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임진각에서 열린 ‘300만 황해도민 자유풍선 날리기’ 대회에서 이민복씨가 북한에 날려 보낼 풍선에 가스를 넣고 있다. |
사실 이민복씨의 ‘사무실’이란 곳부터가 뜻밖이었다. 그가 서울 교외의 지명을 댈 때만 해도, 초라하더라도 시골 상가빌딩에 사무실 하나 얻어 쓰는 정도는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찾아가 보니 도시에서 교외(郊外)로 밀려난 영세민들이 사는 검은 천을 덮은 비닐하우스였다. 문 앞에는 법원에서 보낸 ‘우편물도착안내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민복씨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의 땅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고 있는데, 땅 주인이 나가라네요.”
비닐하우스 옆에는 낡을 대로 낡은 승합차 두 대가 서 있다. 그중 한 대에는 주황색 고압가스통과 비닐전단을 잔뜩 담은 전단꾸러미가 가득했다. 이민복씨는 “백령도에는 컨테이너 사무실 하나와 5톤, 2.5톤짜리 트럭이 있다”고 했다.
―차가 네 대나 있고, 부자네요.
“그렇죠? 몇몇 교회에서 폐차 직전에 있는 것들을 넘겨주거나, 교회에서 모금해 준 돈으로 중고차를 산 겁니다. 사실 주(主)사무소는 백령도인 셈이죠. 여기 있는 차량들은 오늘 같은 날 쓰는 행사용이고….”
보안경찰 6명이 24시간 경호
이민복씨가 창고 겸 사무실로 쓰고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비닐전단이 든 꾸러미를 밖으로 나르고 있다. |
“전 퍼포먼스는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황해도 분들이 행사를 한다고 해서 도와드리기로 한 겁니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 그에게 “저의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에서 내려오셨다”고 했더니 반가워했다.
“‘신천’은 제 풍선 날리기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북한은 ‘미군이 6ㆍ25 당시 신천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학살기념관까지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는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문에 신천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이 6ㆍ25 기간 중 미군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천학살사건’은 사실은 북한군이 밀렸다가 다시 복귀하는 과정에서 신천지역의 좌익세력과 기독교인 등 우익세력이 죽고 죽인 보복극이었어요. 미군은 그 근처에 있지도 않았고요.”
이민복씨는 조용히 풍선을 날린다. 언론에 알리지도 않는다. 조갑제닷컴(www.chogabje.com) 정도가 그의 활동을 꾸준히 보도해 왔다. 조갑제(趙甲濟) 전 <월간조선> 대표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이민복씨는 사람들이 보건 안 보건 혼자서 북한에 풍선을 보낼 방법을 꾸준히 연구하고, 풍향(風向) 등을 면밀히 검토해서 하나라도 제대로 북한에 보내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풍향이야 어떻든 떠들썩하게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풍선 보내기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지요.”
이민복씨는 “날이 더워서 아침 일찍부터 일해야 한다”면서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전단꾸러미들을 가져다 승합차에 싣기 시작했다.
이민복씨에 의하면 12m 크기의 대형풍선 하나에 7.5㎏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7.5㎏짜리 전단꾸러미에 실을 수 있는 양은 소형전단 6만 장, 신문 크기의 전단 1500장가량. 풍선으로는 전단뿐 아니라 볼펜, 라이터, 스카프, 스타킹, 라디오, 아스피린 등 구제품(救濟品)을 실어 보낼 수 있다.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올라왔다. 그를 보호하는 경찰서 보안과 형사들이었다. 웃으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눈 이민복씨가 말했다. “지금이야 저를 보호해 준다고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찰은 ‘원수(怨讐)’였어요. 어떻게든 풍선 못 날리게 하려고 방해만 하고….”
보안과 형사들에 의하면, 경찰이 이민복씨 보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0월부터였다고 한다. 대북 전단에 대해 북한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민복씨에 대한 위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3교대로 6명의 경찰이 그를 24시간 경호하고 있다.
평양까지 풍선 날아가 김정일 大怒
이민복씨가 비닐하우스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
그가 숙식을 하는 방에는 휴전선 이북 지역이 일부 포함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작은 책상 위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이민복씨가 말했다.
“사실 오늘 풍선 날리기를 하는 임진각은 풍선을 북한에 보내기에는 나쁜 곳이에요. 그곳은 남쪽으로 바람이 불어, 풍선이 인근 우리 지역에 떨어지기가 쉬워요.”
그는 젓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면서 “김정일(金正日)은 참 운이 좋다”고 말했다.
“보세요. 동서는 바다로 막혀 있고, 남쪽은 휴전선이 철통같이 가로막고 있어요. 북쪽은 같은 사회주의를 하는 중국이고….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갈 수 없는 섬이에요. 그나마 풍선이 있지만, 휴전선이 S라인이다 보니 풍향을 고려하다 보면 북한에 풍선 날리기에 적합한 곳이 별로 없어요.”
―풍선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곳은 어딥니까.
“‘백령도, 연평도가 가장 좋아요. 철원도 좋고…. 그다음은 강화도. 하여튼 임진각이 가장 안 좋아요. 이 노트북으로 수시로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점검하다가, 북으로 풍선을 보내기에 좋은 바람이 분다 싶으면 바로 달려나갑니다. 특히 평양으로 풍선을 보내기 좋은 바람이 불면, 아무리 피곤해도 기어서라도 나갑니다.”
―평양까지도 풍선이 날아갑니까.
“2005년 풍선사역(使役·기독교인인 그는 대북 풍선 날리기를 ‘풍선사역’이라고 표현했다)에 참가했던 호야선교회 이필생 목사와 김경자 목사가 그해 10월 중국에 들어가 북한에서 나온 사람들을 만나 보았더니, ‘강원도에 엄청나게 삐라 소문이 나 있고, 평양 대동문에 풍선이 걸려 난리가 났었다’고 하더랍니다. 그해 11월 한 탈북자의 처남이 무역일꾼으로 중국에 나와 전화를 했는데 ‘탈북자들이 삐라를 보낸 것이 평양에까지 떨어져 김정일이 미쳐 날뛴다’고 했답니다.”
북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민복씨에 의하면, 그해 10월 북한으로 풍선을 날려 보내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중국에 있는 지하교인이 이메일로 “이민복 선생을 잡으려고 2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알려와 그만둔 적이 있다고 한다.
북에서 ‘6ㆍ25는 남침’ 전단 보고 의문 갖기 시작
비닐하우스 바닥에 깔린 비닐전단과 DVD. 비닐전단 사이에 보이는 과자봉지도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할 때는 중요한 선전수단이 된다. |
“1995년 한국으로 온 후, 기왕이면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창립 멤버로 참여해 한동안 열심히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 등 많은 사람이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들더군요. 김성민씨는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어 잘하고…. 그런 것을 보면서 ‘남과 좀 다른 일, 내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궁리하다가 풍선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민복씨가 풍선을 통한 전단 살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체험 때문이다. 북한 과학원 연구원으로 있던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북한에도 철원이 있음)으로 출장을 갔던 그는 남에서 보낸 전단을 발견했다.
―어떤 내용입니까.
“6ㆍ25는 북침(北侵)이 아니라 남침(南侵)이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내용이 설득력이 있던가요.
“전단 가운데 ‘6ㆍ25가 남침이라는 사실은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흐루쇼프의 회고록이나, 6ㆍ25 당시 귀순한 이학구 대좌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어요. 흐루쇼프는 북한에서 수정주의자라고 낙인 찍혀 있는 사람이고, 이학구의 증언은 ‘남으로 넘어간 놈이 살자면 무슨 소린들 못했을까’ 싶었거든요. 다만, ‘북침이라면 어떻게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겠느냐?’는 물음을 보니 ‘이상하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복씨는 그 후 양강도 김정숙군(郡)으로 출장을 갔을 때, 팔로군 출신 노인을 만나자, 슬그머니 물어보았다고 한다.
“‘6ㆍ25가 북침 맞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아바이 같은 분들이 조국해방전쟁 때 싸워주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서 전쟁 얘기를 해 달라고 했죠. 국공(國共)내전에 참가했다가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6ㆍ25를 치렀다는 그는 신이 나서 무용담을 늘어놓더군요. ‘전쟁 직전 양양ㆍ속초로 이동했다가 6월 25일이 되자 물밀 듯 쳐내려 갔다’는 얘길 들으니, ‘아, 남침이 맞는 얘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복씨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북으로 보내는 전단에 한국의 발전상 등을 소개한 후, 끝 부분에는 ‘이 이야기가 맞는지는 주위의 조선족이나 교포들에게 조용히 물어보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인다”고 말했다.
‘神話’ 깨뜨리기
이민복씨가 풍선을 통해 보내는 전단에 담는 내용은 수령우상화와 혁명주의, 선군(先軍)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는 “이것이 북한정권의 정수리를 때리는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수령우상화를 비판하기 위해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나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의 허구성, 김정일의 여자관계, 3대 세습의 부당성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ㆍ25나 신천학살사건의 진실을 전단에 담은 것도 혁명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김정일의 여자관계도 건드립니까.
“그렇다고 자극적인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인기 높던 여배우 성혜림, 고영희가 왜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지게 됐을까?’라는 질문부터 던지는 거죠. 그런 다음 ‘그들이 김정일의 여자가 됐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엮어 나갑니다. 그러면 북한주민들도 ‘아, 그렇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민복씨는 선군정치의 허구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지스함, 순항미사일, K-2 흑표전차(戰車) 등 국군 보유 무기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단도 보낸다.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가난하기는 해도 군사력은 최고 수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마저 무너뜨리면 북한 주민들을 지탱하는 신화(神話)는 모두 무너지게 되는 거죠.”
이민복씨는 북한에 있을 때 결혼상대로 소개받아 만났던 아가씨 얘기를 했다.
“그녀는 함북 화성정치범수용소 내 교사였어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정치범들은 사소한 규정위반에도 가혹한 처벌을 받는데, 그중 하나가 담배꽁초를 줍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담배꽁초 종이 속의 글자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북한에서는 물자가 귀하다 보니 신문종이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경우가 많아요. 담배를 태우고 난 후 남은 종이에 적힌 글자라도 읽고 싶어하는 거죠. 반세기 이상 밀폐된 속에서 사는 북한 사람들은 담배꽁초를 줍는 수용소 수용자들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때 처녀교사는 ‘정치범들에게 가장 불쌍한 것은 굶주림보다 희망이 없는 삶’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북한 주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민복씨는 “한 사회를 폐쇄시켜 놓으면 사람들은 바보같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소식이 알고 싶어지고, 외부 소식을 알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구전(口傳)문화가 발달했다”고 말했다.
최효원씨와 박창근씨
이민복씨와 최효원씨(왼쪽)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이민복씨가 1회용 접시에 부착한 DVD를 내밀었다. 이민복씨는 “일반 전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어요. 가히 혁명적이죠”라고 자랑하면서 “파손을 막기 위해 1회용 접시를 붙였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DVD를 볼 수 있나요.
“중국에서 밀수입한 것들이 제법 됩니다. 회령 같은 곳에서는 주민의 80%가 DV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훌쩍 10시를 넘어섰다. 이민복씨가 출발을 서둘렀다. 그가 모는 승합차에 동승하고 싶었지만, 운전석 옆자리까지 짐이 가득 차서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경호하는 경찰관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을 붙였다. 눈을 뜨니 어느덧 임진각에 도착하고 있었다. 황해도민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현수막을 거는 등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민복씨가 차에서 내리자, 노인 두 명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민복씨가 대표로 있는 기독북한인연합과 대북풍선선교단 고문 최효원(崔孝元ㆍ예비역 육군대령)씨와 모 교회 장로인 박창근(朴昌根)씨. 두 사람 모두 이민복씨가 하는 일에 공감해 그를 돕는 열혈 노인들이다.
이민복씨는 최효원씨에 대해 “내게 정신적 지주(支柱)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전에 철원에 풍선 날리러 갔을 때에도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옆에서 도와주셨어요. 85세나 된 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저 아바이도 저렇게 하시는데…’하는 생각에 저도 힘이 나더군요.”
박창근씨는 작년에 경기도 포천 산정호수에 갔다가 거기서 이민복씨가 보낸 전단 뭉치를 발견하고, 이민복씨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그의 일을 돕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 “이민복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착한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네. 한국에 온 지 15년이나 지났는데, 거짓말 같은 우리 사회의 나쁜 요소들에 물들지 않았어요. 사람이 참 맑아요. 신앙적으로도 자리를 잡은 것 같고….”
타이머는 선풍기 타이머 응용해 개발
전단꾸러미에 장착된 타이머. 선풍기 타이머를 응용한 것이다. |
―바람이 어떻습니까.
“좋지 않아요. 황해도민회에서는 풍선을 30개 날려 보내자고 하는데, 안되겠어요.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5개만 날려 보내고, 철원으로 이동해서 제대로 날려 보낼 생각입니다.”
이민복씨는 승합차 지붕 위를 오르내리며 풍선에 가스를 넣었다. 허리에 찬 가죽벨트에는 가위, 니퍼, 펜치, 송곳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옷은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그가 전단꾸러미를 풍선에 매달자, 황해도민회 관계자들이 망배단(望拜壇) 앞에 마련된 단상으로 옮겼다. 작업을 하던 이민복씨가 소리쳤다.
“저, 저런, 풍선 치워요. 소나무 곁에서 치워요.”
바람이 불면 풍선이 소나무 가지에 찔려 터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도민회 관계자들이 얼른 움직이지 않자 이민복씨가 달려가 풍선을 단상 중앙으로 옮겼다.
다시 승합차 앞으로 돌아온 이민복씨는 풍선에 타이머를 부착하기 시작했다. 이민복씨에 의하면,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풍선에 사용하는 타이머는 화학식, 기계식, 전기식, 세 가지가 있다. 전에는 화학식을 많이 사용했는데, 지금은 기계식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이 타이머는 0~10시간까지 시간조절이 가능하다. 풍선이 날아갈 거리 등을 감안해 타이머를 세팅해 두면, 해당 시간에 풍선이 터지면서 전단이 뿌려지는 것이다.
이민복씨는 “화학식 타이머를 사용하는 풍선이 일반폭탄이라면, 기계식 타이머를 사용하는 풍선은 스마트폭탄인 셈”이라고 말했다. 기계식 타이머를 사용하면서 풍선이 터지는 시간의 정확도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높아졌다는 얘기다. 그는 “풍선을 많이 날려 보내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골고루 날려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민복씨는 “이 타이머는 선풍기의 타이머를 응용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선풍기요.
“타이머 개발을 위해 머리 썩힐 필요가 뭐 있어요? 있는 거 활용하면 되는 거지. 이거 만드느라고 선풍기 4~5대는 망가뜨렸어요.”
“나한테 30억원을 주면 김정일 자빠뜨리고도 남을 것”
축사를 하는 안무혁 황해도중앙도민회장. |
“내가 2005년 북한으로 풍선을 날려 보내기 시작한 이래 북한은 22차례나 풍선 중지를 요구해 왔어요. 특히 기계식 타이머를 사용하면서 살포 정확도가 높아지자, 북한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2008년 10월 북한이 돌연 남북회담을 제의해 온 것도 풍선 때문이었어요.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대화하자고 해도 안 나오다가 풍선 때문에 자기들이 먼저 회담 제안을 한 것이죠.
옛날에 국방부는 풍선 보내는 데 30억원씩 썼다고 하던데, 나한테 그 돈을 주면 김정일 자빠뜨리고도 남겠어요. 3억원이라도 있으면 정말 많은 일을 할 텐데….”
그는 “풍선은 정말 무궁무진하다”면서 “미국이 대북방송은 지원해 주면서 풍선은 지원해 주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안무혁(安武赫) 회장, 안응모(安應模) 전 내무부 장관 등 황해도중앙도민회 관계자들이 속속 도착했다. 11시40분, ‘300만 황해도민 자유풍선 날리기’ 행사가 시작됐다.
안무혁 황해도중앙도민회장은 축사에서 “오늘 우리가 이 풍선을 날려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전 이북 7도(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에 미수복 경기도와 강원도를 포함한 개념) 도민들, 더 나아가 전 국민이 풍선 보내기에 참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민복씨의 말에 의하면, 이 행사는 안응모 전 장관이 황해도 벽성군 출신 인사들 모임에서 “대북 풍선 날리기를 해보자”고 얘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고 한다.
차례로 대형 풍선 두 개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참석자들은 오색 풍선을 함께 날려 보냈다. 하늘 높이 올라간 풍선 두 개가 그리 오래지 않아 하늘에서 터지는 것이 보였다. 나머지 풍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민복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풍선 두 개는 도민회 관계자들이 서두르는 바람에 미처 타이머를 부착하지 못했어요. 나머지는 곧 터지게 세팅을 해 놨고요. 여기는 어차피 퍼포먼스용이었어요.”
기다리고 있던 MBC 기자가 이민복씨를 인터뷰했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 나왔다고 했다. 최효원씨는 “MBC가 이렇게 취재를 나오는 걸 보니 달라지는 모양”이라며 좋아했다.
김일성에게 집단농 해체 건의 편지
이민복씨가 식사를 기다리면서 노트북으로 철원지역의 날씨를 알아보고 있다. |
“여길 보세요. 여기가 임진각이고, 구름이 이 방향으로 형성돼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이곳은 안 된다고 한 겁니다. 철원은 풍향이 좋네요. 내일도 좋고…. 철원은 내일 가도 상관없겠어요. 오늘은 몸이 좀 힘드네요.”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월간조선> 기자냐?”면서 다가왔다. <월간조선> 6월호 별책부록 <60년 전 6ㆍ25는 이랬다>에 증언을 해 준 김용일(金鎔一) 전 대한체육회 상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었다.
이민복씨의 승합차 운전석 옆 좌석에 있던 짐이 많이 줄었다. 그 짐들을 뒤로 옮기고 이민복씨 옆자리에 올라탔다. 가스통을 가득 실은 차는 무겁게 움직였지만, 이민복씨는 행사를 마쳐서인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전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풍선을 날려 보내지만 차는 이렇게 무겁다는 것, 저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없지만 가장 권력이 센 김정일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어떻게 떠나게 됐습니까.
“김일성에게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농업을 해체하고 개인농을 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편지를 냈습니다. 과학원 과학지도국장이 내려왔는데, 제 주장이 ‘반동사상’이라더군요. 굶주리고 있는 인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뻔한 방안을 외면하는 수령에 대해 분노하게 됐습니다. 그게 북한체제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됐죠.”
―그런 건의는 어떻게 하게 됐는데요.
“강냉이(옥수수) 종자 실험을 하면서 작은 뙈기밭을 운영해 봤어요. 그런데 대강 계산해도 협동농장보다 3~5배는 생산성이 높은 거예요. 협동농장의 경우 1평에 옥수수를 30대 정도 심으면 가을에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은 3분의 1밖에 안돼요. 농민들이나 노력동원된 사람들이나 자기 것이 아니니까 김매기고 뭐고 대강 대강하기 때문이죠.
공장은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농업은 그게 불가능해요. 생산활동이건 사회활동이건 마음에서 우러나 일을 해야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라면봉지 보고 충격”
북한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그는 중국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중국 창바이(長白)현으로 넘어갔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조선족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가 한 얘기 중에 특히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차를 타고 가다 코를 푼 종이를 무심코 창밖으로 던졌는데, 이걸 본 친척이 조용히 차를 후진한 후 휴지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더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남조선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아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남쪽 친척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조상 묘소를 찾아보고 가야 하지 않느냐’고 강권해서 성묘에 나섰는데, 산소로 가는 길에 나무가 우거져서 무서웠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는 ‘남조선에는 민족전통이 살아 있구나’ ‘남조선은 북조선과는 달리 산림이 울창하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남조선에는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남쪽 사람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하는 사소한 데서 남한의 우월함을 깨달았던 그는 그때의 경험을 풍선 보내는 데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풍선으로 전단을 보내면서 과자나 라면 봉지를 함께 날려 보냅니다. 라면봉지를 보면 조리해 먹는 법이 그림과 함께 자세히 소개돼 있잖아요? 제품에 이상이 있으면 교환해 준다는 안내문도 적혀 있고….
이런 건 북한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얘깁니다. 북한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데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웅평씨도 바닷가에서 과자봉지를 주운 것이 월남한 계기가 됐다고 하잖아요? 버리는 라면봉지, 과자봉지는 여기서는 쓰레기지만, 북한으로 보내면 금싸라기입니다.”
1990년 11월, 그는 압록강을 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중국국경경비대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넘겨졌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심문을 받으면서 ‘농업과학자로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농업기술과 종자를 얻으려고 국경을 넘었다’고 우겼습니다.”
―그게 통하던가요.
“아무리 내 행적을 뒤져보아도 문제 삼을 만한 것이 없자, 내 행동을 ‘과잉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 내리더군요.”
덕분에 그는 보위부 감옥보다는 한결 느슨한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한국의 경찰) 소속 집결소(감옥)로 이감됐다가 석방됐다. 그는 석방 3개월 만인 1991년 6월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다시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민복씨는 하바롭스크와 모스크바의 한국인 교회를 전전하면서 한국행을 노렸다.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도 이때였다.
살 통통한 한국죄수들 보고 “굶어죽진 않겠다” 생각
이민복씨가 승합차 위에 올라가 풍선을 점검하고 있다. |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한국인 선교사와 함께 한국대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사관에서는 망명경위서만 받고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1년만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그것은 빈말이었다. 탈북자들을 추적하는 북한 기관원들을 피해 노숙자 생활도 했고, 북한에서 망명한 전직 북한고위인사에게 의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가 돌아간 곳은 교회였다.
여기서 이민복씨는 황성준(黃晟準) 전 <월간조선> 기자와 만났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강사로 있으면서 러시아 내 벌목공(伐木工) 등 탈북자(脫北者)들의 실태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던 황 전 기자는 모스크바에 있는 교회에 다니던 대학 동창을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이민복씨 등 탈북자들의 사연은 <월간조선> 1994년 3~4월호를 통해 집중 보도됐다.
이 보도 때문에 신변이 위험해진 가운데 미국 등 외국 기자들도 그를 찾아왔다. 미국 기자에게 “나처럼 국제미아가 된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호소했더니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난민신청을 하는 방안을 알려줬다. 그는 캐나다 국적인 송광호 기자, 미(美)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는 UNHCR사무소를 찾아갔다. 탈북자가 UNHCR을 찾아간 것은 그가 최초였다. 이를 통해 한국행 길이 열렸지만, 그것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이민복은 죽어도 못 받는다’고 반대했습니다. 언론플레이를 해서 탈북자 문제를 이슈화하고, 탈북자들의 단체행동을 부추기는 골치 아픈 자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안기부 정모 공사는 송 기자에게 ‘왜 탈북자 문제를 유엔까지 끌고 가느냐?’고 면박을 주었다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95년 2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후 북한인권시민연합,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자유북한인협회 등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던 그는 2001년부터 대북 풍선 보내기를 시작했다.
―풍선 보내기를 시작하면서, 생계에 대한 걱정은 안 했습니까.
“한국에 들어온 다음에 ‘감옥을 한 번 보여달라’고 해서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죄수들도 잘 먹어서 살이 쪘더군요. 그걸 보니 ‘여기서는 무슨 일을 하든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왕 여기까지 온 것,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이민복 옆에 있다가 나도 테러당하게 생겼다’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이민복씨가 인근 숲 속에서 북한 실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강연료 수입 등이 제법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안 쓰면 됩니다. 차도 제 돈 주고 산 것 아니고, 옷도 남이 입던 것을 얻어 입고 있어요.”
이민복씨는 “탈북자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과 근검절약하는 정신이 필수인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건강, 인성(人性), 실무능력을 꼽았다.
“탈북자들은 우선 건강이 안되고, 건강이 되더라도 인성에 문제가 있어요. 김정일은 북한 사회를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승냥이나 늑대만이 살아남는 사회로 만들어 버렸어요. 일을 해도 끈기가 부족하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배신하고…. 북한의 산림이야 복구할 수 있다고 해도, 북한 사람들의 인성을 회복시키려면 3세대는 지나야 할 겁니다. 북한 주민들의 인성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김정일이 지은 가장 큰 죄입니다.
게다가 탈북자들은 여기 초등학생만큼도 영어나 컴퓨터를 못해요. 실무능력이 떨어지면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배우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자세가 부족해요.”
―탈북자들은 풍선 보내기에 대해 이해를 해 주는 편입니까.
“이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웃에 사는 탈북자 중에서는 ‘이민복 옆에 있다가 나도 테러당하게 생겼다’면서 항의하는 사람도 있어요(서울 외곽의 비닐하우스는 그의 사무실인 셈이고, 그가 사는 집은 서울 시내에 따로 있다). 하기야 풍선 날리려고 백령도나 연평도로 나가면 ‘당신들 때문에 고기 안 잡힌다’고 하는 어민들도 있으니….”
의정부 외곽의 길을 도는데 길가에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이민복씨가 말했다.
“저거 보셨어요? 2002년 미군차량 교통사고로 죽은 미선이 효순이 추모비입니다. 좌파는 저런 것 가지고도 그렇게 크게 촛불시위를 벌이고 두고두고 활용하는데, 우파는 천안함 격침으로 46명이나 죽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선전선동은 역시 좌파가 잘해요.”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차는 어느덧 이민복씨의 숙소에 도착했다. 이민복씨는 “저기 뒤편으로 가면 시원한 곳이 있다”면서 기자와 박창근씨를 숲 속으로 이끌었다.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월북한 남로당원
―무척 신앙이 독실한 것 같은데,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됐습니까.
“나는 공산주의가 ‘모태(母胎)신앙’이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월북(越北)한 남로당원이었고, 어머니도 열성적인 공산주의자 집안의 딸이었어요. 게다가 농업과학자였으니, 처음에는 선교사가 권하는 성경 말씀이 다 헛소리로 들렸지요. 하지만 수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으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고비를 넘기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선교사나 목사님들께 의지하다 보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국내 교회의 대북(對北)선교나 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곽선희 목사 같은 분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서 김정일도 포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이에요. 김정일은 ‘원수’가 아니라 자신을 우상화하는 ‘마귀’입니다. ‘가짜 교인’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진짜 교인’인 지하교회 가운데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합니까? 굶어 죽은 북한 주민과 외부의 지원금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김정일 가운데 어느 쪽을 구원해야 합니까? 대답은 분명한 것 아닙니까?”
이민복씨는 “스스로를 신격화(神格化)하는 한 김정일은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중국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은 70%는 잘했지만, 30%는 잘못했다’면서 스스로 지도자의 잘못을 시인한 후 개혁개방을 단행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전북 익산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골수 공산주의자였지요. 6ㆍ25 때는 고향에서 당비서를 지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국에 들어온 후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 봤더니, 마을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는 6ㆍ25 때 사람을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럽던지…. 말년에는 당신이 생각하던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 때문에 고민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늘 내게 ‘창조하려 하지 마라. 그러면 반동이 된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습니까.
“김대중 정권 시절,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북방송 등이 중단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해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네가 하면 될 것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세 과목만 더 하면 신학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는데, 그 길로 이리 들어왔습니다.”
―목사가 될 생각도 했습니까.
“제가 순해 보여도 북한에서 인성을 버려놔서 울끈불끈 하는 게 있어요. 이런 성격으로는 목사 못합니다.”
“희망은 대한민국에 있다”
이민복씨는 사업의 투명성을 위해 북한에 풍선을 보낸 후에는 그 사실을 후원자들에게 휴대폰 문자로 알려준다. 7월 11일 이민복씨가 기자에게 보내 온 문자. |
“버려진 땅이었던 것을 복토를 하고, 주변에 밤나무 등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처음에는 평당 10만원 정도 하던 땅이어서, 땅 주인에게 팔라고 했더니 ‘3년만 있다 보자’고 하더군요. 3년이 지나고 나니 땅값을 세 배를 올려서 부르더군요. 이제 소송을 걸어 여기서 나가라고 하는데, 방법이 없네요.
땅 주인은 소장(訴狀)에서 자기는 힘없고 가난한 농민으로 묘사했던데, 사실 그분은 꽤 잘사는 분이에요. 그런 분을 보면, 왜 한국 사회에서 민노당(민주노동당)이 그렇게 세력을 떨치는지 이해가 가요. ‘북한 문제만 아니면 나도 민노당에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어요. 한국의 ‘가진 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결여돼 있어요. 통일 후에 그런 천민(賤民)자본주의가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민복씨는 “그래도 희망은 대한민국에 있다”고 말했다.
“북으로 보낼 전단을 만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게 돼요. 조선(造船) 세계 1위, 반도체 세계 1위…. 무적(無敵)의 이지스함도 만들고….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많이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인성이나 도덕성, 전통의 계승, 이런 것들도 남쪽이 훨씬 잘 보존돼 있어요. 만일 대한민국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자살했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의 농업현실, 자녀교육 이야기 등 이민복씨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문득 이민복씨가 “이젠 들어가 보셔야겠다”면서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첫댓글 이런분들 존경스럽지요
온갖 말을 다 들으면서도 신념을 굽히지않고 꾸준히 한길을 가는거보면 정말 대단하지요
후원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