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18)
"I am the
Good Shepherd"
A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환시에서 자신이 부정한 음식으로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 먹으라고 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며 다른 민족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생명의 길이 열렸음을 깨닫게 한다(제1독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는 자신의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잘
안다. 착한 목자인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실 권한과 다시 얻으실 권한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권한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부활 시기 동안의 미사 독서는 「사도행전」이 계속됩니다. 이
부활 시기 내내 봉독되는 「사도행전」을 꼭 전체적으로 묵상해 보라는,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의 당부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여러 시험대를 거치며 찾아갔는지를 「사도행전」이 보여 준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생활의 이상이자
원형인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모습이 언제나 이상적이고 조화롭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초대 공동체의 삶이나, 스테파노와 같은 순교자의 모습,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놀라운 활동처럼 빛나는 부분들도 있지만, 시행착오와
파당 짓기, 속 좁은 반목들도 등장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여러 어려움을 주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개인도 꾸며 대는 것이나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참으로 성숙한 자기 본연의 '얼굴'을 지니려면 시련과 과오라는 아픈 시기를 겪어야 합니다. 겸손한 인내와 용기 있는 희망으로 부정적
체험에서 교훈을 배우고 올바른 길을 체득해 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찬란한 시간만이 아니라 교회가 겪은 갈등과 혼돈의 시간 역시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 역시
자신의 본디 '얼굴'을 찾는 데 그러한 과정이 면제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목, 탐욕, 편견, 퇴행, 태만, 질투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교회 안에서 자주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이끄는 소중한 계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는 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묵상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 당신 이름 위하여 /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시편 23〔22〕). 다윗이 썼다는 시편 가운데 제23편이 오늘 복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기 전 목동이었습니다.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떠돌던 목동 다윗은 한편으로는 맹수에게서 양 떼를 보호하는 용맹한 전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금을 타고 대자연을 노래하는 음악가요 문학가였습니다. 다윗은 양들을 돌보며 목자의 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목자는 날이 밝으면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푸른 풀밭과 물가로 이끕니다. 밤이면 양 우리를 지키는 문이 되어 밤을 지새우며 양들을 지켜 줍니다. 이런 목자의 삶을 살면서 다윗은 주님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목자였지만 주님 앞에서는 한 마리 양이 되어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주님은 나의 목자!” 하고 고백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느끼는 고독과 온갖 맹수의 위협에서 자신이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듯, 주님께서 바로 목자가 되시어 자신을 이끌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면 한 마리 양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고 지켜 주어야 하는 인생살이의 들판에서는 우리 또한 목자가 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착한 목자의 마음이 되면, 착한 목자이신 주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를 위한 목자가 되어 보아야 주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부부의 만남,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연출하신 것이지요. 그러기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건강한 목숨이 될 수 없습니다. 목숨을 운전한다는 것이 ‘운명’(運命)이라는 말의 ‘숨은 뜻’입니다. 어떻게 이 만남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복음 말씀에 열쇠가 있습니다. ‘착한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할 말도 못하고 남에게 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는지요? 그러나 착한 마음 뒤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께서 작심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착한 마음은 ‘참을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듯’ 덮어 주는 마음입니다. 성질대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곁에는,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어린이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만남은 꽃입니다. 꽃이 싱싱하고 아름다우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이렇듯 ‘상대를 참아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베푸는 일입니다. 만남의 연출자는 주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지금의 만남을 주선하셨다면 앞으로의 만남에도 개입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미래를 그분께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저는 서울 갈 때에는 차를 잘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길이 많이 막히기도 하고, 또한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전철을 잘 이용합니다. 그런데 모임이 길어져서 전철이 끊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집에 와야 합니다. 그것도 미터기에 찍힌 금액보다도 훨씬 더 많은 웃돈을 얹어서 말이지요.
한번은 제가 너무 비싸다면서 조금 깎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택시 기사 형제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손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인천에 가면 빈 택시로 돌아와야 하는데 미터기 액수대로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미터기 요금의 두 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보다도 적게 받는 것인데 뭐가 비싸다고 합니까?”
이 택시를 타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타고서 집에 오기는 했지만, 오는 내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과연 두 배의 요금을 내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것일까요? 어차피 손님이 없어서 오랫동안 서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먼 거리를 갔다 오는 것이 훨씬 이득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상식을 내걸면서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이 어쩌면 나만 주장하고 있는 억지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농부가 여우를 잡았습니다. 이 여우는 그 동안 농부의 닭장을 수시로 습격해 닭들을 해쳤던 못된 여우였지요. 농부는 여우를 혼내주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혼내주는 것이 자기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을 생각했을 때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너도 고생 좀 해봐라.’라는 마음으로, 올리브기름을 적신 베 조각을 여우의 꼬리에 매달고 헝겊에 불을 질렀지요. 그런데 마침 그때는 수확기였습니다. 꽁무니에 매달아 놓은 헝겊 조각에 불이 붙자 놀란 여우는 보리밭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순식간에 보리에 옮겨 붙어 보리밭을 몽땅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수를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결국 손해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그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스스로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착한 목자’를 자처하시면서, 우리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면서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사랑 가득하신 주님을 자신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세우신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 안에 쉽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착과 욕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포옹해 주어야 한다(셰익스피어).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양승국신부- <작은 연못> 저희 집 성모상 밑에 아주 작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물의 유입이 없지만, 가끔씩 큰 비라도 내리면 야산으로부터 여과된 맑은 물이 흘러들어 어느 정도 신선도를 유지하는 작은 연못입니다. 그래서 이 연못에 새끼 비단잉어들을 사다가 풀어 넣었습니다. 빨간 녀석들, 노란 녀석들, 하얀 녀석들, 점박이 녀석들... 틈나는 대로 사료도 먹이고, 지렁이며 벌레며 자연산 먹이도 먹이며 성장하기를 기다렸는데, 성장속도가 얼마나 더딘지 일 년이 지나도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공주 마곡사나 남원 광한루 큰 연못에 모여 사는 팔뚝만한 비단잉어를 생각하며 열심히 먹이를 주고 기다렸는데, 결과는 왕실망이었습니다. 열심히 들여다봐도 그냥 그대로인 것입니다. 혹시나 하고, 녀석들을 끌어내어 좀 더 넓은 연못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쯤 가봤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곡사나 광한루 녀석들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있었습니다. 성장 환경이라는 것,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비단 잉어들은 연못의 크기에 따라 성장 속도가 놀랄 만큼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는 성장이 극히 더딘 반면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는 초스피드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비단잉어만 그렇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양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아이가 착한 시민,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쾌적한 성장환경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 쾌적한 성장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숱한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정말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인도자, 동반자, 지도자입니다. 어제 우리는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을 지냈습니다. 복음도 그에 걸맞게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입니다. 월급 받고 일하는 삯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삯꾼들에게 양들은 무엇입니까? 귀찮고 짜증나지만 월급을 받으니 마지못해 돌봐야 될 스트레스 덩어리들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에게 양들은 누구입니까? 사랑의 대상, 헌신의 대상, 봉사의 대상입니다. 착한 목자에게 양들은 기쁨의 원천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착한 목자에게 있어 양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들입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보고 싶고, 혹시라도 한 마리 잃어버리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찾아 헤매는 연인 같은 사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착한 목자,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 목자이신 이유 -엄기선 신부- 목자에 대한 이미지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사람을 살피시는 목자의 모습은 시편 저자도 노래했습니다(시편 23편). 이제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는 목자의 상像을 예수님께서는 제시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어제도 오늘도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모으시고, 듣게 하시고, 따르게 하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이 진정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낚던 어부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거듭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아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속죄의 제물,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까닭은 우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너와 나의 다름이 존재할 수 없으며, 출신과 신분, 가진 것과 재주를 뛰어넘어 모두가 하나 되는 ‘진정한 일치’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변화된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그분의 삶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진정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 모두가 착한 목자 - 박동순 신부- 우리 모두는 하느님한테서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한테는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고유한 임무가 있습니다. 사제인 저는 성사를 집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로서의 임무가 있고, 자녀 또한 임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각자의 임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목자입니다. 목자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크든 작든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숙소는 성모자헌의 집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이 낯설었는데, 함께하는 사람마저도 너무 낯설었습니다. 어느 날, 한 분이 밤에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걱정을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주눅 들어 움츠리고 있는데 그분은 이불 속에서 통닭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통닭을 따뜻하게 하려고 이불 속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제게 힘내라며 먹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더 먹고 힘내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귀하게 모은 돈을 저를 위해 기꺼이 쓰고 용기와 힘을 주는 모습에서 ‘내가 괜한 선입견을 갖고 살았구나.’ 하는 죄송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분은 요셉의원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줘서 생활하는 사람이었고 당시 저를 이끌어 준 목자였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러 가서 오히려 봉사의 의미를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제외됨 없이 우리 모두는 삶의 자리에서 목자입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매우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지금 나한테 주어진 임무에 목숨을 바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받게 될 것입니다. 목숨을 다해 착한 목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 -김찬선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저의 이름은 한자로 金 燦善입니다. 보통 빛날 찬, 착할 선이라고 제 이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善이 우리말로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집니다. 좋음과 착함입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 즉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통 일컫습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참 착하다고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다른 사람이 보통 윗사람이고, 그래서 어른이 원하는 대로 하고,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보고 좋은 분이라고 해야지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될 말이고, 그러니 예수님을 착한 목자라고 함은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로 나온 어제의 복음 전 환호성은 “나는 좋은 목자다.”라고 표현을 바꾸어 썼습니다.
아무튼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이십니다. 왜 참으로 좋으신 목자이신지는 오늘 당신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움켜쥐지 않고 내어주기만 해도 우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좋은 것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답니다. 이는 이리떼가 오면 자기만 살려고 양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거나 심지어 자기잇속을 차리기 위해 주인 몰래 팔아먹는 삯꾼과 다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저의 형제들이나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지는 못할지라도 모욕이나 비난이라도 대신 감수하기는 하는지..... 형제들이나 사람들에게 주님의 선을 나누는 내가 되려하기보다는 내 비위를 맞추는 사람 정도로 사람들을 생각지는 않는지, 내가 하는 일을 돕는 사람 정도로 사람들을 생각지는 않는지...
주님이 좋은 목자이신 두 번째 이유는 양들을 잘 알기 때문이랍니다. 잘 아신다 함은 우리의 죄와 잘못을 샅샅이 아신다는 뜻도 되지만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우리의 고통을 잘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잘 이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저는 저를 반성합니다. 저는 제가 사람들을 알려고 하기보다 남이 저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기보다 남이 제 처지를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사랑만큼 아는 것인데 저는 정말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많이 알지도 못하지만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남에게도 저 자신에게도 핑계를 대는데 보통 저는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제도 청년 미사 뒤 어떤 분이 제 조카들 이름을 대면서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를 하는데 제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무안하고 미안했습니다. 그분에게 상처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름보다 더 안 좋은 모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처지를, 사람들의 아픔을, 사람들의 갈망을 주님처럼 잘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거나 건성으로 압니다.
아무튼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고 하는 모르쇠도 문제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 모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르쇠가 더 뻔뻔하고 나쁩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쓰촨성 대지진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상자만 5만 명 가까이 되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던 대지진이었지요. 1~2분 사이 땅이 진동하면서 천지가 진동했지요. 산천은 다 흔들리고 그 흔들림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전무후무한 생지옥의 상황을 우리는 모두 매스컴을 통해서 보고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험악한 지진 속에서 보인 한 아름다운 모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답니다.
구조대가 한참 건물 더미를 파헤치는데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온 등이 콘크리트 더미에 찌그러진 모습으로 죽어있더랍니다. 이미 죽은 그 여인을 들어 올리는 순간, 여인의 품에 한 갓난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 아이는 먼지투성이의 상태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안고 일어서려는 순간, 아이 옆에 놓인 엄마의 휴대전화를 볼 수가 있었지요. 구조대원은 휴대전화의 화면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는 그만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그 화면에는 이러한 글씨가 적혀 있었거든요.
“아기야, 네가 만일 살아난다면, 이 엄마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마렴…….”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친 엄마의 사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우리들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며 말씀하신 것이 바로 사랑이었지요. 또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도 보여주신 것이 사랑이었고요. 그렇다면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며,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지요. 즉,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가를 반성하면서 다시금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길은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사랑도 있고요, 부부간의 사랑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와 교우를 사랑하는 성직자 수도자의 사랑도 있습니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소 주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과연 어떠한가요? 지금의 내 자리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면서 잘 살고 있을까요? 혹시 사랑받기만을 바랄 뿐, 사랑하는 데는 인색한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남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서 손해 보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히 오늘은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한 주일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오늘을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는 말씀을 따라서, 사제성소 증진을 위한 기도와 노력을 당부합니다.
각자의 성소증진을 위해서, 그리고 특별히 사제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가장 큰 행복은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에피쿠로스)
예수님 닮은 목자 더 필요한 세상 -배광하신부- ◎착한 목자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신약성경과 산상설교를 읽게 되면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산상설교는 내가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을 연상시켰고, 내 존재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악에 대한 비 보복, 또는 무저항입니다. 내가 읽은 모든 글 중에서 내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는 글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법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즉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상설교가 그리스도교의 전부임을 보았습니다. 바로 산상설교로 인하여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간디의 이 같은 고백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행일치라는 점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인 우리는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목자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한 양이었던 간디는 비록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이었지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처럼 지상의 삶을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5).
예전 개신교 목사 한 분이 미국에 가서 “불교를 믿는 국가들이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까? 전부 가난한 나라들뿐입니다”라는 말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불자들은 격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거꾸로 이야기하는 모순을 범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 20) 그와 같은 복음적 논리가 아닌 경쟁과 경제의 논리로 반 복음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어떤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 당신의 말씀대로 가난을 사셨고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이 진정 착한 목자이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는 착한 목자 -허영엽 신부- “나 는 허락할 수 없다.”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내 말 에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장남이 신학 생인데 둘째 아들마저 신학교를 가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 이셨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에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밖으 로 나왔다. 안방에서 나와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어 머니가 따라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행여 아버지가 들으실 까작은소리로말씀하셨다.“ 네가잘생각해서원하는대 로 하려무나…”결국엔 어머니의 그 말씀으로 내 인생의 행로를 정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전이렇게말씀하셨다.“ 사제로사는것은너무힘든 일이다. 그래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너를 말린 것이었다. 그러니 오해는 말아라.”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족한 내가 지금까지 사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은인들 덕분이다. 특히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고 굳게 믿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착한 목자’ 라고 소개하신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품삯만을 위해 일하 는 삯꾼들과는 다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 숨까지도 내놓는다.
착한 목자의 삶 -윤석희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착한 목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은 개인이 겪은 수많은 일들이 이어져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의 삶’은 그의 직무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자의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에서는 바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 흔히 그에 대한 대가로 인정을 받거나, 금전적인 이득, 영광 등을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일에 대한 대가로 권세와 권능, 영광을 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참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상하다보면, ‘과연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학생일 때 더욱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하지만 그러한 두려움과 의구심이 들었던 때는 더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답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함은 언제라도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목자와 양의 비유’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물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양’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를 양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양의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양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어리석고 약한 동물입니다. 양은 시력이 나빠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에 물이 있고 어디에 풀밭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없어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으면 억울하게 물어뜯기고 잡아 먹힌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혼자 살 수 있지만 양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양의 생명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렸기에 만일 양이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목자 없는 양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에겐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기에 양은 목자를 의존하고 목자는 양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르고 인도하는 착한 목자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르는 양입니다.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느냐 내놓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이 자기의 소유이므로 그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양들을 위해 목숨 내놓고 양을 지킵니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요한 10,11-13 참조) 양들에겐 삯꾼과 달리 착한 목자가 있기에 먹을 것, 마실 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적들과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양들이 그런 일로 걱정한다면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양들은 철저하게 목자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먹고 즐기며 젖을 만들고 털을 내주고 죽어서 고기를 남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노력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물론이고 죽고 사는 문제도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 문제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목자 없는 양”(마르 6,34)과 같다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보통 양치기를 하는 목자들은 최선을 다해 양을 지키고 돌보는 일은 하지만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인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셨는데, 또다시 ‘나는 착한 목자’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10,14-15)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소리만 들어도 알고, 멀리서 양의 모습만 보아도 자기 양을 구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체질이나 습관이 어떤지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앎입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체험적으로 목자를 알아봅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특히 자기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분간한다고 합니다. “뇌는 소리를 들으면 ‘청각 지도’를 만들어 냄으로써 아무리 많은 소음도 속여서 듣고 싶은 소리의 방향과 내용을 감지해 냅니다.”(경희대병원 이비인후과 심주섭 교수) 이처럼 밤중에 사람이 다가오면 그가 자기 목자인지 아닌지 눈으로 분간할 수는 없지만, 목자의 음성을 듣고 금방 알아챕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나 낯선 사람의 소리까지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의 휘파람과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양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됩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체험적으로 알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압니다.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라고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체험으로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체험으로 알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양인 우리를 마음으로 알고 삶을 통해서 압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내밀하게 나를 아신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면, 다시 말해 내가 그분께 그렇게 내밀하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비로소 우리 역시 그분을 참으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어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분, 삶의 모든 복을 가져다주며 우리를 돌보는 목자이심을 압니다. 목자는 양떼를 돌보는 일을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서 끝까지 돌보는 일을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 약점으로 인해 종종 넘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목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착한 목자의 마음을 아는 다윗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기에 주님과 함께 있으면 부족함이나 결핍이 없다고 만족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놀랍고 엄청난 사랑의 은혜를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사랑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아주 간단한 그러나 풀기는 어려운 문제 하나를 내볼께요.
어린이 한 명, 잘생긴 남자 한 명, 못생긴 남자 한 명, 아름다운 여자 한 명, 이렇게 4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글쎄 우산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들은 빗방울을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우산을 썼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우산이 상당히 커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작아서 그랬을까요?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비가 전혀 오지 않으니 우산이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빗방울을 맞을 일이 없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고정관념 속에 빠져서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지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종종 사제로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저를 부르셨을까요? 신학생 때 저는 ‘내가 과연 사제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을 너무나 많이 가졌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이끄는 목자의 역할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주 말씀드렸지요.
‘주님, 왜 저를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까? 저는 당신의 일을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 중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요. 오히려 보통 사람과 비교했을 때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을 보고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체 때문에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시니까…….
우리 인간들도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의 능력만을 보고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고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한 부분일 뿐이지요. 이처럼 주님께서도 능력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그 자체를 보고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풉시다. 빠다킹신부 관리자와 지도자 -노성호 신부- 만일 관리자나 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면,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 ‘지도자’가 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왜냐하면 관리자(manager)는 ‘올바르게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이고, 지도자(leader)는 ‘어떤 일을 올바르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리자는 올바르게 고정된 틀을 나름대로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서도 신속 정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지도자는 모난 부분을 찾아서 깎고 다듬어 주면서 이곳저곳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관리자보다 일의 처리 면에서 약간 뒤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를 하면서 수하 사람들을 인도해 나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리자보다는 자상하고 인자하며 사랑 넘치는 지도자를 원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려 하고, 함께 잘 해 보려고 하고, 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협력하면서 그 단체를 이끌어 나갑니다. 물론 인간적인 결함을 지닌 사람도 있겠지만, 지도자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지도자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또한 지도자는 사랑과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세상 사람 모두를 ‘양떼’에 비유하신다. 특히 우리 신앙인을 당신께서 직접 먹이고 돌보며 구원의 샘과 초원으로 이끄시는 ‘내 양들’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김정훈 신부-
예수님의 착한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 때마다 염소를 키우는 어느 축산업자가 라디오 방송에 보낸 사연이 떠오른다. 하루는 그가 우리를 청소하다가 어린 염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염소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소에게 주인 대접을 받는다든지 섬김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고, 오히려 주인이 하나에서 열까지 챙기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축을 사랑으로 대하고 돌보는 축산업자의 마음이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본다. 하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겐 세속의 목자가 결코 닮을 수 없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의 희생과 사랑이다. 세속의 목자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가축을 키운다. 따라서 양들의 운명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반면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히 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놓는다. 그러기에 양들은 목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시편 23,4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과 양들(우리 신앙인들)의 이러한 관계를 ‘알다’라는 말로 묘사하신다(10,14). 성경 전통에서 ‘알다’라는 말은 사변적 지식보다는 상호 교환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특히 신앙의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구원 역사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앎을 뜻한다. 곧 이스라엘이 역사 안에서 자신을 위해 구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신지 깨닫는 앎을 뜻한다(판관 2,10;1사무 3,7;이사 60,16 등 참조).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도 그러하다. 곧 착한 목자는 당신 양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고 양들은 착한 목자가 자기네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앎이 실현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된 우리는 피조물을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시는 하느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분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0,15ㄴ).
참 주인이 아닌 삯꾼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10,12-13). 그렇기 때문에 맡겨진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을 무모한 짓이라고 여길 것이다. 양떼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의 참된 주인이며 인류의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며 양들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맡겨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실 것이며, 또 양떼를 위해 목숨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0,17-18).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러한 착한 목자의 사명을 아버지께 받았으며(10,18ㄹ) 그 사명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요한 10,17ㄱ)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기 내어 줌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자기 내어 줌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은 분명 더없이 고귀한 희생이다. 더군다나 죄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속전(贖錢)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을 함께 내어 주신 아버지의 희생은 고귀함을 넘어선 인류 구원의 원인이 되는 희생이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 믿는 이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간혹 이 은총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세적인 명예나 지위 또는 재산 따위를 청하기도 하며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은총을 받지 못한 듯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현세에서 잠시 즐겁고 행복한 삶보다는 영복(永福)을 주시고자 하시며,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착한 목자 예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속의 어떤 시련과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고 목자이신 당신만을 바라고 따르게 하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묵상과 기도
▷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손길(이끄심)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께 감사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저희는 당신 우리의 양들이지만 아직까지는 세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가 때로 세상이 주는 시련과 유혹에 흔들릴지라도 그 허물을 사랑으로 씻어주시고, 마침내 당신 목장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의 사랑과 이끄심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목자 -허영엽 신부- 2차세계 대전중인 1941년 2월 폴란드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한 수도자가 독일 나치군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포로 한 명이 탈출을 하고, 그 벌로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그 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놓고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함께 수감된 수도자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수도자의 행동은 독일군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어갔습니다. 그는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에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입니다. 이 성인은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착한 목자의 모범이 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목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양들을 지킵니다. 양들이 위험할 때 도망가는 목자는 삯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들은 풀을 따라 이동하다가 밤이 되면 들판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목숨을 내놓고 맹수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위험할 때 일수록 양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목자야말로 착한 목자입니다. 이 기준은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할 때 나만 살겠다고 뒷걸음친다면 분명 엉터리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와 양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편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성을 잘 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목자가 양을 잘 안다는 것은 양의 건강상태와 성격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잘 알기에 양들은 믿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인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모든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성소를 위한 주일입니다. 혼탁한 오늘날의 세상은 더욱 더 착한 목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님! 목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가 더 많게 하시고, 목자들이 더 착한 목자가 되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주님,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신부- 돈보스코 성인의 3대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의 전기 「사랑에 강요되어」 (피에트로 리날디 저, 돈보스코 미디어)를 읽고 있습니다. 단 하루라도 리날디 신부님과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더군요.
"정말이지 저는 단 한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제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수도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 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신학생이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신학생이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리날디 신부님은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리날디 신부님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신학생은 다시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는 후에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따뜻한 아버지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저희 수도회에서 거의 성인(聖人)급으로 분류되는 할아버지 선교사 신부님께서 내한하셔서 잠시 동행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인들 특징 중에 하나가 살아계실 때 이미 성성(聖性)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확연한 성성(聖性)을 신자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더군요. 그래서인지 신부님 주변에는 잠시도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여듭니다. 연세가 꽤 드셨음에도 언제나 인기가 절정입니다. 정녕 신부님은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사목자요, 모든 사람들의 연인이셨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서 제 머릿속에 몇몇 선배 신부님들이 떠올랐습니다. 저 같이 '덜떨어진' 사제는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심각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로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친절한 모습, 어린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 세심한 배려, 인자함, 따뜻함, 섬세함, 편안함, 극진한 환대….
그 모든 덕행들을 종합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제 개인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온유와 겸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하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때로 냉정함도 필요합니다. 더 큰 선(善)을 위해서 끊고 맺음도 필요합니다. 따끔한 매도 필요합니다. 엄격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감화시키고, 회심시키는 것은 결국 부드러움이었습니다. 착한 목자로서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부성애더군요. 결국 온유와 겸손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착한 목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주님의 집에 피어난 푸르른 올리브처럼 순결한 착한 목자, 언제나 주님 자비에 의탁하는 겸손한 착한 목자, 아무리 짓눌려도 결코 찌부러지지 않는 강건한 착한 목자, 갖은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힘차게 일어서는 착한 목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 믿고 기쁘게 살아가자” : 인정받은 사람 -김영수 신부 - 인본주의 심리학자 메슬로우(Masla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세 가지 욕구는 생리적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그리고 소속감(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사람은 남에게 인정(認定)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기는데 이를 창조적인 욕구라 했습니다.
인간의 욕구들 중에서 인정에 대한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와 창조적인 욕구의 경계에 있는 욕구로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인정의 욕구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창조적인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도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모든 인간이 지닌 갈망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가꾼다.”(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는 옛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 인정받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남에게 인정을 받고 산다는 것은 사는 보람을 누리는 길이고 살맛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으로 부터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감이 부족한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에 집착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 집착하지 않으며, 타인을 잘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착한 목자의 몫을 다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늑대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지키며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지키시는 튼튼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착한목자는 또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각자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계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을 찾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숨죽여 살아가는 우리를 찾아내시고 우리가 온전해지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계시고 그 양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잘 알고 계시듯이 그분께 속한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들 안에서 먼저 주님의 뜻을 찾는 삶은 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가는 착한 양들의 삶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신 것처럼 그분의 양떼인 우리도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그분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알다’라는 말마디는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서 하나의 실존적 관계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하며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숙한 관계를 통하여 가까워짐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을 통하여 깨닫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착한목자가 양들을 잘 알듯이 양들도 그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을 때 목자와 양은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소‘(Vocation)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이 주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듯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삶은 사는 일에 힘을 얻게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인생을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놀라운 표징을 보고 그들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큰 사랑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삶을 누리게 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착한 목자: 양들을 위한 목자의 깊은 사랑 - 조욱현 신부 -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목자는 양의 무리에 대한 목자의 깊은 배려를 더 강조하고자 한다. 이 목자는 이사야의 "야훼의 종"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네 가지의 기본 사상이 맥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 계시하신다는 점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11-12절). 여기에 나오는 삯꾼은 참 목자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된 목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요한복음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은 아주 중요한 표현 형식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줄 뿐 아니라, 그분의 역할까지 계시해 주는 표현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말씀은 그 역할의 계속성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오늘도 역시 그분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목자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로, 목자와 양들이 서로 안다는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4-15절). 요한계 문헌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니라, 사랑과 체험으로써 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 위에서 돌아가셨던 사랑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가 그 양들을 먼저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15,16)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선택'에 응답할 가능성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당신의 피로써 당신의 양떼를 이루신 것이다.
셋째로, 그분의 양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16절). 이 말씀은 종족과 종교의 모든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을 포용한다. 그분의 구원업적을 인식하고 복음을 들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분의 양떼가 되고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거절을 당하게 된다.
넷째는 예수께서 참 목자이시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봉헌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17-18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무상의 사랑이 더욱 빛나고 있다.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것, 다시 얻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하신다. 이 명령의 의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순명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스스로 당신을 봉헌하는 것은 사랑과 권능의 최고행위로 나타나는 부활과 연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의해 잠시 찢겨진 아들을 영광 중에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입증해주는 사건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서공석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된 신앙 문서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맺음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20,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얻게 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하여 남겼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믿고 있던 바를 그분의 입을 빌려 말하는 양식으로 기록된 오늘의 복음입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인들의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해석입니다. 죽음은 부활에로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결과였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친숙한 인물입니다. 목자는 양떼의 길을 인도하며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함께 삽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신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11). 자상한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가로 부르는 시편은 말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신다...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다.”(23, 1-3). 은혜로운 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초기 교회는 목자라는 호칭을 예수님에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고 믿는 신앙인들이 그분의 삶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사용한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살아 계실 때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목자가 착한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 유대교 실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회당에서 고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3,5)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는 말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분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착한 목자와 대조하여 말하는 것은 삯꾼입니다. 삯꾼은 양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한 몸 살 궁리만 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그분은 엄하게 판단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라 상상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상상하면서, 교회 안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자세는 삯꾼의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셔서 자상하게 사람들을 돌보아주시지만, 삯꾼의 근성을 지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위신과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높으신 분, 두려운 분, 당신 영광을 찾는 분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하느님은 겸손하게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제 질서대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횡포하지 않으시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착한 목자로 세상 안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가 행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전쟁과 각종 대량 학살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학대로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소위 위대하다는 문화유산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그런 것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수많은 민초들이 강제 동원되어, 뼈아프고 가슴 무너지는 사연들을 각자 가슴에 안고 그것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구실만 있으면, 자신을 과시하고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들을 이용합니다. 입으로는 봉사를 외치지만, 기회만 있으면 봉사를 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왕이신 예수님,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즐겨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우리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삯꾼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배워 구원되어야 하는 삯꾼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는 생명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삯꾼은 이해타산을 앞세우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찾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고 섬기는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노력하면 조금씩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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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