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의 ‘자화상’
라파엘은 종교화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당대에는 초상화가로 더 유명했다.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꾸려갔다. 꾸려 간 것이 아니고 호화롭게 살았다. 초상화로서 많이 말하는 작품은 발다사르 카스릴리오네의 초상(1515), 율리시우스 2세 초상(1511) 그리고 레오 10세 초상ㅇ(1517-8)이다. 그러나 나는 1506년에 그린 자화상으로서 초상화 이야기를 하겠다. 왜냐면 그의 생애가 길지는 않았지만 화려하였으므로, 자화상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생애도 말하고자 한다.
라파엘은 레오나르드와 미켈란젤로보다는 뒤에 활동했다. 라파엘은 미켈란젤로에게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겨 둔 업적은 미케란젤로를 따라 갈 수 없다. 미켈란젤로는 건축에서 조각 회화까지 광범한 부분에서 활동했고, 명작을 남겼다. 라파엘의 예술 활동 범위는 미켈란젤로 만큼 넓지 못하다. 라파엘의 재능은 회화에 치중되어 있다. 사후에 얻은 명성도 모두 회화에서 이다. 그의 화화적 재능은 친구와 동료 등 친근한 사람들의 초상화에서 잘 드러난다. 가장 성공적이고, 유명한 작품은 1515년에 완성한 발데사레 카스테리오네 백작의 초상화이다.
이와 비슷한 친근감을 주는 초상화는 교황 레오 10세이다. 레오 10세 뿐 아니고 다른 교황도 그렸다. 친근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그렸다. 레오 10세는 교황으로서의 권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고독함도 표현했다.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므로 교회는 무척 시끄러웠다. 근심어린 표정은 그러한 시대 상황을 잘 표현했다고 말한다.
1506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은 그가 23때의 모습이고, 그때 그린 작품이다. 순박한 젊은이의 얼굴이다. 이 얼굴이 경쟁이 심했던 당시의 피렌체와 로마에서 몸부림치고, 노력함으로 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나는 이 얼굴을 보면 어디서 그런 예술혼이 뿐어져 나올까 의심이 들 정도로 티없어 보인다. 라파엘이 그린 여인상은 인위적으로 우아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땅의 여인이 아닌 천상의 여인처럼 보인다. 성모상에 딱 어울리는 모습들이다.
남자를 그린 초상화는(그의 자화상도 마찬가지이다.) 순박하나 고뇌하는 땅 위의 인간 모습으로 그렸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좋아하였으리라 믿어진다.
그 시대의 사람은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세었지만 비현실성을 따지 않고 작품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라파엘은 꼼꼼이 따지는 현실적인 사업가 기질이었다. 항상 옷을 말쑥하게 입고, 세련된 자세와 상냥하고 우아했다고 전한다.
라파엘은 시회적 명성이 높았다. 돈도 많이 벌었다. 교황, 왕,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당시의 로마가 타락한 생활에 젖어 있었어인지 그의 사생활은 타락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여러 명의 여인(창녀라고 함)과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내면서 살았다. 독신으로 평생을 보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드 다 빈치와 다른 점은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고 너무 많아서 결혼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르네상스의 세 거장은 모두 독신으로 살았다.
1520년은 라파엘이 37세가 되는 해이다. 그해 4월이 되기 전에 결혼을 약속한 마리아 바비에나가 죽었다. 그는 유언장을 쓰면서 1천 500두카트를 (그의 전 재산은 1만 6천 두카트라고 했다.) 로마의 판테온에 기부하고, 그곳에 자신과 마리아 바비에나와 같이 묻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죽자 명예롭게도 바티칸 궁에 묻었다.
바사리는 르네상스 화가를 소개하는 ‘미술가 열전’에서 지나친 색정이 죽음을 불러왔다.‘ 라고 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들은 성병이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레오 10세는 라파엘의 죽음을 무척 애통해 했다. 그래서 바티칸 궁에서 장례 미사를 치렀다. 로마 시민들도 라파엘의 죽음을 슬퍼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 조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