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옥천 전씨 (沃川 全氏)
관향
충청북도 옥천군
시조
전학준(全學浚)
집성촌
대전광역시 대덕구·서구
강원도 양구군
충청북도 영동군·옥천군·진천군
충청남도 금산군
경상북도 봉화군·상주시·영주시
황해도 연백군
평안남도 용강군
인구
47,681명(2015년)
1. 개요
충청북도 옥천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옥천의 고호(古號)가 관성(管城)이므로 관성(管城) 전씨, 관산(管山) 전씨라고도 부른다.
한국의 모든 전씨는 백제의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며, 옥천 전씨 역시 환성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전씨 종중에서는 본관을 일종의 분파처럼 말하여 옥천파(沃川派)라 일컫기도 한다.
2. 역사
시조는 고려 시기 영동정(令同正)이라는 벼슬을 한 전학준(全學浚)이다. 전학준의 현손인 전유(全侑)가 고려 충숙왕 치세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으로 피봉되어 옥천을 관향으로 했다.
다만 전학준의 선계는 한동안 모호하였는데, 지금은 북한 지역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묘소에서 "이갑(以甲)의 11세손이자 검교(檢校) 도위(都尉)를 지낸 필(弼)의 아들 관성(管城) 전공(全公) 유(侑) [旌善君以甲 十一世孫 檢校都尉弼之子 忠肅王朝 奉翊大夫 密直副使 版圖判書 上護軍 封管城君 管城全公侑之墓]
"라고 쓰인 묘지석(墓誌石)을 발굴하여 비로소 정선 전씨 충렬공(忠烈公) 전이갑의 후손임을 알게 됐다.
조선조에 들어 단종 절신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청백리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 효자 쌍암(雙岩) 전엽(全燁),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 호종공신 규천(虬川) 전극항(全克恒),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영서(𤃡西) 전명룡(全命龍)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세거지가 기호학파의 주요 지역인 회덕과 영남학파의 본거지 중 하나인 안동 인근에 모두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학맥으로는 서인이나 동인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은 편이다.
1554년 송정 전팽령이 족보를 기록하는 등 계보는 꽤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나 원본은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충익공(忠翼公)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열람하려고 빌려 갔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대신 1635년 영서 전명룡이 남은 사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새로 증수하였고 이후 주기적으로 대동보(大同譜)와 파보(派譜)를 만들어 왔다.
3. 분파
크게는 관성군 전유의 세 아들을 각각 파조(派祖)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로 나뉜다. 이들 삼곤계(三昆系) 아래로 세거지의 명칭을 파명(派名)으로 삼는 소파(小派)들이 다시 나뉜다.
[출처] 나무위키
※ 옥천전씨 문과 급제자
시험종별 | 순 위 | 성 명 | 년 도 | 관 직 | 비 고 |
중종14년 식년시 | 丙科 05위 | 전팽수(全彭壽) | 1519 기묘 | 부정 (副正) 종3품 | ① |
중종19년 별시 | 丙科 23위 | 전팽령(全彭齡) | 1524 갑신 | 통례원 우통례 (通禮院右通禮)정3품 | ② |
선조36년 식년시 | 丙科 06위 | 전 식(全 湜) | 1603 계묘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증 좌의정(贈 左議政) | ③ |
인조02년 식년시 | 丙科 07위 | 전익희(全益禧) | 1624 갑자 |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정5품 | ④ |
인조02년 공주정시 | 丙科 02위 | 전극항(全克恒) | 1624 갑자 | 예조정랑 (禮曹正郞) 정5품 | ⑤ |
인조05년 식년시 | 丙科 12위 | 전명룡(全命龍) | 1627 정묘 | 평양 서윤 (平壤 庶尹) 종4품 | ⑥ |
고종13년 식년시 | 乙科 05위 | 전석교(全錫喬) | 1876 병자 | 통례원 우통례 (通禮院右通禮)정3품 | ⑦ |
고종 28년 정시 | 丙科 1위 | 전우현(全禹鉉) | 1891 신묘 |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정5품 | ⑧ |
2. 인봉(仁峰) 전승업 (全承業)
전승업(全承業 : 1547~1596)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5년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고,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 하고 과거 공부를 집어치우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져 사양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보은에 와 있던 조중봉은 1584년(선조 17) 옥천 안내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에 인봉은 조중봉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한다. 인봉은 본디부터 산수를 즐겼는데 조중봉과 서로 당시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나고 왕이 수도를 떠나자 그는 인봉정사에 있다가 통곡하며 ‘임금이 피난을 갔는데 신하가 집에 있다고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큰 아들을 중봉에게 보내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 건장한 종 100여명을 모으고 잡곡 등 100여 석을 모아 우선 군량미로 충당한 다음 청산‧영동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았다.
8월 선생과 중봉은 1,5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다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관군과의 충돌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자 직접 글을 왕께 전하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조중봉이 금산의 적을 치다가 전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봉사(封事)를 곽현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고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와 700 의병과 승군 300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중봉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중봉이 나라에 올린 글과 기타 잡저를 모아 조중봉의 유고집을 만들었다. 이후 중봉의 모부인과 아들을 인봉초당에서 함께 지내게 하였고 마음을 다해 도왔다.
인봉은 평소 병이 있었는데 임난을 격을 후 더우 심해져 날마다 약을 복용하면서도 금계에서 조중봉 등과 함께 죽지 못했음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기다 1596년 봄에 정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묘소는 동이면 금암리에 있다.
[출처] 옥천군청 옥천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