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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나생이
김선우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
----김선우, [나생이]({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년) 전문
김선우 시인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과 {도화 아래 잠들다}가 있고, 현재 ‘시힘’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나생이]는 그의 고향의 언어인 사투리를 통해서 여성성을 강조하고, 그 여성성을 통해서 ‘상승주의 미학’을 양식화시켜 놓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투리란 무엇이고, 표준어란 무엇인가? 사투리란 어느 특정 지방에서만 사용하는 언어이고, 표준어란 한 국가의 공식 언어이며, 대부분의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서울의 언어가 표준어이고, 그 이외의 지방의 언어는 사투리이다. 하지만, 그러나, 표준어와 사투리의 경계는 매우 자의적이고, 한 국가의 권력의 힘이 개입하여 그 자의적인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표준어는 예의 바르고 우월한 언어가 되고, 사투리는 예의 바르지 못하고 비천한 언어가 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투리가 심하면 고위직 공무원이나 입신출세하기가 힘들어지고, 더,더군다나 공영방송사의 아나운서나 기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학교의 교재는 표준어로 되어 있고, 모든 강의도 표준어 사용이 근본원칙이며, 따라서 사투리는 개그맨 수준의 만담과 소설과 영화 따위 등에서 불량배 수준의 욕설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투리도 엄연히 언어이며, 그 주체자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 영어의 제국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그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될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오늘날 사투리는 비천한 언어이며, 그 비천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중앙집권적인 힘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너무나도 서럽고 서러운 억압과 천대를 받게 된다.
‘나생이’와 ‘나새이’는 강원도와 경기도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사용하는 사투리이며, 그 표준어는 ‘냉이’이다. 냉이는 십자화목 십자화과의 식물이며, ‘나생이’,‘나새이’, ‘나숭게’라고 부르기도 한다. 냉이는 그 키가 10cm에서 50cm까지 자라며, 유럽이 원산지이고, 지나치게 건조하지 않고 일조량이 충분하기만 하면 들과 밭과 둑 따위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매우 잘 자라난다. 뿌리잎은 뭉쳐나고 긴 잎자루가 있으며, 깃꼴로 갈라지지만 끝부분은 넓게 퍼져 있다. 5~6월에 흰색의 꽃이 피고, 십자화十字花가 많이 달려 총상꽃차례(總狀花序)를 이룬다. 더욱이 이 냉이는 ‘달래, 씀바귀, 쑥, 미나리’ 등과 함께, 봄 들녘의 대표적인 나물이며, 비타민 B1과 C가 풍부하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냉이의 뿌리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제채薺菜라고 하며, 꽃이 필 때 채취하여 햇볕에 말리거나 생풀로 쓴다고도 한다. 그 약효는 비장을 실하게 하며, 이뇨, 지혈, 해독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요컨대 냉이는 봄나물로도 사용되지만, 비위허약 · 당뇨병 · 소변불리 · 토혈 · 코피 · 월경과다 · 산후출혈 · 안질 등의 처방에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충북 청주의 교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해마다, 봄마다 냉이를 캔 적이 있었고, 아직도 여전히 그 냉이캐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은 매우 삼가고 있지만, 봄 들녘에서의 냉이캐기, 미나리 뜯기, 씀바귀 캐기, 고들빼기 캐기, 달래 캐기, 돌나물 뜯기, 또, 그리고, 봄동산에서는 두릅과 고사리와 취나물과 고비 등의 산나물을 수십 년 동안이나 채취한 적이 있었고, 어쨌든 나는 ‘봄나물 채취의 대가’라고 할 만큼 그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냉이국의 그 구수한 맛 때문에 군침이 돌고 있지만, 냉이는 매우 특이하게도 준식충식물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냉이의 씨는 젖으면 끈적이는 합성물을 방출해내는 데, 바로 그때에, 수생곤충이 달라붙어 죽게 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백과사전 참조).
참고로 냉이무침의 과정을 적어보면 다음과도 같다.
냉이…………500g
소금…………조금
된장양념
된장…………1½큰술
다진파………1큰술
다진마늘……½큰술
깨소금………2작은술
참기름………1큰술, 초고추장양념
고추장………2큰술
식초…………1½큰술
진간장………1작은술
참기름………1작은술
다진마늘……1작은술
다진파………1큰술
설탕…………1큰술
깨소금………2작은술
1, 냉이를 잘다듬어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살짝 데친 후 찬물에 헹궈 물기를 빼세요.
2, 된장 1½큰술에 다진 파, 다진마늘,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골고루 섞습니다.
3, 초고추장에 진간장, 식초, 다진파, 마늘, 설탕,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골고루 섞으세요.
4, 데친 냉이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된장양념, 나머지 반은 초고추장 양념에 무치세요.
양념이 골고루 배도록 손으로 조물조물 무쳐 주세요.
ㅇ Cooking Point
냉이를 너무 오래 데치면 냉이의 색이 변하고 맛과 향이 떨어지므로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건지는 정도로만 데쳐서 찬물에 행구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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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은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라고 말하고,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듯이, 냉이는 봄들녘의 대표적인 나물이며, 그 냉이는 나물로 무쳐먹거나 냉이국을 끓여먹기도 하고, 한방에서는 매우 훌륭한 약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냉이는 가을에 싹이 터서 겨울을 나는 두해살이 식물이며, 그 맛과 향이 매우 독특한 봄의 전령사라고 할 수가 있다. 이른 봄이면 지금도 여전히 냉이를 캐는 아낙네와 아저씨들을 볼 수가 있고, 재래시장 곳곳에서는 아직도 아주 손쉽게 그 냉이를 살 수가 있다. 김선우 시인이 그 ‘냉이’를 떠올린 것은 봄철이며, 그는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맛을 생각하며, 너무나도 그립고 정겨운 고향산천을 떠올려 보게 된다. 냉이는 내 고향의 언어로는 ‘나생이’이며, 그 ‘나생이 철’이 돌아오면,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생이는 꽃망울이 피기 전에 그 뿌리와 함께 먹어야 하며, 그 꽃망울이 맺히면 그 줄기와 잎과 뿌리가 너무나도 뻣뻣하고 억세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지금은 아저씨들도 냉이를 많이 캐러 다니지만, 예전에는 나물을 뜯는 것은 여인들만의 몫이었으며, 따라서,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나’는 그 여인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이를 캔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고 힘든 노동이 아니며, 오히려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즐거운 유희가 된다. 할머니, 엄마, 순이, 또는 이웃집 할머니, 아주머니, 친구 등과 함께, 지나온 삶과 미래의 삶에 대한 정담을 나누며, 저절로 군침이 도는 냉이나물과 냉이국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어느 덧 배가 부르고, 그 주체자들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해지게 된다. 냉이를 캔다는 것은 너와 내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정담을 나눈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냉이를 캔다는 것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냉이국을 나눠먹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한 유희가 된다. 더욱이 겨울을 지나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여인네라는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따스한 소피”를 보는 배변의 쾌감이란 또한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소피란 오즘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며, 오줌이란 동물의 방광에 저장되어 있는 노폐물을 뜻한다. 오줌을 잘 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며, 또한 그것은 온 산천에 대한 영역의 표시를 뜻한다. ‘이 나생이가 자라나는 황금들녘은 나의 것이다’라는 선언문이 그 소피 행위에는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선우 시인에게 냉이는 낯선 이름이며, ‘나새이(나생이)’는 낯 익고 정겨운 이름이다. 냉이는 모국어이고, ‘나새이’는 모태언어이다. 냉이는 표준어이고, 나새이는 사투리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나새이와 함께, 그 추억이 담겨 있지, 냉이와 함께, 그 추억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태언어인 고향언어--사투리를 쓸 수 없는 그의 한이 담겨 있는 것이고, [나생이]의 제2연은 그 ‘한’이 맺혀 있는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고향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떠돌이--나그네의 설움(한)과 언제, 어느 때나 주변인에 불과하다는 설움이 겹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는 그 언어가 소통될 수 있는 무대가 있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 언어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그 언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체자들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김선우 시인에게 있어서 냉이는 ‘나새이(나생이)’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나새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냉이는 소통이 가능한 언어이지만, 나새이는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라는 시구에는 바로 이러한 까닭이 숨어 있었던 것이고, 또한, 그 ‘나새이’를 적어본들, 그 고향 사람들의 어감과 숨결이 들어 있을 리도 없고, 어느 누구도 그 ‘나새이’에 얽혀 있는 그 정겨운 추억과 일화들을 알아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김선우 시인은 프란츠 카프카가 독일어에 대항하여 소수집단의 언어인 이디시어로 글을 쓴 바가 있듯이, 그의 고향의 언어인 모태언어(사투리)로 이 [나생이]라는 시를 쓰는 더욱 더 과감하고 용기 있는 도전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꿈은 불가능의 꿈이고, 그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꿈이 된다. 시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며, 그 불가능성과의 싸움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시인들은 ‘예술가 중의 최고의 예술가’가 된다. 김선우 시인은 도대체 적어볼 수 없는 ‘나새이’를 적어보며, 그 ‘나새이’를 통하여 ‘상승주의 미학’을 완성해놓게 된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이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은 그 나새이가 흙속에 뿌리를 박은 것을 뜻하고,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은 나새이의 ‘나’와 그 나새이를 캐는 ‘나’를 뜻한다. 고향언어인 ‘나새이’라는 사투리와 ‘내’가 하나가 되고, 또한 그 ‘나새이’와 ‘내’가 하나가 된다. ‘나’는 나새이의 ‘나’이면서도, 그 나새이를 캐는 ‘나’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듯이, 그 ‘나--나새이’를 캐게 되는 것이다. 나새이를 캐는 것은 매우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일인 데, 왜냐하면 그 나새이가 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나새이는 인간과 나물을 넘어서서 새가 되고 있는 데, 왜냐하면 하늘을 나는 새는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형이며, 꿈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새이’가 새가 된 것은 ‘나’와 ‘새’라는 문자와 새들의 알과도 같은 ‘ㅇ’이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상상적인 비약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들과 동식물들이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자기 자신의 초월을 꿈꾸듯이, 그 나새이를 캐는 행위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행위가 되고, 보다 낫고, 보다 행복한 이상세계로의 수직 상승을 뜻하게 된다.
나는 감히, ‘비상콤플렉스’는 ‘외디프스콤플렉스’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큰 콤플렉스라고 선언할 수가 있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아버지 살해’가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 때문이지, 성적 욕망 때문이 아닌 것이다.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나 다윈의 ‘적자 생존’이라는 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와 상승 욕망을 증명해주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 말들은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우생학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상승 욕망은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도 않고,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종을 보존하려는 성적 욕망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이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을 자라나게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외디프스콤플렉스는 조건없이 비상콤플렉스의 하위개념으로 편입되어야 하며, ‘아버지 살해’는 ‘비상콤플렉스’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날아오른다’는 동사는 ‘달린다’와 ‘뛴다’라는 동사와도 다르고, ‘간다’나 ‘걷는다’라는 동사와도 다르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새는 호랑이와도 다르고, 뱀과도 다르고, 백상어와도 다르다.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처럼 빠르게 달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달릴 수는 있고, 뱀처럼 재빠르고 날렵하게 기어다닐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어다닐 수는 있다. 그리고, 더욱 더 백상어처럼 멋지게 헤엄을 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헤엄을 칠 수는 있다. 그러나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는 없다. 아니,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는 커녕, 그 흉내조차도 거의 낼 수가 없다. 우리는 마라톤 우승자를 ‘인간기관차’라고 부르고, 백미터 경주의 우승자를 ‘인간 탄환’이라고 부른다. 인간기관차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빨리 달릴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하고, 인간탄환은 새처럼 가장 빠르게 날아다닐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백미터 우승자와 마라톤 우승자는 단순한 개인들만이 아닌 데, 왜냐하면 그 기록의 기쁨이나 그 헌사의 품격에는 모든 인간들의 염원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더 새에 가까운 인간들이고,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이상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해 왔고, 그 반대방향에서 상승주의에 대한 미학이 양식화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1권 제2장, [상승주의 미학] 에서
상승주의는 삶에의 의지이며, 힘에의 의지이다. 상승주의는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가 피워낸 삶의 양식에 해당된다. ‘나’는 ‘나새이’가 되고, ‘나새이’는 ‘새’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김선우 시인은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에서 무엇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며,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이라는 시구는 또한,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봄 들녘에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새이’를 ‘수런수런 깃 치는’ 새들의 소리로 듣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그 새가 된 인간을 꿈꾸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는 알을 낳는 새이며, 그 2세를 통하여 새들의 역사를 이어나가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왜, 김선우 시인은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와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이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수치심도 잊어버린 채, 그 행위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뇌까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소피와 배변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소피: 배변의 쾌감;
2, 소피: 거름, 나새이가 싹 트고 자람;
3, 소피: 배란, 또는 아이를 낳음;
4, 소피를 보는 여인: 대지의 모신 또는 생산의 여신;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소피를 본다는 것은 배변의 쾌감을 뜻할 수도 있고, 그 소피가 거름이 되어서 그 나생이(나새이)의 발육과 성장을 돕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내가 나생이가 되고, 그 나생이가 새가 되는 상상적인 비약을 만끽한 바가 있듯이, 그 소피 보는 행위와 짜릿한 요기는 성숙한 여인(새)의 성적 욕망을 뜻한다. 나는 새가 되고, 새는 알을 낳는다. 그 알들에게서 새새끼들이 껍질을 뚫고 나오고, 이제까지 그 어느 새도 펼쳐보일 수가 없었던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비상의 꿈을 펼쳐보이게 된다. 성적 욕망은 종족의 명령이며, 그것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욕망이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자기 초월의 욕망, 즉, 상승 욕망을 뜻한다. 보다 낫고, 보다 행복한 삶, 유한한 존재의 껍질을 뚫고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싶은 꿈을 꾸는 것은 모든 유기체들의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 데,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속한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고 부처와 예수처럼, 문화적 영웅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타인과의 사랑을 통하여 어린 아기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인간이라는 종’이 유지되고, 그 종의 건강함과 함께, 역사의 발전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남성은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존재이고, 여성은 낳고, 또, 낳는 존재이다.
김선우 시인의 시들의 기원에는 성적 욕망이 있고, 그 성적 욕망에는 우리 인간들의 종의 건강함과 그 행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는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볼 만큼, 또는, 봄 들녘에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생이의 소리를 새들의 깃 치는 소리로 들을 수 있을 만큼, “그 짜릿한 요기”를 느끼고 있는 여인이며, 무한히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궁을 지닌 여인이다. 그 자궁에서는 ‘나’와 ‘새’의 알이 나오고, 즉, 그 ‘새의 인간’이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형으로서 태어나게 된다.
김선우 시인의 [나생이]는 표준어와 사투리를 통해서, 그 사투리의 언어를 살려내고, 그 사투리의 언어를 통해서 새의 인간을 꿈 꾸고 있는 제일급의 명시라고 할 수가 있다.
오오, 새의 인간을 낳고 싶고, 또, 낳고 싶은 여인이여!
오오, 대지의 모신이여!
오오, 생산의 여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