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건너편 게이트웨이타워 뒷골목에 깊숙이 자리한 ‘일미장어’는 장어소금구이 하나로 오랜 세월 명성을 쌓아온 장어 명가다. 1982년 당시만 해도 쪽방촌이었던 이곳에 장어집 문을 연 박동건(75)씨.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뜨거운 숯불에 장어를 굽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이 집은 입구의 커다란 화덕에서 장어를 굽기 때문에 들어서자마자 장어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풍겨와 군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메뉴를 보면 장어소금구이, 민물새우빙어찌개, 비빔밥을 세트로 구성한 장어구이정식과, 같은 구성에 장어를 반 마리만 주는 점심특선, 장어덮밥이 전부다.
주문을 하면 밭에서 갓 따온 듯 싱싱한 채소와 맛깔스러운 반찬, 장어뼈튀김이 나온다. 짭짤하고 고소한 장어뼈튀김을 오독오독 씹다 보면 테이블에 참숯 화로가 놓이고 그 위에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구운 장어가 올려진다. 화로는 장어를 따듯하게 보온해주는 용도다. 이 집의 장어구이는 놀랍게도 겉은 튀김처럼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럽기가 그지없다. 석쇠에 민물장어와 함께 올려주는 민물새우빙어찌개는 시원하고 깊은 맛으로 장어의 기름진 맛을 씻어 준다. 얼큰한 국물과 고소한 풍미의 장어구이를 번갈아 먹다 보면 어느새 장어 한 마리가 뚝딱! 락교와 초생강, 깻잎과 마늘 등을 곁들여 먹어도 좋지만 이 집의 장어구이를 제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비빔밥이다. 장어를 반쯤 먹어갈 즈음 큼직한 대접에 갓 지은 밥이 담겨 나온다. 달착지근한 장어소스를 뿌린 하얀 밥에 맵싸한 부추무침을 듬뿍 얹고 장어구이를 몇 점 올린다. 찌개 국물을 두어 숟가락 떠넣고 장어구이 살을 으깨어 비비면 그야말로 명불허전! 뱃속까지 든든해지면서 기운이 불끈 솟는다.
주인장 박동건씨는 6·25전쟁이 끝난 뒤 열몇 살 때부터 일식집 주방에서 잔뼈가 굵었다. 독립해서 이런저런 음식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이곳 동자동, 그때만 해도 길에서 간판도 안 보이는 후미진 골목에 장어집을 냈다. 찾기 쉽지 않은 위치에 광고도 하지 않았지만 오는 손님들마다 입소문을 내주어 가게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자리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요리를 주무르는 주인장이 흔치 않은데, 박씨는 특유의 고집과 장인정신으로 직접 장어를 구우면서 이 자리를 지켜왔다.
그래서일까. 이 집은 한번 단골이 되면 직장이나 집이 멀리 이사를 가더라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장어구이의 본고장인 일본의 한국관광 안내사이트에도 올라 있어 일본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그들은 이 집의 뼈튀김 하나만 봐도 정성이 가득하다면서 일본에도 이런 장어집은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장어 뼈를 튀기려면 먼저 뼈를 발라 뜨거운 물에 데쳐서 핏물을 빼고 이틀 정도 실온에 말려야 한다. 준비과정에 손이 많이 가니 일반 장어집에서는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소금을 넉넉히 뿌려 느끼하지 않은 이 집 뼈튀김은 맥주 안줏거리로 포장을 해달라는 외국인들이 있을 만큼 인기가 좋다.
박씨가 처음부터 소금구이를 낸 것은 아니었다. 개업 초기에는 일식 스타일의 간장구이를 냈는데, 손님상에서 직접 간장양념을 덧바르며 굽다 보니 실내가 연기로 자욱해져 고민스러웠다. 때마침 단골이던 박종환 축구감독이 좋은 장어를 가져와 소금구이를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소금구이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소금구이를 해보니 연기가 덜 나고 맛도 담백했다. 손님들 반응까지 좋게 나오자 연구를 거듭해 자신만의 비법을 완성한 박씨는 그때부터 오로지 소금구이만을 고집하고 있다.
▲ 일미장어의 대를 이어갈 박기환씨.
신안 천일염과 양양 들기름으로
자신이 개발한 소금구이에 자부심이 대단한 박씨는 재료 준비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소금은 전남 신안에서 천일염을 사다가 간수를 뺀 다음 직접 볶아서 곱게 빻아 준비한다. 강원도 양양에서 친척이 농사지은 들깨로 들기름을 짜서 볶은 소금과 알맞게 섞는다. 이 들기름소금장을 장어에 네댓 번씩 덧발라가며 구우니 그냥 소금을 뿌려 굽는 것과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박씨는 “장어는 굽는 것이 기술이에요”라면서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직접 구워내고 있다고 했다. 참숯을 피워 장어를 굽기 때문에 점심은 11시 반에서 1시 반, 저녁은 5시 반에서 9시까지로 영업시간이 짧다. 하루 종일 숯을 피우면 숯 낭비가 많기 때문이다.
장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북 고창에서 100㎏ 정도 들여온다. “장어가 너무 크면 맛이 없어요. 그래서 1㎏에 4마리짜리를 씁니다.” 양념이 아닌 소금구이로 할 때는 육질이 더 연하고 부드러운 장어라야 맛있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이 집에선 비빔밥에 장어를 부숴 넣어야 하기 때문에 장어가 질기면 안 된다. 때문에 장어 대금을 바로바로 주면서 부드럽고 질 좋은 장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녀들이 출가한 뒤 박씨는 아내와 함께 식당에서 기거한다. 요즘 들어 부쩍 새벽잠이 없어진 그는 매일 새벽 한두 시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장어 손질을 시작한다. 수족관에서 뜰채로 장어를 건져서 그물망에 여러 마리를 넣고 꼭꼭 동여맨다. 그러면 장어들끼리 서로 비비지면서 겉면의 미끈한 점액질이 말끔히 닦인다. 장어가 지쳐서 움직임이 둔해지면 꺼내어 구이용으로 손질한 다음 냉장고에서 하룻밤 숙성시킨다. 활어보다 선어가 더 맛있듯이 장어도 숙성을 시켜야 더 맛있다고.
박씨는 좀 힘들더라도 식당에서 내오는 대부분의 음식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치부터 소스까지 이 집에서 내는 음식은 대부분 직접 만들고 있다. 손이 많이 가는 비빔밥용 장어소스도 온종일 공을 들인다. 커다란 솥에 멸치, 간장, 물엿, 갱엿, 소주, 정종, 설탕, 다시마 등을 넣고 물은 최대한 적게 부어서 하루 이상 끓인다. 국물이 졸아들면 술을 더 부어서 다시 졸여준다. 장어소스는 한꺼번에 넉넉히 만들어 두고 조그만 솥에 덜어, 구운 장어와 말린 뼈를 넣고 끓이면서 윗간장만 살짝 떠서 사용한다.
박씨의 아내 송영일(75)씨는 주방에서 반찬이며 민물새우빙어찌개 준비를 도맡고 있다. 남편 박씨를 따라 그녀도 장어 손질부터 굽기까지 선수가 다 되었다. 박씨의 둘째 딸 박홍남씨도 가게에 나와 카운터를 보거나 서빙을 돕고 있다. 2대 대물림을 준비 중인 아들 박기환씨는 누나와 함께 카운터를 보면서 장어 굽는 아버지를 돕고 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의 식당인 셈이다.
일미장어를 이어갈 기환씨의 바람은 한 가지다. “미각과 요리가 뛰어난 아버지께 열심히 배워서 변함없는 맛을 유지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