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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
예술과 모더니즘의 발전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지적 풍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2차 세게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생겨 났으며, 따라서 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지적 풍토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 세계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가져 온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이미 크나큰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였다.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큰 상처를 받은 서구의 전신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에 일어난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여러 사건들에 의하여 그 위기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첨예하게 부각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나 사상가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현상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더니즘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모더니티의 피치못할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일원론보다는 다원론을, 그리고 독단주의보다는 관용주의를 한결 더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세계 2차대전을 분수령으로 하여 미국 사회는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새로운 개척정신'으로 상징되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팽배하였던 희망과 낙관주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절망과 비관주의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란 혁명주의자들에 의한 미국 대사관 점령,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 등에서 보여지듯이 미국은 그동안 국제 사회에서 누리던 찬란한 영향력과 권위를 상실하였다.
반대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사건, 할렘가 와츠 등지에서의 폭동과 흑인의 인권운동, 켄사스주립대학의 총격사건과 여러 대학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학생 시위 등과 같은 국내 문제 역시 그 동안 안정과 질서를 추구하던 미국 사회에 큰 타
격을 안겨다 주었다. 결국 이런 모든 것들은 미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퐁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리처드 체이스는 일찍이 그의 고전적인 저서 '미국 소설과 그 전통(1957)'에서 "가장 훌륭한 미국 소설 중에서 많은 작품들은 통합보다는 오히려 급진적 단절을 인식하고 수용함으로써 그 존재와 에너지와 형식을 달성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지적대로 이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급진적인 단절'을 경험하였으며, 이런 경험은 가장 훌륭한 미국문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매우 의미있는 중요한 문학을 탄생시키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비단 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영역으로 널리 파급되어 나갔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말엽부터 랜덜 재럴과 존 베리먼 그리고 찰스 올슨과 같은 시인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재럴은 1946년에 출판된 로버트 로우월의 시집 "위리어 경의 성"에 관한 한 서평에서 로우월을 T.S.엘리어트와 같은 모더니스트 시인들과 변별적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재럴은 로우월의 시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반모더니즘'으로 규정하면서 그의 시는 앞으로 미국 시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년 후, 1948년 베리먼 역시 재럴과 마찬가지로 이 당시 미국시의 특징을 기술하기 위형 "포스트모던"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용어는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 투사시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으로 흔히 일컬어지고 있는 올슨에 의하여 다시 사용되었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인 문학 용어로 도입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의 일이다. 이 용어는 레슬리 피들러, 이합 핫산, 주전 손탁,
그리고 리처드 포이리어와 같은 비평가들과 이론가들에 의하여 문학과 문화 현상을 가르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특히 히들러와 핫산은 어느 누구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이론가들이다. 피들러의 입장이나 태도는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소크라테스' '포스트-프로이트주의' '포스트-청교도주의' '포스트-님성주의' '포스트-유태주의' '포스트-백인주의', 그리고 '포스트-영웅주의'등과 같은 표현에서도 가장 잘나타나고 있다.
핫산 역시 피들러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초엽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고 소개하는 데 지칠줄 모르고 정열을 보여 주고 있다. 원래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그 동안 공학도답게 자연과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새로운 문학적 현상에 대하여 폭넓은 배경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서 왔다. 그의 이론은 '침묵의 문학'(1967) '패러크리티시즘'(1975) '올바른 프로메테우스의 불'(1980), 그리고 오르페우스 절단'(1971, 1982)과 같은 여러 저서들을 통하여 피력되어 있지만, 최근에는 출판된 저서 '포스트모던 선회'(1987)에서 이제까지의 그의 이론이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후일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서 장 보드리야르와 장-프랑수와 료타르, 그리고 독일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에게서 힘입은 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몇몇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시기를 이보다 한결뒤에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맥캐프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시기를 케네디 태통령이 암살된 1963년 11월 22일로 파악한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인 대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쳉크스는 이 전총 특유의 재치와 유희로, 그것이 시작된 시간을 마치 인공위성의 발사 시간이라도 측정하듯이 정확
하게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간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에 일본 태생의 건축가 야마사키 미노루에 의하여 설계된 세인트 루이스의 프루이트- 아이고우 건물이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붕괴된 시간이다. 이 건축물은 그 동안 흔히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몇몇 문학 이론가들은 어느 특정한 문학 작품이 출판된 해를 분수령으로 삼아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시기를 측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니 태너를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개디스의 작품 "인식"이 처음 출판된 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1955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합 핫산을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1938년 9월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는 다름아닌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의 초판본이 출판된 시기이다. 사실상 많은 이론가들은 이 소설이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되는 일종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버틀러는 그가 집필한 어느 한 저서에서 "경야(經夜) 이후"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 여기서 '경야'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를 가리키며, 그 '경야(以後)'란 소설이 출판된 이후를 가르킨다. 그러니까 버틀러가 '경야이후'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때 그가 의도하고자 하였던 바는 모더니즘 이후의 문학과 예술,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과 예술이다. 그런가 하면 윌리엄 해밀턴을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은 T.S. 엘리어트가 사망한 바로 그 날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점으로 삼고있다. 그 동안 엘리어트는 제임스 조이스나 에즈러 파운드와 더블어 모더니즘의 대부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름아닌 1965년에 시작된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국제
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변별적으로 구분되는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서구 세계에 풍미한 여러 이론가들이나 사조들은 그것들이 처음 창안되고 발전된 나라의 특성을 거의 거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형식중의 하면 곧 러시아를, 구조주의 하면 프랑스나 체코를, 그리고 해석학 하면 독일을 연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상학은 흔히 스위스와 관련되어 있으며, 신비평은 주로 미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시작되면서부터 사태는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이제 마치 베를린 장벽처럼 국가간의 경계선을 초월하여 국제적인 현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이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지적 풍토를 이해하는 것에 못지않게 또 다른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컨템퍼러리'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를 서로 변별적으로 구별하는 일이다.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는 용어는 단순히 어느 한 주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당대(當代)'나 '동시대(同時代)'를 가르키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시기를 가르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용어는 낭만주의 시인들이 활약하던 19세기 초엽을 가리킬 수도 있고, 리얼리즘이 풍미하던 19세기 중엽을 가르킬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컨템퍼러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당연히 20세기 후반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예술이나 문화 혹은 사회 현상을 가르킨다. 그러니까 예술과 고나련하여 말할 때 20세기 당대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은 모두 다 일단은 이 '컨텐퍼러리'로 범주화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아직도 낭만주의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작품을 쓰는 작가들, 리어리즘과 자연주의 전통에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들, 그리고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왕성한 실험 정신에 입각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모두 함께 속해 있게 마련이다.
미국 문학,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소설 장르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본다면 한편으로는 솔 벨로우, 필립 로드, 버너드 맬러머드, 존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 윌리엄 스타이런, 존 가드너, 존 치비, 허버트 고울드, 라이트 모리스 등과 같은 일군의 작가들이 이 '컨텐퍼러리' 작가들로 범주화 된다. 한편 '포스트 모던'이라는 용어는 '컨텐퍼러리'와는 달리 상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절대적 개념이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근대'를 가르키는 '모던' 이후에 오는 특정한 어느 한 시대를 의미한다. 그런
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용어는 단순히 시대적 구분만을 기술하지 않고 특정한 가치를 기술하기 위한 제한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해서 20세기의 모든 현대 작가들은 '컨템퍼러리' 작가로 범주화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당연히 '포스트모던' 작가들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비록 20세기 후반에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작품의 경향이나 스타일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 접근하는 예술가들은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랍 핫산이 지적이고 있는 바와 같이 윌리엄 블레이크, 마키 드 사드, 콩트 드로트레몽,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마라르메,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전통에 속해 있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가히 '포스트모던'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현상은 작가들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론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와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사상가들은 모두 여러 면에서 포스트모던의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니체는 가장 포스트모던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핫산은 그의 논문 '문화, 불확정성 그리고 내재성'(1978)에서 바로 그를 가르켜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있다.
핫산은 니체가 1)인간의 탈중심화, 2)새로운 것의 활력, 3)해석학, 4)이성의 탈신격화, 5)통일성의 거부, 6)주체의 공허성, 7)사실과 허구의 균형, 8)언어의 한계성, 9)허구로서의 사고, 10)기원의 부정, 11)가치의 에네르기학, 12)우연적 예술과 형이상학적 유희, 13)시작과 종말의 붕괴등 모두 열세 가지 관범에서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리처드 파머를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은 하이데거를 최초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분만 아니라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사상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활약한, 그리고 가장 본격적인 의미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중세의 암흑기에 흔히 비유되는 스탈린 시대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부할되어 비로소 서구 세계에 소개된 그는, 그의 '다이성'과 '이어성' 혹은 '다성성'이나 '카니발화'와 같은 개념을 통해 간접 혹은 직접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컨템퍼러리'와 '포스트모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변별적으로 구별하였지만 이번에는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을 포스트모더니티'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이나 '포스트모던이즘'이 주로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 국한되어 사용되는 문예적 개념인 반면, '포스트모더니티'는 주로 철학 이론이나 사회 이론에 국한되어 사용되는 이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포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와 개념상 별다른 구별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어느 한 시대에 풍미한 문예 전통을 의미하는 한편, '포스트모더니티'는 역사적 시기에 거의 관계 없이 단순히 '문학과 예술의 근대화 혹은 현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티'는 작가들이 개인의 재능과 창의력을 구사함으로써 끊임없이 전통적인 형식을 수정하고 확충시키는 작업을 가리키기 일쑤이다.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모더니즘'에 상응되는 개념인 '모더니티'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헨 슐테-자스의 지적대로 '모더니티'는 흔히 '산업화와 이른바 고도의 자본주의 등에 의해 특정지워지는 사회 형태 혹은 사회적 물질적 재생산의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퍼스펙티브에서 볼때 이런 현상은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를 걸쳐 20세기 초엽에 이르러 절
정에 달하였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사회적 모더니티가 문화적으로 침전된 형태가 바로 모더니즘인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 다음에 오는 형태, 븍 후기 산업화와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질적 재생산의 유형르 가르킨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포스트모더니티 시대의 문화적 재생산의 유형을 가르키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티는 이와는 약간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처드 파머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20세기 현대의 예술적 경향으로 파악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티'를 문화적 현상이나 역사적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다소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넓은 의미에서 문화에 포섭되는 영역으로서 이 두 영역은 서로 엄격히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파엄가 '포스트모더니티'를 시대적 개념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아놀드 토인비의 이론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토인비가 그의 "역사연구"에서 시대구분의 개념으로 사용한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티'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영역의 혼동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문학에 국한된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어 왔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온 사람들 역시 문학 비평가들이었으며, 그것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해 온 사람들 역시 문학 비평가들이거나 문학 이론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연극, 영화, 댄스, 사진, 비디오 아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예술 영역에 걸쳐 매우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에 못지않게 문학이외의 다른 예술 영역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20세기 후반의 예술 분야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여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양을 받지 않은 분야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록 포스트 모더니즘이 이렇게 여러 예술 영역에 걸쳐 폭넓게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 영역에서 동일한 시기에 그리고 동일한 양상으로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하는데 기본적인 모델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건축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각각의 예술 분야 사이에 존재해 있는 차이점을 검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의 대변자 중의 한사람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더 로헤는 일찍이 건축이 가장 강력한 시대 정신의 표현물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파올로 포르토게시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젱크스는 역시 건축이 일종의 언어이며 의사소통의 수단에 해당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페르디낭드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그는 "간단히 정의해서 포스트모더니즘 빌딩은 동시에 적어도 서로 다른 두 층위에서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다른 건축가들을 비롯하
여 특정한 건축적인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소수 사람들에게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 대중전체, 즉 안락과 전통적 건물과 생활 방싱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갖는 그 지역의 거주자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 건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건축이 지니는 이런 기호학적 특성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 특히 그 중에서도 인터네셔널스타일 건축 양식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나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그것은 방금 앞서 논의한 현대화와 공업화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예술 영역보다도 이렇게 건축에서 이런 비판이 가장 먼저 그리고 다른 어떤 예술 영역보다도 이렇게 건축에서 이런 비판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첨예하게 일어나게 된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잇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동안 모더니즘이 현대화와 맺어 온 영향이나 결과가 보다 명시적으로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포르토게시의 지적대로 다른 어떤 예술 영역보다도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실용적인 욕구와 필요성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 몇 십년 동안 서구 세계를 풍미해 온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소외는 몇몇 젊은 이론가들에 의해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루이스 머포드와 같은 모더니즘 건축을 열렬히 환영하던 이론가들마저도 모더니즘 건축에 대하여 적지않은 불만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알도 반 에이크를 비롯한 이른자 '틴 텐'의 건축가들은 모더니즘에 대해 수정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그들은 추상적 공간을 지양하고 보다 구체적 장소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은 추상적 공간을 지향하고 보다 구체적 장소를 중요시하였
으며 무엇보다도 지방주의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이런 비판은 마리오 보타와 스위스의 티시노 건축가들에 의해서도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들 이론가들의 비판이나 도전은 어디까지나 모더니즘 내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렇게 급진적인 형태라고 간주할 수는 없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형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비판과 도전은 1960년 초엽 제인 제이컵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녀는 '위대한 미국 도시들의 죽음과 삶'(1961)이라는 저서에서 모더니즘과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맹렬히 공격하는 동시에 새로운 건축 양식의 출현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젱크스의 지적대로 진정한 의미의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이론은 제이컵스의 저서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더니즘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도전은 1970년대 초엽과 중엽에 이르러 본격적인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고전적 저서로 흔히 평가받고 있는 '라스베가스에서 배운다'(1972)에서 로버트 벤추라와 데니스 스코트-브라운 그리고 스티븐 아이즈나워는 모더니즘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찰스 젱크스와 포르토게시의 저서 '현대 건축의 시작'(1974)과 젱크스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언어'(1977)는 가장 고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후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로버트 스턴, 마이클 그레이브, 필립존슨, 벤추리와 같은 미국 건축가들, 그리고 알도 로시, 로버트 크리거, 제임스 스털링, 마리오 보타와 같은 구라파의 건축가들에 의해 널리 소개되고 전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한 사람들이다. 이밖에도 한스 홀라인이나 톰 비비 혹은 이조자티 아라타와 같은 건축가들도 모두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상 포스트모더니즘 전통이나 운동에 속하는 건축가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다. 그리고 필립 존스와 존 버지에 의해 설계되어 뉴욕시의 맨허턴에 세워진 미국 전신전화회사(AT & T)의 본부 빌딩, 존 포드먼에 의해 설계되어 로스앤젤레스의 신시가지에 세워진 보나벤추라 호텔과 애틀란타의 피치트리센터, 그리고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 등이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1980년 7월에 베니스에서 개최된 국제 미술박람회인 비엔날레의 건축전은 파올로 포르토게시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이 되었다고 할 만큼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의 그것과 비교하여 과연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1980년대의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역사적 절충주의(折衷主義)'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공시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그것은 과거의 다양한 생활 양식에 대한 향수를 강조함으로써 전통이나 역사성에의 복귀를 주장한다. 모더니즘 건축이 비역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바로 역사적이고 절충주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지난 반 세기 동안의 기억 상실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음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이런 특성을 가르키기 위해 찰스 젱크스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언어'에서 '급진적 절충주의'나 '애드호시즘'(특수주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는 '포스모더니즘 : 예술과 건축의 신고전주의'에서는 '자유형 고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용어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와 맺고 있는 일종의 복고주의적 특성을 지적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포스트모
더니즘 건축은 특징적으로 일상성이나 대중성을 강조한다. 젱크스에 의하면 일상성이나 대중성을 강조한다. 젱크스에 의하면 고전주의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과 같은 다른 유형의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규칙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건축의 기술과 예술의 일상적 내용과 같은 현실의 여러 실재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도시의 문맥주의, 시각적 신인 동형성설, 도착된 질서의 의미적 사용, 폐허와 파편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새로운 수사적 형체' 등에 의해 특정지워진다. 그런데 젱크스는 이런 자유형적 고전주의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고전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규범적 고전주의'와 변별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에 있어 규범적 고전주의는 중요한 주제를 그리스 로마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흥의 고대식의 방법과 관련된, 분명하고 이상회된 스타일로 묘사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본질적인 면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자유형적 고전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대표 중요한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가지 다원적이고 복수적인 특성에 의해서도 특징지워진다. 그 동안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적은 것은 많다'라는 공식이 적용될 만큼 극도의 경제성과 미니멀리즘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건축에서는 모더니즘 건축에서라면 아마 마땅히 생략되거나 제거될 장식적이고 치장적인 요소가 오히려 중시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적어도 기능적인 면에서 모더니즘 건축보다 한결 덜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분명히 모더니즘 건축과의 의식적인 비판적 단절로 파악될 수 있다. 파올로 포르토게시가 그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후기 산업사회의 건축'(1983)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한 방향 전환을 월씬 벗어나 일종의 거부이며 단절이며 절교이다'라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자신있게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른 이유 때문이다. 모든 예술 영역 중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영역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그것은 다름아닌 건축의 영역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건축은 도널드 커스피트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과 용어가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되는 유일한 예술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최근의 건축의 특징을 기술하는 데 '포스트모던'보다는 오히려 '반모던'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는 건축의 경우보다 한결 미묘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더니즘이 논리적으로 발전된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기본적인 전제에 있어서는 모더니즘의 입장을 거의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더니즘 중에서 어떤 특정한 양상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가장 찬란한 호아금기를 맞이하였던 모더니즘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제 더 이상 '저항 문화'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저항 문화'는 커녕 오히려 '긍정적 문화'로 전락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의식적 단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