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여행의 참맛
허봉조
1956년 부산 출생. 2008년 「시와 산문」 등단. 에세이집 「즐거운 농락」, 칼럼집 「행복도 즐기기 나름」,「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처럼 높게」.
늦은 가을, 배낭여행을 즐겨보셨는가. 이미 두 번의 가을이 더 지났음에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본다.
직장에서 ‘장기 재직자 재충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힐링(healing)을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와 둘이서 말이다.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2박3일 일정을 오롯이 대중교통 이용과 걷기만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연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에도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벗어난다는 달콤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날은 항공기 시간에 맞춰 오후 시간만을 할애했다. 첫 일정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 마라도로 가기 위해 모슬포 항으로 갔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얼룩졌지만, 유람선이 운항한다니 천만다행이었다. 기상상태 등에 따라 발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는데, 바로 배를 탈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니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우리는 아마도 평소에 복 받을 일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추켜세우며, 승선을 기다리는 동안 미리 준비한 점심을 먹고 송악산 주변도 둘러보았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라는 마라도는 사람보다 자장면을 파는 식당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고 할만 했다. 총 29만8천㎡(9만평 정도)의 넓이와 걸을 수 있는 길이가 2.5㎞로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해물이 고명으로 얹힌 자장면을 맛있게 먹고, 금빛억새가 살랑거리는 언덕배기에서 사진도 찍었다. 학생 1명에 교직원이 3명이라는 초등학교 앞에서도 기념촬영을 했으며,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3대 종교 시설도 눈에 띄었다.
둘째 날은 제주올레 걷기와 한경면 고산리에 위치한 수월봉으로 정했다. 화순 금모래해변에서 출발해 대평포구로 이어지는 9코스의 반대방향 길은, 거리는 짧지만 난이도가 높은 편. 작은 산 하나를 가로지르는 듯 시작된 산길은 초보자들이 걷기에는 힘이 들 정도로 좁고 가파르게 이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중턱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낭이 젖지 않도록 방수용 덮개를 씌우고 비옷을 걸쳐 입으면서도 우리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제법 소리가 나도록 굵어져, 반들반들 물기를 머금은 바윗길을 로프에 의지해 간신히 내려가는 등 비옷으로 감춰진 어깨가 서늘해지고 바짓가랑이가 흠씬 젖을 무렵 걷기는 끝이 났다.
평일의 낮, 올레길을 걸으며 혼자 걷는 올레꾼을 예닐곱 명이나 만난 것도 드문 일이었다. 비를 피하는 동안 잠깐 얼굴을 마주한 올레꾼 중에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한 달 여정으로 올레길을 걷고 있다는 주부도 있었다. 가상한 용기에 놀랐고, 제주올레의 진정한 고수를 만난 듯 반가웠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화덕피자와 커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점심을 해결하고, 젖은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등 비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오후 일정을 위해 다시 배낭을 멨다. 대평리에서 시외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수월봉은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그 의미가 컸다. 가로로 층을 이룬 두터운 지층인 화산쇄설층은 세로로 줄이 그려진 주상절리와는 대조적으로 장엄하고 이색적인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두 번째 밤은, 산방산탄산온천에서 몸을 녹이고 그곳 게스트하우스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배낭 속에서 눅눅하게 풀이 죽은 옷가지들을 끄집어내어 말리는 것이, 비가 올 때마다 양동이를 받치고 방바닥에 옷을 널어 말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쉰아홉 번째 생일인 셋째 날은,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년째 제주올레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한라산 등반을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정말 좋은 기회였다. 가을단풍이 아름답다는 영실코스는 이미 단풍잎은 떨어지고, 초반부터 길게 이어진 나무계단이 쉬운 듯 보였지만 가파른 경사와 굴곡으로 적잖이 힘이 들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여러 코스의 갈림길 표시가 있었지만 우리는 올랐던 곳으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산을 오르며 만났던 단체여행객 중 한 학생이 ‘올라갈 때도 힘이 들었는데, 내려가는 것도 힘이 든다.’며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 기초체력이 약하다며 웃었던 것이 부끄러울 만큼 나무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탱글탱글 조여 오는 뒷다리의 근육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성격이나 취향이 극명하게 다른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이다. 친구는 성격이 매우 밝고 경쾌하며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반면 나는 차분하고 진중하며 앞뒤를 가려 나설 때를 기다리는 편이다. 어떤 일로 친구가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크게 웃을 때도, 나는 만면의 미소를 띠기만 할뿐 지나친 표현이 경망스럽다며 옆구리를 찌르기도 한다.
굳이 실속을 따질 수는 없지만, 화끈한 친구와 뜨뜻미지근한 친구가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투지 않고 60년 세월을 단짝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부조화의 내면에 깔린 너그러움이라고 할까. 둘의 사이가 이종사촌이라는 점과 오랜 세월 서로의 장단점을 충분히 알고 공통분모를 찾아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일기념 파티는 제주의 별미 성게미역국으로 대신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우리는 피로도 잊은 채 나뭇가지 사이를 사뿐히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비행기가 곧 공항에 착륙하겠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내년 이맘때쯤 회갑 기념의 여행 가방을 꾸리게 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과 함께 건강관리를 위한 명랑한 하이파이브를 외쳤다.
힐링(healing)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몸은 힘이 들더라도, 마음은 훨훨 하늘을 나는 것. 예순이라는 나이 앞에서도 배낭을 메고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것.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마음은 이미 그곳을 걷고 있으며, 더 이상 바랄 것도 원망할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야말로 늦가을 여행의 참맛이 아닌가 한다.
아, 사흘간의 여행은 우리를 참으로 설레고 행복에 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