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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백제 문화제 개막 팡파르…2만명 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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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간 대장정 돌입…한화 불꽃쇼에 탄성 터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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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백제문화제’ 공주 신관금강공원에서 28일 화려한 개막과 함께 9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날 6시30분 시작된 개막식을 놓고 비 예보가 있어 날씨로 인한 우려의 시각도 있었으나, 다행히 적은 양의 비로 무사히 개막행사가 마무리됐다.
개막식에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비롯한 최석원 추진위원장, 박수현 국회의원, 이준원 공주시장, 이용우 부여군수,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 등 내빈들과 시민, 관광객 등 2만명이 운집해 성황을 이루었다.
식전행사로 공주시합창단과 일본인 가수 '와즈마시즈요' 가 무령왕이 탄생한 섬 '니리무세마'(主嶋)를 찬양하는 노래, 퓨전타악 공연, 각계 인사들의 축하영상메시지 등이 마련됐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되는 본 행사는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서 각각 채화해 무대 위에서 합화(合和)한 '혼불' 을 성화대에 옮겨 붙이는 '혼불점화' 로 공식행사가 시작됐다.
이어 안희정 충청남도 지사의 축사, 이준원 공주시장의 개막선언, 주제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개막식 주제공연 '백제금동대향로의 비밀' 은 17분의 넌버벌 퍼포먼스(비언어극)로,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대백제의 기운을 이어받아 축제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행복한 기운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희정 도지사는 축사에서 “백제의 수십만 유민이 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졌고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백제인들이 게르만족과 일본의 대부흥을 이끌었다”면서 “1400여년전 백제라는 국가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을 이어받아 백제의 자부심을 한층 드높이자”고 주장했다.
이준원 공주시장은 개막선언에 앞서 “이번 축제를 통해 자긍심을 갖는 계기와 함께 9일간 백제를 충분히 만끽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식후행사는 걸그룹 걸스데이와 GOD 김태우의 축하공연에 이어 개막식 행사의 백미가 될 한화그룹이 후원하는 중부권 최대 불꽃축제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편 이번 백제문화제는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20주년을 맞아 '금동대향로의 세계'를 부제로 선정해 이와 연관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사료와 지도] |
서남해 마한과 온조.비류의 십제를 통합한 백제시조는 서부여의 왕자 구태
동성대왕 시기에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서백제 지역을 다스릴 태수(제후)들을 임명하였다
백제의 동성왕이 시해당하자,고구려 문자명왕은 백제군을 폐지하고 고구려영역으로 통합하였다.
[문헌 비교분석/윤복현]고추모의 부여왕 승계에 반기든 구태세력의 백제 건국
"69년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태조왕 편]
*각주/기록상 태조왕이 행차하여 부여백성들을 위문한 내용으로 보아 북만주지역의 북부여는 고추모가 부여6대 단군인 고무서 단군에게서 부여단군직을 승계받고 부여영토를 지배했던 바, 대무신왕 때 동부여까지 정벌해서 복속한 만큼 부여지역은 이미 고구려 영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후한서-부여전에 나오는 부여왕과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 기록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부여 내지는 녹산부여로 불리우는 부여잔당세력이라고 보면 된다. 즉,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부여로 망명하여 고무서 단군의 후계자가 되어 부여단군에 오른 후에 국호를 고리(고려=고구려)로 바꾸자, 고구려에 반기를 든 부여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후한과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한군현 회복전쟁을 방해했다. 이 서부여 집단은 3갈래로 나누어 지는데, 구태집단은 백제(일본)로 갈라져 나갔고, 한 갈래는 모용선비족의 정벌로 모용선비에 흡수되었고, 한 갈래는 초원길을 따라 유럽으로 이주하여 불가리아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위구태의 경우에는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가 되어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대방군을 세우고 왕을 자처할 때 100가를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서남해 마한의 웅진에 백제를 세운 인물이다. 이들 구태집단이 나라를 세워 <동이강국이 되었다>라고 지나문헌[수서]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 동이강국이란 해상강국 백제를 의미한다.
구태집단이 백제를 세우고 해상강국이 된 배경에는 한반도 서남해 마한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태집단이 부여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토광묘가 아니라, 서남해 전방후원분을 무덤양식으로 사용하며 온조집단의 십제를 통합한 후에 서울 강동구 지역과 오사카 지역에 대형 전방후원분을 남긴 것이다.
구태의 부여집단과 관련하여 지나문헌에는 부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미 부여의 왕통은 고추모가 승계하였기 때문에 고추모의 왕위 승계에 반기를 든 부여집단은 선비족과 접하는 서쪽으로 이주해 갔기 때문에 서부여 내지는 녹산부여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후한서-부여전]100가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나라세운 백제시조 구태는 서부여 왕의 아들
建武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答報之, 於是使命歲通.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永寧元年, 乃遣嗣子尉仇台(印)[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順帝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 桓帝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즉위연호)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부여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후하게 답례했다. 이때부터 사절이 해마다 통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步騎)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침략해 그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 후에 다시 귀부(歸附)했다.
영녕(永寧) 원년(120년), 적자인 위구태(尉仇台)를 파견해 대궐로 나아가 조공하자 천자(天子)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 비단을 하사했다.
순제 영화(永和) 원년(136년), 부여왕이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자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궁중음악의 일종)와 각저희(角抵戲)를 베풀었다.
환제 연희(延熹) 4년(161년),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를 침략했는데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 희평(熹平) 3년(174년), 다시 봉장(奉章)하여 조공했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는데 헌제 때 부여왕이 요동(군)에 속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3-태조왕] 부여왕 아들 위구태,현토성을 포위한 고구려를 격퇴시키다!
대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 >,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 害穀. 八月, 命所司, 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각주/기록상 태조왕이 행차하여 부여백성들을 위문한 내용으로 보아 북만주지역의 북부여는 고추모가 부여6대 단군인 고무서 단군에게서 부여단군직을 승계받고 부여영토를 지배했던 바,대무신왕 때 동부여까지 정벌해서 복속한 만큼 부여지역은 이미 고구려 영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후한서-부여전에 나오는 부여왕과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 기록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부여로 불리우는 부여잔당세력이라면 보면 된다. 즉, 부여단군에 오른 고추모와 고구려에 반기를 든 부여집단이다. 이들은 후한과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한군현 지역(번조선)에 대한 고토회복전쟁을 방해했다.
그리고 위구태의 경우에는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가 되어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대방군을 세우고 왕을 자처할 때 100가를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서남해 마한의 웅진에 백제를 세운 인물이다. 이들 구태집단이 나라를 세워 <동이강국이 되었다>라고 지나문헌[수서]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 동이강국이란 해상강국 백제를 의미한다.
구태집단이 백제를 세우고 해상강국이 된 배경에는 한반도 서남해 마한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태집단이 부여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토광묘가 아니라, 서남해 전방후원분을 무덤양식으로 사용하며 온조집단의 십제를 통합한 후에 서울 강동구 지역과 오사카 지역에 대형 전방후원분을 남긴 것이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끝]
《통고(通考)》에 따르면 구태(仇台)는 후한 후기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따르면 구태(仇台)의 성(姓)은 위(尉)이다. 《삼국지(三國志)》, 《북사(北史)》, 《수서(隋書)》에 따르면 백제(百濟)는 후한 후기에 부여 태자 구태(仇台)가 세웠다고 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을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동명성왕 고두막)의 후손에 구태(仇台)란 자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실했는데, 대방(帶方)의 옛 땅(황해도)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자기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으며 마침내 동이(東夷) 가운데서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100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부여의 왕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위에 올랐다. 적자는 없고 서자 마여(麻余)만 있었다. 마여가 죽으니 여섯 살 난 그의 아들 의려(依慮)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첫댓글 자고로 역사는 힘에 의해 만들어 져 왔습니다. 그 힘이 장의롭지 못할때 나라가 망한다고 보는 것은 한반도가 둘로 갈라지게 된것 자체가 그렇고 창중스런 놈들만 모여있어도 아무런일 없는것처럼 상황을 주도하는 것을 보세요. 누가수세가 되어야하는지 뻔한데 그 반대의 정세가 되고 있지요.
니가 그토록 욕하는 친노의 거두 안희정충남도지사가 백제문화제에 축사를 하는것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니 은혜를 모르고 음해하는 개잡놈아! 충남행사에 서남해를 왜 살짝 끼어넣는데 ㅋ
운영진들 이렇게 비방모욕하는 자들은 왜 강제탈퇴를 안 시키지? 그래 가지고 삼태극이 대중성을 뛸 수 있겠어? 윤복현 게시글에 쌍욕하며 비방모욕한 자들 모조리 강제탈퇴해..안 하면 증거제시할테니까...원칙도 없는 카페운영이다
안희정이가 현재 충남도지사 맞고 도지사니까 백제문화제에 참석한 건 당연한거다. 내가 보기에 안희정이는 충남도지사로 정치생명 끝날 것 같은데?
삭제된 댓글 입니다.
문헌비교자료를 보라. 위구태가 백제시조로 기록되어 있고, 위구태는 백제 를 세우기 전에 만주에서 후한과 군사동맹으로 고구려에 대적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종왕 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후한 광무제 다음 왕 시기에 한나라를 방문한 기록도 나오고. 기존 사학계에서 온조를 백제시조로 가르치고 있는데 속히 국사책을 개정해서 백제시조는 부여왕 구태로 바꿔야 한다. 온조가 백제시조로 기록된 건 구태집단이 마한과 십제를 통합하면서 도읍지를 서울로 잡게 되는데, 비류.온조,구태 집단이 융합되면서 한반도 마한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개국한 부여집단의 수장 온조를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완도는 '백가'에 들어가지 않고 '제해'에나 겨우 들어간다... 변방에 사는 사람이 중심타령 어지간히 하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