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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537
6월30일[연중 제1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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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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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iTUNPjEd14
(배한욱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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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성체,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복음서 안에는 죄 많고 허물투성이인 우리 인간을 쓰다듬는 주님의 모습이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환부를 존귀하신 당신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장면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 나병 환자와의 만남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 가련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습니다. 나병 환자는 얼마나 절박했던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가장 가련한 사람들이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 나병에 걸린 대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불경스럽고 부정을 탄 인간, 상종하거나 접촉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병에 걸리면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 판명을 받으면 가족과도 생이별해야만, 살고 있던 주거지를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움막을 짓고 들짐승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생사가 궁금했던 가족은 멀찌감치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던져놓고, 목이 터지도록 나병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운이 좋으면 겨우 챙겨갈 수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나병 환자들은 즉시 목청을 높여 ‘여기 부정 탄 사람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준수하려 하셨다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 환자를 향해, ‘당장 내 앞에서 물러가라!’라고 외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의 가련한 모습에 예수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셨습니다. 자동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예수님 손이 자동으로 그의 썩어 문드러진 환부에 가 닿았습니다. 이윽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1,41)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하느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몸을 굽혀 그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고름투성이인 우리 인간의 피부에 터치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런 접촉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를 터치하시러, 우리 안에 머무시려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한 마음, 황공한 마음으로 정성스레 영성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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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W5r4eyuC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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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면 안 되는 사람>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자신을 치유하게 해주시라고 하는 대신,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십니다. 왜 그 이전에는 우리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우리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으실까요? 그분은 원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믿음으로 청하기 전까지는 원하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도와줌은 그렇지 못한 상태의 탓을 자신에게 하는 이들에게만 이익이 됩니다. 도와줌은 자기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옳았다면 왜 도움을 받으려고 할까요?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이에게는 도움이 오히려 해가 됩니다.
‘솔로이스트’(2009)는 실화 기반의 영화입니다. LA타임스 기자 스티브 로페즈는 노숙자 나타니엘 에이어스를 마주칩니다. 시티브에겐 신문 칼럼 소재가 필요했었는데, 나타니엘이 길거리에서 2현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보고는 그의 이야기를 신문에 내고 싶어집니다.
사실 나타니엘은 뉴욕 줄리어드 음대의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환청을 듣게 되고 환청은 두려움을 만들었으며 두려움은 그를 도망쳐 노숙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스티브는 나타니엘을 돕기로 결심하고 주택, 재활 및 적절한 환경에서 곡을 연주할 기회를 확보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나타니엘에게 첼로를 제공해주고 독주회까지 열어줍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에 휘둘린 그는 어렸을 때처럼 도망을 쳐버립니다.
스티브는 정신 치료를 먼저 받지 않으면 그를 돕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그러자 나타니엘은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스티브를 공격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도움을 짓밟고 주는 사람을 물어뜯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들이 개요, 돼지였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움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입니다. 도움은 그 사람을 더 나은 존재로 올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자기 상태를 부정해야 하는 전제가 요구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프랑스 혁명을 가장 잘 이용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교회와 결탁한 군주제에 지친 시민들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를 들고 새로운 제도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나폴레옹은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바탕으로 계층을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1795년 혁명 당시 왕당파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은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결국 1799년에 그는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프랑스의 최고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이라는 혁명적 이상을 스스로 훼손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라고 선언하여 평등과 군주제 폐지라는 혁명적 원칙에 직접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된 계기가 된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했고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을 배신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시 가톨릭교회와의 협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1801년 나폴레옹은 교황과 협약에 서명하여 비록 국가의 통제하에 있지만 가톨릭교회를 프랑스의 종교로 재확립했습니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은 혁명의 세속적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를 도왔던 모든 이들은 결국 그의 야망에 이용당하고 버려지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자유, 평등, 박애와는 거리가 먼 유럽 전역에 걸친 영토 확장을 위해 수많은 프랑스 국민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야욕 앞에서 모든 도움은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하느님께서 그 귀한 은총을 자기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에게 은총이 가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에게 주님은 은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각자가 영광을 향해 계단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습니다. 데레사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높은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주님께서 데레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녀를 손으로 들어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해주신 일이고 그 영광은 완전히 주님께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원해도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모든 것이 주님 힘으로 이루어져 주님께 영광이 가기만을 바랍시다. 주님은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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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김구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외모가 반듯한 것보다는 몸이 건강한 것이 좋다. 몸이 건강한 것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살면서 반듯한 외모와 건강한 몸에 더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그런 것들이 성공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균형 잡힌 몸매를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인한 체력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젊어 보이려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기도 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여전히 하루 3시간 정도는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을 쌓는 데는 소홀한 면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라.”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삼국지에는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서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간 것을 뜻합니다. 유비에게는 강건한 무장이 있었습니다. 관우, 장비, 조운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습니다. 무장과 함께 작은 싸움에서는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략과 전략이 필요한 큰 싸움에서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싸움을 이끌 지략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다스릴 큰 싸움을 논할 전략가가 없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작은 싸움은 물론 큰 싸움도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능히 천하를 건 싸움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모를 감수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늦은 가을에 찾아갔고, 추운 겨울에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따뜻한 봄에 찾아갔고, 제갈량은 유비를 받아들였습니다. 솥단지가 3개의 발이 있어서 균형을 잡듯이 유비가 제갈량을 얻으면서 드디어 삼국지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유비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체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많은 땅과 자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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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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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원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과 구원하신 일도 당신이 원하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병자 쪽에서는 예수님의 의향을 알지 못해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을 했는데, 병자가 청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러신 것처럼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청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청하는 것은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또는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또는 처음부터 받기를 원하지 않아서 청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나는 원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자비’는 원래 아무런 조건 없이, 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잘 받아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잘 받아서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병’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던’ 인간들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일은 메시아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 사신 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깨끗하게 되다.’ 라는 말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리면 아프고, 아프니까 당연히 병을 고치기를 원하고, 그것을 원하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그렇게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병에 걸렸는데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고치기를 원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또는 다른 무엇인가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신앙인은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믿고, 고백하고(사도 4,12),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5,6) 건강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5,7)
그가 못 가에 누워 있으면서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린 것은, 또 물이 출렁거릴 때 남들보다 먼저 못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 것은, 병을 고치고 건강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또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자기가 왜 그곳에 누워 있는지, 또 자기가 왜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함으로써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버렸습니다.(요한 5,15)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병자는,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마르 1,45) 그의 불순종은 그가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몸의 병을 고친 일은, 즉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만일에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몸의 병을 고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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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산 위에서의 설교(5—7장)로 드러난 예수님의 특별한 권위는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여러 개의 기적 사건(8—9장)을 거치며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를 통하여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남다른 힘과 권위를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려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전합니다. 고대에 나병(악성 피부병)은 치료가 힘들고 전염력도 강하여서 매우 특별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3—14장은 이 병의 증세는 물론이고, 나병 환자라고 선언하고 그를 다루는 방법, 그리고 치유 판정을 받는 공식적인 절차까지도 아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특히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우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 ‘부정한 몸’에 손을 대셨기 때문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칠 능력을 지니신 분께서 굳이 그 몸에 손을 가져다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예수님의 구원 방식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몸소 사람이 되셨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려고 죄인 취급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몸소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부정한 사람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였던 나병 환자의 아픔을 손수 어루만져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십니다. 지금 아파하는 모든 이를 어루만져 주고자 하십니다. 그 아픔에서 낫게 되기를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바라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 마음속에 남모를 상처와 아픔이 있다면, 나병 환자처럼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니 저를 낫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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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8장 2절)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며 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일본에 와서 첫 주임 신부로 있던 본당은 반경이 짧게는 20km에서 길게는 60km나 되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끝으로 쿠사츠라는 일본 삼대 유황 온천이 있는데, 그 한구석에 한센병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마을이 있다. 그곳 신자 가족들과 삼 년간 함께 하면서 느낀 바는 지금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뒤져보니 그 당시 마을을 다녀와서 적어놓았던 글이 하나 발견되어 소개해 본다.
자타 모두가 천형(天刑)이라고 생각하며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들로부터 버려진 삶을 살다가 사라진 이들이 겪었어야 할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을 감히 헤아려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치졸함이 누군가를 절망감이라는 세계로 밀어내고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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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머무는 성당으로부터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쿠사츠(草津)라는 곳으로 미사를 가는 날이었다.
보통 아침에 떠나면 밤이 되어야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며칠 전에 분화가 일어났던 아사마야마(淺間山)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정상에서는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부터 유황온천으로 유명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먼길을 마다치 않고 한 달 이상 가마를 타고 와서 온천욕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일본의 삼대 온천 중의 하나이다.
이곳 온천이 한센병에도 효험이 있다는 설이 있어 약 백여 년 전에 정부가 온천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나환자 집단 수용시설을 만들어놓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선상에 오른 나라들이 그렇듯이 새롭게 한센병에 걸리는 이들은 이곳에도 없다.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거의 비어있는 집들만 우중충하게 남아있다.
당시의 모자라는 의학적 수준 때문에, 정책적으로 이들 모두는 불임수술을 받았기에 자식들도 없다. 그곳에 아주 작은 성당이 하나 있다. 전체 가톨릭 신자 수는 여섯, 그중에 네 분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미사에 참여한다. 나머지 두 분을 위해서는 봉성체를 한다.
이들 중에 재일교포가 두 사람이 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나 느낌들은 언젠가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하여간 이들 한센병 가족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왔다. 오늘은 모두들 몸 상태들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 두 사람만이 미사를 참여했다.
그러니 나환자 교우 두 분과, 동행한 수녀님들 네 분과 드린 산골짜기의 작은 미사였다. 그런데도 왠지 어느 때보다 더욱 정성이 가는 미사가 진행된다. 그들과 함께 나눈 강론을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된 분이시고 저 역시 그분께서 살아계실 때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시지요. 신학생 때부터 그분의 시집이나 성가 가사를 통해서 어떤 분이실 거라는 생각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왠지 그분이 쓴 시 두 편이 떠오르는 날입니다.” (그리고 외우고 있던 시를 일본말로 옮겨본다)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고인의 기도 >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평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이곳 쿠사츠에 올 때마다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꽃들을 보게 됩니다. 어느 정도 꽃들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저이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들꽃들이나 야생화들이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녀석들을 보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갑니다.
또한,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아픔을 겪으면서 한 생을 이곳에서 살아왔을 여러분들도 봅니다. 여러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제가 여러분이 겪은 아픔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오만이 되겠지요.
제가 오늘 소개한 이 두 개의 시가 여러분에게 커다란 위로와 하느님을 향한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 없이 피다가 지는 꽃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소중하지 않은 꽃들이 없음을, 그리고 주어진 고통이 내게서 없어지기를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피곤이 몰려온다. 늘 이런 환경에 놓인 이들과 마주할 때는 강론이 어려워진다.
다만 온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주님, 저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된 모든 말씀이 저에게서 먼저 성취되게 하소서. 서로 껴안으며 미사 중 반갑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것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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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깨끗함은 사랑의 기본조건이다.>
산상설교의 대단원을 마치신 예수께서 하산(下山)하신다. 산상설교의 청중이었던 제자들과 군중 모두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가르침의 정신과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으리라 믿는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서 보이신 율법학자들을 능가하는 권위(7,29)를 이제 행동으로 보이실 것이다.
가르침의 놀라운 권위를 인정한 군중과 제자들은 이제 실제로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님 행위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에 마태오는 복음서 8-9장에 10가지 이적사화를 집성해 놓았다. 마태오는 10가지 이적사화 중간마다 유다인의 멸망예고(8,11-12), 예수 추종의 자세(8,18-22), 세리 마태오의 소명과 식사공동체(9,9-13), 그리고 단식논쟁(9,14-17)을 곁들여 기적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자칫 기적을 통한 열광주의나 기적만능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제자들과 군중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나병 환자의 치유는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의 치유와 죽은 사람의 소생,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수용과 함께 근본적인 메시아 사명(이사 29,18-19; 35,5-6; 61,1)을 성취시키는 표징에 속한다.
왜 그럴까? 우선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에 대한 메시아 사명의 성취는 "다시 봄, 다시 걸음, 다시 들음"이라는 구원의 첫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부정함"을 씻고 "정함"을 베풀어 줌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마련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의 깨끗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소생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하시는 메시아의 궁극적인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먼저 겨냥된 이유는 진복선언의 첫 번째 진복자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이들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것(5,3)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이 가장 선호하는 제1의 청중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는 이해되어야 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1,40-45)을 옮기면서 이야기의 규모를 상당히 줄여버렸다. 허나 핵심적인 내용은 같다.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예수 앞에 절을 하며 무릎을 꿇은 나병 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이는 가족과 사회와 종교로부터, 나아가 하느님에게서까지 버림받은 소외된 자의 마지막 절규요 마지막 희망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3절)
예수님의 손길은 나병환자의 부정(不淨)함을 정(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일어난 일에 대하여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다.
다만 율법이 정한 대로(레위 14,2-32)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루어 볼 때 사실상 이런 증명은 필요 없다. 그러나 치유 받은 자의 공적인 사회복귀를 위해 필요한 절차임을 마태오가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손길 하나가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소외된 자에게 화친(和親)을 다시 선물했다.
그런데 희망과 화친의 조건이 깨끗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이 없이는 사랑도 희망도 화목도 헛된 기대와 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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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병환자 한 사람이...”(마태 8,1-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5장에서 시작된 산상 설교를 마치신 후 이제 다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중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마태오 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한 묶음로 산상설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마친 후 즉시 8장에서는 여러 병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병자 등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왜 이런 병자들을 산상설교에 이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 병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치유방법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의 내용을 사는 것이다. 진복팔단은 바로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될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새로운 인생관, 가치관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점점 병들게 하는 삶이었고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인생관이었다면 진복팔단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관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유해 주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더이상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그래서 진복팔단의 정신을 가르쳐 주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씀하셨고 끝으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진복팔단은 정말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며 나병이나 중풍병 등 모든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처음에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하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일그러진 흉측한 모습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느님 자신도 감탄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병든 우리의 모습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던 대로 본래의 자리와 사명으로 복권하시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되찾는 것이요,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루하루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는 어떤 병자인가? 그 당시 나병 환자란 오늘날 불치의 병에 걸린 에이즈 환자 또는 암 환자와 같은 병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는 병으로서 오직 죽음을 기다리고 살 수밖에 없는 아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나병은 하느님한테 죄를 지어 그 대가로 주어진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몸에 다으면 부정한 사람이 되고 또 나병 자체가 전염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였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늘 가족과 친척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외딴곳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몸은 썩어가서 냄새나고 형체가 뭉그러지고 떨어져 나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마치 사체의 모습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라고 선포되면 "당신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죽음이라는 공포에 떨고, 죽어가고 있음으로 자기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 그러면서도 어떤 치유방법이 없이 절망 속에서 외롭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 날 이 나병 환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도 모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언제 죽을지 날짜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하루 하루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행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죽음의 행진을 막지 못한다. 너도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 나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이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까? 그 길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진복팔단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멸망의 길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길이며 그 자세는 오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애원하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애원하는 자세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어 죽음에서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인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 주신 산상설교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아듣는 이는 참으로 복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주님!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진복팔단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병인 나병에서 치유 받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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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어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병보다 사회로부터의 고립됨이 더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한참, 창궐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원은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주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 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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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교 합격 소식을 받고 처음으로 교구 신학생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자리가 서품식 성가 연습 때였습니다. 1월에 있는 서품식에 아직 신학교 입학도 정식으로 하지 않았지만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서품식 성가 연습부터 함께 했었습니다. 성가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선배들이 모여와서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그때 한 선배님께서 “그러면 얘네는 몇 년에 서품받는 거야?”라고 하십니다. 이에 “1999년이죠.”라고 다른 선배님께서 대답하자,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했는데, 너희는 신부 되자마자 인생 끝이구나.”
당시에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사에 기록된 큰 사건들을 계속 예언했었다면서, 인류 멸망의 예언도 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했었지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재 2023년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인류가 멸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에 사제서품을 받아 지금까지 신부로 잘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망하지 않았고, 저도 멀쩡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대로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레짐작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삶이 우리의 마지막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이 병의 치유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어떤 단체나 격리 수용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스스로 사람이 있는 곳을 갈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의무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삶,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희망을 둡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자신의 병도 깨끗하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주님께 말씀을 드리지도 또 주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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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램>
마태오 8,1-4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바램>
나의 바램이
당신의 바램이기를
나의 바램이
당신의 바램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바램이
나의 바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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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안 고쳐주시는 선의에 대한 믿음>
복음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청원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치유를 청하는 겁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치유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압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악령 들린 아이의 아비보다 믿음의 수준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면’이란 말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돌팔이 의사에게도 할 말이 아니고, 의사 특히 명의에게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없이 무엇 하러 의사에게 오고 어찌 치유를 청한다는 말입니까? 고칠 수 없다면 의사가 아니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에게 가서 물을 것이 아니라 가기 전에 그 의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확신이 선 뒤에 가 청해야 합니다.
능력의 하느님과 가능성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믿음의 가장 초보이자 기초입니다.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 사랑과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상태에서 왔고,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믿음도 확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은 어떤 뜻입니까?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는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 선의에 대한 확신은 있습니다. 다만 선의의 내용이 뭔지 모를 뿐입니다.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며 안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쳐 주시는 것만 사랑과 선의라고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에 대해 알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가 고쳐주시는 선의보다 더 큰 선의라고 믿는 겁니다.
다만 그것이 왜 더 큰 선의인지 지금은 알 수 없고, 미래 언젠가는 주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안 들어주셨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의 더 큰 선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믿음과 청원은 내가 원하는 호의를 밝히거나 요구치 않고 그저 주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뭘 원하는지 주님께서 되물으시면 그때 내가 원하는 호의를 말씀드려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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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치유와 위로, 구원-
오늘은 6월 예수 성심 성월 끝날이자 내일은 7월의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역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입니다. 어제부터 장마가 시작된 듯 어제는 온종일 비가왔고 오늘 밤도 계속되는 비에 불암산 계곡 물흐르는 소리가 선명합니다.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하늘 비가 있던 없던,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이면 좋겠습니다. 본기도 말마디처럼 한결같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봉헌함에서 나온 봉투에 씌어진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도원의 햇살, 바람, 새소리 담긴 매실 한 자루 가져다가 매실청 담궜습니다. 감사합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모든 수도자들을 위해 봉헌합니다. 짧은 피정 기간 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보고, 반성하였습니다. 항상 현세에서 나를 향한, 안으로 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수도자들의 생활을 통해 밖으로 향하는 기도와 지향을 배웠습니다.”
다음 자매는 1990년대 초반 20대 나이에 성소자로 수도원을 찾아 저에게 면담했던 지금은 52세 자매의 고백입니다. 거의 30년만에 수도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20대, 푸르른 날들에는 수도성소를,
30대, 짙푸른 날들에는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7년 기다리며 기도로 만난 아이, 그리고 14개월후 남편과 갑작스런 사별,
40대 주님께서 맡겨주신 아이 양육에 온힘을 쏟았고,
52세, 아이를 같이 양육해주신 친정 어머니가 요셉 대축일 입원하셨다가 짧은 투병 생활하시고 부활 대축일 선종, 하나뿐인 아들은 2월2일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시간들 머물수 있게 해주신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립니다. 돌고 돌아 다시 찾은 이곳에 주님처럼 계셔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명실공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자매들이요, 주님을 찾듯 늘 거기 그 자리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 정주 수도원의 역할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순례 여정중인 이들에게는 빛나는 이정표가 되고, 수도원 존재자체가 끊임없는 환대를 통한 복음 선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수도원이 세상의 중심이듯이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의 위로와 평화, 치유를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중심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히 아픈 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끝나고 이제부터 본격적 삶의 현장에서 치유와 구원활동이 전개됩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불가의 말도 있듯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치유와 구원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니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이 되신 분위기입니다.
마태복음 8장은 온통 예수님의 육신의 치유활동에 관한 일화들입니다. 사실 복음은 거의가 치유하시고 먹이신 몸과 관련된 기적들입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말하지만 육신이 무너지면 정신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어제 평생 처음 몸살 감기로 앓다보니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허약한지, 왜 예수님이 치유활동에 그렇게 온힘을 쏟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병원에 가면 온 세상 사람들이 환자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은 첫 치유 기적으로 나병환자가 그 대상입니다. 나병환자의 선택이 참으로 정확했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찾는 갈망이 그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었고 예수님을 발견케 했습니다. 나병은 당시 악성 피부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불치의 나병을 뜻합니다. 나병환자가 주님을 만남으로 이어지는 치유과정이 감동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치유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나병환자의 믿음에 응답하여 1.예수님의 연민의 마음, 2.사랑의 스킨쉽, 3.권능의 말씀이 하나가 되어 발생한 치유의 기적 은총임을 봅니다.
천형이라 불리던 나병이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니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바뀝니다. 주님은 공동체에서 격리, 소외되어 참 외롭게 지내던 나병환자를 치유하여 본래의 공동체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헛된 명성이나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으셨던 주님은 치유된 나병환자에게 함구할 것을 명하시며, 다만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새삼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영육의 치유와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깊고 다양합니다. 육신의 나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나병도 심각하고 엄중합니다. 잘못된 이념이나 신앙으로 인해 맹목적이 되고 광신이 될 때 편견으로 굳어질 때, 백약이 무효입니다. 무지의 나병보다 더 고약한 것은 없습니다. 무지의 나병에서 기인한 육신의 나병인지도 모릅니다.
답은, 치유의 처방은 예수님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육신은 물로 영혼의 나병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이래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매일의 미사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서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흔아홉살이 되도록 흠없이 살아온 아브람에게 또 흠없이 살라 다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이 살아라.”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날로 충실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앞에서의 삶임을 명심하며 깨어 흠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온갖 영적나병을 치유해주시며 흠없는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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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8,3)
<나병은 어떤 병인가?>
오늘 복음(마태8,1-4)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나병은 '소외라는 병'입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은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찍이 떨어진 외딴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소외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가와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산청 성심원이라는 곳에서 사목하면서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또 다른 나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재물과 권력(힘)과 학연과 지연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금 여기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이들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삼천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가 '시노달리따스'(Synodalitas)를 외쳤다고 생각합니다. '함께하기!', '함께 나아가기!' 라는 시노달리따스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교회 구성원인 우리가 나병 환자들과 또 다른 나병 환자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진정한 시노달리타스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6월의 마지막 날, 일 년의 절반이 지나가는 날입니다.
성찰 안에서 함께 노력해 봅시다!
"주님, 세상을 떠나 당신 품으로 돌아간 박필수 실비야 자매를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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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kEtyqNQ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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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 2)
닦아낼수록
드러나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이
깊어지고
밝아지는
사랑입니다.
깨끗해질수록
하나가 되는
건강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 간결한
치유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더럽고
복잡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먼저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듯 하늘을
보게 됩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볼 수 없고
떠나보내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삶의 치유는
곧 마음의
치유입니다.
사랑의 힘을
알고 믿습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알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몸소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
저의 마음
저의 삶을
모두
내어드립니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깨끗하여 지는
길입니다.
참된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삶도
깨끗하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병든 삶을
나누는 것이
깨끗하여지는
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깨끗이 낫는
가장 아름다운
치유이며
가장 간절한
기적입니다.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께
오늘 하루를
맡기며
내어드립니다.
여기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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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 3)
우리의 모습
우리의 믿음을
보게됩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건강한 인격으로
바꾸어줍니다.
믿음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밀어냅니다.
믿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뛰어넘게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주님께로
가야 할 믿음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믿음이 썩으면
우리의 인격도
썩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비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요?
삶의 생명력은
다름아닌
감사와 기쁨의
믿음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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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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