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부 시즈오카현의 한적한 소도시 기쿠가와(菊川). 인구 4만7000명에 불과한 기쿠가와는 일본의 전형적인 농촌 속 소도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농업 혁신 스타트업인 ‘엠스퀘어(M²)’가 자리잡고 있다. 엠스퀘어는 도쿄대 농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크랜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딴 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일본 IT 회사 캐논 등에서 일하다 결혼을 계기로 기쿠가와로 이주한 가토 유리코(加藤百合子) 사장이 2009년 창업했다. 가토 사장은 기쿠가와로 이주한 뒤 한 산업용 기계 회사를 거쳐 기계 설계 컨설팅 사업을 하다 엠스퀘어를 창업했다.
엠스퀘어는 IT(정보기술)를 접목한 스마트 농장용 계측 기기와 산업용 로봇, 관련 소프트웨어를 판매한다. 또 수경재배용 배지(培地) 등 수경재배 관련 기술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기술을 채택한 농장과 실제 수요자를 연결시켜주는 유통업도 사업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스마트팜 기술과 관련해 기술 개발, 기계 및 소프트웨어 생산, 설치 및 운영, 컨설팅, 판로 개척까지 모든 것을 제공해주겠다는 것이다.
가토 사장은 “환경 오염, 물 부족 등의 상황에서 제조업 기술을 농업에 접목하면 생산성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영농 방식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창업에 나서게 됐다”고 농업 스타트업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앞으로 ‘대박’을 칠지는 모르겠지만 착실하게 일정 정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분야”라며 “장기적으로 성장성도 탄탄하다”고 덧붙였다. 엠스퀘어 직원 가운데 시즈오카(静岡) 출신은 가토 사장 한 명뿐. 나머지 직원들은 대부분 도쿄에서 ‘낙향’한 이들이다.
농업에서 가능성을 보고 입사한 20대 직원도 여럿이다. 가토 사장은 “앞으로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스마트팜 기술 수요가 늘 것으로 보고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사업 계획을 밝혔다.
2015년 농업 벤처에만 5조원 몰려
전 세계적으로 농업에 인재와 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은 농업을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 모델을 도입해 수익을 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새로운 프런티어(개척지)로 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농업에 인재와 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은 농업을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 모델을 도입해 수익을 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새로운 프런티어(개척지)로 보고 있다. 미국의 농업 스타트업 대상 투자정보회사 애그펀더(AgFunder) 집계에 따르면 2015년 농업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된 자금이 46억달러(5조1000억원)로 2014년 3억6000만달러(2조6000억원) 대비 2배가량 늘었다. 건수로는 총 526건으로 전년 대비(264건) 2배 정도다.
“올해는 전 세계적인 벤처캐피털 투자 축소 영향으로 소폭 줄 가능성이 높지만, 질적인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는 게 롭 르클레어 애그펀더 최고경영자(CEO)의 설명이다. 올 상반기 주요 분야로는 식료품 전자상거래(32%), 바이오 및 생화학(14%), 토양·작물 기술(9%), 재배 정보수집 및 분석(8%), 드론·로봇(8%), 대안 단백질(5%·투자 금액순)이었다.
글로벌 주요 농업 회사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 키우기에 나섰다. 독일 화학 회사 바이엘(Bayer)은 세계 최대 종자 회사인 미국 몬산토(Monsanto)를 660억달러(74조원)에 인수했다. 바이엘은 살충제, 제초제 등 농화학 분야 1위 회사다. 시장점유율은 23%. 여기에 더해 종자 산업까지 품에 안으면서 종합 농업 기업이 되겠다는 행보인 셈이다.
바이엘이 최근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IT(정보기술)와 농업의 융합 사업을 고려한다면 종합 농업 서비스 기업으로 발전하겠다는 전략이기도 하다. 바이엘은 IT를 활용해 농작물 상태, 기후 등 자연 환경을 정교하게 파악하고 적시에 알맞은 양의 비료와 농약을 투입하는 ‘디지털 농업’ 사업에 2020년까지 2억유로(2500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다.
몬산토도 2013년부터 위성, 무인기 등을 통해 날씨 정보를 수집한 뒤 대규모 경작지를 세밀하게 관리하는 ‘정밀농업’ 분야에 뛰어들었다. 일본경제신문은 “몬산토 인수를 발판 삼아 다른 회사들보다 앞서 농업 분야 혁신에 나서 관련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2월에는 중국 석유화학 회사인 중국화공(中国化工)이 세계 최대 작물보호제 회사이자 3위 종자 업체인 스위스 신젠타(Syngenta)를 430억달러(48조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올해 말까지 합병 절차가 마무리되는 미국 다우(Dow)와 듀폰(Dupont)은 각각 농업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등 관련 기술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농업이 미래의 유망 분야로 꼽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농업이 더 이상 생산량을 늘리기 어려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연평균 10%씩 늘어나던 농업 생산성은 1970년대 이후 연 2%대로 하락했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 평균 연 1.1%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신흥국도 이 같은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국은 개혁·개방이 있었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농업 생산성 증가율이 높았지만, 이후 연 2%에 못 미칠 정도로 부진하다. 화학비료와 작물보호제 사용으로 인한 소출 증가가 한계에 달한 셈이다. 1960~70년대 신흥국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린 품종 개량도 벽에 부딪혔다. 한때 GMO(유전자변형유기체)가 대안으로 꼽힌 적이 있었지만 GMO 개량종의 성과는 비료와 작물보호제 사용량을 줄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 작물육종학자들이 가능한 대안은 모두 시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흥국의 급격한 도시 개발과 선진국 농업 경제성 악화 등으로 경작 면적은 계속 줄고 있다. 지나친 비료 사용으로 인한 경작지 비옥도 저하 문제도 심각하다. 무엇보다 물을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관개 면적’이 한계에 달했다. 글로벌 물 부족 현상 때문이다. 토지와 물이라는 자연적 한계로 경작 면적을 증가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 농업 기술도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신흥국의 인구 증가도 계속되고 있다. 동시에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새로운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유엔은 2016년 74억명 정도인 세계 인구가 2050년 100억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핵심은 농업의 제조업화
2000년대 중반을 전후해 속속 등장한 첨단 농업 기술은 IT, BT(생명공학), 생화학 등에서 일어난 발전을 농업에 접목하는 방식으로 현재 정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땅·햇빛·물 등 자연에 기반해 작물이나 사육동물 등을 기르고, 그 과정에서 비료·작물보호제·농기구를 활용해 산출량을 늘리는 전통 농업의 구조를 확 바꿀 수 있다는 게 최근 농업 혁신 기술의 공통점이다. 가령 토지와 물, 햇빛은 수경 재배와 식물 재배에 최적화된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활용한 스마트팜을 통해 극복 가능하다.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내고 삽입할 수 있는 일종의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는 단기간에 원하는 형질의 동식물을 만들 수 있다. 저렴해진 센서 기술과 사물인터넷(IoT)을 통해 경작지 환경을 세밀하게 통제하고, 그 과정에서 드론이나 로봇을 활용하는 기술로 전통 경작보다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아예 한발 나아가 인공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하거나, 곤충 등 이전에 인간이 먹기 어려웠던 생물을 새로운 식량으로 바꾸는 기술도 생화학 발전으로 가능해졌다. 이러한 농업 혁신은 ‘농업의 제조업화’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자연이라는 제약을 넘어서서 자유자재로 동식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가령 미국 중북부 내륙 아이오와주에서는 미국 농업 기업들이 농가를 대상으로 정밀 농업용 기기와 서비스를 판매한다. 농기계와 위성, 드론 등을 통해 수집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수㎡ 단위로 쪼갠 경작지마다 파종, 시비제초, 추수 등을 제각각 다르게 하는 것이다.
농사짓는 동안 40가지 이상을 해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한두 가지만 정확히 이뤄져도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가령 아이오와주에서 700에이커(2.8㎢) 농지에 옥수수와 콩 농사를 짓는 폴 디젤맨은 태블릿PC를 통해 농지 속 질소 함량 등 세밀한 정보까지 확인한 뒤 농사짓는다. “1에이커당 연 10달러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수확량 증가효과는 그 이상”이라며 “흙의 영양 상태를 관리하고 수확 시기를 판단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1위 농기계 회사 존 디어 (John Deere)는 몇 년 전부터 트랙터 등에 위성항법장치(GPS)를 탑재하고 있고, 현재 무인 농기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드론 업계 1위 중국 DJI는 2015년 말 아예 농업 전용 드론을 개발해 출시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농업과 접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IT뿐만 아니라 태양광발전·스마트그리드 등까지 도입해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그만큼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전에 경작이 힘들었던 사막 지대에서 풍부한 태양광 등을 전력원으로 활용해 온도 조절과 물 공급을 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선드롭(Sundrop)은 남서부 포트오거스타 사막 지대에 2만3000장의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집열장치에 모은 뒤, 그 열에너지로 발전기를 돌리고 냉난방을 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토마토 농장을 운영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으로 해수를 담수화해 물을 공급한다. UAE(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국가들도 이런 방식으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
농업 혁신의 경제성에 대한 전망은 아직 불확실하다. 경제적으로 대규모 성공을 거둔 기업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술들이 시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수·축산업에서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례들은 여러 건 있다. 가령 양식업의 경우 노르웨이의 마린하베스트(Marine harvest), 에우스테볼(Austevoll), 살마르(Salmar), 그리그(Grieg)와 싱가포르 퍼시픽안데스리소스(Pacific Andes Resources) 등 5개 회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영업이익률은 16.3%(2014년)로, 같은 기간 한국 동원산업(5.9%)의 3배 수준이다.
PLUS POINT
와인 유통 뒤흔드는 ‘푸드 테크’
2008년 영국 중부 노르위치에 세워진‘네이키드 와인스(Naked Wines)’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푸드테크(food+tech·식품 산업에 IT를 접목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업 모델) 회사 가운데 하나다. 네이키드 와인스는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을 와인 유통에 접목했다.
네이키드 와인스 회원은 매달 40달러(4만 5000원)를 내면 전 세계 100여개 와인 생산 업체들이 생산하는 280여종의 와인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네이키드 와인스가 회원들로부터 거둔 돈으로 포도 재배 및 와인 생산 자금을 대기 때문이다.
“품질이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소량생산에 그쳐야 했던 와인 생산 회사에 자금을 대는 게 핵심 사업 모델”이라고 앤 센더스 네이키드 와인스 사장은 말했다.
프랑스 보르도 소재 벤처캐피털(VC)‘33앙트레프레너’는 아예‘와인테크(wine+tech)’ 스타트업에 특화돼 있다“. 상대적으로 고가인데다 생산업체와 제품(라벨)이 많아 모바일 기반의 유통 사업에 나설 여지가 많다”는 게 33앙트레프레너의 설명이다.
푸드테크는 농업 혁신 가운데에서 가장 활발하게 창업이 이뤄지는 분야다. 안전하면서도 몸에 좋은 먹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을 뿐 더러, 그 틈새시장에 맞춰 농장을 운영하면서 첨단 영농 기법을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재료를 가지고 집에서 요리하는 방식도 부가가치를 창출할 여지가 많다는 게 스타트업 업계의 시각이다.
가령 블루에이프런(미국), 헬로프레시(독일) 등은 가정으로 음식 재료를 배달해주면서, 그 재료로 해먹을 수 있는 요리 레시피까지 개발해 동봉한다‘. 쿠킹 박스’라고 불리는 식재료 배달 상자에는 손쉽게 요리할 수 있도록 재료들이 미리 반쯤 가공돼 있다. 파미고(Farmigo) 등 도시 근방의 농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플랫폼 사업도 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