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는 것 요4:11~18절 2025.2.23. 주일오전
* 야곱의 우물로 영적 목마름이 없는 자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처럼 사마리아인들도 그러한 조건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2절의 말씀에 “우리의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합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조상인 야곱이 준 이 우물이 있다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합니다. 때문에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철저하게 신앙에 있어서 유대인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모두 같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의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 다른 교회, 다른 종교 단들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을 경쟁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종교적인 행위, 즉 의식과 형식에 불과 한 외적인 것으로 종교의 흉내를 냄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이나 조산으로부터 지키고 내려온 종교적인 제도인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와 절기 제도에 의해서 열심히 제사를 들리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비롯해서 각종 제물을 드리며 또 자신들에게 제사 들리는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한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고, 그리고 역사와 전통에 의해서 행하여지고 있는 자신들의 삶은 마치 계3:17절의 말씀처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이나 동일하게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인 실상을 몰라 안타까워하는 몸부림이 없고 애타함이 없고 목말라 하는 갈증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예배하는 웅장하고 거룩한 예배당이 있고, 자신들에게 듣기에 재미있고 아멘으로 동의하게 하는 축복의 메시지인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십일조와 감사 헌금이 있고, 열정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 다양한 종교 행위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라고 힘주어 외칠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계시록 3:17절의 말씀처럼 내가 눈 먼 상태 벌거벗은 수치의 상태를 알고 내 곤고한 것과 가련하고 가난한 나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깨달아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임을 알고 이 죄 때문에 몸부림 치고 안타까이 회개하며 어찌 할꼬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매달리는 그 마음과 정신 그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성도에게는 영적 목마름과 가증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전하여진 생명의 메시지 성령이 역사하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내가 주시는 생며입니다.
*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즉 예수
13~14절"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물이란 야곱의 우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15절에"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물을 길러 오지도 않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효능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자신에게 가져오는 유익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에게 생수를 구합니다. 구하지 않는 자에서 구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생수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수준에서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를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구하고 살아가지만 그 수준이 생수를 자기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할 때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남들과 다른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서 성령을 구하기도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도 역시 은혜가 주어지면 마치 자신의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여인의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생수를 단지 한번 마시면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목마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야곱의 우물도 아니고 유대 나라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그 어떤 종교적인 제도나 행위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세상의 권력도 아니고 돈이라는 재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만나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의 비밀을 깨달아 그분이 생명의 생수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말씀으로 섭취하고 그분을 마셔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으로 구속의 결과로 오신 성령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령으로 기록된 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눈이 뜨이고 감각이 살아나 그분을 알게 되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예수님이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되어 나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 감격이 솟아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잘 듣고 에수님을 발견해야 하고 그분을 꼭 만나야 합니다.
* 네 남편을 불러오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을 드러내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물 길러 오지 않게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물을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생수가 무엇인줄 모르는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여인에게 생수가 무엇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18절에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결국 예수님이 오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발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남편에게 다섯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여인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남자로 만족하지 아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와 수치가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죄가 드러났을 때 여인은 더 이상 야곱의 우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 물을 마시고 살면 뭐합니까? 문제는 자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살아온 자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내 자신의 실상과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 감사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을 깨달은 성도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가려주기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하신 은혜에 감격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를 드리는 제물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