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리(윤리) Ⅱ
교회는 세상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 안에서 보면 세상을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구약에서 ‘에레츠’ 하면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위대하게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개념이다. 신약에서는 ‘코스모스’로 우주 만물의 원리가 순조롭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신구약 성경 안에서 또 다른 표현이 ‘테벨(온 땅)’, ‘오이쿠메네’(온 세상)으로 나타낸다. 이는 우주 만물의 질서로서 만들어 놓은 세상을 인간에 의해서나 악에 의해서 더럽혀져 있는 것을 말한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이 더럽혀 놓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가 바로 그런 세상이다.
우리는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나눈다. 인간에 의해서 더럽혀진 ’테벨‘과 ’오이쿠메네‘를 하느님이 창조하신 코스모스 세상으로 다시 원상 복귀시키기 위한 원리와 교회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사회 교리이며 사회론, 그리스도교 사회론이다.
교회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이다. 세상은 수많은 악과 전쟁과 분열, 갈등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사는 인간의 욕망과 악에 의해서 무질서하게 파괴되고 있다. 그런 세상을 차단하는 하나의 방법이 사회 교리(사회 윤리, 그리스도교 사회론)이다. 교회는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우리가 받는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고 한다면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월급이나 연봉은 공휴일이나 일하지 않는 날도 포함하여 받고 있다. 그래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보면 안 된다. 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인간에 대한 임금이 월급이며 연봉이다.
오늘날 산업사회를 살아가면서 모든 노동에 관계되는 체제와 법이 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출발했다. 먼저 사회 교리의 원리보다 결과부터 논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대사회 회칙이다. 교황청에서 나오는 문제 문헌은 교황님이 반포하신다. 그 문헌의 종류는 교서, 회칙, 사도적 권고, 훈령, 서한으로 되어 있다.
8월 15일을 ’성모승천‘일이라고 하면 이는 역사적인 날이 아니라 교황님의 교서에 의한 반포이다. 신앙 교리에 대한 것은 교서로 이는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적 순종이다. 이는 교황의 무류성으로 어기면 파문 또는 이단이다. 그러나 회칙은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마음을 모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교황님의 생태 위기에 대한 호소로써 종교적 순종이며 사도적 권고, 훈령, 서한도 여기에 속한다.
훈령과 서한은 교회의 제도에 대한 것이다. 예로 한국의 최대 명절에 금식이나 단식 등 금기시하는 일과 겹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주교단에서 교황청에 문헌을 보낸다. 그러면 교황님의 서한이나 훈령으로 그 기간에는 면제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전례 규정이나 행정, 교회법에 관한 것도 교황님의 서한이나 훈령으로 이루어진다. 신앙의 순종 즉 교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 순종 즉 비무류성 교리에 대한 교도권의 가르침은 ’우리가 함께합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돌려보라는 회칙이다.
100주년 회칙에 관한 문헌은 1891년부터 1991년까지 급변기에 대응하자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1,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변하는 현실 속에 교회가 이런 세상이 교황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코스모스의 질서정연한 인간의 삶, 존엄성이 지켜지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농촌 중심 농업 사회에서 경공업, 중공업으로 급변하는 세상을 살았다. 그러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겪었다. 유럽에는 100여 년 걸린 산업혁명 과정을 우리는 급속도의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탄압, 노동과 자본의 갈등을 겪었다. 그런 혁명의 부조리와 부작용을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유럽 사회는 정리되었다.
이런 100년의 격변기에서 교황님은 여러 회칙을 반포하면서 대처했으나 세상은 듣지 않아 1, 2차 대전이며 경제공황의 시련을 겪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어머니고 스승으로 세상이 가야 할 길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요한 23세는 이제 더 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며 국제기구를 권한 것이 ’유엔‘이다. 2차 대전 후 동서 냉전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이념적 전쟁이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유엔에서 연설한 분이 교황 바오로 6세이다. 선진국은 후진국을 위해서 기금을 만들라고 역설했다. 그 뒤 다양한 금융 지원 기구가 나와 후진국을 도왔다. 우리나라도 경제부흥의 기저에는 세계 선진국의 금융 차관을 통해서 이뤘다.
교황님은 선진국에 일갈로 외쳤다. 너희들은 후진국에 가서 원자재나 원료를 가져와 가공해서 후진국에 팔아먹으니 그런 경제적 예속관계를 끊으라고 했다. 그러니 가난의 악순환이 되어 그 악순환을 막는 방법은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외국에 유학길이 열렸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교황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왔다.
노동은 벌어서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자기의 달란트로 세상에 자기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인류는 모두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노동의 영성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 가치의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남의 노동 가치를 빼앗는 제도적 행위, 즉 정리해고는 위법이다.
기업은 사회적 환원의 의무가 있으며,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노동으로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본과 경영의 세습으로 악습이다. 그런 악습의 순환을 막기 위한 것이 노동조합의 형성이다.
1987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공산권이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교황님은 공산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예언은 1989년 동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져내렸다. 그 핵심이 100주년 회칙이었다. 100년 동안 교회가 해온 일들이 허구가 아님을 증명했다. 노동과 재화, 자본과 기업, 노동조합 등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함을 보였다.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코스모스의 세상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에 밑거름을 뿌리신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민주화를 위해서 당신의 교수였던 분과 연락하면서 민주화를 이끄셨다. 정의 구현 사제단이 70-80년대에 군사 독재하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할 때 사회 교리를 읽고 공부하면서 투쟁했었다. 그래서 감옥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은 사회 교리를 공부하면서 정의를 부르짖는 신부는 별로 없다. 그저 하나의 정당 활동처럼 좌파를 하면 인정받는 것처럼 하고 있다.
우리가 민주화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받아들였고, 사회 교리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노동조합은 이렇게, 임금은 뭔지 인식이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받아들이는 노동 현장이었다. 산업혁명은 유럽 사회에서 뿌리를 흔드는 삶의 근본을 바꾸는 일로 가장 큰 문제가 노동자였다. 가장 큰 혁명은 사유 재산의 인정이다. 봉건 영주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는 내 것이 없으니 노동자는 일의 대가로 얻어 사는 게 고작이었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700만 년의 역사를 한 달의 역사로 표현할 때 얼마나 빠른지 짐작할 수 있다. 유목민이 사냥 채집하던 시절이 29일 22시간 46분, 농경사회가 1시간 12분 20초, 산업 사회가 1분 10초이다. 산업사회가 얼마나 빠른 변화인지 알 수 있다. 단시일의 변화로 적응하기에 혼란을 가져왔다. 준비 없이 겪었으니 충격이고 부작용이 많았다. 그런 시기에 가장 큰 피해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계층이었다. 막스 레닌은 공산주의 이론으로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규합하여 노동 혁명을 일으켰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공평하게 분배하며 세상을 멋지게 살자는 공산주의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 대립이며, 산업혁명은 이들 상호 간의 제약을 주는 여러 요소의 의미로 발생했다.
2024. 11. 23. 유스티노회 김정우 신부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