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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Ⅰ
- ①원시미술,②메소포타미아, ③이집트,④그리스,⑤헬레니즘,⑥로마,⑦비잔틴,⑧로나네스크 이전,⑨로마네스크,⑩고딕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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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Ⅰ https://blog.naver.com/ohyh45/221726407305
① 원시미술, ② 메소포타미아, ③ 이집트, ④그리스, ⑤헬레니즘, ⑥로마,
⑦ 비잔틴, ⑧ 로마네스크 이전, ⑨ 로마네스크, ⑩ 고딕미술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Ⅱ https://blog.naver.com/ohyh45/221726408127
① 초기 르네상스, ② 르네상스미술, ③ 이탈리아 르네상스, ④ 북유럽 르네상스,
⑤ 아메리카 미술, ⑥ 매너리즘, ⑦ 바로크 미술 , ⑧ 로코코 미술, ⑨ 신고전주의, ⑩ 낭만주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Ⅲ https://blog.naver.com/ohyh45/221726417523
① 라파엘 전파, ② 아르누보, ③ 사실주의, ④ 인상주의, ⑤ 점묘파, ⑥ 신인상주의,
⑦ 소박파, ⑧ 상진주의, ⑨ 야수파, ⑩ 입체파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Ⅳ https://blog.naver.com/ohyh45/221726413539
① 미래주의, ② 오르피즘, ③ 표현주의, ④ 러시아 아방가르드, ⑤ 데 스틸과 신조형주의
⑥ 다다이즘, ⑦ 순수주의, ⑧ 바우하우스, ⑨ 초현실주의, ⑩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Ⅴ https://blog.naver.com/ohyh45/221726619662
① 리얼리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Ⅰ 목차
1.공간외포(Horror vacui)-원시미술(Primitive Art)-미술이 어렵다는 당신께--
2.인류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 지배민족 자주 바뀌어 개방적… 문화적 다양성 가져
3.‘영생불사’의 ‘정면성의 법칙’이 만든 이집트 미술-오직 죽은 자를 위한 예술 영생을 위한 절규를 담다
4.그리스 문명 - 산과 섬으로 이뤄진 척박한 땅 고대 도시국가 꽃피우다
5.헬레니즘 미술- - 동·서양 문화의 만남,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탄생
6.로마의 미술 -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한 조각 정원을 옮긴 듯 사실적인 벽화,
7.중세의 시작, 비잔틴 미술 -데이시스, 이콘, 모자이크, 성상파괴운동
8 중세의 시작, 로마네스크 이전의 미술 - 중세 천년, 결코 어두웠던 시기가 아니었다
9.로마네스크 미술 -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석조 건축 전성기 이뤄
10.고딕미술 - 하늘 향해 솟아오른 뾰족탑과 화려한 빛의 예술
1, 공간외포(Horror vacui)-원시미술(Primitive Art)
- 미술이 어렵다는 당신께… “내 맘대로 보면 됩니다”
원시인들이 동굴 벽화를 그린 이유?
① 빈 여백·공간에 대한 공포감 때문
② 소망을 형상화해 기원하기 위해서
원시미술 해석에 ‘절대 진리’란 없다 - 후대인들의 상상과 추론일 뿐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벽화. 필자 제공
미술 작품 앞에만 서면 ‘어렵다’, ‘모르겠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어려움의 바탕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미술품의 보이는 것 너머에 초월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정말 미술 작품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 이런 ‘도그마’로부터 자유스러워지자. 해외여행에서 그 나라 말을 알면 여행이 수월하듯 미술 동네에서 쓰는 말을 배워 쉽게 이 동네를 유유자적 걸어 보자. 독자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용어를 알면 미술이 보인다
미술은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기원전 4만 년에 만들어진, 남프랑스와 스페인 북부에서 발견돼 프랑코칸타브리아미술이라 일컫는 알타미라(Altamira)나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외에도 돌에 새기거나 색을 칠해 형상을 남긴 많은 암각화와 조각이 있다.
동굴벽화는 암각화의 일종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암각화의 나이도 점점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정글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기원전 6만 년 것으로 추정된다. 암각화는 유럽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오세아니아 지역 등 지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앞으로도 꾸준히 발굴될 것이다.
미술의 탄생, 기원전 4만~6만 년 동굴벽화
원시인들은 왜 동굴에 벽화를 그렸을까? 학자들은 자신 앞의 빈 여백 또는 공간에 대한 공포감, 즉 공간외포(空間畏怖·Horror vacui) 때문에 빈 벽에 인물이나 동물 또는 추상적 문양을 그려 넣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는 자신의 공간을 꾸미기 위한 장식 본능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는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화장하는 것과 같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주술적인 이유가 있다. 자신 또는 동굴에서 함께 사는 이들의 소망을 그려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원시인들은 사냥감인 들소가 창을 맞고 쓰러진 모습을 그려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다.
이런 일은 여전히 원시부족 사이에서 성행한다. 서인도제도에서는 지금도 특정인을 저주하고자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는 부두교가 성행한다. 이런 믿음은 원시종교에서 가시적인 대상을 향해 숭배 또는 기도하는 페티시즘(Fetishism)과 통한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 발견된 동굴벽화.
지금까지 발견된 동굴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필자 제공
다산과 대풍 기원한 3.5등신 여인의 나상
암각화와 함께 원시미술에서 나타나는 유물로는 여인의 나상이 있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상이 그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1908년 발굴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있다. 하지만 이 여인상은 우리가 아는 비너스와는 거리가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팔등신의 여성상이 아닌 3.5등신의 작달막한 키에 가슴과 배 그리고 엉덩이가 과도하게 크게 만들어진 비만형이다. 프랑스 로셀의 비너스(Venus of Laussel), 러시아의 코스텐키 비너스(Venus of Kostenki), 우리나라의 울산 신암리 여인상도 빌렌도르프의 것과 비슷하다.
동굴벽화에는 소나 말, 사슴 등 주로 사냥감이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으로 그려졌다. 한 동굴에 200여 마리가 그려진 곳도 있는데 한 번에 전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그림이나 조각은 뜻을 이루고, 소망을 빌기 위한 주술적 이유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조각의 일정 부위가 과도하게 확대된 이유는 낳고 기르는 생육과 대지, 풍년을 상징하고 관장하는 땅의 여신, 즉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지모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즉 다산과 대풍을 기원하는 것이다.
작품 보며 스스로 상상해 가설 세워보길
물론 이런 이야기들도 후대인의 상상이나 추론에 의한 것이다. 원시인들이 왜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기록도, 전해 들은 사람도 없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원시미술에 대한 지식도 알고 보면 학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을 학문공동체에 보고해 인정받은 것이다.
기존 학설과 용어는 언제나 새로운 주장에 의해 바뀔 수 있다. 절대 진리란 절대 강자처럼 절대 없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도슨트(박물관·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의 설명이나 안내서를 참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스스로 상상해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 더 좋다.
다만 그와 관련된 용어를 알고 돌도끼를 보면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고 새로운 가설들이 나올 터. 사실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이렇게 ‘내 맘대로 보기’ 위함이다.
석기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이 스스로 석기시대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1836년 덴마크의 톰센(C. J. Thomsen·1788~1865)은 너무 넓은 선사시대의 범위를 인류가 사용한 도구의 발전 단계에 따라 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나눴다.
영국의 존 러벅(John Lubbock·1834~1913)은 석기시대를 다시 구석기와 신석기로 구분했다. 이렇게 용어란 대개 시대와 지역이나 재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박물관·미술관에서 유물이나 미술품을 분류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고학이 발전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들은 더 세분화될 것이다.
그냥 보지 말고 ‘왜?’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도구도 미술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도구도 ‘만든다’는 의미에서 미술의 범주에 넣는다. 초창기 인류는 돌을 주워 쓰거나 일부를 깨뜨려 사용했다. 이때를 구석기 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 석기를 뗀석기 또는 타제석기라 한다. 또 떼어낸 모양에 따라 격지석기와 돌날석기로 나누고 이는 용도에 따라 다시 나뉜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세분화한 용어까지 알 필요는 없다. 미술이란 모두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면 좋지만, 모른다고 내가 무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쳐다보지 말고 ‘왜?’라고 한 번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 미술이기 때문이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1 연재를 시작하며 : 공간외포(Horror vacui)-원시미술(Primitive Art) -미술이 어렵다는 당신께… “내 맘대로 보면 됩니다” / 국방일보, 2019.1.2.
2 인류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 지배민족 자주 바뀌어 개방적… 문화적 다양성 가져
이라크·시리아·터키 등 중동서 태동 - 근간은 수메르인의 종교·법률·문자
자유롭고 자연주의적인 작품 제작-이후 셈족은 건축에 벽돌 쌓아올린 ‘산’이란 뜻의 지구라트 활용
구 바빌로니아인은 묘사 뛰어나 -점토판·프레스코 대벽화 제작
독일의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바빌로니아 공중정원(Hanging Gardens)의 ‘이슈타르(Ishtar)의 문’. 발굴한 유적을 통째로 실어와 1930년까지 10여 년간 모사해 복원했다. 박물관 높이에 맞춰 복원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높이가 낮다. 필자 제공
인류 문명은 비옥한 토지와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세계 4대 문명’은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허를 중심으로 발생한 황허 문명이다. ‘4대 문명’은 중국 청나라 말 개화운동을 주도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에 의해 정립된 말이다.
문명과 문화
그런데 왜 ‘4대 문화’가 아니라 ‘4대 문명’이라고 했을까? 문명이란 물질과 정신이 모두 발달해서 진보한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시민(Civis)과 도시(Civitas)에서 비롯된 ‘도시문화’를 의미하지만 19세기 말 ‘문화’를 처음으로 정의한 E. B. 테일러(E. B.Tylor·1832~1917)는 ‘문명’과 ‘문화’를 같이 봤다.
이후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은 문명을 ‘외형적인 성취나 물질적·사회적 발전’으로, ‘문화’는 ‘정신적 가치의 발전’으로 정의했다. 즉, 문화가 정신적이면 문명은 물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인류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3500년 전 지금의 이라크·시리아·터키·이란 등을 포함하는 중동 지역에서 태동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사통팔달의 메소포타미아
이곳에서 처음 발전한 것은 수메르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지리적으로 두 강 사이에 끼어 있고 그 밖은 사막이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살았다. 이후 아카드 왕국이, 그후 함무라비 대왕(B.C. 1810~ B.C. 1750)이 등장했고 고대 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아시리아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다리우스 대왕의 페르시아에 복속되면서 맥이 다한다.
시종일관 한 민족에 의해 발전해 온 이집트 문명이 폐쇄적이라면 지배민족이 자주 교체된 메소포타미아는 개방적이며 능동적이라 다른 문명 간의 융합이 쉬웠고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지녔다.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인들이 중심이 되고 아카드·아무르인들의 문명이 더해진 것이다.
사회는 귀족·평민·노예계급으로 이뤄졌고 내세를 믿기보다는 현세의 행복을 주관하는 다양한 신을 모셨는데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많았다.
수메르인의 유산 수용… 예술은 예외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러 민족이 교대로 주인 노릇을 했지만, 근간은 수메르인의 종교·법률·과학과 상업·문자였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메르의 유산을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다만 예술만은 예외였다. 수메르인들은 파테시(Patesi)라는 우두머리가 통치했지만, 제국을 세울 만큼 힘이 크진 않았다.
농업과 함께 상업도 발달해 이미 화폐와 어음, 영수증 등을 사용했다. 또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보복률(Lex Talionis)을 근간으로 한 법체제도 마련했다. 종교는 다신교적이며 인간과 신의 모습이 닮았다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 중심이 됐다.
이들은 설형문자(Cuneiform)를 사용했으며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해 60진법과 태음력을 썼다. 점성술 또한 발달했다. 수메르인들은 금속세공과 보석가공, 조각 등 세속적인 장신구에서 자유스럽고 자연주의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석재가 부족한 지역적 특징 때문에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해 건축 분야는 약했다. 이후 셈족은 건축술을 발전시켜 신전의 경내에 벽돌로 쌓아 올린 ‘산’이라는 뜻의 지구라트(Ziggurat)와 공중정원(Hanging Gardens)을 세웠다. 이들은 왕의 무덤과 개인 주택에는 아치(Arch)와 볼트(Vault)와 돔(Dom) 기법을 활용했다.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부조,
기원전 883~859년경, 설화석고, 높이 234.3㎝,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필자 제공
구 바빌로니아인들, 예술에 탁월
구 바빌로니아인들은 바빌로니아의 법과 종교를 따랐다. 부활이나 영생은 생각하지 않아 현세적이며 물질주의적이었다. 구약의 ‘노아의 방주’와 매우 흡사한 길가메시(Gilgamesh)라는 서사시는 인간은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종교관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구 바빌로니아 문화의 면모는 1933년 도시 마리가 발굴되면서 확인됐다. 마리의 대왕궁은 220개의 방이 미로로 연결돼 신전보다 규모가 컸다. 벽에는 타일 장식을 사용했다. 또 2만4000여 장의 점토판을 소장한 도서관과 프레스코 대벽화도 발견됐다.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 아시리아는 매우 호전적이며 전투적이었다. 이 때문에 구 바빌로니아인들은 적을 물리치기 위한 가장 큰 무기로 ‘두려움’을 선택했다. 그들은 전투에서 매우 잔혹하게 군인과 주민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들은 100년도 못 가 반기를 든 주변 부족들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매우 탁월한 저부조(Low Relief)를 남겼다. 구 바빌로니아인들은 전쟁과 사냥의 극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실감 나게 묘사했다. 하지만 주제가 전쟁과 사냥에 국한됐다는 한계도 보였다.
신바빌로니아… 칼데아의 부활
아시리아가 붕괴된 후 우르(Ur) 지역의 칼데아는 바빌론에 수도를 복구하고 함무라비 시대를 재생하고자 했다. 이 시기를 신바빌로니아(B.C. 626~539)라 한다. 신은 인간을 떠나 별을 숭배하는 점성종교(Astral Religion)로 발전했고 영적인 대상이 됐다. 점성술은 천문학으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인간 너머의 신을 대표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Ishtar)는 격렬하고 호전적인 성격의 여신으로 미와 연애, 풍요와 다산, 전쟁, 금성을 관장한다.
신바빌로니아는 이후 페르시아에 귀속되지만 이집트 문명과 함께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유럽 문명의 시원이 됐다. 특히 이곳을 두 강 사이에 끼인 섬 또는 반도라는 의미의 ‘알자지라’라고 불렀는데 아랍을 대표하는 다국적 방송사의 이름도 여기서 온 것이다. 문명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2 인류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지배민족 자주 바뀌어 개방적… 문화적 다양성 가져 / 국방일보, 2019.1.9.
3 ‘영생불사’의 ‘정면성의 법칙’이 만든 이집트 미술
-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예술 영생을 위한 절규를 담다
영원불멸 내세관 수천 년 이어져 -인간 몸의 형태 영원 보존 위해 흐트러진 모습 용납하지 않아
옆모습인데 시선·몸통 정면 향해 -시선 흩어지면 몸도 흩어진다 생각
고대 이집트의 벽화. - 지체 높은 사람은 크고 화려하게, 시종이나 아랫사람은 작게 그리는 존대비소의 원칙을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왕조 시대의 이집트 벽화. - 인물들의 얼굴은 옆을 향하고 있지만 시선과 몸통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반면 오리의 경우 자연스러운 옆모습을 담고 있다.
기원전 2490∼2472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멘카우레와 그의 여왕’. 필자 제공
우리에게 아마도 가장 익숙한 고대문명이 이집트 문명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현실적이며 현재적이었다면 이집트 문명은 내세적으로 영원한 삶, 죽음을 넘어선 삶을 원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차지하는 자가 이집트를 차지한다’는 말처럼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 즉 나일 밸리(Nile Valley)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집트 문명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용어 중 하나는 ‘정면성의 법칙(Gesetz der Frontalitat, Law of Frontality)’이며 그 법칙의 중심에는 ‘영생불사’의 정신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예술은 죽음과 사후세계에 초점을 두어 영생을 위한 절규에 가까웠다. 그들의 예술은 지금의 삶보다 죽은 후의 삶에 더 집착했다. 따라서 죽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미술품을 포함한 일상적이고 사치스러운 물건들로 그들의 무덤을 채웠다.
죽은 사람들의 사후 새 삶 돕기 위해 무덤 채워
또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그릇은 생전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만들어야 죽음 다음의 삶이 계속될 수 있고 영혼이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의 예술은 인간과 자연에 대해 매우 원칙적이며 규칙적이고 상세한 묘사가 특징이다. 물론 당시의 기법이나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보면 좀 조악하고 부족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최상의 기술을 동원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현재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영구적으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아름답기보다는 완전성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정면성의 법칙’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의 몸의 형태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 형태나 동작이 흐트러진 모습은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모든 조각이나 회화작품에서 인물들의 시선은 정면을 분명하게 응시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라보는 사람이나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 모두의 시선이 흩어짐 없이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시선이 흩어진다면 몸도 아울러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법칙은 아주 철저하게 불문율처럼 지켜졌는데 사람의 옆 모습을 그리거나 만들어도 몸통과 눈은 정면을 보고 있도록 했다. 물론 이 법칙 때문에 매우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형식의 원칙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삶이 아니라 생전의 삶의 순간을 정지시키는 동시에 그 순간을 생생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매우 적절하고 의미 있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변하지 않는 돌이나 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또 영원불멸의 내세관을 반영한 정면성의 법칙은 2차원의 미술 형식으로 그들의 무덤이나 사원의 그림, 벽화는 물론 조각상 등 전방위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 예술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딱딱한 예술이었다. 이는 이집트 예술이 변화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 범주가 나일 유역에 한정되고 그 밖은 사막으로 둘러싸여 폐쇄적이었다는 점도 이유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었는데 이는 후기에 이를수록 쇠퇴하기보다는 더 보수적이며 경직된 형태로, 그 옛날 전성기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이어갔다.
영생불사 정신에 정복당한 알렉산더 대왕, 파라오가 되다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BC 323)에 의해 이집트는 정복당했지만, 그는 이집트의 영생불사 정신에 정복당해 파라오가 됐고 그 또한 영원불멸의 모습으로 새겨지고 그려졌다.
그만큼 이집트의 영원불멸, 생명불변의 법칙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녔고 후에 로마에 복속돼 멸망할 때까지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정면성의 법칙은 인체의 평형과 부동성이라는 절대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조각이나 벽화의 인물들은 인체를 좌우로 양분하는 중앙선을 중심으로 분명하게 좌우대칭을 이룬다. 또 인물의 본질에 중점을 두어 닮는 것보다는 절대적인 형상을 만들고자 했다.
약 3000년을 이어온 이 방법은 이집트의 지배자 또는 왕족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아 늘 언제나 똑같은 한 인물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남자들은 모두 팔과 발을 모은 채 차렷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여성은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은 풍만하게 묘사되지만, 부동의 차렷 자세는 동일하다.
모든 이집트 예술은 이 하나의 법칙에 따라야 했고 그래서 이 방식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동일하게 유지됐다.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는 과거의 기법과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는 사람들이었다. 피라미드(Pyramid)와 미라(Mummy), 스핑크스(Sphinx) 같은 것도 이런 영생불사라는 믿음에 대한 결과물이다.
다만 벽화에서 보이는 일상은 비교적 사실적이며 살아있는 듯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주인공의 모습은 정면성의 법칙에 따라야 했지만, 배경은 그리는 이들의 자유였다. 따라서 종종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들이 발견된다. 또 집과 그 안에 사는 사람, 새, 수영장, 신 등은 기하학적으로 디자인한 모습을 지니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도 지체 높은 사람은 크고 화려하게, 시종이나 아랫사람들은 작게 그리는 존대비소(尊大卑小)의 원칙을 지켰다. 아무튼 이집트 미술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미술이 지닌 감상과 장식의 역할이 아니라 현세와 영생을 이어주는 충실한 중개자였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3 ‘영생불사’의 ‘정면성의 법칙’이 만든 이집트 미술-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예술 영생을 위한 절규를 담다 / 국방일보, 2019.1. 16.
4 그리스 문명 - 산과 섬으로 이뤄진 척박한 땅 고대 도시국가 꽃피우다
기원전 8세기 중엽 시작 - 아테네·스파르타·테베 중심으로 폴리스 세우고 중동과도 교류
4~5세기 전성기 이룬 유럽문화 원류 - 인간의 모습을 띤 신 조각상 제작
- 모든 가치에 ‘인간 우선’ 사고 담겨
작가 미상, ‘라오콘(Laokoon)상’, 기원전 150∼50년경, 바티칸 박물관. 필자 제공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하는 그리스는 산과 섬으로 이뤄진 척박한 땅이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신석기 문화가 등장했고, 기원전 15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Cretan civilization)의 뒤를 이은 독특한 청동기 문화의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 등장했지만 도리스인(Dorians)의 침략으로 사라졌다. 이후 기원전 1100년부터 약 350년간 그리스는 문자도 없는 암흑 시기를 맞는다.
하지만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문명이 시작돼 4~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며 고도의 문명을 일군 것이 그리스 문명이다. 이들은 아테네, 스파르타, 올림푸스산, 마라톤, 델피, 테베, 아르카디아, 올림피아 등을 중심으로 각각의 도시국가(Polis)를 세우고 중동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수용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가꿔나갔다.
그리스인들의 ‘유럽문화의 원류’라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하긴 이미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이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We are all Greeks)”라고 할 만큼 그리스를 빼면 유럽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유럽은 그리스 문명에 빚지고 있지만, 요즘의 그리스는 경제난으로 인해 유럽의 계륵 신세로 전락하면서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이다.
사실 그리스 문명은 18세기가 될 때까지도 로마 문화에 밀려 존재가 미미했다. 하지만 로마도 실은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리스인들에 의해 시작됐다.
로마는 그리스의 12주신을 자신의 신으로 모셨다. 아프로디테가 비너스, 제우스가 유피테르로 이름만 바꿨을 뿐이다. 또 그리스의 서사문학, 역사, 미술, 과학과 같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받았다.
로마의 그늘로 들어간 그리스 문화가 다시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중세사회가 자리 잡은 12세기 들어서였다. 이때 비로소 아라비아어로 쓰인 고대 그리스 서적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점차 유럽 전역에 그리스, 희랍 문명이 알려지게 됐다.
안디옥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of Antioch), ‘밀로의 비너스’,
기원 전후 100~130년, 대리석, 루브르박물관. 필자 제공
하지만 바티칸 도서관에서 일하던 독일인 빈켈만(J. J. Winckelmann·1717~1768)이 수많은 그리스 조각품을 보고 이를 양식과 시대별로 구분해 1764년 『고대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rns)』를 출간하면서 그리스가 발굴(?)됐다.
그는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특히 ‘라오콘상’을 두고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숭고함’이라며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이후 그리스는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후 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그리스 유물을 수집 혹은 약탈을 통해 끌어모았다. 오늘날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베를린의 페르가몬에 있는 엄청난 그리스 유물은 당시 유럽의 그리스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의 증좌다.
그리스 미술의 중심은 조각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띤 신을 조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가치에 우선했다. 조각은 아카익(Archaic, 기원전 8~6세기)기를 거쳐 초기 고전주의 (기원전 490~460년), 고전주의(기원전 450~400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침공하기 전인 후기 고전주의 양식(기원전 400~300년)을 거치면서 전형화한다.
그리스 조각상은 남녀별로 차이가 있다. 흔히 여성상을 의미하는 ‘코레(Kore)’는 여성 또는 소녀를, ‘페플레스(peoples)’는 여성이 입고 있는 긴 겉옷을 의미하는데 남성은 옷을 벗고 있지만 여성들은 항상 페플레스를 걸치고 있다.
인체는 아직 딱딱하고 굳은 자세를 버리지 못했지만 코레상의 큰 특징은 얼굴에 드러나는 ‘아카익 스마일(Archaic Smile)’이라고 하는 미소다. ‘신비로운’, ‘알 수 없는’이란 의미의 아카익 미소는 얼굴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한 결과다. 무표정에서 표정을 지닌 조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스 조각은 더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왁스와 안료로 색칠을 했다. 이를 ‘납화법(Encaustic)’이라고 한다. 고전주의에 들어서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얼굴과 골격, 근육이 등장하며, 비대칭적인 어깨와 골반이 편안하게 보이도록 몸의 중심을 한쪽 다리에 두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형태가 등장한다.
이제 움직이는 자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청동상들은 ‘밀랍소멸식 청동주조법(Lost Wax Process)’으로 제작됐다. 우선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밀랍을 두껍게 바른 다음 흙을 덮고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내고 그 속에 청동을 부어 넣고 틀을 떼어 내는 방식이다. 지금도 사용되는 이 주조법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됐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서 매우 우아하고 매끈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조각이 등장했다. 감정이 정제된 매우 사유적이며 침착한 표정을 지녀 이상적인 인간의 원형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인체도 ‘캐논(Canon)’, 즉 비율을 중시해 ‘등신’의 개념을 세웠다. 초기에는 7등신, 이후 이상적인 인체의 비율로 8등신 개념이 도입됐다.
남아 전해지는 그림은 극소수지만 제욱시스(Zeuxis)와 파르하시우스(Parrhasius)가 누가 더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는가를 두고 내기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회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의 그림 실력은 도자기에 그려진 여러 그림을 통해 보여진다.
물항아리(Hydria), 기름항아리(Lekythos), 와인 항아리(Krater), 와인주전자(Oinochoe)와 다용도 컵(Amphora) 등 다양한 종류의 도기가 만들어졌는데 자기 표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들을 서술형으로 그렸다.
이들 형상은 고대 이집트나 에게헤 문명의 작품들처럼 옆모습이 강조됐고 인체의 부분 부분이 세밀하게 묘사돼 꽤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또 경우에 따라 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항아리도 나와 장인이 예술가로 사회적 지위가 격상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후기 헬레니즘 시대로 이어간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 그리스 문명 - 산과 섬으로 이뤄진 척박한 땅 고대 도시국가 꽃피우다 / 국방일보, 2019. 2. 1.
5. 헬레니즘 미술 - 동·서양 문화의 만남,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탄생
: 코즈모폴리턴, 간다라미술,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토스 양식과 콘트라포스토
그리스에서 페르시아, 인도까지 - 거대제국 이룩한 알렉산더 대왕
피지배 문화 존중하며 새 문화 접목 - 세속적 현실적 일상적 문명 지향
인간의 격정·역동성 미술품에 표현 - 그리스 조각, 印 간다라 미술로 완성
한국·일본 건너와 불상조각에 영향
메디치의 비너스, 대리석 B.C.1, 158.4×43.8 ×47.6㎝, 우피치 미술관. 필자 제공
사지 또는 오지선다형 문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역사, 그중에서도 미술사를 공부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시대 구분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졌지만 실은 최고 지배계급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뀐 것일 뿐이다. 법과 제도가 바뀌고 새로운 삶의 양식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칼로 무 자르듯 할 수 없는 까닭에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역사다.
특히 헬레니즘(Hellenism)이나 로마(Rome)문화가 그렇다. 특히 헬레니즘 문화는 지속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민족과 문화가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하나의 문화를 창출해낸 독특한 시기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고대 근동지방, 인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 B.C. 323)에 의해 비롯된 문화다.
쿠로스상, 아나비소스 출토, c. 530 BC, 대리석 (H)163㎝, 아테네고고학박물관. 필자 제공
불과 13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에 거대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명 그리고 인도 문명 등 동방과 서구 문명의 근저를 융합시켜 범세계적인 새로운 시대와 문화를 창출했다. 이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그의 치세술에서 비롯됐다.
알렉산더는 피지배국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접목되도록 하는 용광로 정책과 함께 분권정책을 펼쳤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는 통합돼 강력한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로 변화했고 인간의 현실적인 평안과 안락을 중히 여기면서 올림포스의 신들은 점차 쇠퇴해갔다.
아무튼 새로운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한 헬레니즘 미술은 모든 면에서 전 시대를 초월했고 그 중심은 그리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지금의 시리아 인근의 안티오키아, 터키 북부에 위치했던 페르가몬 등으로 옮겨 갔다.
헬레니즘 문화는 특히 풍만한 인체와 장식적이며 화려한 동방주의, 단순하고 고전적인 그리스 양식이 만나 새로운 미술을 창조했다. 따라서 지적이며 이성적이었던 그리스 문명은 더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서민의 문화, 일상적인 문명을 지향하게 됐다.
미술품은 인간의 격정과 흥분이라는 격정적인 태도와 역동적인 운동감으로 표현됐다. 이런 역동성은 바티칸에 있는 ‘라오콘’이나 베를린 페르가몬 미술관의 ‘제우스 신전 대제단의 부조’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사실적인 감각과 기법도 가미했다. 로마국립박물관에 있는 ‘휴식을 취하는 권투선수’, 루브르 박물관의 미로의 ‘비너스’나 ‘승리의 여신상’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들은 헬레니즘의 새로운 전통이 로마를 통해서 꽃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쪽으로 뻗어 나간 그리스 조각은 인도에 이르러 간다라 미술(Gandhara Art)로 완성된 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 건너와 특히 불상 조각에 영향을 미쳤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은 최대한 육감적인 형태를 취했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천상의 미녀가 아닌 속세의 요염한 관능미를 드러내는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결국 상반신은 풍만한 가슴을, 하반신은 남성의 상징을 지닌 남녀 양성의 자웅동체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로 나타났다.
로마 콜로세움. 1층은 도리아, 2층은 이오니아, 3층은 코린토스식으로 세워졌다. 필자 제공
루브르 박물관에 있으며 ‘미로의 비너스’라 불리는 ‘메로스의 아프로디테’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메디치의 비너스’ 등이 그것이다. 고전주의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얼굴과 몸의 골격은 몸의 중심을 한쪽 다리에 실어 ‘짝다리를 짚은’ 인체상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로 특화된다.
그리스 조각은 헬레니즘을 맞으면서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완성했다. 빈켈만(J. J. Winckelmann, 1717~1768)은 ‘라오콘상’을 두고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숭고함’이라 높게 평했다.
그리스 미술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석조건축이다. 건축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이때 매우 엄격한 규칙에 따라 목조건축의 형식을 석조건축으로 구현했던 단순하고 남성적인 도리아 양식(Doric Order)이 처음 등장했다. 도리아 양식은 고졸기(Archaic Period, c.800~c.500 B.C.) 건축의 주된 양식으로 파르테논 신전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후 기둥의 높이가 지름의 10배에 이르는 섬세하고 우아한 양식이 고전기(Classical Period, c.500~323 B.C.)에 등장하는데 이것이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이오니아식 기둥은 기둥 최상부에 베이스가 있고 캐피털에 소용돌이 모양의 볼류트(Volute)라는 장식이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기둥 상단부에 아칸서스 잎을 새겨 매우 장식적인 코린토스 양식(Corinthian Order)이 등장한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1층은 도리아, 2층은 이오니아, 3층은 코린토스 양식으로 이 세 가지 양식이 모두 적용됐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5 헬레니즘 미술, 코즈모폴리턴, 간다라미술,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토스 양식과 콘트라포스토-동·서양 문화의 만남,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탄생 / 국방일보, 2019. 2. 13.
6 로마의 미술 -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한 조각 정원을 옮긴 듯 사실적인 벽화
: 프레스코, 세코, 모자이크 그리고 스케노그라피아, 콤펜디아리아,
아우구스투스상. 바티칸미술관 소장. 필자 제공
고대 로마의 생선을 묘사한 모자이크. 필자 제공
고대 로마 리비아 빌라의 벽화. 로마국립박물관 팔라조 마시모 소장. 필자 제공
로마의 문명은 이제 ‘미술’이라는 용어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전의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현상들을 ‘문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질적이며 실용적인 삶의 방식을 포함하는 개념인 반면 ‘문화’란 도덕·가치관·종교 등 정신적인 측면을 중하게 다룬 때문이다.
사실 문명시대는 문화 또는 미술이라는 개념보다는 삶을 위한 수단 또는 방편으로서 실용적 목적 아래 제작된 유물들을 통해 당시를 조망했다면, 이후 문화 또는 미술이라는 말은 가치중심적이며 비가시적인 측면의 현상이 나타났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실생활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취미와 미적 태도에 따라 제작된 회화·조각·공예품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화·조각·공예품의 등장
지금은 로마라는 도시명으로 남았지만 로마 미술은 기원전 27년경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로 즉위한 때부터 제정로마가 동·서 로마로 분리된 395년 또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그리고 때로는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문화를 의미한다.
이탈리아 반도를 최초로 지배했던 민족은 에트루리아(Etruria)인들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10~8세기경 터키 지방에 살았던 리디아인으로 지금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알프스산맥 아래까지 세를 떨쳤다. 이들은 이미 BC 8세기경부터 돌로 성을 쌓았으며, 도로를 닦고 다리를 만들고 길을 포장했다.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도시의 형태를 완성했다. 특히 원형 아치는 로마 문화의 근간을 세웠다. 또 건축·조각·회화·공예에 있어서 독창적인 면모를 세워나갔다.
이후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나눠 점령하고 있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이들은 점점 힘을 키워 지중해 동부에서 이집트, 이스라엘은 물론 서부의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 프랑스와 벨기에를 망라하는 서부 유럽 즉 라인강과 알프스, 피레네산맥을 넘어 대서양에 연한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했다.
이런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이들은 ‘분권’과 ‘자치’라는 알렉산더의 전례를 따랐다. 대제국이 된 로마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줬고,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화의 시대에서 종교의 시대로 자리한다.
회반죽 마르기 전 칠하는 프레스코 벽화
로마의 회화는 현재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회반죽을 발라 마르기 전에 채색하고 마르면서 색이 고착되는 프레스코(Fresco)가 벽화로 제작됐다. 그러나 완전히 마른 회벽에 석회수에 물감을 풀어 그리는 세코(Secco) 기법도 쓰였다.
또 원화 위에 돌이나 유리, 색이 있는 대리석, 타일 같은 것을 모르타르나 석회, 시멘트로 고정시켜 그림을 완성하는 모자이크(Mosaic)가 크게 성했다. 이는 마치 요즘 디지털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픽셀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고대 원근법 스케노그라피아
로마 시대의 그림은 ‘눈속임 회화(Trompe-l’œil)’를 시도했다. 공간은 마치 무대에서 소실점을 통해 깊이감을 느끼는 것처럼 눈을 속이는 스케노그라피아(Scaenographia)라는 고대 원근법을 사용했다.
바사리가 ‘감탄스러운 속임수’라고 했던 15세기에 세워진 산 사티로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의 제단 뒤 벽을 착시 현상을 이용해 마치 깊은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도 실은 이런 고대원근법을 원용한 것이다.
또 인상파처럼 생략하면서 빠른 필치로 그려내는 콤펜디아리아(Compendiaria)라는 기법이 성행하면서 분위기 위주의 그림으로 변화해 나갔다. 폼페이 벽화가 공상적이며 신화적·헬레니즘적 성격인 반면 로마 고대 미술의 진수인 ‘리비아 빌라의 벽화(Frescoes from the Villa of Livia)’는 이탈리아 고대 미술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월계수·종려나무·오렌지·석류 등 과실수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사실적인 정원은 자연주의의 반영이다.
고대 로마 걸작 ‘리비아 빌라의 벽화’
조각은 그리스의 뒤를 이었다. 1867년 리비아 빌라에서 발굴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를 조각한 ‘프리마 포르타(Augusta of Prima Porta)’는 시대의 걸작인 동시에 벽화가 그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 BC 58~AD 29)의 집임을 밝혀준 증좌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많은 그리스 조각들이 로마로 옮겨졌고 파시텔레스(Pasiteles), 클레오메네스(Cleomenes) 등 재주 있는 그리스 조각가들이 로마로 건너와 그리스의 명작들을 복제했다.
그리스 조각의 단정함에 로마의 자연주의 결합한 역작 ‘아우구스투스 상’
로마 조각은 그리스를 잇고 있지만 특히 초상 조각은 단순하게 외양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함으로써 남다른 성과를 거뒀다. 또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대를 구현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들어서는 단정하고 고전적인 양식으로 정리돼 ‘프라마 포즈타의 아우구스투스 상’이나 ‘아라 파키스(Ara Pacis)’의 부조 같은 작품들은 그리스 조각의 엄격함과 단정함을 토대로 로마의 사실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을 결합시킨 역작으로 남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회화성 높은 고부조의 역동적인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조각은 건축의 일부로 다뤄졌기 때문에 도시의 발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며 로마의 자연주의를 완성한다.
그리스를 포함하는 로마 시대 조각의 정수는 이탈리아 로마 테르니미역 근처의 팔라조 마시모(Palazzo Massimo)와 디오클레치아노 욕장(Terme di Diocleziano), 팔라조 알템프스(Palazzo Altemps) 그리고 크립타 발비(Crypta Balbi) 등 4곳의 국립박물관에 분산 전시돼 있다.
[출처]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6 로마의 미술, 프레스코, 세코, 모자이크 그리고 스케노그라피아, 콤펜디아리아- 성격과 풍모까지 묘사한 조각 정원을 옮긴 듯 사실적인 벽화 / 국방일보, 2019. 2. 20.
7 중세의 시작, 비잔틴 미술 -데이시스, 이콘, 모자이크, 성상파괴운동
-그리스·로마·동방 문화 기독교 미술로 융합하다
비잔틴 십자가의 상아 이콘 책 표지, 11세기,
크리스털과 유리 및 사파이어로 장식, 콘스탄티노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필자 제공
아야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 콘스탄틴 8세의 딸 초상, C. 1028∼1050. 필자 제공
로마 제국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실감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중동아시아에 걸쳐 광활한 국토를 차지하고 각지의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창조적 모방의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를 응용해 자신들의 문화인 그레코로만(Greco-Roman)을 완성했다. 하지만 로마도 유한할 수밖에 없는 세상 이치에 따라 기독교를 공인하고 지금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다.
새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337)에 이어 황제에 오른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Magnus, 347~395)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그가 죽은 395년 로마는 동서로 나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약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지속된 문화를 비잔틴 미술(Byzantine art)이라 한다. 르네상스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비잔틴 미술은 ‘원시 르네상스’라고도 할 수 있다.
초기 비잔틴 미술
2차원적인 선묘·밝은 색상 선호
초기 비잔틴 미술은 자연주의 경향에서 탈피해 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으로 바뀌었다. 또 입체적인 묘사보다는 2차원적인 선묘를 선호했다. 작품은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들이 주를 이뤘다. 12세기에 이르면 표현력과 상상력이 풍부해지면서 더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이교도들의 미술을 빌려 신을 기리고 장식하기도 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그리스 유물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전통을 지켰다. 또 종교적인 주제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재창조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나갔다.
비잔틴은 로마보다는 그리스의 헬레니즘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이집트나 곱트 기독교인들의 곱틱 양식(Coptic style)을 수용, 중간 톤보다는 밝은 색상을 선호해 인물의 현실성은 떨어졌다.
반면 리본, 생명의 나무, 숫양 머리, 날개 달린 동물 등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미술에서 차용한 모티브도 등장했다. 이에 따라 그림에 대한 숭배와 예배 여부로 갈등이 생기면서 우상파괴운동(Iconoclasm)이 생겨났다. 이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유대교, 성상을 부정했던 파울로 파와 정치세력이 가세하면서 비롯됐다.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 숭배를 금지했지만 로마의 서방교회는 무지한 야만인들을 교화하려면 성상 숭배는 불가피하다고 봤다. 또 황제가 교회에 간섭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도 더해져 성상 숭배 금지 명령을 묵살하고 만다. 이는 교황과 황제의 세 대결을 의미한다.
이후 서로 파문을 주장하며 결국 1054년 7월 16일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열돼 서쪽은 로마 가톨릭 교회, 동쪽은 그리스 정교(동방정교)로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신은 정신인 반면 예술은 감각이어서 신적인 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오필루스 황제(Theophilus, 804~842)가 죽고 나서 무려 100년 이상 끌어온 논쟁은 성상 수호자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성화와 성상은 예배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상 숭배 둘러싼 100년 논쟁 종지부
“숭배의 대상 아닌 예배의 대상 ”
수 세기에 걸쳐 흥망성쇠를 거듭한 비잔틴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이민족들과 교류를 통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보다 서유럽과 교류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동방정교의 교세를 통해 아르메니아·조지아 러시아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이 거의 없었던 것은 오직 종교적인 목적에서 경건함과 신을 경배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름다운 사물(Object)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이전에는 작가들이 자신이 만든 작품에 서명을 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는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에게 바치는 물건에 개인의 이름을 적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이유도 있었다.
비잔틴 시대의 미술은 교회나 집을 장식하고, 문맹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려주는 외에 믿음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용도로 제작됐다.
따라서 교회 내부는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장식됐다. 물론 건물 자체가 시각적인 메시지를 지녔지만 가장 청빈한 교회에도 프레스코는 필수였다. 하지만 양식은 대동소이한 데이시스(Deesis) 양식을 선호했다.
이 양식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대천사와 성인들이 인류의 구원을 청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또한 휴대용 성화라 할 수 있는 나무 소재의 이콘(Icon)도 3세기경부터 제작됐다. 이콘은 동방 정교회에서 중히 여기는 그리스도, 성모, 성인 등의 성화상으로 신도들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지녀 성당은 물론 집안에도 모셨다.
이콘은 모자이크나, 나무, 금속, 보석, 에나멜 또는 상아로 장식됐는데, 물감을 벌꿀이나 송진에 녹인 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 벽면 또는 화면에 색을 입히는 전통적인 엔카우스틱(encaustic) 방법을 사용했다.
모자이크(Mosaic)도 교회장식을 위해 성했다. 특히 성모와 그리스도의 후광을 표현하기 위해 금으로 작은 타일을 만들어 썼는데 표면에 요철이 있어 더욱 빛났다. 하지만 여전히 인물은 정면성의 법칙과 부동의 전통을 지켰다.
비잔틴 모자이크의 백미로는 현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성당(Hagia Sophia)의 모자이크와 1100년경 제작된 그리스 다프니(Daphni)돔의 예수 그리스도 초상화가 있다. 물론 기원전 6세기에 비롯된 모자이크의 신화나 일상적인 소재도 비잔틴 모자이크에 반영됐다.
비잔틴 성배, C.1070, 준보석 돌체와 금 에나멜 플라크 장식. 필자 제공
소재는 다양, 양식은 대부분 데이시스
중앙엔 예수, 좌우엔 마리아와 요한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산 비탈레(San Vitale)성당 모자이크가 대표적인 예다. 초상 조각은 로마의 법칙을 따라 청동상과 대리석상이 제작됐으며 6세기 이후에는 그 열기가 식었다. 상아조각도 제작됐는데 빅토리아 앤 앨버트미술관(V/A)의 성모자상이 유일하게 남아 전한다.
또한 성배나 삽화로 장식된 성서 그리고 금은 보석으로 치장한 성서의 표지도 제작됐다. 결론적으로 비잔틴 미술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이 특징이며 우아하고 세련된 그리스, 로마와 동방의 문화가 융합된 문화였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7.중세의 시작, 비잔틴 미술 -데이시스, 이콘, 모자이크, 성상파괴운동 -그리스·로마·동방 문화 기독교 미술로 융합하다 /국방일보, 2019. 3. 6.
8.중세의 시작,로마네스크 이전의 미술- 중세 천년, 결코 어두웠던 시기가 아니었다
: 익랑, 바실리카 양식, 인슐라 미술, 리브볼트, 삽화, 스폴리아
린디스판 복음서의 카펫 페이지, 715~720, 영국박물관 소장. 필자 제공
전기 앵글로 색슨기 어깨금속장식, 7세기 초, 금·석류석·밀피오리 유리. 필자 제공
프랑크왕국을 통일한 샤를마뉴 대제 기마상, 9세기, 청동, 루브르박물관 소장. 필자 제공
우리에게 중세는 종교재판·마녀사냥 등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마 이런 이미지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카멜롯의 전설(1995)’, ‘헨리5세(1992)’, ‘로빈 후드(2010)’, ‘킹 아더(2004)’와 같은 영화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와 주장에 의하면 중세는 결코 ‘어두웠던’ 시기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중세는 마치 ‘가짜뉴스’처럼 실상을 왜곡하고 비틀어 낸 이미지라는 것이 정설이다.
중세는 로마가 동서로 나뉘고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 15세기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중세는 약 1000년 동안 유럽의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서로 연결돼 이뤄진 문화라 ‘중세’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기에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중세는 로마와 르네상스 사이에 끼어있는 시대였다. 후대 역사가들은 인류 최고의 문명을 창조했던 르네상스를 빛내기 위해 중세를 실제보다 더 어둡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연구가 깊어지면서 중세를 지역이나 민족 중심으로 분류하거나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전후로 구분하면서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초기의 중세는 초기 기독교 미술, 게르만족의 이주시대 미술, 비잔틴 미술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달했던 인슐라 미술을 포함해 앵글로 색슨 미술, 노르웨이 미술을 포함하기도 한다. 또 그 이후를 로마네스크와 고딕으로 구분했다. 중세라는 말이 의미하는 복잡함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세 미술 시발점-메로빙거 미술
복식품 등 공예 중심 장식 미술 발전
중세 미술이 이렇게 범위가 넓고 다양한 것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국가에서 황제가 교황을 보호하는 권력의 역전 현상이 나타났고 다시 권력의 중심이 영주에게 넘어가면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도시국가 형태로 분화한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 초기 즉 로마네스크 이전인 전기 로마네스크는 8세기 중엽을 전후로 메로빙거 왕조 시대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로 나눌 수 있다.
메로빙거 시대는 지방분권화가 강화되는 시기였다. 물론 왕권이 쇠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방 영주들에게 권한을 분산시켜 왕권을 유지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게르만의 전통도 여전해 왕들은 머리를 기르고 소를 타고 외출했다. 오늘의 중세에 대한 이미지는 이때 비롯된 것이 아닐까?
중세 미술의 시발점인 메로빙거 미술은 로마 제국령의 건축과 장식조각, 모자이크, 석관조각 등 기독교 미술이 주를 이뤘다. 또 아시아권인 동방의 영향으로 반 고전적인 원시양식이 나타나며 새롭게 이 지역의 주인이 된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들은 기독교 미술에 그들의 전통 민족미술을 접목해 무구, 마구, 복식품 등 공예가 주가 되는 장식미술을 발전시켰다.
이슬람과 싸운 영웅적인 전투를 담은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 샤를마뉴(742∼814)는 카롤링거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는 수도를 아헨으로 정하고 문화·예술을 장려했다. 샤를마뉴는 유럽 전역에서 학자와 문인들을 초빙해 문법·수사·논리 등 3학과 산술·기하·음악·천문 등 4학을 합친 ‘교양 7학과’를 성직자와 귀족, 일반인의 자제에게 가르쳤다.
물론 시간은 짧았고 내용도 고전문화의 형식을 빌려 독창성은 떨어졌지만 기독교와 고전문화를 융합시켜 중세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이때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 시기 미술의 중심은 건축이었다. 특히 종교건축이 많았는데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매우 적다. 당시의 공간구성과 기술은 초기 기독교 건축과 달랐다. 이들은 로마의 건축기술을 받아들인 뒤 게르만 양식과 접목했다.
교회 건축의 기본인 정방형의 평면 내부에 두 줄 또는 네 줄의 기둥으로 공간을 분할해 중앙과 통로로 나눈 바실리카 양식을 선호했다. 돌을 쌓아 올리고 주두(Capital)가 있는 원형의 기둥을 사용하는 한편 목조건축에 능했던 게르만의 기술을 접목해 지붕은 나무로 했다. 북유럽 교회의 상징이 된 종탑도 이런 목조 건축술 덕분이다.
카롤링거 시대 문 연 샤를마뉴
로마 건축에 게르만 양식 접목
교회는 중앙집중형과 선형양식을 선호했지만 모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의 건축물로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로르슈 수도원이다. 746년 세워진 이 건물은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익랑(Transept)이 없는 직사각형의 구조의 3랑식이다. 천장은 격자무늬 모양의 나무를 썼고, 바닥은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해 소박함과 장식적인 요소를 더했다.
중앙집중형 양식의 대표적인 예는 아헨 왕궁 예배당(790∼805)으로 많은 발전과 변화를 보여준다.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의 팔각형 겹공간과 복층갤러리를 차용해 새롭게 정리한 성당은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의 기본을 마련했다는 평이다.
특히 게르만의 역동성이 반영된 수직적인 공간과 두꺼운 벽체 그리고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해 주는 갈비뼈처럼 굽은 천장 구조물을 돌로 만든 석조 리브볼트(Ribbed vault) 천장을 통해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또 전 시대 건축물의 석재를 뜯어 옮겨 재사용했는데 이를 스폴리아(Spolia)라고 한다.
예배 중시 문화 ‘제기와 성전 아름답게’
성경 각 페이지까지 화려하게 장식
남프랑스와 스페인에 들어온 서고트족도 비잔틴 제국과 교류하면서 동방양식을 빌려와 석조 아치 구조와 돔을 사용했고 내부는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조각은 남·북 지방이 달랐는데 남쪽 지방은 로마를 계승해 고부조 기법을 써서 신화나 기독교 도상을 만들었다. 북쪽 지방은 석관과 석비의 표면을 자연주의적인 기법으로 선묘·평부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예배를 중시했던 샤를마뉴는 신을 찬미하는 제기와 성전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성경의 각 페이지를 아름답고 빛나게 장식하는 삽화가 특징인 사본장식을 극채색으로 만들었다. 표지는 금 또는 칠보나 보석으로 장식했다. 영국에서는 장이 바뀌는 빈 페이지에 극도로 기하학적이며 장식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이를 ‘카펫 페이지’라고 한다.
게르만, 켈트의 전통은 금속 공예품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상아조각도 유행했다. 이후 메로빙거 왕조는 프랑스 문화, 카롤링거 왕조는 독일 문화를 만들었지만 뿌리는 같다는 점에서 지금의 앙숙 관계는 아이러니하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 8.중세의 시작, 로마네스크 이전의 미술 - 익랑, 바실리카 양식, 인슐라 미술, 리브볼트, 삽화, 스폴리아 - 중세 천년, 결코 어두웠던 시기가 아니었다 / 국방일보, 2019.3.13.
9 로마네스크 미술 -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석조 건축 전성기 이뤄
: 봉건제, 영주, 레헨, 교차궁륭, 대학, 틀의 법칙, 스크립토리움
1130년대 완성된 부르고뉴의 베즐레 수도원 입구 부조.
글로스터 촛대. 12세기 영국 VA미술관 소장.
스페인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12세기 세인트 클레멘트 드 타웰 중앙의 벽화. 필자 제공
내부분열과 외적의 침입으로 혼란했던 유럽은 독일에 오토와 프랑스 지역에 카페 왕조가 등장하고 봉건제가 정착하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중세를 지탱한 봉건제는 왕이 가진 토지를 제후 또는 영주에게 나눠주는 레헨제를 매개로 군신의 관계를 맺고 제후들은 가신인 기사들과 함께 농노들을 보호해주고 농노들은 반대급부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예속관계였다.
왕의 권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분권이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영주는 제법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세는 농노 또는 장원제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제도를 유지했다.
교황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나라를 복음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왕들은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렇게 중세 유럽은 농노제를 근간으로 기사와 수도원이 영주가 사는 성을 중심으로 장원을 이뤘다.
10세기 후반~12세기 로마네스크 미술
장원제 정착‥독일미술 유럽 최고
이제 힘을 갖춘 안정적인 시기(960~1060)의 독일미술은 유럽에서 최고 수준에 달했다. 이후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까지 건축은 로마 건축을 바탕으로 획기적이며 인상적인 양식들이 나오면서 로마네스크 미술의 대표적인 조형예술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중세 중기에 속하는 로마네스크(Romanesque)는 ‘로마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1818년 프랑스 고고학자 게르빌(1769~1853)이 로망(Roman)이란 말을 쓴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로마 건축을 야만적인 북방 민족이 망가뜨렸다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로마네스크의 건축은 주로 중세의 중심이었던 수도원 건축이 주를 이룬다. 잦은 전쟁과 불로부터 하나님의 집을 보호할 셈으로 주로 돌을 썼다. 따라서 내부의 궁륭(穹륭·연속된 아치들로 이루어진 반원통 모양의 구조물)은 웅장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했으며 아울러 탁월한 음향효과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두꺼운 벽과 둥근 아치, 원통형 궁륭과 교차궁륭을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은 10세기 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최초의 국제적인 건축 양식으로 12세기에 전성기를 이룬다. 흔히 ‘황제의 돔’으로 불리는 보름스와 마인츠 대성당, 슈파이어 대성당이 대표적인 이 시대의 건축물이다.
특히 슈파이어 대성당은 건축물 전체가 하나의 통일체로 총체적인 조형미를 갖춘 건축물로 완성되면서 로마네스크 건축의 정점이 됐다. 만프레드 분드람(1925~2015) 같은 이는 “이후부터 지금까지 없었다”는 말로 이 시기 건축을 격찬했다.
중세의 중심 수도원 건축
두꺼운 벽·둥근 아치 음향 효과 탁월
로마네스크 건축물은 농촌 지역에 장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건립된 수도원의 성당에 적용됐다. 로마의 영향으로 둥근 아치 형태의 천장은 석재로 만들어졌고 이를 견디려면 벽도 두껍고 웅장해야 했다. 무게를 견디려면 창문도 커서는 안 됐다. 따라서 내부는 늘 어두컴컴했는데 이는 오히려 교회 안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또 다른 힘은 수차와 풍차 등 새로운 동력기술의 발달로 높아진 농업 생산성에서 나왔다. 이로 인해 잉여 농산물이 시장에 나오고 수공업도 발달하면서 상업이 융성해졌고 상공업자들의 동업자 조합인 길드(Guild)가 생겨나면서 재정적으로 교회 등 대형 건축을 뒷받침했다.
기독교 성지회복을 위해 결행한 십자군 원정(Crusade, 1095~1272)은 의학·과학·법학 등 새로운 지식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학생과 교사조합 형태의 대학(University)이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1088), 살레르노대학(1231), 파리대학(1109), 옥스퍼드(1167), 케임브리지(1209)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 수도원은 문화의 산실이자 예술의 생산기지로 건축과 함께 특히 조각과 금속공예, 상아조각이 성했다. 조각은 독립적이기보다는 건축의 일부로 회화적이면서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다뤘다. 건축물의 기둥 꼭대기에 동물을 한 쌍씩 대칭적으로 조각해 균형을 이뤘는데 조각은 ‘틀의 법칙(Portion)’에 따라 길게 늘어나거나 춤을 추는 듯, 광대의 모습처럼 비뚤어져서 건축물의 형태 속에 자리했다.
이런 로마네스크 특유의 변형을 통해 건축의 틀 안에서도 격렬하고 역동적인 생명감을 표현했다. 또 건축물의 문에 성서의 내용이나 그리스도의 일생 등 교리를 묘사했다.
또 자연의 일부는 추상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환상적인 이미지로 자유롭게 변주되면서 초월적인 신의 세계를 그려냈고 화려한 원색으로 채색된 십자가상이 제작됐다.
또한 이 시기부터 기독교 전통인 ‘지혜의 자리’라는 의미의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이 나타났다. 이때 성모는 인류의 구원 원천으로 항상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문화 산실이자 예술 생산기지 ‘수도원 ’
조각·금속공예·상아조각도 많아
로마네스크 시대 건축의 벽은 그림으로 가득 채워졌다. 베네딕트회는 물론 910년 베네딕트회의 혁신을 위해 결성된 클뤼니회 등 많은 수도회는 벽면을 성상화로 장식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현존하는 그림을 보면 조각과 같이 건축의 형태 안에서 그려졌는데 성서의 내용이나 성도의 도덕적 삶이 주제였다.
이들은 깊고 넓은 신앙의 표현수단으로 그림을 그려 인간의 몸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원한 미를 추구했다. 따라서 교훈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며 ‘문맹자들을 위한 성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했다.
양식적으로는 이콘화를 대표하는 ‘데이시스(Deesis)’ 양식이 주로 사용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대천사와 성인들이 인류의 구원을 청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따라서 이 도상에는 ‘간청’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재료는 계란, 아교질, 벌꿀, 무화과나무의 수액 등을 안료와 섞어 물감을 만들어 그림을 그린 템페라(Tempera)가 사용됐다. 특히 강한 터치와 채색은 표현주의적 왜곡과 양식화를 통해 오늘날의 표현주의와 흡사하다.
아무튼 이 시대 미술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초현실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편 스테인드글라스로 성상을 표현하는 예도 많았으며 필사본 삽화가 대부분 수도원의 사본제작소에서 제작돼 중세 전기의 전통을 이어갔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 9 로마네스크 미술: 봉건제, 영주, 레헨, 교차궁륭, 대학, 틀의 법칙, 스크립토리움-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석조 건축 전성기 이뤄 / 국방일보, 2019.3. 20.
10. 고딕미술 - 하늘 향해 솟아오른 뾰족탑과 화려한 빛의 예술
:수태고지,성직매매,아비뇽 유수,카노사의 굴욕,스콜라철학,공중부벽,팀파눔,고딕적 미소
13~15세기 고딕 미술의 중심은 신앙 - 벽돌 사용해 가늘고 긴 기둥 세우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사람들의 마음 홀려 - 조각·그림·창문에 성경 내용 담아 장식
성경 대중화 이전 문맹자들에게 신앙 전파 - 국내엔 명동성당이 대표적인 고딕양식
라생트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고딕건축의 백미인 영국 런던의 캔터베리 대성당.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부벽.
샤르트르 대성당의 팀파눔.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성모자상.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 사진=필자 제공
다시 한 번 되새기면 ‘로마네스크’나 ‘고딕’이란 용어는 그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로마네스크가 독일에서 시작됐다면 고딕(Gothic)은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서 비롯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영국에 이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들 두 양식의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처음에는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특히 ‘고딕’이란 말은 르네상스 시대 바자리(1511~1574)가 붙인 말로 처음 본 고딕양식이 낯설고 야만적이라 생각해 고대의 수준 높은 예술을 고트족이 파괴했다는 뜻에서 경멸조로 썼는데 대개 13~15세 무렵의 미술을 말한다.
1450년 구텐베르크(1400~1468)가 인쇄술을 발명해 성경을 대중화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써야 하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그림과 건축을 중요하게 다뤘다. 문맹자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고자 탄생한 종교화는 주로 ‘수태고지’와 ‘성모자상’이 그려졌다.
이즈음 부족하나마 원근법이 도입되고 인물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딕은 ‘신앙의 시대’였다. 중세 초기 부패한 교회는 베네딕트수도회 중심의 클뤼니개혁과 교회의 직책을 사고파는 성직 매매 타파로 교황권을 세워나갔다.
교황에 의해 시작된 1차 십자군(1096~1099)의 원정 성공은 교황권을 강화했지만 이후 2차(1145~1149), 3차(1189~1192)에 이어 4차 원정(1202~1204)부터 상업적 목적이 강화되면서 베네치아공화국은 상권을 다투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비잔틴을 멸하고 라틴제국(1204 ~1261)을 세웠다.
이후 5차(1217∼1221) 그리고 6, 7, 8, 9차 등 약 186년간 거듭된 원정에도 불구하고 성지 회복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결과 세속 군주권이 성장하고, 교황권이 약화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바티칸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무는 아비뇽 유수가 일어났다.
200여 년 전인 1076년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대립했던 서임권 투쟁에서 하인리히 4세(1050~ 1106)가 겪은 ‘카노사의 굴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이후 교회의 방종으로 이어졌고, 이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성적 사유를 통해 논증하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이 발달하고 중세도시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르네상스를 촉발했으며, 지리상의 발견과 계몽주의가 발현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성당은 종교의 중심이자 교육과 교류의 장
고딕에서 건축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첨탑과 뾰족탑, 기괴하고 불필요한 장식이 과다하게 나타나는 건축은 디자인에서 비율과 대칭을 중시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교회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하늘 위의 천국’을 지상에 재현하고자 했다.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찬 ‘천사들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벽화를 대신하는 성령의 빛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은유였고, 창문은 고딕 시대의 신학교재였다. 성당은 종교의 중심이자 교육과 교류의 장이었다.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과 대기근,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종교재판으로 마녀사냥이 성했던 무지·야만·몽매·폭력의 시대라 하지만 고딕은 ‘빛의 시대’였으며 한편으론 근대적 계몽의 씨가 발아했다는 점에서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
고딕건축은 벽돌을 주로 사용해 첨탑을 세워 수직적인 느낌을 준다. 육중한 벽과 기둥을 버리고 가늘고 긴 기둥과 넓은 창을 만들어 가없는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도록 했다. 따라서 신비롭고 경건하다. 이런 건축은 새로운 첨두아치(Pointed arch)와 늑골궁륭(Ribbed Vault),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이란 외부 버팀목이 발명됐기에 가능했다.
늑골궁륭은 천장의 무게를 분산시켰고 벽은 부벽을 만들어 또 다른 부벽으로 지탱하면서 건축물을 높이 지을 수 있었다. 특히 1144년 6월 11일 완공된 생드니 대성당은 새로운 건축물로 높은 천장과 가볍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기둥,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홀렸다.
이런 건축물은 도시화가 이뤄지던 이 시절 각 도시의 자부심으로 여겨져 도시마다 서로 다투듯 크고 높은 성당 짓기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높이가 51m에 이르는 보베성당(1247~1568)도 건설됐다. 그러나 기술 부족으로 12년 만에 강풍에 지붕이 주저앉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고딕성당 내부는 매우 밝고 경쾌하며, 석조 천장의 음향효과는 웅장함과 신성함이 느껴진다. 또 성당을 장식하는 사실적인 조각들은 건축에 비종속적인 존재로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다.
고딕미술의 중심, 건축
12세기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각각의 단위 조각들이 질서와 조화를 통해 성당의 전체상을 깨지 않는 한 각각 독립성을 구가했다. 성경의 내용을 담은 조각상들은 성당의 정면, 입구 및 입구 위쪽의 팀파눔(Tympanum) 등에 장식됐다. 특히 등장 인물들의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정리돼 알기 쉽게 만들어졌다.
기둥 꼭대기의 조각은 점차 사라지고 식물이나 단순한 기하학적인 장식으로 바뀐다. 또 민속신앙에 기반한 가고일(Gargoyle) 등 괴수도 등장하나 길고 가는 기둥에 새겨지는 인물상은 흥미로운 존재다. 특히 샤르트르 대성당은 4000여 점의 조각으로 장식돼 있는데 특히 ‘왕의 문’이라 불리는 성당 정문 조각은 시대의 백미다.
이 시절 인물상에서 나타나는 고딕적 미소도 특징인데 입술 끝이 올라가 미소를 머금을 뿐만 아니라 양 눈이 좁아지고 미간과 아래 눈꺼풀이 오므라들게 웃는 모습이 특징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사실적 묘사 기법을 선호했다. 너무 사실적인 관계로 장식성을 잃게 된 점은 아쉽다.
회화는 여전히 사본장식이 주종을 이뤘는데 기도서는 고딕 시대의 사치품이자 신앙의 징표였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만들어진 ‘부르고뉴의 마리아’(1477)라는 사본은 고딕대성당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묘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후 고딕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국제적인 고딕양식으로 전개되며 시대를 넘어 존재하는 하나의 양식이 된다. 서울의 성공회 서울대주교좌 성당(1926~1926)은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이며, 명동성당(1892~1898)은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다시 한 번 되새기면 ‘로마네스크’나 ‘고딕’이란 용어는 그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로마네스크가 독일에서 시작됐다면 고딕(Gothic)은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서 비롯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영국에 이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들 두 양식의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처음에는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 10.고딕미술-수태고지, 성직매매,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스콜라철학, 공중부벽, 팀파눔, 고딕적 미소 - 하늘 향해 솟아오른 뾰족탑과 화려한 빛의 예술 / 국방일보, 2019.3. 27.
[출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Ⅰ - ①원시미술,②메소포타미아, ③이집트,④그리스,⑤헬레니즘,⑥로마,⑦비잔틴,⑧로나네스크 이전,⑨로마네스크,⑩고딕미술|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