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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묵상글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허물고 세우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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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허물고 세우는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인데
건물로서의 대성전의 의미를 기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성전인 우리와 우리 공동체의 의미도 기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사람들이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얘기하자
당신의 몸인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렇지만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나라는 성전이나 공동체라는 성전이
그 안에 하느님께서 계셔야지만 성전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고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 안에 계셔야 할 하느님이 아니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폭격받거나 사람들이 허물지 않아도
무너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기에 폐허가 되고 무너진 거지요.
그러니까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성전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성전에 오히려 아니 계시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은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고,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처럼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려면
프란치스코처럼 성당을 재건하기도 해야 하지만
성당 재건에 앞서 무너진 인간 성전들을 재건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사실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망하고 무너지는 곳을 보면
그곳에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시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모여 살고,
그러니 자기들끼리 혹 사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미워하고 싸움박질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끼리,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니,
사랑의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 아니 계신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는 셈이요,
그러니 당연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설 수밖에 없게 되고 망하게 되겠지요.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성전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무너지기 전에 우리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허물어라! 다시 세우겠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허무는 것이고
이렇게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싹 허물어버릴 때 오늘 주님처럼
우리도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요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이 과감한 작업을 주님과 프란치스코처럼
용감히 수행하라고 촉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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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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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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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전주의 한옥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중앙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봉천동성당에 다녔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첫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당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 이해할 것입니다. 성당의 기능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예배의 가장 큰 형태는 ‘성체성사’로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밖에 다양한 전례를 통해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혼배, 장례미사가 있고, 성모의 밤과 같은 전례가 있습니다. 학생 때 성당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당에서 예술제가 있었고, 성당에서 교리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먼저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당은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론’을 배우면서 성당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성당은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매일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위로하는 미사가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람들은 삭막한 광야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묵상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위령의 날에 교구는 용산 성직자 묘지와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주일미사 참례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걱정합니다. 교우들이 다시금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배와 친교의 장소인 성당도 필요합니다. 경건함과 엄숙함이 드러나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많은 예술 작품이 영적인 충만함을 드러내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제도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독선과 교만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십자가와 나눔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되어야 합니다.
“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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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소가 자는 곳을 외양간이라 하고 말이 자는 곳을 마구간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거룩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 안에 장사하는 사람, 음식과 술을 마시는 사람, 동물을 사고파는 사람 등, 도저히 그곳이 성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17년 전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로 하고 하룻밤을 성 밖 이스라엘 지역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저녁 팔레스타인 지역인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조용할 줄 알았던, 너무나도 깨끗하고, 거룩할 것 같았던 그 성안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상인으로 가득했고, 먹고 마시는 사람, 우는 아이, 소리치는 사람 등을 보았습니다. 겉에서 보는 예루살렘의 모습과 그 안에서 보는 모습은 달랐습니다.
그 후 저는 이런 묵상을 간혹 합니다.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 말입니다. 가끔은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모습 말입니다.
겉만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내 모습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인지, 가끔, 아니 아주 자주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은 하느님과 여러분만 아십니다. 겉과 속 모두 주님 닮은 모습인가요? 정반대의 모습인가요?
오늘은 가만히 내 안에 성전을 바라보세요. 내 안에 성전 말입니다.
단호박 쉐이크
요즘 아침으로 먹는
단호박 쉐이크
우선 단호박을 찝니다.
간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을 이해 준비합니다.
아침이 왔습니다.
믹서기에 주먹만한 단호박 반개를 넣습니다.
우유를 한컵 넣고 꿀도 살짝 넣어봅니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믹서의 버튼을 누릅니다.
윙윙 쉐킷쉐킷~~~~~~
아침 식사가 완성됬습니다.
단호박 쉐이크~~~~~~~~
기호에 따라 견과류도 넣어보세요.
아침 시간을 든든하게 만들어 줄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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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흥청대는 술 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 아오스딩 성인은 그의 책,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선명한 빛이 자신에게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십니다. 저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는 말씀에 크게 감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악이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말씀이라면서 세상 것만을 추구하고 세상 것만을 입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다의 높은 염도로 인해 물 위로 잘 뜰 수 있었고 그래서 신나게 수영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너무 신나게 놀았을까요? 갑자기 다리에 쥐가 올라왔습니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청난 물을 마셨지만 겨우 해안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구명조끼의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수영 잘하니까 답답한 구명조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꼭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입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너무 많은 악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주님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기가 어렵고 힘들다면서 그냥 세상을 입겠다고 합니다. 구원의 열쇠는 주님께만 있는데, 세상 것만을 따르겠다는 ‘어리석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즉, 하느님을 입고 세상의 악을 막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집인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환전하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입을 수 없고, 세상 것만을 입게 됩니다. 그런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와 멸망을 예고하시지요. 참된 성전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성령으로 충만하신 그분의 인격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입지 않고, 세상 것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입게 되는 특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성전도 세상 것이 가득하게 되면 그 거룩함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입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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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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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삶의 중심인 성전-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라테라노에 대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할 때 함께 세워준 성전으로,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교회가 되었습니다. 1307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 까지 역대 교황의 주거지였으면 이곳에사 대관식, 착좌식을 했고 이곳에 묻혔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총본산으로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은 12세기부터 바로 오늘 11월9일에 지냈고, 후에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인 이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기록한 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서 이날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대성전 축일이면 떠오르는 다음 시편 둘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84,2-3)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녘에 구원하시네.”(시편46,5-6)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성전입니다. 이런 중심이 없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보이는 가시적 중심인 성전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성전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전을 사랑하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듯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전의 타락과 속화에 열화같은 분노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로 세상을 성화해야할 성전이 부패하고 속화된다면,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상실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어지럽히는 상인들과 환전꾼들을 쫓아내신후 가난한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타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킬 것입니다.”라는 시편 말씀을 연상하며 예수님을 이해하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가시적 성전이 아닌 불가시적 성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뒤에야 깨닫고 믿게 된 제자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몸이 참 성전이 된 것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바로 거기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가 없는 성전이라면 그 보이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할뿐 쓸쓸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잘 드러내는 미사중 감사송 경문이요 가톨릭 교리서의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니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진짜 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지체들인 우리로 이뤄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정화에 날마다 거행하는 성전 미사전례은총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다음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말씀이 심오하고 참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 있는 돌”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거룩한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교리서1179)
놀라운 것은 성전의 삼중(三重) 차원입니다. 보이는 1.가시적 성전이요, 2.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요, 3.각자 개인의 성전입니다. 셋이자 하나인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이 끊임없이 세상을 살리고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바로 에제키엘서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은 그대로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물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서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창세기 아담의 죄로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실낙원에서 복락원을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영적 양식이자 영적 약이 되는 말씀과 성체의 은총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입니다. 묵시록에서 다시 반복되는 우리 궁극의 희망인 천상고향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있어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묵시22,1-2ㄱ)
우리는 황송하게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다달이가 아닌 날마다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무엇보다 놀랍고 은혜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며 용기백배 힘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얼마다 거룩하고 소중한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인지요!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정화는 비단 보이는 성전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뿐만 아니라 내 자신 성전정화도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성전을 돌보듯 내 심신의 성전을 잘 돌보는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은총과 더불어 사랑의 수행을 통해 날로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는 우리 자신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성체성사 미사은총입니다. 날마다 정성껏 온마음과 온정신과 온힘을 다해 정성껏 거행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함으로 주님을 닮아감이 성전정화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미사때 마다 오늘 영성체후 기도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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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 정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네 삶의 모든 순간에
불신의 너를 허물어라
믿음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불신의 나를 허물리니
믿음의 나를 세우소서
네 삶의 모든 순간에
절망의 너를 허물어라
희망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절망의 나를 허물리니
희망의 나를 세우소서
네 삶의 모든 순간에
미움의 너를 허물어라
사랑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미움의 나를 허물리니
사랑의 나를 세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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