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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완도 지역 오지의 섬을 찾아서 -
차에서 내린 우리는 차를 보낸 후 배에 올라탄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간다. 10시 25여 분. 마지막 날이지만 다소 늦게 시작하는 일정이다. 마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그다지 많은 섬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 목적지는 ‘횡간도(橫看島)’. 바로 노화도 북쪽에 위치한 섬이다. 일명 토말(土末)이라고 부르는 ‘땅끝’ 마을 갈두항 남동쪽 8.7㎞ 지점에 위치한 섬이다. 노화도에서 1km 지점에 있는 섬으로 백일도, 흑일도, 동화도, 마삭도 등이 이웃해있다.
70년대 고향의 모습을 간직한 섬, 횡간도
다시 날씨가 안개로 예측불능의 상황에 접어든다. 위쪽은 안개 아래로는 그나마 안개가 걷힌 상황. 산양진항을 벗어난 등대호는 동쪽으로 돌아선다. 횡간도와 노화도 사이의 수로에 들어선 후 이어 양식장 영역으로 들어선다. 저만치 낮은 구릉지에 붉은색의
기중기시설이 보인다.
이어 배가 선착장 오른쪽 방파제에 닿는다. 방파제 오른쪽으로 경사식 승선장이 있다. 이곳으로 카페리호가 드나든다. 왼쪽에 서방파제가 방파제와 방파제 사이에 작은 배들이 정박해있다. 면적 3.54㎢, 해안선 길이 11.5㎞, 오지의 섬이라고는 하나 면적이 우리나라 섬 중 100번째 정도를 차지하니 결코 작은 섬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을은 섬의 남쪽과 북쪽 만입부 저지대에 밀집해있다.
방파제 끝으로 가면 건물 한 채가 있다. ‘횡간도길1번’으로 선박출입항신고대행소다. 안에는 쇼파와 탁자 그리고 책상이 하나 놓여있다. 바로 왼쪽에 ‘횡간리’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해안길을 따라 들어간다. 포구는 반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빙 돌아서 마을 입구로 가는 해안도로가에는 낡은 집들이 널브러져 있다. 대부분이 공장 아니면 창고로 사용되는 공간들이다.
마을 입구 서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에 파출소인 횡간도 치안센터가 있고 부근에 보건소가 위치해있다. 섬 안에는 내세울만한 관공서가 없다. 경찰출장소와 보건지소가 전부다. 치안센터 옆에는 고목과 함께 두 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전적비가 있다. 바로 무장공비사건에 대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다. 1980년 11월 3일 무장간첩사건으로 유명한 섬으로 당시 이 섬에 침투한 무장간첩 3명은 주민신고로 경찰에 쫓기다가 전원 사살, 또는 자폭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단층짜리 건물인 치안센터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본다. 건물 뒤로 밭이고 그 뒤에 모여 있는 마을은 나무에 가려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 안개가 자욱한 상태라 뒷산의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옥상에서 내려와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서쪽으로 간다. 치안센터 오른쪽으로 보건진료소를 거쳐 마을 가는 길이 있으나 나중에 이곳으로 나올 작정이다.
한참을 가니 해안도로는 끝나고 오른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안개로 인해 수평선을 구별할 수 없는 해상,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해 북쪽과 남쪽이 심하게 만입되어 있으며,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동쪽과 서쪽 해안 일대에는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여 해안에는 단애의 절벽을 이루며 흑란과 석곡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해안에서는 어부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완도군에 속하는 탓에 횡간도의 주수입원은 역시 김이다. 그러나 김 양식 이외에 별반 소득이 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김 양식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생활이 좀 낫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렵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이제 먼 이야기이다. 마을 대부분 전복 양식과 김 양식, 문어통발을 한다.
마을사람들을 뒤로 하고 시멘트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들어간다. 실제로 이 길은 어차피 연결되겠지만 마을로 가는 길이라기보다는 밭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길을 넘어가면 바로 드넓은 밭이 좌우로 펼쳐진다. 최고 봉우리는 해발 201m이며,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넓은 평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 언덕배기까지 깎아 밭을 일군 선조들의 덕택으로 밭곡식은 그런대로 자급자족이 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마을을 바라보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포장길이 구불구불하게 사방으로 이어져 있는데 마주보이는 제법 넓은 단층짜리 건물이 학교 건물인 듯싶다. 학교는 마치 사자바위의 품 안에 있는 듯 뒷산의 바위가 학교를 온통 감싸고 있다. 마을 중간이라고 하지만 마을은 학교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형성되어 있었다. 왼쪽은 밭이다. 일단 학교로 방향을 튼다. 이 넓은 임야지대에 염소를 방목하여 사육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염소는 몇 마리 되지 않는다.
‘횡간도43번길 11’에 위치한 ‘소안초등학교 횡간도분교’는 그러나 폐교되었다. 학교 교문 입구에 폐교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모든 것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섬, 희망이 없는 곳에서 섬사람들이 희망을 거는 것은 자식밖에 없다. 이의 표출이 곧 학교에 대한 애정이다. 그래서 웬만한 섬에서는 폐교를 극력 반대한다.
횡간도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 학교는 1940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 2명에 학생 1명인 분교로 폐쇄될 위기에 놓였다가 학생 수 감소 대상이 되어 결국 지난 2008년에 진산분교장과 함께 본교인 소안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어느 독립운동가가 큰 뜻을 품고 시작했다고 하는데 산뜻한 교실과 잘 정돈된 화단, 아이들이 뛰어다니기에는 힘에 겨울 넓은 운동장, 그리고 각종 놀이기구가 즐비하다. 교실로 사용된 교사는 두 동이고 운동장 오른쪽으로 부속건물들이 있다. 운동장은 폐교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잡초투성이 공간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나와 서쪽방향으로 걸어간다. 시멘트포장길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인지 흙길처럼 보인다. 아까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굵어진다. 마침 아주머니가 밭에서 나오고 있어 등대 가는 길을 물어보니 내 차림으로는 갈 수 없단다. 거리도 멀기도 하지만 산 위로 올라가야 해 숲속이라 반팔차림으로는 힘들다 한다. 그래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물어서 간다. 한참 가다가 삼거리가 나온다. 다시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오른쪽으로 가는 길인데 험한데 하면서 말린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걷다가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고 하여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우산도 없는데.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발길을 되돌린다. 배에서 봤을 때는 등대가 그리 멀게 보이지 않던데.
폐교 쪽으로 와서 골목길로 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섬 전체에 길이 잘 만들어져 있지만 마을 골목길도 복잡하다. 그러기에 ‘횡간도몇번길’이라는 번지수도 생기지 않았을까. 그만큼 마을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완도의 어지간한 오지의 섬일지라도 숙박시설은 있기 마련인데 횡간도에는 그 흔한 민박집 하나 없다. 외지인들의 출입이 그만큼 많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돌아본다. 외딴섬으로 개발이 더딘 탓에 70년대 고향의 모습을 간직한 섬이다. 낮은 돌담에 담쟁이가 올라와 있고, 아직까지 우물에서 물을 긷는 아낙네의 광경과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겨운 섬이다. 빙빙 돌다가 나오니 마을회관 앞. 커다란 나무가 마을회관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섬 대부분 50대 이상 노령인구가 주류를 이루고 산다.
빗방울이 굵어져서인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더 이상 돌아다닐 그런 여건도 못된다. 더 많이 돌아보고 싶은데 그냥 나오기로 한다. 이후 길은 선착장으로 이어지지만 주변에 밭들만 있을 뿐 집은 찾기 힘들다. 다시 마을 입구에 닿으면 왼쪽에 보건진료소가 있다. 그 옆으로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치안센터에 들어가 본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전기밥솥에서는 밥하는 냄새가 난다. 마침 책상 위에 비스켓 한 조각이 있어 그것을 슬쩍, 한 입에 넣는다. 치안센터 앞에 일행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내보고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 하지만 경찰을 만나보고 간다고 하고는 먼저 보낸다. 그러나 기다리는 경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횡간도.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닌데도 내가 아는 섬만도 벌써 세 개째다. 여수에 있는 횡간도 두 개와 이 섬. 그런데 아직 가보지 못한 제주 추자도에도 횡간도가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빗간이섬. 유래를 보면 그렇게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반란과 전쟁과 연관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횡간도는 삼별초의 피난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별초 군인들이 살았다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위쪽에 그들이 살았다는 집터라든지, 그 지붕의 청기와 조각을 보았다는 것은 소문만 내려올 뿐 별다른 증거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고려시대에 삼별초 난을 일으켰던 패잔병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주민을 약탈하고 못살게 했는데, 그 뒤 이 섬에는 사나운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피해 다니라는 소문이 났으며, 섬의 이름도 사나울 ‘횡’(橫)자, 지켜볼 ‘간’(看)자를 써서 ‘횡간도’라 했다고 전한다.
횡간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라고 추정되는 고려 말엽 ‘삼별초의 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삼별초는 최충헌을 시발로 하는 무인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 사병을 육성하였던 바 처음에는 야별초를 두었다. 군인의 수가 증가되자 좌별초, 우별초로 삼더니 몽고와의 항쟁 때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온 자들로 신의군을 조직하면서 이 모두를 합하여 삼별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별초는 국가의 재정으로 유지되면서 6위가 담당해야 할 공적인 임무를 맡았다고는 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다.
이후 고려는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고종 19년, 1232) 항쟁하기 시작했지만 1270년, 최씨의 무인정권이 몰락하면서 대몽항쟁을 포기한 채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몽고에 대한 항쟁세력의 중심부대였던 삼별초는 여기에 반란을 일으켰다. 배중손의 지휘 하에 국왕을 따로 세우고 개경의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와 함께 개경과 거리가 멀면서 바다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진도를 거점으로 남하하였다. 진도로 간 그들은 궁성을 크게 이룩하여 왕도로서의 시설을 갖출 뿐 아니라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여 완연한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진도가 함락되고, 마지막으로 옮긴 제주도마저도 함락되고 말아 전후 4년에 걸친 저항은 끝나고 말았다. 횡간도는 바로 이때, 삼별초가 몽고군과 합세한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진도를 비롯한 여러 부근 섬에서 생활하다가 제주도로 후퇴하는 어간에 삼별초 군인들이 살기 시작했다. ‘가로지르다’ ‘횡단하다’의 횡(橫)자에서 삼별초 군대의 피난길을 암시한다. 이때가 1270년경이었으니 횡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가 700년이 조금 넘었다.
그 외 임진왜란 시 완도에 주둔해있던 충무공 휘하의 수병들이 거북선을 타고 나가 적선을 끝까지 쫓아가 몰살시켰는데 이때부터 왜구들이 이 섬을 지나가려면 무서워서 힐끔 힐끔 곁눈질을 하며 비켜 지나갔기 때문에 섬의 이름을 횡간도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 처음으로 밀양 박씨와 창원 황씨가 섬에 들어왔다고 하나 지금은 후손들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임진왜란 이후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풍란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고장을 빛낸 인물로는 항일독립투사인 김통안 선생이 있다.
사자바위의 목갈기와 가슴팍, 시퍼런 바다를 내려다보는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에는 남해 특유의 희귀종인 풍란이 자생한다. 풍란꽃이 개화했을 때 그 향기가 멀리까지 풍겨 안개가 낀 밤에도 풍란의 향기를 맡아 사공은 뱃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경찰을 기다린다고 앞 방파제에도 가보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그냥 발길을 돌려 등대호가 정박해있는 방파제로 간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 30분. 마침 배가 한 척 들어온다. 전복 양식장에 갔다 오는 배 같은데 빈 배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배에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배는 이내 출발하고 횡간도를 빠져나와 왼쪽(동쪽)으로 돌고는 횡간도를 끼고 북쪽으로 향한다. 비는 그쳤지만 다시 안개가 몰려들기 시작한다.
떨어진 동백꽃조차도 아름다운 섬, 동화도
횡간도를 떠난 지 30여 분. ‘동화도(東花島)’에 닿는다. 짧은 방파제로 이루어진 선착장. 안에는 두 척의 조그마한 배만 정박해있다. 방파제에 올라 마을을 보니 역시 지형이 경사진 탓에 숨어있는 형국이다. 집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방파제를 벗어나면 바로 앞에 공장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선다. 방파제 왼쪽에도 해안도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길게 이어진 해안도로 끝에 긴 방파제가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전봇대에 마을번지수를 알리는 도로명 표시가 있고 왼쪽으로 마을로 올라가는 시멘트계단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은 돌로 된 옹벽이다. 도로명 표시에는 ‘동화도길 1-9’까지로 표시되어 있다. 채 열 가구도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 옆으로 우물터가 보인다. 그만큼 물이 많다는 이야기다. 계단은 비가 와서 물기가 축축하다.
수백년 된 동백나무와 팽나무, 후박나무가 섬을 에워싸 동리 입구만 겨우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나무에 가려 숨어있던 집이 몇 채 나타난다. 집은 담이 있는 곳도 있지만 없는 곳도 있다. 그러나 빈집은 찾기 힘든 섬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 온기가 느껴진다. 이곳에는 곳곳에 우물이 있다. 마침 담장을 낀 집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온다. 안으로 들어서니 평상에 한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궂은 날씨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모두 다섯 명인데 여자가 두 명이고 남자가 셋이다. 대부분 50대 이상 노년층이다. 인사를 하니 어떻게 왔느냐 묻는다. 섬 취재하러 왔다 하니 기자냐 한다. 기자가 아니고 작가로 섬에 관련된 책을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커피 대접을 하려는 것을 사양했다.
섬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를 이루며, 산맥이 발달하여 평지가 협소하다. 섬의 대부분이 가파른 해식애로 발달하였으며 북동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고 여기에 마을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섬을 흔히 ‘화도’라고 부른다. ‘동화도’는 꽃이 많이 피는 섬으로서 동쪽에 위치해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동백꽃이 많단다.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나고 밑에 떨어진 동백꽃조차도 아름답다. 역시 섬 이름처럼 동쪽에 위치한 꽃 많이 피는 섬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화도와 미녀)가 내려오고 있다.
이 섬에는 옛날부터 양귀비를 무색케 하는 천하일색의 미녀가 한 명씩 태어났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일은 처녀들이 별로 아픈데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섬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차라리 진자리에서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고 연령 찬 딸을 가진 사람들은 자나깨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이 섬의 이름도 꽃섬, 꽃과 같이 떨어지는 처녀들의 넋을 달래려고 화도라 하였고 백일도의 동쪽에 있어 동화도라 했다고 한다.
외로운 섬 동화도에는 모두 7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 명조 때에 진주 강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고 하나 그 후손이 없고 1600년경 선조 말기에 경주 이씨 이현영 씨가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때 14가구까지 살았다는 동화도. 그래서 이 섬에는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학교터도 있다. ‘군외초등학교 화도분교장’이 그것이다. 마을의 제일 위쪽에 위치해있는 이 분교장은 지난 1991년에 폐교되었으니 거의 20년을 웃돈다. 운동장과 길은 온통 잡초투성이지만 건물은 그런대로 쓸만해 보인다. 조형물로는 남아있는 것이 책읽는 소녀가 유일하다. 최고 많았을 때가 14가구라는데 이런 곳에 학교가 있었다니. 역시 섬사람들의 교육열은 대단한 것임을 실감한다.
면적 0.13㎢, 해안선 길이 3.5㎞, 이곳은 집과 집이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다. 조그마한 공간에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폐교 주변 마을 뒤쪽으로 조그만 밭이 있다. 주민들 대부분이 노령이라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연안에서는 멸치, 농어, 도미, 새우가 많이 잡히며, 미역 김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최고점 127m로 모래사장이 있고.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와 겸하기에 좋다.
여기저기 구경하고 내려와 선착장으로 간다. 마침 배 한 척이 오더니 남자가 뭔가를 열심히 배에서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것을 거들어준다. 이 풍경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을 따라 왼쪽 긴 방파제로 걸어간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방파제 입구에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한 채 있고 그 주위로 잡동사니가 쌓여있다. 이곳 방파제는 폭이 제법 넓다. 방파제는 끝에서 갈라지는데 오른쪽은 경사진 방파제다. 여객선을 위한 공간이다. 이 방파제 주위로 2척의 배가 정박해있다.
방파제를 벗어나 다시 선착장으로 가니 창고에서 생각지도 않은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멸치를 삶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이 멸치를 뜨거운 물에 삶고 꺼내는 작업을 하고 남편이 그것을 받아 건조장으로 운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수 횡간도에서 본 그 풍경이다.
바쁘게 움직인다. 삶은 멸치를 담은 그릇에서 쭈꾸미가 보인다. 아저씨가 내보고 먹어보라고 한다. 멸치잡이에 덤으로 잡혀온 쭈꾸미다. 삶은 멸치 사이에 있는 쭈꾸미를 찾아서 입에 넣는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꼬르륵 하던 차에 보이는 족족 쭈꾸미를 먹어댄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저씨가 멸치를 솥에 쏟아 넣는다고 바쁘면 내가 뜨거운 삶은 멸치를 담은 통을 들고 건조대에 운반한다. 어느 사이 사진작가들이 다 내려왔다. 그리고 연신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기를 몇 분. 상당히 많은 양이 건조대에 나와 있다.
가져온 멸치를 다 삶았다. FRP선에 가는 아저씨. 아저씨가 다시 멸치를 가지러 나갈 모양이다. 아저씨가 목사님에게 고기 몇 마리를 준다. 횟감으로 사용하라고. 아마도 일을 도와준 댓가이리라. 그것을 받아들고 등대호에 올라탄다. 그리고는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배는 다음 목적지로 방향을 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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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도에는 참 가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재언 작가님 책을 보고 백일도와 동화도는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고향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스크렙하여 갑니다
수고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