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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1-14 / 계강현 목사
여러분이 심각한 고난과 환란 가운데 빠져있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조언을 듣고 싶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면 좋겠는가? 그냥 고난과 환란을 당장 거둬 가시면 제일 좋을 거다. 그러나 만약 그 고난이 뜻이 있어서 지금은 당해야 할 일이라면 그러면 무슨 말을 해주면 좋겠는가?
요한 사도가 밧모 섬에 갇혀있을 당시, 신약교회는 로마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와중에 심각한 박해 아래 놓여있었다. 그런 요한 사도에게 하나님은 계 4장에 이어 5장에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여주고 계시다.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이 오른 손에 두루마리를 쥐고 계신데,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 있고,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밀이 담겨있는 계시와 섭리의 책이다. 그런데 봉인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비밀이란 얘기다. 이때 힘센 천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요한 사도가 둘러보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슬피 울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구원의 책이 펴져야만 지금 고난 속에 있는 신약교회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고, 또한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수 있는데, 아무도 그걸 펼 자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손에서 봉인된 책을 펼 수 있을까? 그 누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 왜 하나님은 박해 가운데 있는 요한 사도와 신약교회 공동체에게 이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고 계신가? 오늘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분은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vv4-5,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v7,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유대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는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 승리한 분이다. 그가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실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라는 거다.
‘어린 양’이란 칭호가 요한계시록에 28회나 나오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된다. 요 1:29,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 구약 제사제도에 따르면,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드린 순전하고 흠 없는 양을 상징하는 희생제물이다.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시기 전에 구약시대 사람들은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죽여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란 이미지는 요한 사도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을 금세 알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v6b,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이 어린양에게 ‘일곱 뿔’이 있다는 말은 뿔은 힘의 상징이고 일곱 뿔은 완전한 신적인 힘, 즉 전능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또한 ‘일곱 눈’은 완전한 신적인 전지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시기에 숨길 수 없다. 또한 어린양의 일곱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주님 대신 보내신 보혜사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얘기다.
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했다. 세상을 마무리하는 구원과 심판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펼쳐진 거다. 그분만이 하나님 오른손의 두루마리를 받을 수 있고,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분이시다. 유일한 구원자,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삶의 어려운 순간에, 고난에서 문제가 풀리지 않는 순간을 만나면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울거나 낙심하지 마라. 요한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울음을 그친 것처럼 여러분의 눈물을 그치기 바란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컨트롤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류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여러분! 세상 어느 종교나 학문이나 사상에도 죄를 사하는 구원의 능력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그 길이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현대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종교다원주의는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 힌두교도 괜찮다. 회교도 좋다. 유교도 좋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남한산성 꼭대기에 수어장대가 있는데, 거기에 가려면 광주로 올라가나 성남으로 올라가나 거여동으로 올라가나 등산 샛길로 올라가나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고 주장한다. 아무 종교나 믿어도 다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남한산성 수어장대 가는 길은 그럴지 몰라도 구원 얻는 길은 결코 그렇지 않다. 틀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배타적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뭐라고 하든지 간에 참된 진리는 영원불변하다. 내 아버지가 한 분이요, 내 어머니도 한 분이다. 남들이 혹시 아버지가 두 분이 아니냐고 할지라도 그건 아니다. 오직 한 분이니까.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구원의 길도 하나밖에 없다. 천국 가는 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우리가 복되게도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고, 스님이 미사 하는 성당에 앉아 있으면 통 큰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언론들이 입바른 칭찬을 한다. 종교가 화합하는 통 크고 멋진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증스러운 일들이다. 우리는 천주교를 인정하고 불교를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로 인정하는 것이지,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통해서다.
여기 지금 죽어가는 중병환자가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약이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고 해보자. 그러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약 먹어야 된다. 먹기 힘들어도 먹어야 한다. 약을 구하기 힘들어도 구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분명히 알려주는 게 옳지 않나? 상대방이 수용하기 힘들다 그래서 중병환자에게 그냥 “활명수는 만병통치약입니다. 두통약 한 알이면 끝날 겁니다. 소화제 한 알이면 낫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게 의사의 입장 아니겠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외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분명히 외쳐야지 얼버무리면 사기요 죄악이다. 모든 길이 구원의 길이라면 그냥 놔둬도 되겠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구원의 길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전해야 한다. 독선적이더라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한 작은 교회를 섬기던 존 하퍼(John Harper)목사는 그의 생애 후반에 목사가 되었는데 헌신적인 목회활동으로 처음에 교인 25명이었던 교회를 5백 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1912년 4월 시카고 무디 기념교회의 초빙을 받은 그는, 미국의 목회지로 가기 위하여 여객선 타이타닉 호에 승선하였다.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을 때, 그는 딸과 조카를 구명정에 옮겨놓은 후 물 속으로 사라져 익사하고 말았다.
그 사고가 있은 후 여러 해 뒤에 캐나다 온타리오 해밀턴 집회에서 한 청년이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나는 그 배에 타고 있었어요. 그 무시무시한 밤, 널빤지를 타고 표류하다가 존 하퍼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도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내게 ‘당신, 예수 믿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내가 ‘아니요.’ 하자 그는 ‘주 예수를 믿으시오. 당신은 구원받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잡은 것을 놓쳤는지 2마일이나 되는 깊은 물속으로 잠겼어요. 나는 그의 마지막 전도로 인해 영육이 모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물속에 빠져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한 그 한마디가 한 영혼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모든 길이 구원의 길이라면 그렇게까지 전할 필요가 있겠나?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의 길이기에 죽는 순간에도 우리는 전해야 한다. 한 생명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전도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렇게 세례 받는 두 분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삼위 하나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얻은 축복이다.
2.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vv6-7,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한 어린양이 서있는데,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다. 그가 두루마리를 받아들었을 때, v8b,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지금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린 모습은 어린양에 대한 예배적 자세를 보여준다. 이때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인데, 그 향은 지상교회의 성도들이 고난 중에 드린 기도다.(6:9-10; 8:3-5 cf.) 구약에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희생제사가 필요했지만, 지금 여기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희생제사 없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해 모든 희생 제사를 단번에 드리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의 공로 때문이다.
또한 v9에서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라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거론하여 찬양한다. 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자꾸 반복 거론할까? 그 이유가 바로 뒤에 나온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온 열방 중에서 사람들을 피 값을 지불하시고 사서, 그들을 하나님에게 드리셨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을 사기 위해서 돈을 주던가, 다른 물건을 주던가 하지 피 값을 지불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사단에게 노예로 넘어가고 말았다. 사단의 노예로, 죄의 노예로, 율법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죄 사함을 이루는 피 흘림만으로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법이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히 9:22)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노예 된 인간들은 영적 사망을 당한 자들이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이다. 또한 때가 되면 육적 사망을 당한다. 꼭 한 번 인간은 죽는다. 죽어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 이런 사단의 노예로 팔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피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려 구원받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삼아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복음이 뭔가? 단어 그대로 좋은 소식(good news)이다. 나와 여러분이 죄인이고, 그 죄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죄인인 우리 대신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게 바로 복음이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천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공짜로 최고의 선물인 영생의 구원, 천국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 복음이 아닌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것은 대가이고, 뭘 봐달라며 뭔가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선물은 그냥 공짜로 주는 거다. 그래서 선물을 받은 자는 감사할 뿐이다.
어느 교수의 이야기다. 교수 정도 되면 배운 것도 많고, 사회적으로도 존경 받는 위치에 있으므로 나름대로 자존심이란 게 있다. 그분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사람이며,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쌓여있던 분이었다. 아내는 예수를 믿는데 아무리 믿자고 해도 남편이 말을 안 들었다. 고민 끝에 한번은 목사에게 와서 남편을 전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가 남편을 찾아가 전도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예수를 안 믿으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그 교수가 대뜸 이렇게 말하더란다. “뭔가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라니까 그것을 채우려고 예수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니까 매달리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구차하게 그렇게 매달리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얼마 지나서 그 교수가 감기에 걸렸는데, 금방 낫지 않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바이러스 감기 정도로 진단을 내렸다. 그 소식을 듣고는 목사가 병상에 가서 그 분을 만났다. “교수님,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어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못 느끼세요?” “무슨 말씀하세요? 감기는 누구나 걸리는 건데, 그걸 가지고 제가 약하다고 느끼다니요?” 그래서 그 시간에도 전도를 못하고 돌아왔다. 또 며칠이 지났다. 갑자기 부인으로부터 아주 다급한 전화가 왔다. 정밀검사를 한 결과 폐암이라는 것이다. 교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그래서 찾아간 목사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교수님, 지금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못 느끼세요?” 그러자 그 교수는 꺼져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보니 나는 참 바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온 낙오자 같아요.” 드디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그 목사가 복음을 전했고 그도 진지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가장 행복한 시간을 잠시 누리다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다.
암 선고를 받고 소망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 교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나? 자식이 일류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일까? 큰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일까? 학위 논문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일까? 주식에 투자한 것이 갑자기 뛰어서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소식일까? 이 사람은 이제 조금 있으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의인으로 서느냐, 죄인으로 서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자기의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고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이 십자가 복음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 복음이다. 이 복음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문제는 비신자는 물론 심지어 교인들 가운데도 이 기쁜 소식을 제대로 절감하지 못하고 산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는다. 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다. 그런 감사가 없으니까, 예수 믿는 게 기쁘지가 않고 늘 힘들게만 느껴진다. 이런 복음의 감격이 부족하니까, 맨날 얼굴을 찌푸리며 산다. 복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니까, 늘 자존심 싸움이나 하면서 산다. 여러분은 구원의 선물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라. 주님처럼 남을 섬기면서 살자.
3. 천상의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vv9ff에서는 천상의 존재들이 부르는 세 가지 찬양이 나온다. 첫째,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피로 만국 백성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셔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어 땅을 다스릴 권세를 갖게 하셨다는 것을 찬양한다. vv9-10, “그들은(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어린 양은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찬양 드린다. vv11-12,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모든 피조물과 만물들이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하도록 받으시길 찬양한다. vv13-14,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며 새 창조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 미래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런데 이미 그 완성품이 하늘에 존재한다. 누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이시다. 교회는 오늘 현실의 예배를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한 이 종말의 예배에 미리 동참하며 경험하는 거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을 미리 오늘의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맛보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요한 사도와 신약교회 공동체는 당시에 로마제국의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로 고난과 환란 가운데 처해 있다. 가산을 약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 속에 날마다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왜 하나님은 이 하늘의 장면을 요한 사도와 신약교회에게 보여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너희들이 지금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과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당하고 영혼구원, 제자 만들기 위해서 섬기고 희생하며 손해 보는 삶을 살고, 때론 자존심 상하는 일을 참고 견디며 희생하지만, 너희의 끝은 반드시 해피엔딩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거다. 주님 안에서 이 승리의 기쁨을 죽고 나서만 누리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그렇다면 요한과 신약교회 공동체는 이 말씀을 통해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고 용기를 얻었겠나?
여기 보면,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어린양과 이 모든 구원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그들이 돌리는 것은 오직 찬양과 영광뿐이다. 여러분,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할 일은 무엇일까? 거기서 기도할까? 전도할까? 봉사할까? 성경공부 할까?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봉사하고 좀 욕먹어가면서 전도해야 한다. 천국가면 다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속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일이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찬양을 부르면서 마음이 열리고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고 하는 기쁨을 누릴 때가 많지 않나? 그 순간의 기쁨, 그 황홀함, 그 만족과 행복을 일억 배를 곱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감사와 찬양으로 영원히 사는 곳이 천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이 찬양을 시작해야 되지 않겠나?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시는 날, 개인적으로 말하면 내 생애가 끝나는 날 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 찬양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감사의 찬양이 있는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나! 고난이 있다고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나!
구원의 인봉된 하나님의 책을 받아 펼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다시 재림하여 우리의 완전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그분을 전하는 일에 최선의 경주를 다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토록 해야 한다.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입으로 어찌 다 찬양할 수 있겠나? 우리가 자발적인 혹은 우발적인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 안에 있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인내하면, 마지막 완성될 하늘나라는 해피엔딩이요,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다스리고 지켜주신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용기를 잃지 말고 전도하며 찬양하며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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