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스바 3,14-18; 필리 4,4-7; 루카 3,10-18 / 대림 제3주일; 2024.12.14.
1. 말씀의 초점과 흐름 : 기뻐하여라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입당송. 필리 4,4.5 참조)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초점은 입당송에서 알려주는 대로, 메시아께서 오실 때가 임박했으니 기뻐하라는 메시지에 있습니다. 이 초점에 따라서, 독서와 복음에 담긴 말씀의 흐름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전하고 나누라는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스바니아 예언서의 말씀은 바빌론 유배 전후의 상황과 직결되어 있는데, 준엄한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고자 스바니아 예언자는 하느님을 섬기던 ‘이 땅의 겸손한 이들’에게 의로움을 찾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나빔(anawim)’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아나빔에게 요청한 의로움이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남은 자들’이란 바빌론 유배 시절에 앗시리아 군대가 왕과 신하들과 엘리트들은 모조리 학살해 버리고 자신들이 부려 먹을 만한 지식과 기술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고 갔지만, 그만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더 가난한 이들을 남겨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을 ‘암헤레츠(amharetz)’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아나빔들이 겸손함과 의로움으로 더 가난했던 암하레츠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게 되면, 모두가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고 스바니야는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땅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복되고 기쁘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다음과 같은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하지만 스바니아 예언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헬레니즘 세력에 이어 로마제국 등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며 종교적으로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으로 불의한 사회악이 지배하던 상황에서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 이스라엘의 지배 엘리트들은 외세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특히 정신적으로 옭죄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직 폭력이 일상화되자 민중 안에서도 권세나 재물 등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자들은 힘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수평 폭력도 만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즈카르야 사제의 아들 요한은 다시 예언자적 노선에 따라 모두가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은 당시 군중으로부터 선풍적인 호응을 받았고 이 광범위한 호응 분위기에 놀란 지배층도 요한의 메시지에 비판적으로 주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예언자적 전통이 무려 4백여 년 만에 회복되었던 셈이었고. 스바니아 예언자의 외침이 이스라엘 민중 안에서 의로운 나눔의 메시지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3장에 이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0-14)
광범위하게 전개된 세례 운동 덕분에 ‘세례자’라고 불리던 요한은 메시아로 기대를 받기도 했으나, 정작 그는 본격적인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실 것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 예고의 상징이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ㄴㅁ)
과연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상황은 오늘 제2독서인 필리피서 4장에 담겨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빵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공동 생활(사도 2,42-47; 4,32-37 참조)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과 불의 세례’ 운동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 멀리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파되었고 그 중 뛰어난 열성을 보인 공동체가 필리피 공동체였습니다. 필리피 교우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전해 받은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4-6)
2. 전례의 뜻: 믿음으로 행하는 나눔
이러한 말씀의 초점과 흐름에 따라서 오늘 대림 제3주일은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취지로 제정된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성체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믿는 이들의 자선은 성체성사의 정신에 따라서 물질적인 나눔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가난한 이들의 불쌍한 그 처지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가난해지게 된 것이 세상의 죄악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그 죄악에 일조했던 우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 보속의 마음으로 나눔을 행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치는 것이 되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선을 위한 나눔에는 믿음이 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눔에 믿음을 더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온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은 네 가지인데, 긴급구호, 사회복지, 사회개발 그리고 사회운동입니다.
긴급구호는 일시적으로 화재나 수재, 철거나 지진 등 재해를 당하여 어려워진 이웃들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번만 도움을 주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나, 부양해 줄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한 번만 도와주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이고도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나 민간 그리고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이들은 가정도 있고 노동력도 있는데 자기 집이 없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어렵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서는 효과도 없고 반감을 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기 문제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회개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를 공동체 운동이라고도 합니다.
가난이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볼 때, 위의 세 가지 방식은 사후 치료에 해당됩니다. 질병도 사후 치료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듯이, 가난에 대해서도 미리 예방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계몽 활동이나,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청원 활동 또는 필요할 경우 법률을 만드는 입법활동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운동이라 합니다.
3.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이상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방식은 예수님께 기원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성령께서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자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 시작 무렵부터 이렇게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고 나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금새 퍼져서 병든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긴급구호와 사회복지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시어 도움을 주신 가난한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매우 다양합니다: “눈먼 사람,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묶인 사람,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 군중, 보잘것없는 사람, 가장 작은 이들, 맨 끝자리의 사람, 어린아이, 철부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등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바리사이들은 이들에 대해서 율법도 몰라서 죄를 짓는 저주받을 족속이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헌금을 많이 낸다고 자랑할 뿐, 그 가난한 이들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들과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나눔을 행한 모범적 사례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신 일도 많았지만,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산상설교에서처럼 간접적으로 하지만 지속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개발이나 사회운동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운동을 벌이면서, 군중에게 정의롭게 나눔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일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믿는 이들이 행하는 나눔이 큰 힘이 됩니다. 이 믿음의 나눔은 우리가 이 대림 시기에 성탄을 준비하면서 행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예수님의 성탄을 더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4. 이룰 수 있는 꿈,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가난한 라자로와 인색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루카 16,19-31)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부자와 라자로가 같은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굶주린 라자로에게 부자가 빵부스러기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람직한 사회는 부자가 라자로에게 개별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회가 아니라 라자로의 권리로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6세의 호소는 가난이라는 사회 현상의 정곡을 꿰뚫어본 성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빈곤으로 인한 불편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자선에 의지함이 없이 떳떳하게 정책과 법률 등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게 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부여된 권리입니다. 이 권리를 충족시켜 주고자 우리가 그들에게 기쁨을 전하면 우리 또한 그 기쁨을 더 크게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스바니아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이 가르치는 사랑의 문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