 화가 일어나지 않아 최, 정 양공이 홍건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세력을 남부에 심었으면 주원장이 어디에서 일어났으리오”라 한탄 했다. 정녕
그리했다면 북방 고토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주원장은 물론 이성계가 어디 있어 고려왕조가
망했겠으며 이성계에게 죽는 참변 또한 어디 있었으랴.
민족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성계를 다음과 같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여 두 눈에 민족, 국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최영(崔瑩), 정몽주(鄭夢周) 등 반대파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세력이 만만치 아니했다. 이에 명나라를 등에 업은 것이다. 즉 명나라의 세력을 빌려서 반대파를
제거코자 하여 추악한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는 최영이 만주를 정벌코자 한 것은 명나라를
반역한 것이라 하여 백주에 최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이를 명제(明帝:주원장)에게 보고하는
추태를 부렸다. 또한 국호조차 스스로 결정치 못하고 명제(明帝)에게 조선(朝鮮), 화령(和寧)
중에서 하나를 지정하여 주기를 청하니 명제가 조선이 좋다 하므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취하였다.
또한 명제는 한민족의 투쟁, 진취의 활동을 억제키 위하여 망건(網巾)을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망건을 쓰고 투쟁, 진취적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계는 명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망국의
망건을 쓰게 한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사대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유교를
국교로 정했으니 유교는 중국의 국교로 중국이 인류의 중심이요 타민족을 중국에 예속된 것으로
가르쳐 이조의 백성은 중국을 천자국이요 조국으로 생각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3학사로 추앙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같은 이가 과연 애국자인가?
윤집은 자주독립의 정신을 말살한 이성계의 친명사대 조선의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명나라를
하늘과 같은 조정이라 하여 천조(天朝)라 하고, 우리와 더 가까운 혈족인 청나라가 주적 개념에
불과한 명을 치는 것을 노적(奴賊)이라 하여 노예도적이라 하고, 천조는 아국의 부모요 인척인
관계인 청을 우리 부모의 원수요 아국인을 명나라의 자식이라, 청이 부모인 명을 침략하는데
명의 자식인 아국인이 청과 화친함은, 우리의 부모인 명나라를 잊어버리는 수치스러운 일이라 한
바 있다.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以臣伐君)으로 정권을 탈취한 역적 이성계가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고취했고 사대정책을 고취하기 위해 인류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 유교사상을 들여와
조선민중을 고리타분하게 선비화 노예화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실은 한민족 역대
왕실에서 지내온 천제(天祭)를 일개 제후국이 중국황실을 욕보이는 것이라 하여 내팽개쳤으며,
사대하여 스스로 굽혀 지나 연호를 쓰고 천제지자(天帝之子)의 국통을 이어받은 기존의 천자국의
왕실칭호를 제후국의 왕실칭호로 바꾸어 썼으며, 왕이 누런 황색 곤룡포 한번 못 입고 붉은 적색
제후 옷을 입었으며, 왕실로부터 학사(學士)라는 존호를 받은 소위 3학사-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는 명(明)을 부모와 같다하여 천조(天朝)라 하고, 명을 대국이라 하고
스스로를 소국이라 자처했으며, 명(明)에 도발하는 청(淸)을 부모를 치는 적(賊)으로 간주했다.
또한 선조의 모든 비문과 귀중한 문서 첫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명이 있으므로 조선이 있다)
이라 하여 조선보다 명을 먼저 했다.
단재 신채호가 애석해 마지않은 불세출의 영웅-최영 장군을 벤 이성계가 북벌주의를 역적이라
매도하고 존명 사대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지 않을 수 없어 왕건의 혈통부터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바꿔치기 해 놓았으니 이것은 일찍이 최영에 대해 “최영은 미치광이로다.
조심하여 큰 것을 섬김은 선왕이 남긴 규범이거늘, 이를 불고하고 다른 이론을 감히
제창하는구나” 라고 한 노예학자 정도전에 의해서다.
새로운 유교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역사를 필요로 했다.
이것이 몰고 온 것이 정도전, 정찬을 위시한 새로운 고려사의 개찬이었고 태종, 세종 때까지
끊임없이 자행된 역사수탈과 인멸이었다. 이것이 바로 태종, 세종 연간에 극비리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조선 판 분서갱유다. 고려의 왕씨 혈손들은 강화도로 보낸다는 명분 하에 한 밤중에
배에 태워져 수도 없이 수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려의 왕비들이 그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씨를 말리고 몇 안 남은 왕씨들을 너그러이 살려주는 척 하는 기사가 정종인가 세종
연간에 보이지만 이미 왕씨는 씨를 모두 말린 후였다.
단재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조선 판 태종의 분서갱유다. 그런데 태종이 못다 한 역사수탈을
극비리에 왕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심복중의 심복 김문기를 시켜 세종이 그의 선산 함경도에서
고려 이전의 역사를 모조리 소각하고 맹목적 친명 사대주의에 입각, 존 중화 사대주의 사서를
남겨두고 집현전을 중심으로 역사왜곡의 문치시대를 개막했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3대 가륵
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또는 가림다) 문자도 물론 서문에 해당하는 해례본 제자서만 첨부해
훈민정음 창제로 선포한 것으로 이것은 성군으로 알려진 충녕의 뜻깊은 공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사적 차원에서는 엄청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KBS 역사스페셜 추적보도에 의하면, 한글 창제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해 이미 고도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어문학자 세종이 직계 가족만을 데리고 만들었다고 한다. 유교적 사대주의로
신하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었던 세종은 삼강행실도 간행 문제를 계기로 몰래 세자인 문종, 세조,
안평대군, 둘째 딸 정의 공주 등 자식들을 데리고 10 여 년 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라는 것. 이것은 반도사관을 배경으로 추적해 본 것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자식들을 통해 연구하게 한 것은 훈민정음 자음, 모음의 창제라기보다는
당시 이미 고서에 전해지고 있던 가림토 문의 음성론 음운론 등 제자 원리가 주였고 실제
훈민정음 서문에는 이 내용이 전부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물론 그
뿌리를 밝히는 사료들은 이 성계, 이 방원의 전례에 따라 깡그리 소각되어 허공에 사라졌다.
그 중에 세간에 남아 떠도는 사료들 마저 후일 세조에 의해 대대적으로 수거되어 사라진다.
심지어 세조의 아들 성종마저 사서를 거두어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을 정도였다.
*성종 1년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ㆍ 《지공기(志公記)》ㆍ 《표훈천사(表訓天詞)》ㆍ
《삼성밀기(三聖密記)》ㆍ 《도증기(道證記)》ㆍ 《지리성모(智異聖母)》ㆍ 《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ㆍ 왕거인(王居仁)ㆍ 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ㆍ
《지화록(地華錄)》ㆍ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ㆍ 지리(地理)ㆍ 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ㆍ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이신벌군(以臣伐君)의 패역정권(悖逆政權)을 명분화 하기 위해 고려사는 철저히 위조되었는데
조선왕실을 위해 고려사는 은연중 비정통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왕건
혈통의 조작인 작제건 신화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지나 황실의 혈통으로 끌어부친 것.
잠시 그 내용을 스케치하고 넘어가자. 이 신화는 고려 의종 때 벼슬이 징사랑검고 군기감에 이른
김관의의 저서 「편년통록」에 실린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 책은 이조 초엽 역사왜곡의 차원에서
소각 처리되었으니 그의 이름만 편의상 빌린 것인지 그 내막과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에서 세종은 사서편찬 신료들에게 왕건의 용과 용왕의 신화가 황당하지만 후세를 위해
그대로 실으라고 한 것으로 보아 태조 때의 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와 산천을 두루 구경하다가 부소산(扶蘇山:송악산) 골짜기에 들어가
스스로 성골장군이라 칭하며 아내를 맞아 눌러앉아 산다. 그의 집은 부유하였으나 아들이 없고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가 날이 저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바위 굴 속에서 자게되었는데 그때 범 한 마리가 굴 앞을
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열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범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시험삼아
각자의 관을 던져 보아서 그 관을 범에게 물리는 사람이 나가서 일을 당하기로 하자고 하면서
모두 자기 관을 던졌다. 범이 호경의 관을 무는 지라 호경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고 하는데 범은
갑자기 없어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호경이 돌아 와서 평나군에
보고하고 다시 산으로 와서 9명의 장사를 지내 주었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시 과부로서 이산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성골장군을 만나게
되여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신의 정치를 하려고 하는바 우선 당신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겠다고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산신과 호경은 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 사람들이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는 동시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고 고쳤다. 그 후 호경은 옛 처를 잊지 못하여 항상 밤에
꿈과 같이 나타나서 처와 동침하였다. 산의 대왕 <산신>이 된 호경과 부소산의 아내와의 사이에
강충(康忠)이 태어났다. 아들 강충은 서강 영안촌 부자집 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를 들어
오관산 마가갑에서 살았다.
그때에 신라 감간 팔원이라는 사람이 풍수에 관한 방술을 잘 알았는데 팔원이 부소산의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일 부소군을 남쪽으로 옮기고 솔을 심어
암석이 나타나지 않도록 만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출생할 것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강충은 그의 말에 따라 군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하고, 전 산에 솔을 심어 군 명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그는 드디어 군의 상사찬으로 되고 마가갑 저택을 세전하는 재산으로 하여
거기로 왕래하면서 살았다.
수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마침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은 손호술이였다. 후에
보육(寶育)이라 개명하였다. 뒤에 보육(寶育)은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어느 날 꿈속에서 곡령산(鵠嶺山)으로부터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이 온통 물에 잠겨
은빛으로 빛나는 꿈을 꿨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 이제건(伊帝建)은 "너는 반드시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딸 덕주 (德周)를 그의
아내로 주었다. 덕주는 두 딸을 낳았다. 두 딸 중에 동생을 진의(辰義)라 불렀다. 미모가 수려하고
재주가 뛰어난 진의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의 형이 꿈을 꾸었는데 오관산(五冠山) 마루턱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그 오줌이 흘러 천하에 가득 차 보였다 그가 깨어나서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진의가 비단 치마를 가지고 그 꿈을 사겠다고 하기에 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진의는 형에게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하라 하고 그것을 움켜서 품에 품는 시늉을 세 번이나 했다.
그랬더니 그의 몸이 움직이고 무엇인가 얻는 것 만 같았다. 진의는 그것으로 하여 자못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나라 숙종이 아직 즉위하기 전에 천하 산천을 두루 유람하기 위하여 명황의
천보 12년 계사 -명황은 중국 당나라 현종 황제의 별명이요, 천보 12년은 753년에 해당하다-
봄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예성강 서포인 패강 서포에 당도해 진의의 집에 나타났다.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숙종은 보육의 작은 딸 진의와 하룻밤을 지내고 사내아이를 낳거든
이 활과 화살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므로 그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다. 작제건은 다섯 살을 넘기자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단지 그의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다. 작제건이 자라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진의는 아들에게
남편이 두고 간 활과 화살을 주었다. 그것을 받은 작제건은 기뻐하며 매일같이 활과 화살을
가까이 하여 신궁이 되었다. 그는 그해 열 여섯 살 때 중국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갑자기 배가 멈추어 서 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뱃사람들이
점을 쳐보니 "고려 사람을 배에서 떼어 버려라." 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를 본 작제건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작제건을 구해 주고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것은 부처로 변신해 자신을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는 것이었다. 작제건은 다음날 부처로
변신한 여우를 활로 쏘아 잡아 주었다. 용왕은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의 딸을 작제건에게 주었다.
용왕의 딸을 아내로 얻은 작제건은 육지로 올라와 살림을 차렸는데 용왕의 딸은 우물을 파고
용으로 변해 몰래 용궁을 왕래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모습을 작제건이 엿보자 그녀는 영영
떠나 버렸다.
그 뒤 작제건은 속리산에서 불경을 읽다가 죽었다. 작제건과 용녀(龍女) 사이에서 난 아들 중
맏아인 용건은 나중에 이름을 왕융이라고 고쳤다. 그는 꿈에서 본 미인과 비슷한 여인을 길에서
만나 아내로 삼았다. 부인의 성씨를 몰라 꿈에서 만난 부인이란 뜻으로 몽부인이라 불렀으나,
나중에 삼한(三韓)의 어머니가 되어 성을 한씨라 했다. 하루는 왕융이 자신이 살던 송악의 옛집
대신에 남쪽에 새로 집을 지으려 했다. 그 때 당(唐)에서 풍수지리를 배워 온 승려 도선이
지나다가 새로 집을 지으려는 왕융을 보고 말했다.
"기장을 심을 땅에 어째서 삼(蔘)을 심었는가?" 이어 도선은 주변 땅의 지맥을 살피더니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맥이 북방의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온 명당이니 내 말대로 이 터에 집을 지으면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이오." 왕융이 그의 말을 좇아 집을 지으니 과연 그 다음해에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었다.-
작제건 신화중에 등장하는 보육과 진의의 꿈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김춘추를 둘러싸고
보희와 문희간에 서형산 꼭대기에서 오줌누는 꿈을 사고 파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삼국유사가
고려사가 쓰여진 시기에 개찬된 것을 비교하면 동일한 사료편찬자가 고의로 왜곡 편찬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KBS 사극 왕건 태조는 왕건의 혈통을 “이들의 조상은 고려사의
기록이 미진하여 확연치는 않다. 당귀인이란 왕건의 조상은 아마도 장보고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옛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라 하여 다음과 같이
얼버무려 방영한 바 있다.
- 다음편에 계속 –
[출처] 108. 왕조의 비밀 1 - 7|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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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도를 멈추니 읽고 싶은 글을 읽을 수 있어 너무나 좋다.
그 동안 모아 놓은 수많은 역사책들을 죽기 전에 다 읽고 싶다.
좀 더 건강하고 로또가 1등 된다면 빙혼도 한 번쯤 직접 대륙으로 건너 가
대륙 백제와 고조선의 역사를 파헤치고 싶었는데...
그냥 남이 정리한 자료나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로또되면 연변이나 헤이롱장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조선족 학생을
직원으로 삼아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역사를 추적하고 싶었다.
여진족 출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국하였으나 철저하게 명의 눈치를 보면서
이전 역사를 개무시하는 역사 찬탈을 했던 죄를 드러나게 만들어
차이나사관, 재팬사관, 유대인/개독사관, USA에 빌붙어 살아가는
반민족 인간들의 뇌를 씻기어 주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 달래면서 나 혼자 잃어버린 역사의 한숨 소리를 들어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