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웃 위한 ‘당신의 자리’…종로구, 쉬어가는 벤치 보급
종로구 곳곳에 ‘당신의 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한 ‘벤치 더 놓기 프로젝트’ 덕분이다.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19 상황이 길어지면서 야외에서 비대면으로 휴식을 취할 공간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또한 어르신들과 장애인, 임산부 등이 이동 중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로구 곳곳에 늘어나고 있는 ‘당신의 자리’는 1~ 3인용까지 다양하게 설치되고 있다. 사진은 청운공원의 업사이클링 벤치 ⓒ이선미
얼마 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르신이나 임산부, 무거운 짐을 들거나 몸이 아파서 불편한 경우에는 그 짧은 시간이 무척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도 적절한 곳에 벤치가 놓이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어르신들의 이동이 많은 종로5가 인도에도 벤치가 놓여 있다. ⓒ이선미
독특한 점은 구청에서 운용하는 '공공형'과 기업과 시민들의 참여로 설치하는 ‘기부형’을 같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로구는 '쉼이 있는 종로'를 목표로 벤치 더 놓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시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기부를 받고 있다.
창덕궁 앞 돈화문로에 공공형 벤치들이 놓여 있다. ⓒ이선미
공공형은 현재 창의문로와 돈화문로, 낙산공원과 숭인공원 등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 앞 돈화문로는 여행자들이 많은 길이다. 크고 작은 벤치는 시민들이 잠시 앉아 쉬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창덕궁 앞 돈화문로는 여행자들이 많은 길이다. 벤치는 잠시 앉기도 하고 짐을 내려놓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선미
벤치 더 놓기 프로젝트에 공감한 기업들이 협업한 ‘작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청운공원 등에 설치된 '업사이클링(Upcycling) 벤치'는 화장품 회사 아모레퍼시픽이 기부한 화장품 플라스틱 공병과, 삼표그룹이 기부한 초고성능 콘크리트를 원료 등으로 만들었다. 벤치의 디자인과 제작은 '디크리트'라는 업체가 맡았다고 한다. 기업들의 협업, 환경을 생각하자는 취지가 담겨 더 의미 있는 기부가 되었다.
청운공원에 설치된 업사이클링 벤치는 세 기업이 협업해 만들어 기부했다. ⓒ이선미
청운어린이집 앞에도 벤치가 마련되었다. 호젓한 길 한 켠 나무 아래 멋진 디자인 벤치가 놓여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이를 기다리면서, 잠시 앉아 나무그늘을 즐기는 여름날이 그려져 미리 상큼했다.
청운어린이집 앞 길에 디자인 벤치가 마련되었다. ⓒ이선미
고즈넉한 길가 주변과 어울리는 벤치다. ⓒ이선미
벤치의 이름인 ‘당신의 자리’는 ‘당신이 기부하고 당신이 사용하는 의자, 이웃(당신)의 편안한 쉼 공간’이라는 뜻이다. 설치 장소와 기부액에 따라 1인용부터 3인용까지 제작되며, 기부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벤치에 부착돼 시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는 부부의 기부부터 다채로운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특별한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 앞에 심플한 돌벤치가 놓여 있다. 기부자의 덕담도 쓰여 있다. ⓒ이선미
삼청공원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벤치들이 마련되었다. 트롯 가수 장민호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팬들이 기부한 것이다. 젊은 부부가 벤치에 앉아 있어서 의미를 알려줬더니 지인이 열성팬이라며 알려줘야겠다고 사진을 찍었다.
산책 나온 시민들이 가수 장민호 팬에게 알려줘야겠다며 사진을 찍고 있다.ⓒ이선미
“빨리 산책 나오시라고 해야겠어요. 정말 좋아하시겠는데요?”
요즘은 남녀노소 경계없이 트로트 열풍이 불어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면 삼청공원에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늘어날 것 같다.
벤치에는 기부자의 메시지가 부착된다. ⓒ이선미
종로구뿐 아니라 강남구에서도 ‘세상의 모든 벤치’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4월 30일까지 테헤란로에 설치할 벤치를 공모하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기업과 시민들의 참여로 테헤란로에 보행자들의 휴식 공간을 늘리는 이 공모전은 '당신의 벤치로 테헤란로에 쉼표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도심 곳곳의 벤치들이 분주한 시민들의 일상에 쉼을 선물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남구에서도 ‘세상의 모든 벤치’를 진행하고 있다. ⓒ강남구청
영국의 트레킹 코스인 CTC(Coast to Coast)에서는 종종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기리는 ‘의자’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장치로 이런 전통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 의자에 앉으면 어떤 소통이나 교감이, 혹은 짧은 축복이 오가게 될 것도 같다.
종로구에는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다. ⓒ이선미
종로구 곳곳에 시민들의 추억이 담긴 벤치가 늘어나고 있다. 누군가의 기념일, 축하할 일, 함께 기억할 만한 순간 등을 위해 마련한 벤치에 앉는 건 꽤 신선한 경험이다. 메가시티 서울은 이제 굳이 거대한 랜드마크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시민들이 나누는 이야기, 시민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가 서울의 이미지가 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