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월 26일은 한국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날 가운데 대표적인 날입니다. 한국을 대표할 굵직 굵직한 일들이 역사상 같은 날 일어났다는 것은 무언가 이 날이 길일중의 길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태풍속 같은 역경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대부분 발생했기에 길일이라기 보다는 민족의 정신이 뭉쳐져 엄청난 큰 힘을 발휘한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꺾일 수 없다는 민족성과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감이 만들어낸 민족적이자 쾌거적인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597년 10월 26일은 명량대첩을 이룬 날입니다. 1597년 10월 26일 음력으로는 9월 16일 명량앞바다 그러니까 지금의 전남 진도앞바다 울돌목 인근에는 일본 군함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함은 133척 조선 군함은 12척에 불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아 직위해제된 것은 물론 옥살이까지 당했습니다. 일본군의 재침입에 따라 당시 왕인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을 풀어주게 되고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당시 해군의 리더였던 원균은 일본 해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군함도 모두 파괴돼 12척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아직도 우리에게 12척의 배가 있다고 선언하고 일본 군함을 항해 전투를 개시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전술로 일본군을 압도했고 일본해군은 우왕좌왕하면서 헤매다가 결국 일본군 장수 구로시마의 목이 베이면서 일본군은 지리멸렬하게 됩니다. 이 명량전투는 당파싸움에 모함을 받아 심신이 극도로 상한 상태의 이순신 장군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승리를 이끈 해전이며 이 명량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에게 빼앗긴 해상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망국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역사적인 해전입니다. 이 명량해전은 세계사에 빛나는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정말 우여곡절끝에 나라를 지키고 그 이후 3백년이 지나갑니다. 조선말기에 조선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조선의 왕은 국제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결국 나라를 일본에게 뻬앗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게 강제적으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의인이 있습니다.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립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빼앗는데 앞장선 원흉중의 원흉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역에 도착하고 내리자 안중근 의사는 바로 달려나가 주저없이 품속에 있던 권총을 꺼내 원흉에게 수차례 총격을 가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하고 안의사는 체포됩니다. 안중근 의사가 역사적인 거사를 수행했지만 그로부터 조선은 10개월후 일제에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타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를 향해 조선인의 자긍심과 정의로움을 행동으로 보여준 독립투사로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았습니다.아직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내 친일세력은 안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만 말입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날이 바로 오늘 10월 26일입니다.
한반도는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그로부터 한반도 한민족은 곳곳에서 일제에게 저항하고 투쟁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에서는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이에 대해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도 더욱 강경해지고 전투도 더욱 격렬해집니다. 그가운데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청산리전투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은 일본군과 맞서 상당한 전적을 거두고 10월 26일 전투를 끝내게 됩니다. 이 전투를 청산리대첩이라고 평가하는데 대한 일부 다른 해석도 있지만 한반도의 한민족군이 일제군과 맞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만은 확실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반도는 그후 한반도인의 힘이 아닌 미국의 원자폭탄의 덕으로 해방은 되었습니다. 그이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고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한은 한국으로 북한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은 강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을 불러왔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후 혼란스런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면서 박정희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거의 20년 가까이 한국을 군사독재나라로 만듭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그 유명한 10.26사태가 터지고 맙니다. 군사독재정치는 결국 국민적인 저항운동을 일으키게 됐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마항쟁입니다. 그 부마항쟁 등을 논의하려고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 모인 대통령 박정희를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총을 쏴서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18년동안의 군사독재정치와 유신체제는 몰락하고 맙니다.
이처럼 10월 26일은 한국 역사상 엄청난 사건이 연속된 아주 특이한 날이 되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이 물밀듯이 처들어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힘든 역경속에서 한국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명량대첩,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쾌거,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둔 청산리 전투, 그리고 현대사의 아픈 독재의 질곡을 끊어낸 10.26 사건이 모두 오늘 10월 26일에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라 느껴집니다. 10월 26일은 폭풍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웠던 그 시절에 한국인들은 결코 몰락하지도 좌절하지도 소멸하지도 않겠다는 그 의지를 표명한 그런 날이라는데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합니다. 오늘 10월 26일이 새삼 다시 보이고 다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24년 10월 26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