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1]<책풍>의 촌장과 어느 ‘선생님과 제자’
어제(11월 18일)는 바쁜 하루, 모처럼 다이내믹했다. 대설大雪로 뒤집어쓴 자동차에 눈을 부랴부랴 털어내고, 오수역으로 향한 게 아침 8시 30분. 무궁화호로 익산역에 도착하니 9시 44분. 내리자마자 만난 초면의 영화평론가 신귀백님의 차로 곧장 정읍역으로 향했다. 10시 47분 광주에서 KTX로 올라온 사진작가 윤재경님(이분도 초면)과 맞춤도킹, 급하게 향한 곳이 고창군 신림면 가평의 <책을 읽는 풍경>(일명 책풍). ‘책풍’은 직접 와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책세상’, 본채에 이어 서너 채에 4만여권의 장서가 골골이 쌓인 책방이다. 촌장 박영진 님은 기인이라면 기인, 서치書癡라면 서치, 문학평론가 명함을 달고 있지만, 헌책 매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책방의 주인이자 가난한 인문학 강사로 그나마 이름이 났다. 열흘 전쯤에 정읍의 지인선배가 “우천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며 소개해 처음 수인사한 사이. 한 달 전쯤에 『사랑의 인문학 번지점프에 빠지다』(2023년 10월 20일, 도서출판 등, 382쪽, 19500원)를 펴내 여기저기 북콘서트로 바쁘다. ‘물 들어올 때 배 띄워라’는 말처럼, 자신의 첫 저서 팔기에 입술이 부르텄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 가난한 서생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책 뒷표지에 추천사를 쓴 정지아 작가는 "책풍은 고창의 심장에서 나아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고 썼다.
그날의 점심 물주로 내가 정읍의 지인선배(김이종 님)를 찍었는데, 기꺼이 응해주셔 고마웠다. 이런 만남도 정말 흔치 않을 터. 사연인즉슨, 신 작가에게 전라도닷컴에 연재하는 <인간공감>의 주인공으로 박촌장을 불쑥 제안한 것이 먹힌 것. 국어선생님 출신 신작가의 필력과 내공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평을 묶은 『영화사용법』(2014년 3쇄, 도서출판 작가, 311쪽, 13000원)을 비롯해 『전주편애』등이 있다. 인터뷰어는 촌장의 설명을 듣고 여기저기 ‘책풍’을 돌아보며, 연신 ‘미친 짓’ ‘무엇을, 누구를 위해 하냐’ ‘차라리 수도권으로 옮기라’ ‘전생의 업보’ 등 애정 어린 걱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한마디로 ‘어안벙벙’ ‘어이상실’ ‘대책 전무’처럼 보였다. 한 달 경상비만도 일백은 넘을 텐데, 다행히 회원제 운영 후 적자 수년만에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 있다는, 희미하나마 반가운 소식이다. 제발 그렇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 일’에 목숨 바쳐 일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진저. ‘눈을 사랑하면 얼어죽을 각오를 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심화불석명尋花不惜命 애설상인동愛雪常忍凍: 꽃(진리)를 찾아서는 목숨조차 아끼지 말고, 눈을 사랑하였으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하라>.
촌장이 추천한 점심메뉴 흥덕면의 맛집(흥성회관) 들깨볼떼기탕(대구 아가미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 뽈떼기)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책방을 운영하는 비결이 김홍정 등 책풍소속 작가와 정지아 작가나 나태주 시인 등을 초청하는 ‘인문학당’ 북토크 인 것같은데 “글쎄”라는 말밖에 할 수 없지만, 회원이 1천여명을 넘어섰다니 <인문한국>의 미래가 반드시 어둡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아무튼, 책 제목 <사랑의 인문학>은 좋다. 세상은 온통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한두 편(‘봄날이 간다’와 ‘김소월의 시’)을 읽었을 뿐인데, 글쓴이의 진정성을 십분 이해하겠고, 감정이입이 잘 된다. 인터뷰어(신작가)가 전라도닷컴 12월호에 어제의 인터뷰를 어떻게 글을 엮을지 궁금하다. 궁금하신 분들은 꼬오옥 정기구독을 하거나 사보시기 바란다.
돌아오는 길, 전직 교사인 작가가 인근(신림면 차단리)에 사는 친구같은 제자(정낙신 님)의 집을 잠깐 들리자한다. 성균관대 중문과 86학번, 이 제자는 은행에서 일하다 영 적성이 맞지 않아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 한문학을 전공한단다. 동문이 뭐라고 왠지 낯설지 않았다. 처가동네에다 알뜰한 집을 짓고 학문에 열중한다는 그는 ‘착하고 작은 학자’같았다. 약간의 사연을 듣고 보니, 작가가 80년대 후반 총각으로 첫 부임한 정읍의 모고등학교에서 만난 사제지간師弟之間. 그때 2,3년 스친 인연이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드문 일이다. 게다가 진로를 바꾼 것도 작가의 영향이 컸다는 것. 한문에 조예 있음을 안 작가가 제자에게 은행 때려치우고 대학원 진학하여 한학자나 한문번역가가 되라고 강력히 권유했다는 것. 제자는 “공부하는 게 너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말을 듣는 옛 선생님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을 터. 졸업 이후 지금껏 간간이 중국, 일본 등 여행도 같이 했으니,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아름다운 사제’가 아닌가.
제자가 추억하는 작가선생님은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의 웰튼 아카데미 국어선생님인 키팅(로빈 윌리엄스 역) 같았다고 한다. 내 보기에도 그는 분명 초임교사 시절 키팅같은 국어샘이었을 것같다(원광대 국문과 77학번). 불과 10여 살 차이난 제자들을 위해 영화를 같이 보며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틈만 있으면 키팅처럼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카르페 디엠)” “너희의 인생은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는 말을 주문처럼 말했을 것이다. 작가샘이 제자와 제자 부인에게 친구처럼 툭툭 던지는 '어록'같은 말들을 들으며 나는 그가 은근히 부러웠다. 나도 선생님을 했으면 좋았고, 잘했을 것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다음주에는 고교 은사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따뜻한 점심을 대접해야겠다.
익산역에 내려주고 돌아서며, 저녁을 같이 못해 미안하다는 작가. 조만간 내 고향을 다녀가라며 기차여행을 강권했다. 고려초 발생한 ‘의견 실화’관련 시나리오와 영화 아니면 오페라 제작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눈 것은 가외의 수확. 익산역에서 콩나물해장국으로 혼밥을 하고 기차를 탔다. 그가 조만간 나의 우거를 방문하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