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까지 사랑이었던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년 2월 6일 ~ 1902년 6월 11일)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보통 헨리 G. 아펜젤러라 표기한다.
미주 펜실베니아주의 숀더튼의 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동주 소재지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의 드류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개신교 중에서도 감리회 신자로,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같이 한국을 방문한 언더우드처럼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종파를 바꾸었다.
희비교차가 되는 부분인데, 처음에는 한국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는 언더우드도 마찬가지로 인도 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1883년 커네티컷주 하트포트에서 개최된 전미 신학교 연맹 수련회에서의 기록까지만 봐도 인도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변화는 1884년 프린스턴 신학교 선교모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회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조선땅을 밟자마자 미군 측의 폴크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언더우드는 홀몸이라서 바로 입국이 가능했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의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여담으로 이 때 배에서 내려 입국할 당시, 처음에는 무심코 아펜젤러가 먼저 내리려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자신의 아내인 엘라가 먼저 내리게 했다.
이후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회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처럼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를 만들었고,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
1902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위치한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격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지역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한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는 서로 절친한 친구였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이름을 딴 아펜젤러관(사적 제 277호)이 있다.
인성적인 면에서든 활동적인 면에서든 구한말의 인물들 중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이로, 현대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행보에 따른 역사적 의의 때문에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직접적인 조선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거나 당시 조선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을 교육 및 계몽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사에도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학생인권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였던 협성회를 조직한것도 아펜젤러가 최초이다.
또한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일단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장례가 치뤄진 곳도 바로 정동제일교회이다
배재고등학교는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아펜젤러의 동상과 초상화 등을 소장중이다. 관심이 있는 위키러라면 외부인 개방 시간에 배재고등학교 정문의 수위실에 문의를 하고 직접 볼 수 있으니 참고. 그 외엔 정동제일교회 근방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아들 내외와 딸의 묘역은 합정역 인근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https://youtu.be/WrXA3888CII
아버지를 이은 한국사랑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양화진선교사 묘원)
▶주일 학교 때 전도사님께서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아펜젤러 선교사님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다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만은 기억한다
아펜젤러선교사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서 마음에 먹먹함과 함께 너무 너무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조선사람도 자신의 생명이 아까워 뛰어들지 못했을 깊은 바다에
먼 동양의 어떤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바다에 뛰어든 그분!
그 때 그 시간 그 광경이 상상되는 동시에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교차한다
무지하고 죄인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먼 곳에서 이땅에 내려 오셔서 친히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
그 큰 사랑이~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사랑이 아닐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숙연해진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분!
먼 타향에서 시신도 없는 가묘를 쓴 선교사!
그런 분들이 온 땅에 얼마나 많을까
이 순간에도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누군가를 위해 몸바쳐 사랑을 행하는 이가 있을터...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그 크고 큰 숭고한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
◇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
* 아펜젤러 선교사는 여명기 조선 땅에 들어와 배제학당을 세우고,
정동제일교회를 세워 어린 양들을 돌보다 해상사고로
지난 1902년 고군산열도 어청도에서 순교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105주년을 맞이하여,
전북 군산시 내초동에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가 들어섰다.
* 주소: 전북 군산시 내초동 109-16
 * 아펜젤러 선교사 | *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창립하였고, 배재학당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성서번역사업, 문서사업, 청년운동을 통해 민족 계몽과 복음전도에 힘썼다.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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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펜젤러는 1887년 4월 북쪽지방으로 1차 전도여행을, 1888년 봄에는 2차 전도여행을 하였다. 5월 포교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전도여행을 감행하여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 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이 땅을 측량하고 상세지도를 그려낸 진정한 순회 선교 탐험가였다. |

* 초기의 배재학당 *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1887년 2월 고종이 “유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집”이란 뜻의 배재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한국 근대기에 있어 개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민족의 수난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며 기독교 학교의 대표적 소임을 다해왔다. | 
* 정동제일교회 * 아펜젤러는 한국인들에게 성경공부도 시키고 예배도 드리기 위해 정동에 위치한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이곳을 “벧엘예배당”이라 이름지었다. 1887년 10월 9일 이곳에서 첫예배를 드림으로 한국 감리교회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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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펜젤러 선교사가 승선했던 여객선 *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조수(조한규), 친지의 부탁을 받은 이화학당 여학생과 함께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자대회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가다가 다른 배와 해상 충돌 당하였다. 조난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광산업자 보울비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충분히 탈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 아래칸 3등 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려고 아래로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배를 찾기 위한 작업은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고, 학자들도 여러 갈래로 검증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있던 조난한 배와 유해 탐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비용부담이 큰 탓이다. |

* 서울 양화진의 아펜젤러 선교사 묘역 | * 지금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아펜젤러 선교사 묘역은 가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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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밟지 않은 툭 트인 바다 밑 묘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무덤 속에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는 잠들어 있다. 그는 그의 품에 영혼을 안고 천국에 들어갔다.” -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례식 때에 사용한 조가가 추모비에 새겨져 있다. |

* 아펜젤러 순교 기념관의 1층에는 아펜젤러의 생애에 대한 자료, 2층에는 한국교회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