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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말 ‘아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그런데도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한 해의 ‘전례 주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해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렸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도 묵상하게 한다. 이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가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 부분으로 묵상하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사순 시기는 회개가 강조되는 시기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뜻에서 노래를 생략한다. 하지만 대림 시기는 기다림과 희망의 시기다. 인류 구원의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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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25-28.34-36)
Be vigilant at all times
and pray that you have the strength
to escape the tribulations that are imminent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말씀의 초대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분께서 계획하신 일은 막을 수 없다. 아무도 다윗이 왕이 될 줄 몰랐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고 약속을 지키셨다. 이렇게 해서 유다 지파는 왕족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다. 모두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제1독서). 사랑은 축복이다. 이웃을 사랑하면 주님의 위로와 힘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언제라도 사랑의 길이 정답이다. 믿는 사람이 사랑의 길을 걷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제2독서). 종말의 날에는 해와 달과 별들에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해당될 만큼 중요한 것들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일상의 기도와 선행에 더욱 충실하라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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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느새 대림 시기가 되었습니다. 성탄 준비가 시작된 것입니다.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을 현실에서 한 번 더 ‘만나려는’ 노력이 대림 시기의 준비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복음의 내용입니다. 대림 첫 주일에 이 ‘말씀’을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대림 시기 동안, ‘지상의 것’에 매달리지 않는 훈련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해와 달과 별들에 해당될 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 변화를 가져가 보라는 말씀입니다. 목숨만큼 소중해도 언젠가는 ‘두고 갈’ 것들입니다.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두고 가야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라는 것이 대림 시기의 교훈입니다.
‘하늘의 힘’은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일상의 기도가 매일 취하는 영적 에너지이며, 그로 인해 ‘내면 세계’는 풍요로워집니다. 대림 시기 동안 하루라도 기도를 빠뜨리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은혜로운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울러, 매일 한 가지씩 선행을 실천한다면, ‘지상의 것’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기다림을 안고 살아갑니다. 영혼을 깨우는 기다림은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합니다.
<자작나무처럼>
-양승국신부-
인적이 드믄 첩첩산중 오지에서도 환한 얼굴로 서있는 자작나무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작나무는 나무껍질로 아주 유명합니다.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하얗고 윤이 나는 수피, 그 껍질은 마치 종이처럼 얇게 벗겨집니다. 해질 무렵 강 건너편에 키 큰 자작나무 군락이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입니다.
자작나무는 누구나 한번이라도 보면 잊지 못할 매력을 지녔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이 나무를 ‘나의 어머니’라고 부른답니다.
자작나무들은 마치 그 세월이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표정으로 그렇게들 서있었습니다.
전례시기가 돌고 돌아 또다시 기다림의 계절, ‘대림시기’가 돌아왔습니다. 돌아보니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기다림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이 제발 빨리 좀 물러가줬으면 하는 기다림,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기다림, 내가 꿈꾸고 있는 목표점에 어서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기다림, 살림살이 좀 나아질 미래의 어느 순간에 대한 기다림...
한 열흘 국제회의에 다녀왔습니다. 낯선 땅,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음식, 빡빡한 스케줄, 많은 숙제들...제 마음 속에는 어서 빨리 회의가 끝났으면 하는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다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보다 품격 높은 기다림, 순도 높은 기다림, 수준 높은 기다림을 요구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깨우침을 하나 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묘한 분이십니다. 간절히 염원하고 기다릴 때, 너무나 절박해서 울부짖을 때, 많은 경우 바로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뜸을 좀 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좀 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순간’인데 하느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여백, 공간, 여유를 두시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 의지의 정화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들의 모든 인간적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 체념의 밑바닥에 퍼질러 않아있을 때, 내 삶에서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버려 더 이상 그 어떤 기쁨도 낙관도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 때, 하느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구나, 인간은 정말 의지할 대상이 아니로구나, 철저히 깨닫는 순간 하느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힘이 부서진 내 삶 위로 건너오십니다.
결국 정답은 기다림입니다. 괴로워도 기다려야 합니다. 외로워도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미칠 것 같아도 기다려야 합니다.
길고 긴 기다림만이 하느님의 손길을 몰고 옵니다. 오랜 기다림만이 기적을 낳게 합니다. 끝도 없는 기다림만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 새로운 삶을 불러옵니다.
다시 돌아온 대림시기 자작나무로부터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자작나무들은 어떤 한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는 꼭 이래야 된다는 듯이 그렇게들 서있습니다.
삶의 비참함도 인생의 비루함도 그저 묵묵히 수용하면서, 때로 불쑥불쑥 표출되는 분노도 그저 담담히 다스리면서 자작나무처럼 그렇게 서 있어 봐야겠습니다.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 깨어 영접
-배광하신부-
속량의 날을 준비하며
기다림의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림으로 깨어 준비해야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은 ‘기다림’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모든 것이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 낳기를 기다리고, 어서 자라 주기를 기다리며, 학교 가기를, 졸업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취업하기를 기다리고, 시집 장가가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는 밥 나오기를 기다리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기다립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의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역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돌아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고 또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서의 주제와 예언자들이 외쳤던 외침은 한결같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그런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마침도 기다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추방에서부터라고 봅니다. 그들이 쫓겨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구세주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 3,15 참조). 그로부터 구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무려 4천 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약속대로 메시아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고 그들과 33년을 함께 사셨습니다. 당신의 구원사업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문에 신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2천 년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은 공심판의 날이며, 세상 종말의 날입니다. 사이비 종교에서는 종말을 선전하며 교세와 착한 신도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금품을 갈취하는 악용으로 이용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의 참된 종말은 예수님 약속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어서 오도록 2천 년을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교, 그 모두가 기다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때문에 진정 참된 기다림과 기쁨으로 그날을 깨어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기다림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신다.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신다.”(시편 25,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왕좌왕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한 눈 팔 것이 아니라, 정해주고 알려주신 그 길을 따라 충실히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어머님을 여의고 가슴 아파하며 어머님의 무덤을 찾고 돌보다가 이민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민을 떠나기 전 아들은 어머님 무덤 가까이 사는 동네 사람에게 큰 돈을 주며 어머님의 무덤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고 매년 돈을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수년간 고국을 찾지 못했던 아들은 문득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갑자기 귀국했고, 어머님의 무덤부터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덤을 돌보는 사람은 아들이 영영 오지 않을 줄 알고 몇 년을 돌보지 않아 무덤은 이미 잡초 무성한 풀밭으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의 무덤이 폐허가 된 것을 본 아들은 오열하였고 무덤 관리인을 경찰에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같은 무덤 관리인이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대림, 기쁨과 설렘으로 깨어 기다리는 이 시기에 우리는 버마의 민주운동가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저명한 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인용 되면서 널리 알려진 부패에 이르는 네 가지 길에 관한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우리는 진정 욕망과 미움, 망상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을 깨어 영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깨어나 마음의 눈을 뜰 때"
-홍승모 신부-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주일 복음말씀에는 늘 변함없이 주님이 오시는 날을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늘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와 함께 주님이 오시는 날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복음 내용은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주님 오심이 묵시문학적 종말사상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의 표현법은 독특한 의미와 색채를 띤 낯선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오역해, 많은 종교집단에서는 공포와 두려움의 상태로 신앙인들을 몰아넣어 신앙인들에게서 종교집단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오히려 주님 오심에 대한 희망과 구원을 내용으로 합니다.
사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그 안의 모든 것은 하느님 창조물입니다. 그런데 늘 우리가 보아서 익숙했던, 그래서 안전하고 확고하다고 여긴 창조물들이 그 기반을 잃고 흔들립니다. 이런 표징들이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가져와 마음을 동요시킵니다. 복음의 내용은 외적으로는 주님 오심을 표현하고 있지만, 내적으로 그 당시에 일어났던 박해의 고통과 주님 현존 앞에선 모든 창조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표현된 불안과 두려움이 바로 절망에 빠져 낙담하고 있는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늘 안전하고 확고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때가 인생에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태양과 같은 빛이 없어지고 어둠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태, 기쁨이 없는 상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여정에 앞서서 복음이 이런 말씀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의 십자가 수난 여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기대했고 마땅히 받아야 했던 것만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될 것들을 기다리고 그것에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기다림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움켜질 것에만 삶의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다림은 주님의 오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향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쳐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림 속에서 원하는 바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완전히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이기적인 잠에 너무 취해 있지 않나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움켜질 것에만 빠져 있다면 이제는 깨어나 마음의 눈을 뜰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주님 사랑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 불안과 두려움은 아물고 우리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 뛸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다림과 충만함
-이규성신부-
어 느덧 대림절이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기간인 대림
절은 오시는 주님을 잘 영접하기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이 충만하고 완성된 미래에 대한 기대
로 말미암아 현재의 자신을 의미 있게 꾸미고자 하는 때인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은 이미 우리 현실을 뜻깊게 가
꾸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다림보다는 조급함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같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누구나가 바
쁘게 살아가는 분주한 상황 속에서는 기다림이란 매우 낯
설고 불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리는 것은 마치도 무
의미하다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기다
린다는 것이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으로 느껴
지기도 합니다. 바쁜 내가 남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당연하
지만 내가 남을 기다리는 것은 참을 수 없기도 합니다. 우
리는 그만큼 조급해졌고, 그만큼 정신적인 여유 없이 각박
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고는 하
나 급속히 변화해가는 세상에 빨리 적응하고자 하니 자신
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습니다. 심지
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어디론가 가야 하는 강
박관념 속에서 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세상은 매우 역동
적으로 보이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무의미한 삶의 반복
인 듯 보입니다. 분주한 가운데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는 우
리는 마치도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공허함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다림
없이 바쁘고 급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시 돌
아보게 하고,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며 나아가서 앞으
로 나아갈 방향과 길을 살피게 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득히 채워주
려고 말입니다.
교회 전례주년의 첫 시기는 대림절입니다. 새해 서두에
그 해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듯이 대림절
에 신자들은 기다림의 각오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
가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
시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에서 의미에로, 어두움에서 밝음
에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
의 삶을 과거 지향적으로 머물게 하지도, 현세적 집착에 머
물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게 합니다. 희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잘
준비하고 가꿉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는 설레
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설렘은 현재의 우리에게 살아가
는 힘을 선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 어떠한 것과
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선물을 갖고 오십니다. 그것은 사랑
으로 충만한 구원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빈곤
을 풍요로움으로 채워주시고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난함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유함으로 변화됩
니다. 우리의 결함은 완전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말미암아 더
욱 풍요롭고 충만해집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악의 실체를 말하며 사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사탄·마귀·악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시련과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 사탄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고통과 슬픔과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곳도 없고, 질병과 아픔과 죽음이 없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사탄의 존재를 이야기하지만, 눈으로 본 사람이 없기에 사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탄은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탄을 대비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사탄의 존재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고 고통을 안겨주고 질병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건강하다고 이 세상에 암이 없다고 하거나, 내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고 치매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해서 사업 실패가 없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도망갈 수 없는 구렁으로 몰아넣고 삼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표징’(루카 21, 25)에 대해 주목할 것을 가르칩니다. 사탄이 날뛰면 이 세상은 참혹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세에는 사탄의 영들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때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부유함이 결코 우리를 이 참혹함에서 건져주지 못하고, 지위가 우리를 면하게 하지 못하며, 사랑하는 가족도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사탄은 누구한테나 무차별적으로 고통과 슬픔과 실패를 가져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시련을 겪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다가오도록 허락하실까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 씨가 3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타이거 우즈는 아버지 때문에 오늘의 골프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얼 우즈 씨는 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색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골프 연습을 할 때 고함을 지르거나 다른 공을 던져 빗나가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집중력을 일부러 방해했습니다.
어린 타이거는 아버지가 코스에 나타나기만 하면 집중해서 한 샷, 한 샷 치면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런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는 골프 황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경을 허락하신 것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발전시키고 우리를 돕기 위해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전을 거치면서 싸우고 있을 때, 우리는 그만큼 성숙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쉽게 만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고,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이 닥치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무거운 고통이 찾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딜레마가 우리를 깊이 좌절시켜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곁에 계시기에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지금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상황이라는 수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괴로움만 바라보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보고 계시기에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들어 높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계획에 비추어 모든 것을 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아니면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땅을 보며 살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정말 우리는 땅의 것에만 충실했습니다. 더불어 하늘을 향해서도 충실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땅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땅의 양식을 뒤로하고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 것에 충실할 때,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땅의 것만 보며 땅의 것에만 충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렁에 빠지지 말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느님께 눈을 고정시켜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체 그림을 보시고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인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가장 멋진 시작
-조명연 신부-
우리는 머지않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고해 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해야겠지요. 그리고 곧 탄생하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쁜 선물도 미리 준비해보면 어떨까요. 그 선물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예수님께서는 이런 물질적인 것보다
우리 마음의 선물을 원하실 테니까요.
이번 성탄에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마음의 선물로 우리의 습관 중에서
가장 나쁜 습관을 버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즉,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고 실천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예수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로 바쳐보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늘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짧은 순간이라도
주님 안에 머물고 한 해를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예민하고, 명징하고, 정갈하게
-김찬선신부-
다시 새 해가 시작되었고
다시 기다림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다린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어머니와 저를 봅니다.
제가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저를 늘 기다리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시겠습니다.
제 어머니가 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차려놓고 저를 기다리시듯
푸짐한 잔치를 차려놓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기다리시건만 우리는 주님께 잘 가지 않지요.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제일 후회할 게
살아계실 때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도 잘 드리지 않으니
참고 참다가 결국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려야지 하지만 매번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우리가 가지 않으니
주님께서 손수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방탕이 오신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만취가 주님이 오신 것조차 모르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심걱정이 오신 주님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눈길을 주님 오시는 쪽으로 돌리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며,
정신을 명징하게 하고,
우리 안에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들을 쓸어내어
마음을 맑고 정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인간
-전삼용신부-
오늘은 기분 좋은 새 해의 첫 주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종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김빠지네, 오늘 복음은 누가 정한거야?’
이렇게 좀 불평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저의 어렸을 때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어렸을 적 첫 기억도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과 그분들의 장례 때의 기억이 저의 첫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 전례에서 새해 대림 첫 주부터 마지막을 생각하도록 복음을 정한 것은 깊은 뜻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어디를 보고 던집니까? 바로 공이 날아가서 도착 할 포수의 글러브를 보고 던집니다. 타자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타자를 보고 던지다가는 공이 타자에게로 날아갈 것입니다. 또 달리기를 하는 선수가 관중들을 보며 뛰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보고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 목적지에서 눈을 Ep지 않습니다. 인간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뛰게 되어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를 보지 않고 주위에 있는 것들이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삶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태어나자마자 죽음이라는 저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제가 된 것도 이 기억이 큰 작용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보다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더 행복하기 위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차차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물론 혼인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혼인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로 볼 때 성소의 길은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베드로가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물고기만 잡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를 잡는 것과 사람 영혼을 잡는 것과는 물고기와 사람 영혼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삶의 가치도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물고기를 잡으며 살기보다는 잠깐의 즐거움을 보지 않고 영원한 가치와 행복을 보게 해 주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기억이 항상 저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죽음의 기억이 저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친구처럼 함께 해 주었고 목적지를 똑바로 보게 해 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지금 처음부터 죽음을 생각하게 해 주셨던 것을 가장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죽음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떨어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암벽을 오르기도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얼음으로 덮인 높은 산에 오르며 자칫 실수를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자동차 경주를 합니다. 사고로 실제 죽기도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런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얼라이브’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여객기가 눈으로 덮인 산맥 위에 떨어져서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인육으로 목숨을 연명합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게 되었는데 아마 그 이후 그들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삶을 오히려 생기 있고 풍요롭고 알차게 하였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깨어나게 합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실 때부터 죽음을 항상 달고 다니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 예언자 시메온은 예수님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어머니도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조금 뒤에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행히 이집트로 피신하여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도록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죽음의 공포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삶이 길지는 않았지만 가장 생기 있는 삶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각하지 않으려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생기를 잃게 만드는 독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해 첫 날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 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 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종말이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려왔던 또 다른 시작이란 바로 메시아의 탄생입니다. 억압된 세상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 된 불멸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오셨는데도 유다인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2000년 전에 이미 왔었고 이스라엘에서 다만 몇 명만이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왜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그들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도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시에 태어나지 않으시고 조용한 시골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도시의 삶은 종말을 사는 삶이 아니라 목표를 잊고 세상에 집착하는 삶입니다. 도시의 삶이란 아이가 학교에 가다가 학교 가는 것은 잊고 오락실이나 만화방, 인터넷 방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노는 것과 같습니다. 피시방에 가는 아이들 탓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은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지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도시에 있는 수많은 걱정거리와 유흥거리들은 우리의 목적지를 잃게 만들고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어 영혼을 잠들게 하고 하느님을 잊게 만듭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시집 장가가고 정신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아만이 늘 깨어있으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 종말이 오더라도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놀라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뜻은 항상 종말에 살기 때문에 항상 주님 앞에 있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시간이 종말이고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종말에서 멀어져 있으면 하느님과도 멀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만이 종말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상에 집착하며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는 한 순간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삶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소돔이라는 도시에 들어갔을 때 롯만이 그들을 맞이하였고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만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그 손님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롯만이 살아남고 악인들은 유황불로 완전 멸망하였습니다.
간단한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일은 또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들판에서 양들을 치던 목동들만이 예수님을 경배하였고 나머지는 도시에서 흥청망청 바쁘게 살다가 그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구원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종말은 노아의 홍수 때보다도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비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심해의 어두움(노아의 홍수)과 영원한 불의 뜨거움(소돔과 고모라) 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순간이 바로 도시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비참한 종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종말의 삶을 살지 않고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생각해 봅시다. 남편이 직장에서 올 시간이 되면 아내는 문 밖으로 나와 남편을 기다립니다. 집 안이 더 따듯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재미난 것도 많이 하지만 남편을 단 일초라도 더 빨리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문 밖으로 나오고 남편이 오는 길로 한 걸음씩 자신도 모르게 걸어갑니다. 종말을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즐거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목적지만 보이지 주위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너무 집착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원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도 아닌 것입니다.
2012년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주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만약 세상 것에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돌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남도 하나의 종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적지이고 방주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니 그분만을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더 사랑하기 위한 노력’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 눈에 그리스도만 들어오고 그분만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오남주신부-
11월 위령성월도 다 지나갑니다. 때맞추어 찾아온 초겨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온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토록 하는 성찰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위령성월의 근본 지향은 연옥 영혼들의 귀천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위령성월이 갖고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 로마인들의 경구를 빌려 표현한다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코헬렛 12장 7절에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시공(時空)안에 태어난 인간은 시공 속에 살면서 시공의 제한을 받다가 시공을 떠나게 마련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묵시 1, 8) 어떠한 피조물도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다면,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결자해지라고, 피조물을 지으신 창조주 말고는 어떤 무엇도 결자해지의 능력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환시를 보는 듯한 장면을 통해 종말론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 첫 번째 순서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구하기보다는 물신사상으로 상징되어 세속의 가치를 우선 구하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모든 가치와 목적은 무한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유한한 가치에 불과한 세상 가치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탑 얘기가 하나의 옛 설화가 아니라 현재도 진행중인 실제 상황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신앙은 이와 같은 가치의 혼돈 속에서 정도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삶 자체입니다.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물신 숭배 사상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뿐더러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나리아 성령 안에서 누리를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궁극적인 행복의 가치를 현세에 두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살아갈 때 그 안에 참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삶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 어서 오소서(마라나 타!, 1코린토 16, 23)
성탄은 새로운 출발
-김지훈신부-
해마다 성탄 때가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대림초, 별, 구유, 아기, 목동, 천사, 크리스마스 트리, 동방박사….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도 이내 잃어버린 어린시절에 대한 아쉬움이나, 의무감과 타성에 젖어 이 축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해 저편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 갈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합니다.
대림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인간으로 이 땅에 이미 오셨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고계)시며, 우리의 시간이 끝나는 세말의 영광 속에 오실 것을 기다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깨어 기다려야’한다는 말씀을 이맘때만 되면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정작 깨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또 왜 그래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여전히 엉뚱한 곳만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과연 대림초에 불이 차례로 밝혀지는 것도(기다림), 미사 전례 중 사제의 제의색이 자색이며,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 것(회개와 정화)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작정‘깨어 있겠다’며 힘주어 두 눈만 부릅뜬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을까요?
왜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와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요? 삶의 목적과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지 않고 오로지 인간적인 희망, 현세적인 욕심에만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면 말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은 물론, 과부들과 많은 병자들, 고아와 죄로 인한 고통 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고백한 사람들은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 어찌 죄 많은 나에게 오실 수 있겠는가?’라며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절대 포기 할 수 없었던‘희망’이 낳은 기적과도 같은‘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세말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을 것”(루카 21,28ㄱ)입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희망을 거슬러 구원의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5).
올해 성탄에도 예수님께서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속량이 가까웠기 때문”(루카 21,28ㄴ)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참으로 친절하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그 답을 던져주십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올해 성탄이 우리 모두의‘새로운 출발’이길 기도합니다.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유영봉신부-
전례력으로 새해(다해) 첫날이다.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는 것은 참된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바쁘게 바동그리며 정신 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음은 아니다.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함' 이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방법이다. 내 안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하자.
1. 세상 종말은 무서운 파멸의 날인가?
세기말(世紀末)이 되면 항상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그런 것을 떠들어대는 여러 사상이 판을 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요즘은 1년이 옛날의 백년 못지 않게 빠르게 변화하고 불안하다보니 세기 말이 아니라도 근원적인 가치전도와 변혁을 꿈꾸고 외치는 종말 현상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희망도,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들은 맷돌처럼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학적인 원한을 쏟아내는 이들이 우리 사회엔 그만큼 많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가21,25ㄴ-26)고 하신다.
이런 말을 들으면 죄 많은 우리들은 오금이 저리고 그저 무서운 생각부터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세말(世末)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자지러지기부터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세말의 진정한 의미는 '비극적인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세말의 대 재난은 완성을 위한 진통이요, 정화의 과정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가21,28)고 하시는 것이다.
2. 주님의 세 가지 오심
우리는 대림절을 맞으면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해마다 또 오시는가?"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면서 해마다 그냥 기념하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이에 대해 성 베르나르도께서는 "첫 번째 오심은, 말구유 위에 나약한 육신으로 오심이고, 두 번째 오심은, 마지막 날 재림 시에 영광과 위엄으로 오심이며, 첫번과 마지막 사이의 세 번째 오심은, 영(靈)과 권능으로 오심이다."고 하셨다.(대림 제1주간 성무일도 제2독서 참조)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재림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남이 계속되다보면, 친구를 더욱 새롭게 알게 되듯이,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에 눈뜨는 그만큼 새롭게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기에 해마다 맞는 대림시기는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성탄도 단순한 2000년 전의 첫 성탄의 기념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님의 재림은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재림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가 사는 이 역사의 시간은 종말(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 시간'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때, 바로 오늘 닥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 항상 함께 하고 있듯이 재림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숙히 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시간 속에서 영원을 희망하며 사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의 삶의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깨어 있어라."는 말씀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3.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 있는 삶은 아니다
일찍이 우리 국민들이 적이 아니면, 동지라는 식으로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라 이렇게 극명하게 분열되었던 때는 없었다. 소위 대선 주자들은 일회용 당을 또 만들고, 철새 정치인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도 이어질 것이다.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며 끝간데 모르게 치솟는 요즘, 취업을 희망하는 졸업생들은 신발이 닳도록 쏘다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바쁘게 뛰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며 허둥대는 삶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가?"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 몫을 다하고 바로 서있는가?" 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이는 '바쁜 삶'은 곧 허둥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고 그분과 함께 계획하고 그분과 함께 매일을 가꾸어 가는 삶이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조용히 주님 안에 한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자. 그리하여 언제나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조욱현신부-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제1독서: 예레 33,14-16: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 주리라
제1독서의 주님의 선언은 다윗의 정통 후손에 대한 약속에 집중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신 백성의 운명에 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유다가 살 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 모두들 마음놓고 살게 되면”(16절)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공로일 것이다.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의 정통 왕손(싹)”(15절)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이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민족과 민족을, 국가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야 할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제기되는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헌신의 최고의 표현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가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올 때”(27절),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날이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제2독서: 1데살 3,12-4,2: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살라
그러므로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앓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즉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오늘 대림 첫 주일에 진정으로 하느님과 나 그리고 이웃 앞에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매일이 성탄이다.
-이기양신부-
"Everyday is Christmas!"(매일이 성탄이다!)
지난해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 성을 방문했을 때 벽에 써 있던 문구입니다. 이 말대로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은 매일이 성탄이었습니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 탄생지가 표시된 곳에서 절을 하고 입을 맞추며 감격스러워 했고,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대부분 순례객들은 마치 그 날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처럼 벅찬 감동으로 크리스마스 성가를 부르면서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마치 내 가슴에, 우리들 사이에 함께 현존하는 듯한 체험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성탄절이 아니라면 12월25일은 극히 평범한 날일 수 있듯이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매일을 예수님 현존을 체험하며 사는 성탄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대림 시기는 예수님 탄생을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 체험하기 위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이 대림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할까요? 지난 주일과 달라진 전례와 제의 색상, 대림환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당에는 대림초 4개를 담고 있는 대림환이 제대 앞에 놓였고, 제의 색상이 자색으로 바뀌었으며, 대영광송이 생략되었습니다. 각기 의미가 있지요. 대림초 4개는 예수님의 성탄을 맞기 위한 네 주일의 준비 기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제의색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대영광송이 생략되는 것은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화의 때를 상징합니다. 대림 시기는 세상 사람들이 지내는 대로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송년회다, 망년회다 들떠서 휩쓸려 놀러 다니는 그런 시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고 말씀합니다. 대림 시기가 은총의 시기인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깨어 기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 홈페이지에 올랐던 글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느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느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하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 안 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느님이 다시 와서 말씀하셨지요.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네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오랜만에 '내 집이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느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그렇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의 욕망과 이기심이 빚어낸 지옥 같은 상황을 하느님 말씀으로 정화하고 천국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매일을 성탄절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깨어 있는 대림절이 되도록 더욱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이기락신부-
대림 첫 주일 교회력으로 한 해의 처음이 기다림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들어오시면서 제대 앞이나 옆에 놓인 대림환을 보셨을 겁니다. 네 개의 초가 있고 그중 제일 진한 보라색 초에 촛불이 켜져 있지요. 새벽이나 평일 저녁에는 아침의 고요와 저녁의 평온함 속에 촛불 홀로 타고 있습니다. 그 빛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지금 성당의 주인은 신자도 건물도 아닌 저 촛불인 것 같습니다. 이 빛이 주는 고요와 평온함 속에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 예수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궁의 경비대 울안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쳐온 시기, 나라는 이제 곧 망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 무너지고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치드키야 임금은 두 눈이 뽑혀 청동 사슬에 묶여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주겠다.”(예레 33,14) 오늘 독서 앞부분에는 “기쁜 소리와 즐거운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와 ‘만군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예레 33,11)라는 신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구원의 모습을 말씀하시다니! 독서의 말씀들은 다윗 임금 때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현세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도 정말 이해가 갑니다.
유다 백성들은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처지로 내몰리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포기하지도, 그들에게 절망하지도 않으시는 하느님. 더욱이 가져본 적도 없었던 꿈같은 행복까지 약속하시다니! 이런 불행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그들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떨치며 올 것이다”(루카 21,27 참조) 하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재난은 가깝게는 기원후 70년의 로마제국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 멀리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기도 하겠지요.
예레미야서와 루카 복음의 정황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무엇을 생각하면서 오늘 제2독서를 묵상하면 이런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실체를 보는 듯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지요. 그런 확신과 흔들림 없는 신앙 속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1테살 3,9)라고 감동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서간의 집필 연대가 기원후 50-55년경 쯤이니 그래도 거의 2000년 전이네요. 그때의 신앙과 굳은 확신이 마치 금강석처럼 빛이 납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요.
사도 바오로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제대 앞에 놓인 대림환의 초들을 봅니다. 이 초에 하나하나 불을 붙이면 제일 처음 것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갇혀있던 유다 왕궁의 경비대 안으로 또 다음 것은 루카복음의 예수님께로 그리고 세 번째는 아테네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책상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 같습니다. 남아 있은 초 하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2006년 12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마지막 촛불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어떤 믿음과 확신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서처럼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재림 못지않게 우리 개개인의 죽음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며 내일은 은총이요, 자비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망각할 정도로 찰나적인 세상사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재림과 죽음의 시간은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 되겠지요.
조용히 타고 있는 대림환 촛불에서 극적인 기다림의 순간들이 일렁이며 지나갑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때가 차면(갈라 4,4 참조) 기다리던 분이 오시겠지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을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또 우리가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하게 살고 있어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다림을 주님께서는 작게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 속에서 저물어간다고 누군가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 속에서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이고 희망찬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쩌면 일년 중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때인지도 모를, 대림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희생과 긴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리고 권고합니다. “삶은 인내로구나. 삶은 긴 인내로구나. 삶은 길고 긴 인내로구나!
주님! 왜 오셨어요?
-상지종신부-
성당 문이 열리고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옵니다. 말쑥한 차림의 이들 사이에 아주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하나 이 사나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피곤에 지친 이 사나이 서 있을 기력조차 없어 보입니다. 미사를 마친 사제가 제의를 벗고 나서 성당 마당으로 나옵니다. 신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사제의 시선의 어느덧 어느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던 허름한 차림의 그 사나이에게 머뭅니다. 사제는 이 사나이를 본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변합니다. 사제가 쏜살같이 사나이에게 달려가 소매를 잡아 끌다시피하여 사제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제관에 들어서자 마자 사제가 사나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애절하다시피 말을 합니다.
"주님, 지금 여기에 나타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식대로 잘 꾸려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평지풍파를 일으키시려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제발 하늘로 돌아가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처럼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마십시오."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사나이, 세상을 돌아보시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하느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알았네."
예전 청년 활동을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들떠서 외치고 있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쌓아 놓은 온갖 탐욕과 불신과 증오의 탑을 허물고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안전하게 받쳐 준 온갖 재물과 지위와 인간적인 힘은 그 위력을 잃고 마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도하면서도 내심 지금의 생활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분명 우리 전 존재를 뒤흔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이미 신앙인들 안에 들어오시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계십니다. 현실과 복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도록 만드십니다. 이기심과 집착으로 물든 삶에 안주하려는 이들을 나눔과 섬김을 삶으로 이끄시고자 복음이라는 채찍으로 내리치십니다. 아픕니다. 이 아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삶을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히 바꾸는 것이지만, 이 길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하느님 나라와, 주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현실에 타협하는 길을 걸어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주님, 어서 오십시오. 이 몸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라는 익숙한 기도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진정으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 어서 오십시오. 이 몸이 당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라는 기도가 입밖으로 흘러나오지만, '주님, 오지 마세요. 거기 그냥 계세요. 괜히 오셔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려거든 그냥 거기 계세요. 적당히 나름대로 살아가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먹고 있지는 않는지 냉정하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편안함보다는 오직 복음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의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저 혼자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삶이기에 주님께서 제 안에 오셔서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셔서 제 자신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기도합니다.
"주님, 어서 오십시오."
-서공석신부-
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대림(待臨)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새 주기(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고,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 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새 주년(週年)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의 유대교 묵시문학의 표현들(하깨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을 빌려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가 말한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창조와 세상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의 기원(起源)이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 종말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종말과 삶에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그분이 하신 자비와 사랑의 실천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어서 복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방탕하거나 만취하는 일이 없고, 일상의 근심에 얽매여 허송세월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삶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얻은 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그분의 법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과거 세상에는 높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법을 지키고, 그들에게 바쳐서,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에게 연장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세상의 관행에서 발생한 편견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참으로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과 성전의례를 강요하면서 가르친 하느님을 거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율법과 성전의례에 예속되어 비굴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어, 하느님이 벌하시기 위해 그런 불행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연민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거나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믿고 있는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연민은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연민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며 실천하신 그 연민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가 또 가고 있습니다. 열 두 장이었던 달력의 남은 한 장이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웃을 향한 연민의 순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셨던 순간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도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시기를 시작합시다.
구름아
-민경철 신부-
낮은 기마 자세로 멋지게 구름을 타고 오는 손오공. 여의봉을 힘차게 돌리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카리스마… . 어린 시절 그 구름의 주인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상에서 제일 힘센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구름은 아무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오공도 안 됩니다. 하느님만이 탈 수 있는 전차이기 때문입니다.
손오공 제까짓 것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 위에 사람의 아들이 타고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오십니다.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가난과 미움과 박해의 고통 중에
비천하게 있던 이들을 드높이시기 위해 오십니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2천 년 전에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릴 뿐만 아니라 세상 종말에 하느님의 전차를 타고 오시는
영광의 왕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이날이 주님의 사람에겐 공포와
죽음의 날이 아닌 희망과 축복의 날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주님 오실 때 구름 한 번 태워달라 청해볼까 합니다.
손오공하고 ‘맞짱’ 한번 뜨고 싶거든요. 손오공 그까이 꺼, 우리가 누굽니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정훈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면서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ㄴ).
이번 주부터 대림절이 시작된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성탄 축제를 준비한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이 세상 끝날에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 곧 세상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의 설렘과 기쁨과 기대가 담겨 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신분상 구속을 받는 경우가 생길 때 가족 또는 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를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께 그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하느님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구원’ 또는 ‘해방’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신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고 최종적인 속량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와 힘을 준다.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물질문명에 익숙해지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이야기로만 들린다. 때로는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이나 천상복락 등에 대한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관심사를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구원 불감증’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심판의 냉혹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고하신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 21,26ㄱ). 하지만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그날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루카 21,28ㄱ).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4-36)고 가르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이 해주어야만 하는 일도 있다. 후자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 말은 우리에게 ‘선택’의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한다. 구원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아닌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심지어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게 한다’, ‘어쩌다 한 번쯤은 괜찮다’, ‘하느님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라는 식의 핑계나 논리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정당화한다. 필자도 그러한 허물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여하튼 그러한 사고방식의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이들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종교인이 아닌 참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제시되는 참 신앙인의 첫번째 생활방식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ㄱ)이다. 일상의 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는 일이 있고 삶의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으면 크고 작은 생각(근심·걱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근심이 깊어지면 때로는 방탕으로, 때로는 자포자기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현세)’의 근심이 ‘영원(내세)’의 행복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두번째 생활방식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이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일이 아니라 종교인의 일일 뿐이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기도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의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께서 제시해 주시는 참 신앙인의 생활방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묵상과 기도
▷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주님, 저희는 때로 의무감으로, 때로는 타성에 젖어 당신 축제를 준비하고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대림절에는 저희가 ‘무엇 때문에’ 성탄과 당신의 다시 오심을 정성껏 준비하고 기쁘게 기다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준비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성탄과 다시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게 하소서.
새로운 전례주년
-박상대신부-
오늘 대림 제1주일과 함께 교회는 새로운 한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전례주년의 기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오늘", 그리고 "여기"에 재현하고 기념하는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사건의 신비를 1년의 전례주년 안에서 시기별로 나누어 기념함으로써 구원사건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에 신자들의 삶을 질서 지우고자 한다. 전례주년은 특히 시간(時間)과 장소(場所)의 성화(聖化)를 강조한다. 매년 반복되기에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전인류와 전역사에 베푸신 구원의 신비를 1년이라는 주기 속에서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찬미와 기쁨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주년의 신비 속에서 매번 그 사건(구원사건+성인축일)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여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화하여 이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참다운 "성사(聖事)"로서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중심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사건이다. 그래서 주님성탄대축일과 주님부활대축일이 전례주년의 두 기둥이 된다. 교회는 12월 25일 성탄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4주간의 대림시기를 지내며, 그 다음 주님세례축일까지 성탄시기를 보낸다.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연중시기를 지내는데, 이는 대략 연중 제5∼7주간으로 중단된다. 그 이유는 주님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시기 때문이다. 부활대축일은 매년 "춘분(3월21일)이 지나 만월(음력 15일) 다음에 오는 첫 주일"로 정해진다. 당해의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거꾸로 46일째 되는 날이 사순시기(총40일)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다. 이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사순시기에서 제외된다. 주님부활대축일부터 부활시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된다. 그 다음 월요일부터 사순시기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편리상 사순시기 이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I), 부활시기 이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2) 라고 한다. 연중시기(2)는 한해 전례주년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으로 끝난다.
따라서 전례주년은 크게 대림시기-성탄시기-연중시기(1)-사순시기-성주간-부활시기-연중시기(2)로 구분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모든 시기는 통상 그 날의 사건과 의미를 밝히는 특별전례와 함께 성체성사, 즉 미사로 기념된다. 미사는 "주일미사"와 "평일미사"로 구분되며, 그 미사의 중요성에 따라 "대축일미사", "축일미사", 또는 "기념미사"로 불리며, 모든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다. 특히 말씀전례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주일을 3년 주기 [가해-나해-다해]로 정하였고, 평일을 2년 주기 [홀수해-짝수해]로 정하였다. 이는 말씀전례의 독서와 복음을 지정하기 위한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주일미사에는 3년을 주기로 같은 독서와 복음이 봉독되며, 가해는 마태오복음을, 나해는 마르코복음을, 다해는 루가복음을, 부활시기에는 요한복음을 위주로 선택하였다. 평일미사의 독서는 홀수해와 짝수해의 원칙을 따라 신·구약성서에서,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으로 봉독된다.
그러므로 오늘 대림 제1주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2004년 "다해"와 "짝수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 셈이다. 따라서 올해의 전례주년동안 우리는 부활시기와 특별한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에서 루가복음을 복음으로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은 매번 기다림과 준비로 특성화된 대림시기로 시작된다. 대림(待臨)은 말 그대로 "올 것에 대한 준비"를 말하며, 대림시기는 그 준비기간이다. 무엇이 온다는 것이며,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인가? 교회가 말하는 대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느님의 이 땅에 "벌써 오심"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후자에 관한 것으로써 "깨어 기도함"을 인자의 재림에 대한 준비과제로 제시한다.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는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과거지사의 성탄과 미래사건의 재림을 한꺼번에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한꺼번에 현재의 순간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 뿐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한다고 식상해서는 안 된다. 벌써 오셨던 하느님과 다시 오실 하느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나, 우리 자신이 달라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분명 작년의 내가 아니며, 어제의 내가 아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겉과 속을 비추어 보라. 분명히 나의 모습을 달라졌다. 우리는 성장했고, 변했다. 그래서 올해의 대림도 그만큼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대림시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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