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의 안식
- 사회교리 주간 3: 사회의 공동선
이사 40,25-31; 마태 11,28-30 / 대림 제2주간 수요일; 2024.12.11.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먼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어떻게 일하실 지에 대해서도 일러주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과연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어”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하신 것이었지만, 그 메시지에 따라서 행하신 활동은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보살펴 낫게 하며,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위해 투신하고자 하는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등 그들의 인간적 본성을 채워 주시는 활동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들을 쉬게” 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상설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마태오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그분의 공생활 활동을 집약하여 보도합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백성을 위해 봉사해야 했던 공직자들이 했어야 할 활동을 예수님께서 대신 수행하신 셈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일을 정부가 수행하는데, 이 일을 공동선이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교리 주간 셋째 날인 오늘은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할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동선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선익이 되는 것으로서 최고선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자 하면 자연히 사람들의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동선을 증진시키고 그 혜택을 고르게 나누는 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선이야말로 세상에 정치가 존재하고 나라에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공동선이란 무엇입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사회의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사목헌장, 26항)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 완성’이란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인생 목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인생 목표를 각자가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각자의 인간 본성이 채워져야 합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잠을 자고 쉬어야 합니다. 일도 해야 하고 건강해야 하며 교육도 받아야 하고 의사표현의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개인이나 집단 간의 권리가 충돌할 경우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도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대변해 줄 대표를 선출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반드시 채워져야 할 조건들을 모두 공동선이라 합니다.
공동선의 본질적 요소는 “인간 본성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또한 공동선의 성격상, 시민들의 직책, 기여도, 조건들은 서로 다를지라도 한 정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이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56항). 한 나라의 공동선을 책임지고 운영되는 정부의 정치 및 행정 활동에 대해서, 교회는 존중하고 협력하지만 개입하지는 않으며 다만 최고선의 가치가 공동선에 반영되는지 등 가치상의 서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 23세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공동선은 전체 인간, 곧 정신의 요구만큼 육체의 필요성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권력은 공동선을 여러 방법과 단계로 실현해야 하고, 동시에 가치 서열을 올바로 인식하여 존중하고, 영신적 선 못지않게 육체적 유익을 증진해야 한다”(어머니요 스승, 57항). 따라서 정부의 공권력이 정의롭게 행사되는지,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지, 경제적인 기회와 노동의 조건은 공정하고 공평한지 등 정치의 윤리적 상태에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지난 군부 독재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저항한 것도 이와 같은 근거에서였습니다. 사목헌장에서도, “교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자기 교리를 가르치며, 사라들 가운데에서 자기 직무를 지장없이 수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하는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76항)이며, “육신과 불멸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현세에서 그 존재의 요구들을 다 채우지 못하며, 완전한 행복을 얻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법은 영원한 내세의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데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하고 그 같은 목적의 실현에 도움이 되어야”(59항)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공동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3일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현 대통령이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점령하고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는 동시에 선거관리위원회를 침탈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헌법과 법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내란 범죄였습니다. 비상 계엄은 전쟁이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적 안보 위기에 처했을 경우에 한하여 국무위원들의 심의를 통하여 시행하도록 계엄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이런 본질적이고 절차적인 규정을 무시하고 마치 절대 군주처럼 헌법 기관을 무력화시키고 국민의 기본권마저 무시한 채 중무장한 군인들을 수족처럼 부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현대 국가의 사회적 공동선은 헌법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공동선이 규정되어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렇습니다.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화정의 질서 그리고 주권재민의 원칙이라는 사회적 공동선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 대통령은 이 가치와 질서와 원칙을 원천적으로 무시하고 짓밟음으로써 내란 수괴가 되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최고선의 가치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공동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로 역사에 뿌리내린 제도입니다. 그리고 공화정의 질서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가 권력을 분점하면서도 국정에 있어서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사회적 재화와 기회 그리고 갈등에 대해서 법률에 따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석열은 그 동안은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무소불위를 남발하여 운영해 왔고, 이번 내란 성격의 친위 쿠데타에서는 특전사와 수방사와 방첩사 등 친위부대의 무력을 통해 국회를 점령하려다가 한밤중에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공동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기반입니다. 국민은 주권자로서 일시적으로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행정부에 권력과 권한을 위임했을 뿐인데, 윤석열은 권력과 권한을 사유화시켜 국가의 안보와 국방 외교, 경제와 민생은 물론 국격도 형편없이 추락시켰습니다. 권력을 위임 받은 봉사자가 아니라 절대 왕정의 군주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리하여 국회는 윤석열을 대통령 직무에서 배제시키기 위하여 탄핵소추안을 상정하려 하고 있고, 공수처와 경찰은 체포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연일 전국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탄핵 촉구 집회를 열고 있고, 특히 국회가 있는 여의도 의사당 앞 거리에서는 매일 같이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2.3 비상 계엄 전에 거의 한 해 내내 열리던 토요 촛불 시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청년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정치적 항의를 하기 위한 집회가 흥겨운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 시기 대한민국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긴박하고 안개 속에 갇혀 있습니다. 윤석열과 집권 여당이 탄핵을 반대하면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윤석열 탄핵, 김건희 구속”과 함께 “국힘당 해체”라는 구호까지 외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 힘 당은 헌법과 법률이라는 우리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 앞날에 닥칠 이해 관계에 대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과연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어”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방법, 그것은 우리가 최고선에 따른 공동선을 지키고 증진하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의 선물, 그것은 우리가 공동선을 짓밟고 사회악을 저지른 악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이 희망을 만들고자 애쓰는 많은 시민들이 지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