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에게 효도를 하게 만드는 잡지
-2020년 한국잡지협회 주최 '전국민잡지읽기 공모전' 낙선작
이 세상에 수백, 수천 종의 잡지가 있을 터이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부모님께 효도를 하게 만드는 그런 잡지가 있을까? ‘효도 전문잡지’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아마도 없을 것같은데, 여기 이 잡지를 보자. 2000년초 밀레니엄 때부터 전남 광주에서 한 달에 한번 '전라도의 사람과 자연과 문화'만을 온전히 다루는 ‘전라도닷컴’(이하 닷컴)이라는 잡지가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일개’ 잡지가 불효자를 효자로 만드는 것일까. 효도하라는 말은 눈 씻고 봐도 한 마디 없는데, 대체 무슨 말인가? 2005년인가, 셋째형님이 읽어보라며 던져준 A4 크기의, 오프라인 잡지인 데도 ‘전라도닷컴’이라는 투박하고 생뚱맞은 제호의 잡지는 단박에 나를 매료시켜 열혈독자로 만들었다. 이른바 ‘광팬’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대한민국에 유일한 할머니․할아버지 전문기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닷컴’의 전문기자들은 한 달 내내 발품을 팔아 전라남북도의 고고샅샅을 누비며,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거친 숨결이나 표정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사람 사는 도리’와 그들의 거짓없이 순박한 ‘농심’을 무수한 ‘전라도 탯말(그쪽 지역에서는 당연히 모두 표준어일 터)’로 20년째 쏟아내고 있다.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바로 나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분들의 귄있고 게미진 육성들이 사무치게 소중한 까닭은, 그분들이 세상을 뜨면 금세 사라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말과 미풍과 양속들이 무릇 기하였을 것인가.
또한 이 잡지 속에는 수많은 사모곡과 사부곡이 통째로 흐르고 있다. 여우도 죽을 때에는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나는 대도시에 40여년째 살면서 청소년 시절까지 자랐던 고향을 어쩌면 마음 속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았던 듯했다. 도시생활이 이미 몸에 배어 익숙한 지라, 고향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부모님이 계셨으므로 명절 때와 생신 때에는 연례행사처럼 내려가곤 했지만, 삐쭉 얼굴 보여드리는 ‘생색내기’에 그쳤던 게 아니었을까. 새삼스레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분들이 평생토록 보내주신 쌀과 채소 등 각종 농산물을 어쩌면 성가시게 생각도 했으니 불효자임에 틀림없었다. 분에 넘치는 자식 사랑을 잡지에 나오는 남의 부모로부터 확인한 것은 수확 중의 수확이었다.
기획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우리 부모의 한숨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휴가철이면 혹여 자식들에게 오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얼마나 기다리며 애를 태우셨을까. 당신들이 자식들에게 직접 말하지 못한 비원이 들리기 시작했다. 언제 자식들에게 그런 내밀한 자식사랑과 사람 사는 도리의 이야기를 해주실 시간이 있었던가. 아니, 보따리 챙기기에 바빠, 그런 말씀조차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불효를 뉘우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잡지를 거듭 받아보며 괴로운 마음이 더해 갔다. 농촌과 고향에 대한 이해, 부모의 무한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만드는 ‘간접효과’가 쌓일수록 고향에 달려가고 싶었다. 도시생활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뭔가 커다란 변곡점이 생길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년퇴직 후 고향에 곧장 내려가 오래된 집을 수리하여 부모님을 모시는 게 ‘나의 길’이라고 작정한 일생일대의 ‘큰 사건’말이다. 시골생활을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하다 못해 내가 먼저 자리를 잡아놓기로 타협을 보았다. 이러한 선택과 결정의 배경에는 100%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닷컴의 영향이 지대한 게 사실이다.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부모의 이야기를 쓰고 기고하여 영광스럽게 닷컴에 십수 번 실리는 행운도 맛보았다. 어쩌면 닷컴이 나에게 한 달에 한번쯤 고향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부모 옆에서 닷컴에 실린 맛깔스런 글들과 생생한 현장사진들을 보여 드리고, 어느 때에는 목소리를 높여 읽어드리면 두 분 눈에 어느덧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땡볕에 굽은 허리로 왼종일 빨간 고추를 따고, 참깨를 가망가망(조심조심) 터는 할머니가 곧 나의 어머니였음을, 겨우내 땔 장작을 패는 늙은 할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음을, 잡지 켜켜에 대문짝만한 기획기사가 수두룩한데, 그것들을 읽고나면 어찌 매일 아침 안부전화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곳에서 만났던 수많은 촌로들을 곧 부모라 생각하며, 한 글자라도 놓칠까봐 구석구석 샅샅이 읽곤 한다. 창간호를 비롯하여 과월호까지 모두 구해 책꽂이에 장식해 놓은 것을 바라볼 때마다 왠지 뿌듯하고 행복하다. 은퇴 후 한 권씩 다시 차근차근 읽어볼 작정이다.
닷컴의 열혈독자가 되어 고향과 부모님의 사랑을 속속들이 확인하지 않았다면 노후를 별 고민없이 대도시에서 지냈을 게 틀림없다. 이제 10여년만의 나의 소박한 꿈이 실현되어(지난해 귀향, 고향집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 툇마루에서 앞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아무 생각이 없다. 근심 걱정이 없다. 오직 ‘마음 부자’가 된 듯해 벅차고 뿌듯하기만 하다. 한편으로 ‘한 잡지의 힘’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지천명(50세)’ 즈음에 내 삶의 지향점을 바꾸게 한 닷컴을 만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다. 농사를 배우지 못했지만, 배워가며 하나하나 조금씩 해볼 생각이다. 탯자리인지라 동네인심이 나쁠 까닭도 없고,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잘 왔다:”며 반길 뿐아니라 구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가 아직도 정정하시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 형제자매들도 수시로 찾아오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연명‘귀거래사’의 한 구절 ‘열친척지정화’, 부모 앞에서 피붙이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우는 것만큼 행복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2016년에는 닷컴에 실린 십수 편의 글들과 블로그에 올려놓은 가족을 주제로 한 생활졸문들을 책으로 엮었다. 아버지 구순과 부모님 결혼 70주년을 기념하여 ‘총생들아, 잘 살그라’라는 이름의 가족문집을 아버지 생신날 무릎에 바쳤다. 닷컴의 전문기자에게 한 권 보내드렸는데, 서평이 실릴 줄이야. 막 배달돼 온 닷컴을 소파에서 읽다가 깜짝 놀랐다. 문제는 그 다음, 낯 모르는 ‘인간극장’ 제작 프로덕션 팀장의 전화가 온 것이다. 출연을 꺼려 하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3주 동안 촬영에 임했다. 힘드셨지만, 응해 주신 부모님이 고마웠다. 2016년 11월초 문집 제목 그대로 방영된 5일간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실시간 검색 1위로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전라도 방언 ‘총생’이 방송에 떴다. 총생은 당신들로 인해 이루어진 자식들을 비롯한 슬하 자손들을 뜻하는 방언이다. 그것이 어찌 흔한 일일까. 결과적으로 닷컴이 나로 하여금 백만불짜리 효도를 하게 한 셈이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가 닷컴의 글과 사진들을 보시며 당신의 긴 삶을 회억하고 미소를 짓는 것도 보기에 좋다. 이 잡지는 내 노후의 삶을 무력하게 살지 않고 윤택하고 풍성하게 살라는 활력소이자 인생의 길동무이다. 착하고 주변에 서로 인정을 베풀며 노놔먹는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200호를 쌓아놓으니 나의 키를 넘어선 닷컴, 나의 삶을 감칠맛나게 만드는 생활의 조미료, 나의 ‘닷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첫 사랑’처럼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