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5) - 충효당의 정원
류인혜
마음에 그리던 우리 조상들의 터전인 안동의 하회마을에 들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마을만큼 나이를 먹은 많은 나무들이다. 잘 자란 나무들이 오래된 집들과 보기 좋게 어울려 한 눈에 마음을 빼앗아 간다. 그곳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마당에 심겨진 나무도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자연도 사람의 삶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동네라는 인식이 하회마을에 대한 느낌의 무게를 더해 주었다. 나무의 종류도 다양해서 어릴 때 자주 보아서 친숙했던 나무들도 만날 수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던 나무들을 다시 대하니 피붙이를 만난 듯 반갑다. 사람은 떠다니며 변하여 가지만 나무는 한 자리에 심겨져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사실이 더욱 새삼스러워졌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더욱 다정한 마음이 드는 감나무가 특별히 눈에 띈다. 집집마다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감나무에서는 서둘러 익은 홍시가 길 쪽으로 떨어져 있다. 반가운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은 깨끗한 것을 골라드니 자연스럽게 입으로 들어간다. 무심결에 취한 행동에 스스로가 놀라서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살폈다. 나무에서 떨어졌어도 제법 먹을 만큼 깨끗한 것들이 많아 시작한 김에 한 개를 더 골라 먹었다. 아무도 떨어져 있는 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시댁에서 지낼 때 이른 아침마다 작은 소쿠리를 들고 감나무 밑을 순례하던 일이 생각났다. 저절로 익은 홍시가 풀밭에 떨어져 있어 한참동안 떨어진 감 줍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다 보면, 풀잎에 남아있는 이슬로 다리가 흠씬 젖었다. 감잎에 아직 이슬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것으로 손을 닦았다.
골목길을 돌아서 찾아간 서애의 종택인 충효당은 넓은 터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조경이 잘되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곳은 옛날의 초가가 있던 자리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을 그리워하여 지었다는 집이다. 집을 지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조경을 한 듯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묻어있다.
앞뜰 한편에는 영국의 여왕이 하회를 다녀가는 기념으로 심은 구상나무가 서있었다. 나무의 모양이 긴 삼각형으로 품위 있게 다듬어져 흡사 여왕을 닮은 듯 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라고 한다. 나뭇잎이 가시처럼 갈라져 있는 것이 얼른 보면 전나무처럼 여겨졌다. 소개 글을 읽어보니 열매는 하늘로 향해 달려 있다가 어느 날 산산이 흩어져서 사라지지만 그 향기가 좋아서 오래 남아있다고 했다. 흩어져서 사방으로 날리는 향기를 상상하니 나무의 모양과 너무 잘 어울리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다.
유물관은 집 안쪽에 자리잡아 아담하고 정갈한 정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심겨진 나무들의 무성한 그늘로 깊은 산중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여러 나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나무는 유물관 앞에 심어진 만지송(萬枝松)이었다. 13대 종부께서 집안의 번영을 위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화산에서 옮겨 심었다는 그 소나무는 모양이 화사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소나무처럼 줄기가 하나로 높이 자라 가는 것이 아니라 밑 부분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수많은 줄기를 가지처럼 사방으로 내뻗고 있었다. 나무의 잎사귀들마저 갈라진 모양이 섬세하여 과히 자손의 번영을 위한 할머니의 마음을 담아둘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로 인하여 나무의 모양이 전체로 잘 잡히지는 않았지만 넓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면 위풍당당한 모습을 이룰 만큼 규모가 넉넉했다. 길을 가다가 사진관 앞을 지날 때면, 전시해둔 가족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식구가 많은 가족사진을 보면 저절로 부러운 마음이 드는데, 그만큼 풍성한 느낌을 주는 나무였다.
사람이 자연 속에서 지내면 저절로 침묵을 배워 신중해지듯이 자연이 사람과 어울려 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인품을 닮아 가는 것인가 보다. 하회 마을에서 만난 다른 나무들도 낯선 사람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세월이 주는 넉넉함과 그곳 사람들에게 배운 위엄을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2001년 12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