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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던 카타리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도미니코회 재속회 회원으로서 탁월한 영적 생활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타리나의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 생활, 사심 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은 즉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성덕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고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살아있을 때 성인 소리 듣는 사람이 결국 성인이 되는가 봅니다. 살아있을 때, 쌩 양아치처럼 살던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에 크게 회개를 해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벼락 맞기보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성인의 길을 걸어야 함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카타리나가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붕ㄹ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보여준 삶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덕은 나이나 연륜과 비례하는 것도 아님을 그녀는 잘 보여준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단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매일을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만났으며, 사랑으로 주님과 일치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는 의복입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이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하신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나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카타리나가 봉사하러 다니던 성 라자로 병원에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괴팍한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테카였습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제나 불평불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의사나 간호사에게 대들었습니다. 강제 퇴원당한 그녀는 거리를 헤매다녔는데, 다니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카타리나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테카는 카타리나를 저주하면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를 할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방문하여 위로해주었고, 상처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친절의 결과는 늘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쩐 일이야? 성당에 앉아 계시기가 지루했던가 보지? 나를 준답시고 맛있는 과일 케이크를 받아서는 남몰래 다 먹어 치웠군? 내 말이 틀림없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드디어 테카가 카타리아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져주던 카타리나의 손에 나병 징후가 생긴 것을 본 것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카타리나, 나 때문에 당신께서 나와 똑같은 몹쓸 병에 걸렸군요. 날 간호하다가 이렇게 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카타리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더 큰 상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병에 걸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테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주님께서는 카타리나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카타리나에게 주님께서는 오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령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계명을 실천하면 반드시 그에게 칭찬받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은 영광과 비슷한 말입니다. 칭찬을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어른 보면 무조건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무조건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가 인사를 너무 잘하고 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칭찬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칭찬해 주셨고 우리는 이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칭찬은 사실 선생을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어느 정도는 칭찬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팩 초프라도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은 아버지가 책임질 테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두 아들 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영광으로 그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시켰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자기 낙타들과 자신에게 선행을 할 줄 아는 레베카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각종 폐물과 옷을 주었습니다. 이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선행을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으로 레베카는 이웃에게 선행을 더욱 잘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선행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 영광, 성령의 은총은 내가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말씀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축일 잔치를 본당에서 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입니다. 도망을 치고 싶지만, 신자들이 아쉬워할까 봐 어쩔 수 없이 국수 잔치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받는 영광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왜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광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광이지만, 자기 양심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영광은 나 자신이 합당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 부담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신자들에게 사비로 국수를 대접해 드렸습니다.
물론 신자분들이 축하한다고 주시는 축하금이 그 비용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본당에서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아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국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할 수 있다면 이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잔치는 잘 끝났습니다.
이것을 하는 중에 지금의 상황이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상황과 똑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사우가 부담스러워 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아서 자기 가족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되니 기도하였습니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에사우를 하느님처럼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자들에게 힘줄이 끊어진 장단지를 가진 야곱처럼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조금 받아들일 만했습니다.
이것이 왜 주님께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지가 이해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라도 하느님 나라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저는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것이 확실히 이해되었습니다.
성령의 영광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꼭 선행을 하고 영광을 받아봅시다. 그러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방에 강의 갔다가 강의를 거의 마칠 때, 청중에게 “저, 어때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청중 중 몇몇이 “멋져요. 좋아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사랑해요.”라고 크게 외치시기도 했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저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는 청중이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이상을 강의하는데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시는 모습, 그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 어때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멋짐이 드러나는 곳은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사로 이 자리에 있어서 ‘멋지다’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만취해서 비틀거리며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멋지다’라는 말보다는 ‘흉하다’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기에 멋집니다. 그 멋짐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계속 멋질 수 있도록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물든 곳은 멋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그밖에 삶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멋집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멋짐을 흉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만든다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가장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모습이 과연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수록 더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더 멋지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멋지게 하시려고 계속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은
우리를
죄로 이끌고 간다네.
그러니
어두운 생각이 들어와
우리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기 전에
주님의 법인
기도와 회개로
어둠을 벗어나야 하리.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의 정신을
맑혀 놓아야 하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진리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참 행복의 길에는
장애물과 걸림돌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의 계명에 저항하는 왜곡된 자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도록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질기고 질겨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견디어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호자이신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성령에 따른 삶은
주님의 진리 앞에 자신을 내어놓을 때 가능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도록
우리의 허물과 거짓 환상을 벗는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의 첫걸음임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그만큼
그 사람 말을 잘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듯이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복음 말씀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