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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NO.1 Yashin
제6회 정부지원학자금 수기공모전 대상
오늘의 밥 한 그릇보다 내일의 꿈을 위해
물수제비 달인, 종이비행기 오래 날리기 국가대표. 제가 가진 가장 자랑스러운 두 가지 타이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특이한 장기를 가지게 된 것은 제가 살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터넷, 케이블 방송은커녕 수신되는 지상파조차 KBS1, MBC, EBS가 전부였고, 마을로 들어오는 교통편이라고는 하루에 4대 들어오는 버스가 전부인 시골마을에서 할 수 있는 놀이들은 주로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물수제비를 잘 뜨고 종이비행기를 오래 날리기 위해 물리학 이론, 공기역학을 공부하고 논문도 찾아보면서 수 만 번의 연습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대학내일에도 소개되고 기네스북에도 도전을 준비할 만큼 달인이 되었습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언가에 하나 꽂히면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골청년의 서울 상경기를 이야기해드리려고 합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제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경북 상주의 시골마을에는 아이들이 귀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 14명밖에 없을 정도로 학생 수가 적었고, 4교시까지만 수업을 하는 수요일이면 책가방 대신 낚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만큼 PC방보다 저수지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자동자보다 경운기와 트랙터가 많은 동네인 만큼 농사와 가축 기르는 일은 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일과였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해도 다 같은 농사꾼이 아닙니다. 자기 땅, 자기 농기계를 가지고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고, 땅이 없어서 소작농을 하는 농사꾼도 있지요. 도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시골에서 보이는 트랙터 한 대의 가격이 웬만한 외제차보다 비싼 5천 만 원 ~ 1억 원을 호가합니다. 저희 집은 소박한 시골 마을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편에 속했습니다. 학기 중 평일에 가축을 기르고 주말마다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매 방학마다 친척 형님이 운영하는 경기도에 있는 공장에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15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겨울방학 두 달, 여름방학 한 달, 평일은 아침 9시에서 밤 12시까지, 토요일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일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테기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육성회비 미납 독촉장과 결식아동으로서 덩그러니 마주하게 되는 점심시간의 텅 빈 교실풍경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가난은 어렸던 저에게 불편하고 부끄럽고 마치 죄를 지은 것 마냥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굴레였습니다.
오늘의 밥 한 그릇보다 내일의 꿈을 위해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을 마치게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니,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좋겠다.”
어려운 집안 살림 탓에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그렇게 할머니의 손에 자라는 아들의 고등학교 뒷바라지가 걱정이 되셨나봅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될 무렵 이미 환갑을 맞으실 나이가 되신 아버지께서 언제까지 일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또래 아이들이 귀찮아하며 가기 싫어하는 보충수업을 너무나 받고 싶었고, 하루에 15시간씩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아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할머니, 고모, 누나와 단칸방에 지내야했기 때문에 방에서 공부를 할 수 없어도, 단 한 번도 소홀히 시험을 치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생활에서 유일한 낙인 학교생활을 포기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40살 차이나는 늦둥이가 반기를 듭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일을 하던 공장의 사장님인 친척 형님께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학교를 다녀도 좋으니, 고등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경기도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친척 형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농사와 공장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이어나가던 고2 여름방학, 저에게 천금과도 같은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지금까지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잘 어울려 지내며 일을 하던 성실함이면 한 번 믿어볼 만하다’시면서 공장의 사장님이던 친척 형님이 남은 고등학교 1년 동안은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물론 조건이 걸렸습니다. 남은 고등학교 1년 동안 고등학교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해줄 테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 첫 학기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주시고, 만약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 할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친척 형님과 함께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말입니다. 당시 시골에 살던 저희 집이 70만원이었고 대학 등록금은 입학금을 포함하여 450만원이었으니, 저에게 대학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만 해도 학자금 대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등록금이 없으면 대학을 진학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친척 형님의 약속은 있었으나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2004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에 아버지께는 편지 한통을 남겨두고 고등학교 기숙사로 가출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나는 편지 내용 중 한 부분은 ‘한 달 한 달의 월급보다, 짧게는 제 가까운 미래를 위해서 길게는 제가 앞으로 기를 제 자식을 위해서 투자를 해보고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시간을 돈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호랑이 같던 아버지의 뜻에 반기를 들고 던진 출사표였기에, 과외 한 번, 학원 한 번 다니지 못 하는 학업 조건에서도 선배들이 수능을 치르고 난 뒤 버린 EBS 문제집과 교사용 참고서를 받아서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이를 악물고 1년을 흔들림 없이 공부하였습니다. 절박한 마음과 그에 따른 노력이 빛을 보게 되어 드디어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며, 형편 때문에 휴학은 엄두도 못 내고 8학기를 연속으로 다니며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외적으로는 굉장히 바쁜 시기를 보냈지만, 오히려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산만큼 저의 진로와 미래에 대한 내적인 고민에는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번의 휴식 없이 내달려온 대학생활이었기에 남들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마음 한켠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학업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취업을 해서 돈을 벌게 되면 분명히 지금 내가 사는 고시원보다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 달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고, 학비를 벌기 위해 주말에 쉬지 못 하는 일은 없겠지’, ‘아니야 잘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불편들은 물리적인 것들 아닌가. 지금이야 당장 좁은 방에 변변치 못한 식사를 하며 사는 게 불편할 수 있겠지만, 내가 훗날 어느 정도 이런 물리적인 불편들을 해결하게 되면 그 때가 되면 나는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4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이 시기가 돼서야 저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고,‘얼마나 빨리 가는지 보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명언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진학하고 싶어 하던 신문방송학과의 전공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커뮤니케이션학에 관한 전공서적을 공부하던 중, 도저히 독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공 서적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의 윤석민 교수님을 찾아뵙고 직접 청강을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학 이론을 청강하기 시작하여, 관심 있는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께 편지를 쓰고 직접 찾아뵙고 청강을 허락받아 1년 동안 20학점 정도의 수업을 청강으로 들으며 중간·기말고사도 치르고 과제도 내며 수업을 들었습니다. 청강 수업이기 때문에 중간·기말 성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리포트 성적을 받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간·기말 기간에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밤을 새면서 공부하고 그 어느 때보다 퇴고를 거듭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리포트를 제출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소속된 곳 없이 청강 수업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나중의 취업 걱정을 해주기도 하셨지만, 저는 이 과정이 내가 훗날 돌아봤을 때 내 삶에서 가장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살아간 기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성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즐거움, 내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조사하는 설렘을 만나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 빨리 사회생활에 뛰어들기보다 못 다한 학업을 이어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촌놈의 꿈을 응원해준 한국장학재단
못 다한 공부에 아쉬움을 가지고 편입을 준비하던 2011년. 25살이 되던 그 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문자 메시지를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 고생많치! 지식은 금이다. 힘내라!!!!’
아마 아버지의 저 말씀은 미안하다는 말씀이셨을 겁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 대학교 뒷바라지 하실 여력이 못 돼서 공부를 만류하셨을 아버지의 십년 묵은 사과의 말씀이라는 것을 압니다. 고등학교 때 집을 나서며 남겨둔 편지를 보신 뒤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편입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단 한 번 싫은 소리, 조바심 내는 소리 하지 않으시고, ‘뒤를 받쳐주지 못 해서 미안하지만, 집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만큼 공부 해 봐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어렵게 시작한 편입시험에서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 할 때는 친척 형님께서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내주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도움을 청할 친척 분도 없었기 때문에 시험에 통과한다고 해도 당장 입학금과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진학하고 싶던 신문방송학과에 도전하는 문턱에서 다시 한 번 어려운 형편 때문에 좌절할 무렵,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자금 대출, 국가장학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든든학자금 대출은 졸업하고 취업한 후에 대출 받은 학자금을 갚을 수 있어서 학비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휴학을 하지 않고도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고, 등록금의 액수에 상관없이 전액 대출을 해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저처럼 집에서 학비를 전혀 보조받지 못하는 학생도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 집은 기초수급 대상자와 소득분위 하위 1분위를 오갈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학에 합격하면 소득분위에 따라 등록금의 대부분을 국가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50대 1을 넘는 경쟁률의 편입 시험을 아르바이트와 병행해야하는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합격하기만 하면 입학금과 등록금을 지원해주는 한국장학재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3년 2월, 27살이 되는 해에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합격증을 받아들게 됩니다. 든든학자금 대출로 150만원의 생활비를 대출 받은 덕분에 아르바이트에 쓰는 시간을 줄이게 되고, 학내 활동과 대외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나게 되어 더욱 발전적으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서강대와 일본 소피아 대학교의 정기교류전인 SOFEX(Sogang-Sophia Festival of Exchange)의 축구 선수 선발전에서 주전 골키퍼로 발탁되어 7개월간의 훈련을 소화하고, 일본 소피아 대학교를 방문하여 서강대학교의 대표로서 축구 경기를 뛰고 돌아왔습니다. 또한 신문방송학과 영상제작단 MEGS(Media Experts Group of Sogang)의 부국장으로서 서강영화제 촬영, 학교 홍보영상 제작 등의 업무를 맡고 있으며 스튜디오의 조교로 학내 근로도 하고 있습니다. 대외 활동 영역에서는 기획, 촬영, 연출을 함께 한 다큐멘터리 ‘맑게 갠 하늘처럼, 해밀학교’가 KBS1 TV 열린채널에 서강대학교 영상제작단 MEGS의 이름으로 공중파를 타게 되는 값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자랑스러운 서강인의 한 명으로 제가 그렇게도 하고 싶던 신문방송학 전공에 진입하여 저의 앞날을 위해 차곡차곡 꿈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탓하며, 그것을 내 모자람을 가리는 방패막이로 삼지 말자
지금도 낮에는 수업을 듣고, 공강 시간에는 학내 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과외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제가 그토록 하고 싶은 전공에 진입하여 공부를 하고 있고,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기에 단 한순간도 저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하루를 보낼 수만 있다면, 이렇게 기쁜 하루하루를 맞을 수 있다는 사실만 안다면, 지금 다시 시골 마을에서 낚시 하던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단 하루를 살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을 다시 인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할 만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삶이 그러했기에 ‘어려운 환경을 탓하며, 그것을 내 모자람을 가리는 방패막이로 삼지 말자’라는 생각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형편과의 싸움은 진행형이고, 8년 간의 서울 생활에서 아르바이트로 1억을 넘게 벌었을 만큼 주말에 쉬어 본 날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쉬고 싶은 마음과의 싸움은 힘이 들지만, 무언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뜻을 굽히지 않고, 물수제비와 종이비행기처럼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장학재단의 든든학자금 대출과 국가장학금 제도가 없었다면, 저는 꿈을 향한 도전의 끝에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 채,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20대를 돌아보며 평생 가슴 아파했을 것입니다.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 제도와 국가장학금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부모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과 한국장학재단 분들의 노고에 부끄럽지 않도록 전심전력을 다 해 살아갈 것이며, 훗날 제가 받은 이러한 도움들을 후배들과 사회에 돌려줄 것을 다짐하며 저의 수기를 마칩니다.
첫댓글 별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