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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모씨’의 脫근대적 궤변을 비판하기 위해, 알아야만 할 右派理念의 기초
1. ‘지모씨’의 연이은 脫근대적 궤변 성명. 이면의 좌파프레임을 제대로 전복하여 반박하려면?
우파 구세대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으나, 젊은 세대들에게 먹힐 수 있는 ‘지모씨’의 반응을 고치지 못하는 쉬운 답변을 거부한다. ‘지모씨’를 반박하는 쉬운 방법은 이러하다.
박근혜대표의 오세훈 유세장에 때 맞춰서, 오세훈이 박근혜대표 영접하는 바로 등 뒤에서 건장한 남자를 상대하기엔 형편없는 도구인 문구용 카터칼을 들고, 박근혜대표가 오세훈을 지나칠 때까지 아무런 인기척을 보이지 않다가 범행하고서, 범행 현장에서 오세훈도 노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범행도구는 조직폭력배가 아닌 양아찌가 여성 괴롭힐 때 많이 연상되는 것으로 지모씨도 수십년전에 범행했던 것이고, 건장한 40대 남자엔 안 어울리는 것이다. 또, 사진과 동영상으로 볼 때 박근혜대표가 지모씨에 가까이 올 때까지 참 강한 인내력을 갖고 있었다.
배가 거의 다 기울고 있는 측면에서, 정동영 호를 결정적으로 추락시킬 것임을 알면서도 지모씨가 자신의 불운함을 알리려고 고의 테러 했다? 열린당 기간당원으로서 경찰 수사 때에 ‘노빠류’의 전형적 발언(‘민주주의’어쩌고) 몇 문장 때문에 계속 대중들에게 강하게 각인되는 인상을 지우고자, 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한다고 하기는 쉽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박근혜대표의 피습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열린당의 말 같지않은 비난에는 답변이 안된다. 테러는 지 모씨가 하고서, 국민이 근심 걱정하니 ‘이용한다’는 몰아붙이는 바탕에서 포퓰리즘이나 감성정치라고 몰아붙이면, 좌파지식인들이 장악한 대학가 배경으로 정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이 글은 여기에 대하여 ‘가장 완벽하게 답변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 제시 차원이다. ‘지모씨’ 단일 케이스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면, 결론을 먼저 보는 것이 낫다. 그러나, ‘지모씨’의 말장난은 좌익 학술단체 ‘학술단체협의회’급의 사고배경을 전제한다. 한번 제대로 파악하고 계속 제대로 답하는 것이 낫다.
2. ‘보수사상’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이념이 어떻게 붕괴시켰는가?
일부 유명 보수 인사 조차도 대학에서의 ‘교양강의’가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전혀 모르는 체, 잘못된 사상을 강연하는 것을 보았다. 대충 ‘右尊左卑論’ 논리에 끼워 맞춰서 ‘탈근대’를 비천한 것쯤으로 바라보면서, <그 길은 아니다>란 인상만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일반 네티즌’들의 경우에서는 유명 보수 인사의 [철학개론] 지식 부실에 의거한 철저하게 틀린 내용을 들을 때 상당히 헷갈릴 수가 있다.
복음성가 [그리스도의 계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란 가사를 해석하는 방식에, 그 목사님은 ‘포스트모던’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를 융단 깔듯 까는 방향인, 우파 철학 원론의 입장을 가지 않으셨다. 이 글은 ‘현학적 학술 논리 수준’ 아니라, 가끔 기독교 방송의 성경강좌에서 철학자인 체 할 때 나오는 수준까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현상’과 ‘본질’ 논의를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의식은 가상으로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란 대상을 가진다. 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구현된 모든 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의식 속에서 드러난다. 이승만대통령의 ‘一民主義’는 기독교 자체를 현재에는 믿지 않는 사람의 믿지 않을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애국적 주체들의 의식의 지향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식 성경해석을 좋아하는 보수인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차원적인 ‘성경 요소’를 소유하느냐의 여부로 생각하셨다. 따라서, 이승만대통령의 ‘일민주의’ 사상은 모든 他종교들의 자유로운 종교행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의 의식지향성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안 믿고 영원한 자발적 노력을 존중한다.
의식지향성이 ‘노에시스’요, ‘하나님의 나라’가 ‘노에마’(본질)이요, 개별 주체가 판단할 수 있는 사실 상황은 ‘사실 자체’일 것이다. 사실 자체를 물고 늘어질 수록 탄탄한 것으로 기초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판단 중지를 내리게 된다. 에드문트 훗설의 ‘에포케’부분은 하나님 아래에서의 인간의 겸손으로 해석함이 마땅할 것이나, 그 목사님은 이것이 좌익 교단의 ‘多종교주의’를 허락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를 닦는 것으로 해석했다. 근대 사상을 여는 기독교정신을 기반한 철학 이념이, 인간들 사이의 하나님 아래의 평등성을 생각하고서 각 주체간에 각각의 권리를 도출해내는 경향이 강함을 안다면, ‘非성경적 요소’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구현에 대하여 판단중지를 내리지 않고서 포스트모던적이며 이슬람적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된다. ‘판단중지’를 내린 영역에 대하여는 인간은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수준’까지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에드문트 훗설의 ‘말씀중심주의’를 이야기하고, ‘말씀중심주의’와 이성중심의 합리성의 연관을 이야기해야, 脫근대 多종교주의를 온전히 비판할 수 있다. ‘역대 국정교과서’ [국민윤리]를 좌익교단의 음모로 몰아붙이는 일부 보수 인사의 얼치기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 뚜렷한 객관적 보증 없이 과거의 일반론을 좌익교단의 음모로 몰아붙이는 것은, 곧장 개혁 보수의 말이 되는가?
성경을 ‘노에시스’ ‘노에마’ ‘사실자체’ ‘의식지향성’개념으로 읽지 않고, 냅다 ‘성경적’ ‘非성경적’ 이분법으로 나눠서 읽어버리며 ‘성경적 요소’의 소유성이 전국을 장악해야 한다고 한다면, 사실상 ‘기독교’와 ‘레닌 마르크스주의’의 차이가 소멸되어 버린다. 사두개 논리로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무력옹호론이 강한 성경논리 옹호란 이름으로 융합되는 지평은, 훗설의 ‘말씀중심주의’로 개념화한 것을 단순한 실증주의로 오독하는 착오가 놓여 있다.
3, ‘음성중심적’으로 드러나는 ‘진리지향적’이며 ‘형이상학적’특성을, 시각중심적으로 해체하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철학의 연구 대상을 그 자체로서 존재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듯이, 형이상학은 경험적이고 감성적인 현상을 초월한, 그러면서도 모든 현상의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되는 항구적 실재, 가장 참되게 있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분과 학문들의 지식체계는, 그 체계 속에서는 검토되지 않은 개념과 전제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 지식 체계의 정당성은 자신의 체계 밖에 있는 전제들과 개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정당성의 근거를 부여하는 개념과 전제들을 다룬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아무런 전제도 없는, 논리적으로 완결된 자기충족적인 지식 체계이어야 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다.
(중략)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은 실재, 실체, 정신, 물질, 신과 같은, 경험에 의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의 본성을 탐구한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 접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이성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서양에서는 경험주의보다는 합리주의적 성향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진교훈 외, [고등학교 철학교과서], 78쪽. )
우파들의 전형적인 담론은 이러해야 한다. 즉,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 자유주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에 합리주의적 선험적 접근을 해야 하며, 경험주의적 과학주의적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과학적 역사’란 말은 좌익들의 상투 어구로, 이것조차도 흉내내는 ‘개혁적 보수’를 주장하는 우파 논객은 막말로 ‘똥과 오줌’을 구분 못한다는 비난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선험적 차원에서 ‘평등하다’는 과학적으로는 증명되지 못한다. 그러나, 선험적으로는 너끈히 인정되기에 자유세계가 연합하여 북한주민의 ‘인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우파 내부에서 교과서적 훼방을 놓고 싶다면, ‘방글라데시’ 주민도 행복권이 있다는 측면으로서의 개별적 분파적 지류적 경험적 차원의 반론을 제기하라. 그리하여, 수없는 인권 학살 중에서도 ‘괜찮아유’하는 일부의 목소리만을 붙잡아 클로즈업 하라.)
모든 自由主義 國家는 ‘테러’와 ‘전쟁’으로부터 자국의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국민행동본부의 ‘자유’가 북진한다는 말은 막말로 ‘똥’과 ‘오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난에 할말이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국가의 영주민들의 일신상의 자유를 무조건 보호해줘야 하는 전제로서 최소한의 기초를 유지한다. 1987년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으로 통일한다는 조항과, 그에 모자라는 특별법으로서 국민보호의무를 적시한 <국가보안법>을 제시함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에 최선을 다한 속에서의 통일론만을 인정한다고 성문화시켰다.
지모씨의 커터칼 하나로 사진자료와 동영상자료에 안 나오는 ‘오세훈’도 노렸다는 주장도 하고, 당시 정황상에서 나올 수 없는 ‘정동영’도 노렸다는 주장을 하는 바는 간단하다. 지모씨의 성명 발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철학에 달관한 사람들의, ‘자유주의 국가의 사명’을 짊어져야 할 친여당 기간당원의 폭거행위에 대한 해체를 전제한다.
국민의 민생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 여당’이 선거 때에 오히려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테러를 유발하게 하다니! 하는 바를 지우기 위해서, 극렬 친북좌익의 테러 연출설과 지모씨는 노무현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도 노렸다고 말하면 ‘화룡점정’으로 끝날만큼 모두다 노렸다는 주장을 하는 바일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를 이끄는 정부 여당에겐 민생 치안을 확고하게 다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국민의 기본정서를 깨뜨리기 위해서, ‘갖가지 상식’의 경계를 허무는 해체주의 정치 공학을 쓰는 것이 된다.
“민주주의와 어쩌고 집단이란 노사모류로 박근혜를 노렸다”란 말과 “오세훈을 노렸다”란 말, 그리고 “정동영도 노렸다”란 말은 데리다가 말한 ‘차이’와 ‘연기’의 중첩 효과이다. 결국, 지모씨의 커터컬에 의한 생명이 위독할 수 있을 박근혜대표에 대한 테러를 지우고자, 디지털 미디어에 ‘박근혜를 노렸다/오세훈을 노렸다’와 ‘박근혜를 노렸다/정동영을 노렸다’하는 언어놀이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민생 치안을 허물어뜨리는 ‘정치판용 조직폭력배’를 사냥개처럼 데리고 다니는 위험천만한 풍경을 숨기려는 입장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는 민생 치안을 확고하게 담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진리지향성을 해체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해체주의가 철학에서의 진리지향성을 파묻어 버리고 ‘형태’와 ‘스타일’의 문제만 묻듯이, 각본에 의해서 발언한다고 추정되는 ‘지모씨’의 테러를 후면화시키고 ‘득표력’의 향방만을 전면화시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주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조직폭력배의 노사모류의 발언까지 했음을 후면화시키고자, 지모씨의 발언만 곧이 곧대로 인용하는 좌파 미디어에 의존하여, ‘자유주의 국가에서 용납할 수 없는 테러범 지모씨의 흉악성’과 ‘바른 민생 치안’의 경계를 허물려는 것이 된다. 인터넷 미디어로 접하는 뉴스 독해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문자’다! 결국, 내일은 ‘노무현대통령’도 노렸다. 글피는 ‘김대중대통령’도 노렸다. 글글피는 ‘김근태최고위원’도 노렸다. 글글글피는 ‘김한길최고위원’도 노렸다. 등등의 발언과 한나라당에 유리함을 몰고오는 이익이 있다를 집중 부각하여, 정치판에서 고용된 조직폭력배로 의심되는 지모씨의 존재를 숨기려는 것이 된다.
지모씨는 ‘열린당 대변인’과 ‘조직폭력배’의 경계를 허물고, 민생 치안을 지켜야 한다는 정부 여당의 책임감과 그것의 반대를 허물었다. 그것은 인터넷이란 문자 우선 공간을 사용하는 해체주의전략인 것이다.
4. ‘善’과 ‘惡’을 해체하여 ‘이익’과 ‘불이익’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좌파에 저항하는 바른 방법.
이성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는 발상은, 결국은 송두율의 철학과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으로 귀결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가 서로 엮일 수 없는 체제이면서도, 이익이 되니 엮일 수 있다는 식의 발상법을 하는 것이 좌파 세력일 것이다.
‘선’과 ‘악’을 아우르는 일은 결국은 몽롱한 자아 상태를 만든다. 우파 세력은 ‘개인적 자아의식’을 강화하는 배경으로 논의를 만들려 하고, 좌파 세력은 개인적 자아의 의식을 축소시키려 하고 있다.
아시아 연방을 중심으로 하는 배경으로서 ‘한국 다운 것’(한국인의 특성이란 연구가 중단된게 언제부터인가?)은 중단되며, ‘한국인’내부에 외국요소가 얼마나 있는가의 분할로만 논의되는 것은 주목될 수 있다. 아시아 연방은 결국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이게 하는 동일성 요소를 국민의 내면에서 허물어뜨리는 강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정치란 요소를 물고 늘어지는 좌파들의 배경에, 911이후의 뉴라이트 요소가 있다고 가르쳐줘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가폭력론도 자유주의 국가의 공권력의 집행의 필요성 일반을 겨냥하는 ‘반국가론자’의 사상임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결론으로 말하자. 지모씨의 성명에 대한 바른 답변은 한 가지일 것이다.
박근혜대표의 테러 사건을 유발시켰다고, 검거 당시 뇌사모류 발언과 소속으로서 주장된 흔적을 은폐하고자, 말장난을 즐기는 차원을 정면 보도해주는 이들에 대한 반론은 한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빈라덴’과 ‘지 모씨’를 연속으로 바라보면서, 자유주의 국가의 테러 방지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것이겠다. ‘양아찌 수준’으로 비춰지려 형량 감형 하려 애쓴다는 성명은 끌려다니는 측면이다.
‘빈라덴’ ‘김정일’ ‘지모씨’ 삼위 일체를 논하며, 집권 여당의 국가안보 민생 치안 불안의 요소를 압박해야 마땅하다. 그것도 가급적 ‘목소리’로 제시하여야 한다. ‘지모씨’의 테러명단에는 ‘정동영’도 ‘박근혜’도 있으니, ‘김대중’이 없으리란 법 없느냐고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어느 당에 이익 주러 출몰한 지모씨로 바라보며 이 따위의 전략에 흥분하면 말린다.
테러리스트를 정치 프로퍼갠더로 둔갑시키는 언론 홍보 전략을 꿰뚫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