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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 도올 김용옥
▢ 책 속으로
- 자아~ 이게 웬일일까요? 한 글자 두 글자, 센텐스 바이 센텐스, 주어, 동사, 부사, 형용사 따위를 맞추어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보는 순간, 아니! 막연하지만 그 의미가 통달케 되면서 펼쳐지는 광막한 사유의 세계, 전 우주가 나의 의식권내에서 기발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나는 정말 무지막지한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 20쪽
이것은 반불교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논리를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전혀 새로운 논리다! 불교를 불교다웁게 만드는 모든 그룬트Grund(땅바닥, 근거, 기초)를 파멸시키는 다이나마이트다! 아니! 불교라는 종교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교냐? 종교가 반종교의 논리를 자기의 최상의 언설로서 모시고 있다니! --- 21~22쪽
나는 그 순간 종교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의 대오大悟였지요. 제도화 된 종교의 규범은 인간에게 덮어씌워진 겉껍데기라는 것! 껍데기는 가라! 나는 그 체험을 통하여 목사의 옷도 벗었고 승려의 옷도 벗었습니다. 그리고 무전제의 철학의 길만을 고집하며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 27쪽
해월海月(1827년생)과 경허鏡虛(1849년생)! 나이는 해월이 한 세대 위이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같은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허는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적 수양을 통해 새로운 정신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고, 해월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사회조직적 운동을 통해 정치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 다 조선역사의 개벽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 57~58쪽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이 되어 의승義僧의 총궐기를 호소하니 순식간에 전국에서 5,000여 명의 승군이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서산대사는 의승군을 거느리고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서울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 36~37쪽 서산은 수행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지만 매우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선禪·교敎 양면을 깊게 통달한 사람입니다. 하여튼 조선 중기에 서산과 같은 큰 인물이 스님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44쪽
바로 경허처럼 단단한 학식, 그것도 한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경허는 세칭 이단비도異端非道의 스님, 막행막식의 선승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경허처럼 무서운 학승이 없고, 그의 싯구에 담긴 한학의 소양은 그저 흉내만 내는 스님들의 화려함이 미칠 수 없지요. --- 49쪽
그러나 경허는 말합니다. “내려놓으라!”짐을 내려놓는데 전혀 예수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 부인과 남편과 사소한 일로 싸우고 그것이 짐이 됩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될 일을 계속 가지고 다니면서 이를 갈지요. 이 한마디만 제대로 이해해도 한평생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 77~78쪽
“부처님은 이 천장사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못 먹고 못 입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과 똑같은 것. 머슴이나 하인이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시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불공입니다.”--- 83쪽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이야말로 당·송의 불학을 뛰어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과 가치와 느낌의 결정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새로운 정신사적 활로라는 것을 이 조선땅의 미래 세대들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내가 택한 불교의 진리체계가 〈반야심경〉이라는 것입니다. --- 112~113쪽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자면, 선이니 삼매니 요가니 하는 말들이 뭐 대단히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니라 “정신집중”정도의 아주 비근한 인도말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죠. …… 선(댜나), 삼매, 요가 등등은 본시 인도사람들의 생활습관 속에 배어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그러한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지고한 철학적 경지나 신비한 체험, 혹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만 하는 어떤 실체적 코스모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 116~117쪽
밥 먹고 똥 싸는 것, 졸리면 자곤 하는 것이 선禪이다? 이 깊은 뜻을 조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결코 쉽게 넘어가는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임제는 여기서 “일상의 삶”그 모든 것이 선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는 모든 종교적 환상의 실체성을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 120쪽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항상 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모든 것이 고苦다! 아~ 고통스럽다! 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게 불교의 알파 - 오메가입니다. 불교의 전부입니다. 아니! 불교가 이렇게 쉽단 말이오? --- 133~134쪽
반야경이 성립하면서 대승불교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대승불교”라는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야경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리고 또 소승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반야경전들과 『반야심경』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얘기되어야만,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 151쪽
기나긴 불교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의 종착지는 선종이었다.”선불교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모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실천불교의 정점입니다. 불교는 선종을 통해서만 법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에만 해도 선종의 독자적이고 실천적인 성격 때문에 그 통불교적인 포용성을 상실하지 않고 순결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 158쪽
우선 대승불교은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 176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내용은 출판사 리뷰로 대략 읽어 낼 수 있다. 도올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지난여름 KBS 1TV에서 방영한 「도올, 아인 오방간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어 어떻게든 쉽게 쓰겠다는 결심이 생겨 많은 내용을 쓰기보다 간결하게 쓰자는 결심 하에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책은 『반야심경』260자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사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했다고도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시에 대해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올은 자기 나름대로 이 시를 이렇게 해석했다.
*경허(鏡虛,1849년~1912년) 근대불교를 개창한 대선사. 전주 출신, 아버지 송두옥(宋斗玉), 어머니 밀양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9세 때에 경기도 의왕 청계산 청계사로 출가했다. 계룡산 동학사 아래 살던 이처사(李處士)가‘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고 하였다는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바로 깨달았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선사의 선어다.
그리고 입적한 경허의 저고리에서 글귀가 하나 나왔는데,
삼수갑산장곡리(三水甲山長谷裡)
비승비속송경허(非僧非俗宋鏡虛)
고향천리무인편(故鄕千里無人便)
별세비보부백운(別世悲報付白雲)
삼수갑산 깊은 계곡에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닌 송경허라는
놈이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운 고향은 천리길이나 되고
소식 전할 인편 또한 없도다.
세상을 하직했다는 슬픈 소식일랑
저기 떠있는 흰 구름에 띄우노라.
이 시에 대하여 도올은 “너무나 소박한, 스님의 내음새가 전혀 나지 않는 자기일상의 느낌을 다 담은, 참으로 맑은, 우리나라의 우전차*와도 같이 향기로운 〈임종시〉라고 했다.
*우전차 : 우전차(雨煎-)녹차의 한 종류, 24절기 곡우(穀雨)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를 말한다. 이른 봄 가장 먼저 딴 찻잎으로 만든 차라 하여 첫물차라고도 한다. 여린 잎으로 만들어 은은하고 순한 맛이 특징이다.
책에 경허의 일화가 여러 가지 소개되어 있으나 다 옮길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한두 가지만을 옮겨본다.
「어느 날 경허에게 교화의 도리를 깨우쳐준 스승 만화스님이 경허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경허는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준엄한 스승에게 기본적 예의도 치르지 않는단 말인가? 만화스님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 괘씸한 놈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건넸습니다.
“웬일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는가?”
경허가 대답합니다.
“무사지인은 본래 이렇습니다.”
만화는 묵묵히 물러났습니다.」
무사지인(無事之人)은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임제*가 말한 무사인(無事人)을 말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임제의현(臨濟義玄) : 그는 867년경 「임제록」을 썼는데, 간명하고 직접적인 언어로 불교의 극의를 드러낸 당나라 선승의 언행록이다. 정식명칭은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임제라는 법호는 그가 몸담고 있던 진주[鎭州, 지금의 하북성 호타강(淲陀江) 부근]의 임제원(臨濟院)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종지(宗旨)를 임제종이라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키워준 은사에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건 인지상정상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무례를 통해서라도 경허는 단절을 요구하고 있다. 자기 존재의 모든 연속성을 단절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 마음을 표현한 말이 사고무인(四顧無人)인데 이제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경허는 다음해 서산(瑞山) 연암산(鷰巖山)천장사(天藏寺)로 거처를 옮겼다. 천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먼저 출가한 친형 태허(太虛)가 주지로 있고, 친어머니가 공양주보살로 있는 절이었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에 어머니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등 여러 가지 만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도올은 그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고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이제 경허의 이야길랑 끊어야 할 것 같네요.”했다.
그러면서 어느 해 무덥던 여름, 하루는 어린 사미승을 데리고 탁발을 나갔는데 어느 산 고을에서 개울을 건너야했는데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 그냥 옷 입고 건너기에는 난감한 상황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젊은 여인이 스님을 불러서 돌아보았다. “스님 저를 업어서 건네주지 않겠습니까?”하고는 건네주면 품삯을 주겠다고 했다. 품삯으로 두 푼을 받기로 흥정까지 되어서 업어 건네주고는 품삯은 받지 않고 손바닥으로 여인의 궁뎅이를 철썩 때렸다. 그러면서 “재물이면 뭐든지 된다고 믿는 것들은 이렇게 버릇을 고쳐줘야 하느니라. 허허 요망한 거 궁뎅이 하나는 제법인 걸.”했다고 하고, 그날 밤 사미승은 잠자리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스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스님께 여쭤봐야 할 것이 있다며 “스님께서는 늘 저에게 출가사문(出家師門)은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님께서는 젊은 여자를 …”
“오늘 나는 분명히 그 여자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네주었고 네 말대로 궁뎅이까지 쳤느니라.”
“스님 그러니 분명 계율에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여인을 개울가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아직까지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단 말이냐? 내가 만약 환갑 넘은 할머니를 등에 없어 건넸다면 네가 아직도 그 할머니를 가슴에 품고 잠을 못 이루겠느냐? 겉모양, 겉 소리에 눈이 흐리거나 귀가 어두워지면 아니 된다. 집착치 마라! 애오(愛惡)를 떠나보내라! 이제 내려놓아라! 젊은 여자를 마음속에 그만 품고, 낮에 건넜던 그 개울가에 버려야 할 것이니라.”
사미승은 크게 깨닫고 훗날 큰스님이 되었다나 뭐라나.
방하저(放下着-착을 저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설명하지만 생략)이라고 하는 이 말은 중국 고사에도 나오는데 핵심은 ‘내려놓았다’는 것으로 도올은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 위대한 일화라고했다. 이야기는 ‘경허가 여인을 등에 업었다.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여인을 내려놓았다.’는 것인데 경허에게는 그것으로 끝났지만 사미승은 여인을 내러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경허도 말했다. “내려놓아라.”
짐을 내려놓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남편과 부인이 사소한 일로 싸우고 그것이 짐이 된다면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방하저(放下着)! 이 한마디면 평생 동안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도올은 말한다.
한국불교는 너무나 많이 선(禪)을 이야기하고 있다. 좌선, 참선, 선종, 선불교 등등. 그런데 그 선이란? “경허 스님 같은 고승이 고뇌한 것이 훌륭한 선사(禪師)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불교가 가르쳐준 근본진리를 통해 참다운 「인간」이 되고자 한 아주 보편적이고, 기본적이며, 상식적인 인간학의 과제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이라는 것이 무슨 종파의 으뜸 원리인 것처럼 이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조사(祖師)들의 공안(公案-말과 행동)을 자신의 심지를 단련시키는 깨달음의 열쇠처럼 숭상하고 좌선(坐禪)에 몰두하는 집단을 선종(禪宗)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선이란 말이 본래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니었다. 댜나(dhyana-샨스크리트어)를 음역하면서 생긴 말로 원래는 선나(禪那)라고 썼던 것인데 나중에 선으로 줄인 것이다. 댜나라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명상’‘정신집중’‘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심신을 통일시키다’는 의미뿐이다. 선(댜나), 삼매, 요가 등은 본시 인도사람들 생활습관 속에 배어 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어떤 지고한 철학적 경지나 신비한 체험, 혹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하는 실체적인 코스모스(우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선’이라는 말이 한역(漢譯)되는 과정에 아주 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은 음역하면서 생긴 말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본래부터 신성하고 거룩한 의미를 지닌 ‘봉선(封禪)’에서 따온 것으로 ‘봉’은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를, ‘선’은 제단을 설하여 하늘에 제사 지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선’이 신비로운 기운을 얻었고, 특히 선종에는 의발전수(衣鉢傳受-가사와 바리때를 후계자에게 전하는 것)라는 관념과 전통이 있어서 족보를 엄격히 따지는 문벌의식이 강화되고 결국에는 불교를 편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종의 마지막 대가 중 한사람인 임제의현(臨濟義玄)은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들아! 불법이란 본시 힘쓸 일이 없느니라. 단지 평상심으로 무사히 지내면 되느니라. 너희들이 옷 입고 밥 처먹고 똥 싸고 오줌 누고, 졸리면 자고 하는 짓이 다 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리고 또 “이놈들아 뭘 추구하겠다고 발바닥이 닳도록 사방을 쏴 다니고 있는 게냐? 원래 너희들이 구할 수 있는 부처라는 게 없는 것이요. 성취할 수 있는 도道라는 게 없는 것이요, 얻을 수 있는 법法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진짜 부처는 형形이 없고, 진짜 도는 체體가 없고, 진짜 법은 상相이 없느니라. 삼법(三法)은 혼용되어 하나로 수렴되어 있거늘 이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영원히 미망(迷妄-사리에 어두워 진실을 가리지 못하고 헤맴)의 바다를 헤매는 업식중생(業識衆生)에 불과하도다.”
밥 먹고 똥 싸고, 졸리면 자는 것이 선이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 말이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임제의현은 ‘일상의 삶’그 모든 것이 선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종교적 환상의 실체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불佛도 없고, 도道도 없고, 법法도 없다. 그냥 삶이 있을 뿐이다. ‘그냥 삶’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
여기까지는 도올 선생 나름대로 한국불교를 돌아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제3장으로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에서는 《반야심경》이 만들어진 과정과 진리를 살피고 있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산물로 순서도, 내용도 간단한 것 같지만 어렵고 심오하다. 불교에는 교리를 특정 지을 수 있는 삼법인(三法印-세 개의 도장)*이란 게 있는데 1. 제행무상(諸行無常) 2. 일체개고(一切皆苦) 3. 제법무아(諸法無我) 4. 열반적정(涅槃寂靜)이 그것이다.
*보통 삼법인을 1,3,4를 의미하지만 남방불교에서는 4를 빼고 1,2,3을 말한다.
싯달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진리가 연기인데 연緣은 원인을 말하고, 기起는 연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도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원인의 변화에 따라 결과는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배가 부르다면 조금 전에 밥을 먹었기 때문이고 또 밥을 먹지 못하면 배가 고파지는 것과 같이 모든 현상은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순간순간 변한다. 그래서 제행무상이라는 것이다. 일체개고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인데, 일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존재함 자체가 고’라는 뜻으로 존재하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말이 된다. 하물며 살아있다는 것이 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므로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세 번째 ‘제법무아’에서 ‘제’는 ‘모든 것’을 뜻하고 거기에 ‘법’이라는 주어는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샨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라고 하는데, 법칙·정의·규범이라는 뜻도 있지만 불타의 가르침을 총칭해서 쓸 때도 있고 덕·속성·원인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번역가들은 법의 개념을 선택해서 썼지만 여기서는 법보다 도道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여기 법은 그냥‘사물이나 물건이 존재하는 것’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물건(사물·사태·사건)은‘무아’라는 말인데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만, 나름 내역이 있다. 한자가 ‘나아我’이기 때문에 그냥 ‘나’( I )를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아는 샨스크리트어의 아트만을 의역한 것으로 ‘숨’‘호흡’을 의미하고 그‘숨’은 생기, 본체, 영혼, 자아를 의미한다. 오늘 숨 쉬고 있는 내가 내일도 숨 쉬고 있는 나와 동일할까? 나의 자기동일성은 불변의 본질, 본체, 실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열반적정’은 제법무아 명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한 측면 같은 것으로 제행무상과 일체개고가 한 쌍이라면, 제법무아와 열반적정은 또 다른 한 쌍인 것이다. 제법이 무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열반(涅槃)은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불을 ‘끈다(滅)’는 의미다. 불이란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의 불길로 ‘화가 난다.’는 표현처럼 분노 라는 심리현상을 불과 같다고 본 것이다. “불길이 타오르면 신장이 타고, 두뇌가 타고, 눈이 타고, 코가 타고, 혀가 타고, 몸이 타고, 의지가 탄다.”고 했다. (초기경전 ‘마하박가’에서)
흔히 열반을 죽음과 연결시켜 죽음을 ‘열반에 들다’고 하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죽으면 누구나 적정(寂靜-적막하고 고요하다)해 진다. 이 열반 때문에 불교를 죽음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다. 열반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상태, 즉 번뇌의 불길이 다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확철(確徹)하게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열반에 들어가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불교의 교리를 증명하는 4법인을 정리하면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항상(恒常)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모든 것은 고苦다. 고통스럽다. 모든 법에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으로 지속됨이 없다.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가 된다.
《반야심경》을 깊이 알기 위해서라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뿐이 아니다. 계(戒-sila), 정(定-samadhi), 혜(慧-panna)라는 삼학(三學)은 무엇인지? 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그 깨달음을 쉽게 일반대중에게 전하기 위해 설파했다는 사성제(四聖諦)를 알아보아야 한다. 사성제란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데,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이 가운데 고, 집은 유전연기(流轉緣起)로 생성적 인과이고, 멸, 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로서 소멸적 인과에 속한다.
사성제 가운데 4번째 도제는 초기불교시대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수행자들의 생활규칙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 부른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는 뜻으로 팔정도야말로 원시불교*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불교 : 불타가 살아 있던 시대를 근본불교라 하고, 불타 입멸 후 150년간을 원시불교라고 하는데 둘을 합쳐 초기불교라 부르기도 한다.
팔정도는 정견(正見-법의 진리를 바르게 봄), 정사유(正思惟-바른 생각), 정어(正語-바른 말), 정업(正業-살생이나 도둑질 하지 않는 바른 일), 정명(正命-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악행을 버리고 바른길로 가기 위한 노력), 정념(正念-성성性相의 바른 기억), 정정(正定-번뇌를 버리고 바르게 안정)을 말하는데 이것은 규범을 나열한 것 같지만 사실은 초기불교 시대에는 극히 윤리적인 단체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싯달타도 열반에 들면서 제자들에게 ‘빨리 해탈하라’고 하지 않고, ‘정진하라’고 했다.
이 팔정도는 아라한(阿羅漢-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응당 공양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성자)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도덕적 수양덕목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원시불교는 ‘공자학단’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계·정·혜는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자. 계戒는 계율, 정定은 선정(禪定-속정俗情을 끊고 삼매경에 이름), 혜慧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교학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계율을 지키고, 정과 혜를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것은 불교경전이 던져주는 깊은 지혜의 공부가 없이는 선정이라는 정신통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참 어렵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외쳤던 정혜쌍수(定慧雙修)는 계·정·혜 삼학의 본래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줄였음에도 너무 길어져서 독후감마저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반야심경》이 어떤 경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자.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이 서기 663년10월20일 『대반야경』이라는 책을 번역 완성했다. 그리고 넉 달 후인 664년2월5일 향년63세로 그만 세상을 하직했다. 『대반야경』의 번역과 편집을 시작한 것이 660년 정초였으므로 3년 11개월 만에 완성했는데, 그것은 가히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대반야경』의 분량은 자그마치 작은 글씨로 편집된 〈대정대장경〉* 3책을 차지하는 분량으로 권수로 600권이나 되는데, 600권을 다시 16회(會)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반야경』은 단일 종의 책이 아니라 반야경전이라고 나와 있던 책들을 모두 모아서 16회로 분류한〈반야경전집〉인 것이다.
*대정대장경 : 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한 최초의 대장경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1880~85)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이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을 모범으로 삼고 중국과 일본의 불전으로 증보하여 1,916부 8,534권을 수록하였다.
반야경 중에서 단일경전으로 대표적인 것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두 경전을 따로따로 알고 있으나, 두 경전은 반야경전 그룹에 속한다는 것으로 『금강경』은 현장의 『대반야경』에 편입되어 있는데 반해(600권 중 577권이 금강경), 『반야심경』은 극히 짧은 것임에도 『대반야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보면 현장이 『대반야경』을 번역하면서 『반야심경』을 번역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반야심경』을 단행본으로 먼저 번역하고 나서 『대반야경』을 번역했다는 말이 된다. 그만큼 현장도 『반야심경』은 따로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중의 심心을 흔히 깨달음 즉 반야를 성취하는 마음을 설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여기서 심은 물리적인(의학적인)것으로 신체의 중추인 심장(heart)을 의미한다. 핵심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 『반야심경』은 600권의 방대한 『대반야경』의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란 것으로서, 『대반야경』과 『반야심경』은 부피로 보면 그 량이 1000만 대 1정도로 차이가 나지만 무게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대승불교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그것을 알아야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데, 흔히 대승불교하면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지역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는 대승불교 버마, 타이,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는 소승불교로 이해하고 있으나 엉터리다. 또 대승불교가 생기기 이전까지를 소승불교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이다. 대승은 소승의 짝의 개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대승은 자체로 절대적이며 새로운 불교운동을 지칭하는 것이다. 대승(大乘)이란 ‘큰수레’라는 뜻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로 음역되는데 1세기경 확립된 개념이다. 반면, 소승이란 개념은 대승보다 200년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큰수레’라는 말을 쓴 사람들이 ‘큰수레 운동’에 따라오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비적으로 비하하여 쓴 말이 소승이라는 것이다.
도올은 대승과 소승을 버스와 자가용으로 비유하면서 자가용은 폐쇄적이고, 버스는 개방적, 자가용은 선택된 소수만이 이용하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 탈수 있는 것이라면서 수행자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개념이 달랐다고 한다. 불교에서 수레에 탄 사람을 삼승(三乘)으로 구분해 3종류의 수레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성문성(聲聞乘)으로 이는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들로 가섭과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제자들로서 이들은 자가용에 탔던 사람이고, 둘째가 독각승(獨覺乘)인데, 이는 홀로 깨달은 사람으로 12인연(十二因緣)을 관(觀)하여 개달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한다. 독각·연각은 성문 다음 단계의 수행자들을 말한다.
다음은 보살(菩薩)인데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로 보리는 지혜 혹은 깨달음, 살타는 사트바(sattna)의 음역으로 복합적인 의미로 본질, 실체, 마음, 결의(決意), 용기 그리고 유정(有情-정감)을 의미하는데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부류 중에서 성문과 독각은 작은 수레 즉 자가용에 세 번째 보살은 그야말로 버스에, 다시 말해 큰수레에 탄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서 싯달타는 과연 왕자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무지막지 비상식적 기적을 만들고 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예수의 생애와 달리 싯달타의 생애는 비상식적인 것은 없지만 그 출생에 대하여 예수만큼 구체성이 없고, 출생에 관한 이야기들 모두가 후대의 기술이며, 생몰연대도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까지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도올은 싯달타가 “히말라야 네팔의 어느 산 중턱에 있는 조그만 종족의 부잣집 청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한다고 했다.
업(業), 윤회(輪廻), 열반(涅槃)등에 대해 인도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의 김치 같은 것으로 아주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고, 감정의 원천인데 싯달타가 조금 혁명적인 생각을 한 것일 뿐이었는데 싯달타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초기경전이 결집되면서이고 경전의 내용이 계속 발전적으로 수정, 보완, 확대되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자가용을 탄 성문과 독각들은 나름 행복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불타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살들은 달랐다. 불법을 닦고 쌓으면 스스로 부처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불교초기에는 부처의 상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금기되었다. 그런데 아쇼카왕*대에 와서 붓다가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한 후 유골을 8부족에게 나누어 8개의 불사리탑을 건립하게 했는데 8개 중 한개만 남기고 나머지 7개의 사리탑을 해체해 유골을 재분배하여 전 인도에 8만 4천개 스투파(사리탑)을 만들게 했다. 이때부터 사리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탑돌이가 부상하게 되고 정착되면서 스투파(무덤)옆에는 가람이 생기고 싯달타의 생애와 고행, 깨달음을 이야기해 주는 ‘구라꾼’이 생기고, 구라꾼들은 스투파의 한 곳을 파서 불감(佛龕)을 만들고 거기에 불상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시주도 더 많이 들어오고 듣는 사람도 실감이 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상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그것이 돈이 되니까 전문 제작인이 생겨났는데 그 시기가 대략 기원전후 혹은 약간 이전부터라고 한다.
*아쇼카왕 : 인도 마가다국 제3왕조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황제로 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황제(재위:기원전 265년경~기원전 238년 혹은 기원전 273년경~기원전 232년)로 불교를 크게 신장시켰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했는데 그래서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라고 하는지 모른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된 것이다. ‘자각(自覺)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자기 구제만을 위하고 타인의 구제를 등한시 하는 소승과 달리 대승은 철저한 구도(求道)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계율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정도로 불살생(不殺生)을 생각하고 계율의 본래적 의미인 자기만 살생하지 않으면 오케이 되었지만, 대승은 타인으로 하여금 살생하지 못하게 하는 계율도 포함된다는 한 것이다. 불살생의 계는 나의 청정만을 지켜가는 계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타인의 생명을 위험에서부터 건지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는 계율의 문제로 소승은 250가지나 되는 매우 복잡한 자격을 지녀야 올라탈 수 있었지만 대승은 그런 계율이 무의했다. 세목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널리 구원하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같이 타고 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 계율이 유연해져야했고 혁파되어야 할 것은 혁파되어야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육바라밀(육도-六度)이라는 것이다.
육바라밀, 육도는 1) 보시(布施-제물을 바침). 2) 지계(持戒-계행을 지킴.반대가 파계). 3) 인욕(忍辱-번뇌를 끊고 욕됨을 금함). 4) 정진(精進-선행을 닦음). 5) 지혜(知慧-미혹을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음)인데 소승의 250개 계율에 비해 매우 추상화되고 유연한 원칙이다. 바라밀은 바라밀다, 즉‘최고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로 여기에 상태를 나타내는 다ta가 더해져 ‘극치, 완성’이라는 추상명사가 된 것이다. 바라밀다는 ‘탁월함의 극치에 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제부터 《반야심경》을 보자. 《반야심경》의 주어는 관세음보살이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설법이 아니라 관세음이 설했다는 말이다. 관세음은 중성이지만 그 모습이 여성적 이미지와 함께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다 잘 알고 있다. 경주 석굴암의 벽면에 줄지어 새김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와 더불어 태어난 캐릭터로 1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타 본존의 양쪽에서 협시로 미륵보살과 같이 조각된 경우도 있고, 해수관음처럼 독자적으로 조각된 입상도 많다. 이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의 「하화중생(下化衆生)」정신과 자비와 구제의 심볼로 태어난 보살이다.
관자재와 관세음은 같은 뜻이며 이것은 ‘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 자유 자재롭다.’는 뜻이므로 현장(玄奘)의 번역이 원래에 따른 번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소리를 본다’가 되어 조금 이상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본다’는 것은 ‘심안(心眼), 통찰(通察)’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관세음의 ‘관觀’은 ‘본다’보다 ‘보여준다’는 의미가 강하므로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 그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보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1면의 얼굴을 지니고 온갖 소리를 듣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인 것이다.
여기서 관세음이 법을 설한 대상은 사리불, 《반야심경》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하는데 그는 누구일까? 사리자는 바라문 출신으로 왕사성 부근의 ‘우파팃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목건련과 함께 붓다에게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인물로 부처의 아들인 ‘라훌라’의 후견인 노릇도 한 붓다의 10대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성문 중에서 성문이었던 것이다.
그 지혜제일의 사리자가 《반야심경》에서는 어린 행자처럼 관세음보살로부터 지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다. ‘보살이 성문을 가르친다? 있을 법이나 한 일일까?’그러나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정신이다.
여기까지 독후감을 쓰는데도 A4 용지 20장을 접었다. 내용을 다 기술할 수 없을 것 같아 간단히 전문만을 베끼면서 줄일까 한다.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으면 책꽂이에서 책을 들춰내면 될 테니까 말이다.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 眼耳鼻舌身意 无色聲香味觸法 无眼界 乃至 無意識界. 无無明 亦无無明盡 乃至 无老死 亦無 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无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㝵 无罣㝵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无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 揭帝 菩提僧莎訶】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 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 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 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고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고.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一切苦厄’이다. 풀이하면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을 뛰어 넘으셨다.”인데 여기서 조견은 ‘비추어 안다’는 것으로 우주론적 통찰로 오온(다섯 가지 집적태를 말하는 것으로 우주의 일체 존재가 구성된 요소로서 색, 수, 상, 행, 식을 말한다)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통찰하셨다는 뜻이다. 오온 중에서 색은 물질을 말하고, 나머지는 모두 정신적인 것인데 수는 눈으로 색을 본다든가 귀로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감각작용을, 상은 생각한다. 행은 행한다는 뜻으로 의지적으로 동작한다는 것이며, 식은 판단력을 갖춘 우리의 의식작용을 말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오온 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에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나머지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여기가 어쩌면 《반야심경》의 핵심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반야심경》은 《대반야경》전체를 압축시킨 것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잘 알지만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은 유실하는 경우가 많다. 색은 물론 수도 상도 행도 식도 모두 공이라는 것으로 결국 나(我,Ego)는 오온의 가합(假合-일시적 조합)이고 가합의 요소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말이다.
‘舍利子! 是諸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 眼耳鼻舌身意 无色聲香味觸法 无眼界 乃至 無意識界’
“사리자여! 지금 내가 깨달은 세계, 반야의 완성을 통해 조견한 세계, 제법이 공한 이 모습의 세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 듬도 없다. 그러므로 공의 모습 속에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식도 없다. 따라서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또한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는 모든 식계도 없다.”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이 6개의 명제는 절대명제들로 그것은 내가 아버지 어머니 염색체의 조합으로 태어난 것인가? 나는 죽어 스러지지 않을 것인가?... ‘불생불멸’은 이러한 수수께끼를 그것 자체로 해석하지 않는 한 《반야심경》은 바르게 읽히지 않는다고 도올은 말한다.
여기서는 공으로 색수상행식이 없다고 한데 이어서, 육근(六根)인 안이비설신의, 육식(六識)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그리고 육경(六境)인 색성향미촉법 등 18계가 모두 없다고 하였다. ‘내지’는 ‘역부여시’와 같은 축약이다.
‘无無明 亦无無明盡 乃至 无老死 亦無 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无得 以無所得故’
“뿐만이겠느냐!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가 없다는 것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그래서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12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고집멸도 또한 없는 것이다. 앎도 없고 또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소승에서 보면 엽기적 혹은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우주가 다 사라지고 인식의 뿌리도 대상도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식도 다 사라졌는데 무엇이 남았을까? 관자재보살의 혁명적 외침이다. 싯달타는 싯달타가 아니다. 그는 부처도 아니다. 생전에 깨닫고 외쳤던 법문이 다 헛거다. 다 공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12연기를 깨우쳤다고? 그것도 공이다. 다 헛거다!
12연기란 무명(반야심경의 부정적 논리로는 無無明), 행(無行), 식(無識), 명색(無明色), 육입(無六入), 촉(無觸), 수(無受), 애(無愛), 취(無取), 유(無有), 생(無生), 노사(無老死)로,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깨우친 12연기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현실로부터 고뇌의 원인을 파고들어간 것으로 그 궁극적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끊으면 인간의 고뇌를 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오온이 없어지고 18계가 다 사라졌는데 무슨 12연기가 있을까? 따라서 연기의 압축인 사성제 즉 고집멸도도 사라지는 것이고 아라한의 팔정도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공의 철학이 아닌 무의 철학으로 ‘공이다’는 것조차 부정해 버리는 철두철미한 부정의 논리를 펴고 결국에는 대각자 싯달타의 진제도 부정하는데 이른다. 그래서 불교는 불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지혜를 완성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다.
끝부분 무소득의 ‘득’은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공자 왈 사람이 늙어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뭘 자꾸만 얻어야 한다고 욕심내는 것이다,”(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가 그것이다. ‘앎도 얻음도 없다.’이것이 반야사상이 가르쳐주는 도덕적인 명제다. 지를 버리고 득을 버려라. 왜냐하면 반야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㝵 无罣㝵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藐三菩提.’
“보리살타,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의식과 꿈같은 생각들을 멀리 벗어나 버리고, 끝내 열반에 도달한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의 정등각을 얻는다.”
여기서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인데, 이는 단지‘anuttara samyak sambodhi'의 음역으로 ‘위가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최상의 깨달음,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의역되는 말로 아가 무이고, 뇩다라가 상이고, 삼막이 정, 삼이 등, 보리가 각이다. 더 이상의 것이 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无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의 사실을 숙지해야할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야말로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이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고 진실한 것으로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등’하면 광주의 ‘무등산’을 떠오르는데 ‘주변에 맞먹을 산이 없는 산’이란 뜻이다. 등은 같다. 무등은 같지 않다는 뜻이고, ‘무등등’은 앞의 무와 결합하여 맞먹을 것이 없는 ‘최상의’것이 되고 뒤의 등은 같은 등이지만 그 자체로 ‘뛰어나다, 평등하다, 모든 것이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어 원문에는 등등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두 번 반복한 것으로, ‘똑 같은 주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 揭帝 菩提僧莎訶’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이 부분의 한자음은 ‘게제게제 반라게제 반라승게제 보제승사하’인데, 이것은 단지 음역일 뿐 한자로 의미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보리사바하’로 쓰고 읽는데 ‘승사하’라고 한 것은 고대의 발음으로 이것이 ‘스바하’로 소리 났던 것이다.
*《반야심경》 마지막 부분에 ‘보리사바하’는 대부분 해설서에 한자 菩提娑婆訶로 쓰고 있으나 도올은 ‘菩提僧莎訶’(보리승사하)로 쓰고 있다.
이것의 인도에서의 발음은 매우 명료하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비록 주문이기는 해도 담긴 뜻은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이고, 마지막의 ‘스바하’가 ‘행복하소서, 만세!’이런 뜻인데, 이는 인도인들이 흔히 인사말로 쓰는 용어다. 만트라(만다라)와 다라니가 ‘스바하’로 끝을 맺는 것과 같다.
짧지만 긴 《반야심경》의 대략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 경전의 궁극목표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구경열반」에 이르기를 모두에게 축원하며 줄일까 한다. 몽상으로부터 떠나면 구경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욕망의 불길이 꺼지면 열반에 이른다는 말이다. 욕망의 불길을 만드는 원인들은 전쟁, 고집멸도, 공포, 증오, 번뇌 이런 것들이라고 하니 이것들을 끊으면 될까?
-2019.1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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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