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더디 진행되어온 일이므로, 마음의 준비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락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인생에서 겪을 수 없을 달콤한 밤들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 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룸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 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한강, 《희랍어 시간》
문제시 삭제
첫댓글 아 힐링된다 ♡
마지막 진짜 좋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