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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예수님의 초상화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매일 자신을 다듬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하나님을 어떻게 삶으로 보여 줄 수 있는지, 생활전도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팔복의 첫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천국을 약속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인은 애통과 같은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대 문화는 편안하고 좋은 느낌을 주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자들도 심각한 이야기는 잘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이야기라면 짧게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기분 좋게 웃어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교회에서 애통의 눈물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적당한 인문학적 지식과 유머가 있는 설교,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메시지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이 복이 있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5절, 21절 참조)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이것은 인생에서도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눈물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진정으로 애통해 본 경험이 없다면 아직 깊은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통의 눈물을 경험해야 신앙의 본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려면 애통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애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펜데오’(πενθέω)입니다. 이것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 심장을 꿰뚫는 듯한 통증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몇 가지 있는데, 이곳의 애통은 그 강도와 농도에 있어서 가장 깊은 슬픔을 가리킵니다.
애통하는 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열 번, 백 번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죄의 유혹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한일서 1장 8절)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와 개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과오들로 인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추악함을 더 많이 보게 되고, 그래서 더욱 애통하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죄짓는 것을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 진정으로 애통함이 없이 몇 마디 기도하면 죄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이웃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표준은 이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애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시편 51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 ‘상하고 통회한다’는 표현과 관련된 히브리어 ‘다카’(דָּכָא)는 부서지거나 짓눌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통회한다는 것은 자신의 교만과 고집이 산산이 부서지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어진다는 것은 내 고집이 산산이 부서지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2.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데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자녀는 속을 썩이고, 몸은 병에 걸려 고생하는 분들이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처지를 당할 때 우리는 가슴에 밀려오는 슬픔과 아픔을 참고 견디면서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4절)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이사야 38장 5절 참조)
우리의 눈물을 아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 그것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며,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3. 세상의 죄를 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셋째, 애통하는 사람이란 세상의 죄를 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죄까지 자기의 책임처럼 여기며 회개하고 애통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4~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죄만 가지고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에 못지않게 이웃과 세상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인정해 주십니다.
에스겔 9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세상의 죄로 인해 탄식하는 성도들의 애통이 없다면 아마도 세상은 지금보다 더 절망의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불의와 고통을 봅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관심, 힘없는 사람을 짓누르는 불의,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죄악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단지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도 그 사회의 한 구성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불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애통은 단순히 슬퍼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
본문의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입니다. 이 말은 ‘곁에’를 뜻하는 ‘파라’와 ‘부르다’를 뜻하는 ‘칼레오’가 결합한 말로, 곁으로 부르거나 가까이에서 격려하고 위로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기와 세상의 죄로 인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진정한 위로를 베푸십니다.
‘파라칼레오’와 같은 어근을 가진 말 가운데 ‘보혜사’ 또는 ‘위로자’를 뜻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곳에 나오는 ‘보혜사’라는 용어 역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죄와 이 세상의 죄에 대해 애통할 때,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이끄시며,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다윗의 회개와 회복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된 어느 날 유혹에 빠져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끔찍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욕보이고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죄를 숨긴 채 쾌락을 즐길 정도로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의 혹독한 책망을 통해 다윗은 자기 죄의 흉악함을 보게 되었고 깊은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편 32편 3~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시편 51편 1~2절과 10~11절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진정으로 성결함을 얻기를 간구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는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흉악함과 자기 영혼의 더러움을 깨닫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용서만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의 정결을 얻기 위함이었다.” (『부조와 선지자』, 725쪽 참조)
통회한 다윗은 타락하기 전보다 더욱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이웃에게 동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열매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단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자기 죄를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천사가 천국 문을 열기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피 한 방울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닫힌 천국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와 슬픔 가운데 죽어 간 한 여인의 한숨을 거두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흘린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담아 갔습니다. 그러자 천국 문이 활짝 열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매일 나 자신의 죄 된 모습과 인생의 무거운 짐, 세상의 불의와 고통을 안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눈물을 흘림으로써 하늘의 위로를 우리 모두 경험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친절하고 예모 있고 부드럽고 동정적일 것 같으면, 진리로 회심할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회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은 자기 성찰과 애통은 영적 성숙의 지름길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도들과 예수님 시대의 성도들 사이에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점검과 자기 성찰의 의식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죄에 대한 깊은 애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일과를 마칠 때 잠깐 멈추고 묵상하면서 자기 생활을 점검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무슨 말을 했는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가?’
만일 해서는 안 될 생각이나 말을 했거나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발견되면, 그들은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자기 성찰과 애통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통회의 눈물은 굳게 닫힌 천국 문을 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 주며, 신앙 부흥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통회의 눈물이 있을 때 심령에 위로의 무지개가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지고 애통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하늘의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