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名妓) 玄桂玉의 사랑 따라 의열단 입단(관리번호 187) ................................. 木蘭火兵(목란화병) 유일하게 남은 玄桂玉의 시
馬訾江邊雲漠漠(마자강변운막막) 마자강변에 구름이 막막하고 滿珠沙上朔風驚(만주사상삭풍경) 만주 모래 위에는 북풍이 세게 부네 木蘭已謝當窓織(목란이사당창직) 목란이 이미 창 앞에서 베 짜는 일 그만 두고 好向營中作火兵(호향영중작화병) 영중을 향해 가 화병이 되었네 ............................................................ 통석(通釋)취람 여포
일제하 조국의 앞날은 (압록강 머리)위에는 구름이 끝이 없고 만주의 모래 위에는 북풍(독립군 의열단 형편)이 세차게 부네 목란(木蘭)나는 이미 길쌈(작정하고 의열단 가입)을 그만두고 군영(軍營)으로 가서 대병(隊兵)(조국독립군 결사단원)되었네.
키워드:직(織)길삼X. 길쌈:직(織)부녀자들이 가정에서 베·모시·명주·무명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
‘목란(木蘭)’은 〈목란사(木蘭辭)〉에 나오는 여자 이름이다. 〈목란사〉는 고악부(古樂府)의 하나로, 양(梁)대에 효녀 목란이 늙은 아버지가 화병으로 출정하게 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장(男裝)하고 종군하여 12년 만에 개선했다는 일을 주제로 한 오언(五言) 극시이다. ‘당창직(當窓織)’은 〈목란사〉의 “덜그럭 또 덜그럭 / 목란이 방에서 베를 짜네(喞喞復喞喞 木蘭當戶織)”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자강(馬訾江)’은 압록강이며 ‘만주(滿珠)’는 만주(滿洲)를 가리킨다. 목란이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한 것처럼 자신도 독립군을 도와 헌신하려는 기개와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계옥 [玄桂玉]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 3. 25., 국학자료원)
아버지가 악공(樂工)으로 총명했다고 한다. 진주 논개 사당과 평양 계월향(桂月香) 사당이 퇴락했음을 듣고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중수(重修)했다가 경관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동지들과 극단을 조직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군자금을 희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남장을 하고 출정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19년 봄. 소리와 산조 잘하기로 유명하고 춤과 가야금에는 대적이 없다고 하여 당시의 풍류랑의 애간장을 녹이던 당대의 명기 玄桂玉이 하룻밤 사이에 경성의 화류계에서 그림자를 감추었다. 현계옥을 잃어버린 화류사회의 놀라움도 물론이거니와 평소부터 그의 행동에 주목을 아끼지 않던 경찰에서도 크게 낭패하여 당시 그가 소속되어 있던 한남권번을 수색하는 한편으로 국경 각지에 전보를 하여 그의 체포를 의뢰하게 된다. 그때 그녀는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안동현을 거쳐 간신히 봉천까지는 갔으나, 일본관헌의 탐지한바가 된 줄을 알고 중국옷으로 변장을 하고 귀를 뚫어 간신히 잡히기를 면하였다. 그것으로 현계옥은 기생으로서의 화려한 삶을 접고, 만주벌판과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가지각색의 고생을 하기 위한 여정으로 접어 든 것이었다.
현계옥은 경상북도 대구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가세가 어려웠고 일찍 부모를 여윈 까닭에 17세가 되던 때에 대구 조합에 기적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재주가 많아 풍류가무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으며, 한문에 특출하였고 가곡, 정재무, 승무를 비롯하여 가야금이 절묘하였다고 한다. 당시 대구 전체를 살펴보아도 소리와 산조 그리고 춤과 가야금에는 그녀와 필적할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였으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대구의 명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풍류를 아는 남정네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운수 좋은날」,「빈처」,「술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현진건의 형이었던 玄鼎建을 만남으로 인하여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현정건은 대구의 유력한 집안의 자제로 일찍이 경성, 중국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유학을 하던 중 고향으로 돌아왔던 틈에 여러 친구와 어울려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기생의 집을 한 번 찾아갔던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현계옥을 만나게 된다. 그날 밤 첫 눈에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이후로부터 현계옥의 가슴에는 오로지 현정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를 위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절실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현정건은 조국이 일제치하에 있음을 한탄하여 고국에 있지 못하고, 중국으로 혹은 러시아로 혹은 일본으로 흘러 다니는 생활을 하게 된다. 현정건에 대한 그리움으로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현정건을 좀더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19세 되던 늦은 봄, 사고무친한 서울로 이사를 하여 한남권번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녀가 남보다 재주가 많은 만큼 그의 정열 또한 그러하였던 듯하다. 그녀는 현정건의 姓이 자기의 성과 같이 현가이므로 님이라 하지 못하고 오빠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으나, 현정건 역시 그녀를 사랑하였으므로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하며 연인으로서의 애뜻한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현정건의 가정에서는 기생과 관계를 가지는 것에 못마땅하게 여겨 현정건의 행동을 엄중히 감시하고, 현계옥의 가정에서는 돈 없는 현정건과 가까이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야단을 하였다.
그러나 젊은 남녀의 사이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은 완고한 부모의 몇 마디 책망이나 노여움 따위로 꺼질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위의 반대는 두 사람의 사랑에 더욱 불을 지필뿐으로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현계옥은 기생생활을 저주하며 자기의 박명을 한탄하던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려 밤잠을 못자고 신음하는 몸이 되었다. 두 사람은 부모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서 그녀의 집에서 십리나 되는 영찬 못이라 곳에서 밤마다 시간을 정하여 두고 만나면서 사랑을 키워갔다. 그렇게 애절하던 두 사람사이에 이별이 찾아 들었다. 현정건이 중국 상해로 들어가서 이태리신문의 기자로 일하게 된 까닭이다. 두 사람은 <날 데려가오.>, <잠깐만 더 기다리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넓은 황해바다를 덮을 만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연인에서 부부사이로 관계를 형성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서 기생생활을 하는 그녀의 집에는 날마다 풍류 많은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당시 재산 많고 돈 잘 쓰기로 유명하던 전라북도 옥구군 田某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한계옥에게 마음을 두기 시작하여 같이 한 번 살아 보았으면 죽어도 원한이 없겠다고 애원을 하며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현계옥은 멀리 있는 사랑하는 남편인 현정건을 잊지 못하여 항상 그의 간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실망하던 田某는 같은 玄가끼리 살면 玆가가 된다고 비꼬기까지 하였다는데 이에 대하여 구변 좋은 그녀는 玄가와 田가가 같이 살면 畜가가 된다고 거절하였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렇게 주야로 그리운 애인의 반가운 소식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현계옥에게 한편으로는 여러 풍류남아들이 돈으로, 말로, 편지로 갖은 수단을 다하여 그녀에게 구애를 요청하였다. 취할 수없는 것에는 욕망이 더욱 심한지라 사람들은 이 값비싼 기생의 마음을 따 보려고 서로 경쟁 삼아 갖은 희활극을 연출한 일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어렵고 힘든 기생생활을 하며 그저 멀리 있는 남편의 성공만 바라고 있던 중에 간혹 자기 남편의 소식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오는 청년이 있으면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섬기며 위로하였다. 그리하여 현계옥은 중국을 오고가던 활발하고 말 잘하는 청년들과 자주 사귀게 되었다. 현계옥이 청년들에게 중국의 사정과 형편을 묻던 중에 중국 제 2혁명 시대에 유명한 쾌남아 黃興씨의 사적을 알게 되고, 天津妓樓에서 그 당시 기생으로 뒤에 여자혁명 결사대를 통솔하여 이름을 일세에 떨치던 <정추진>여사의 용장한 행적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은근히 자기의 처지와 정여사의 과거를 비교해 보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녀가 뒤에 모든 것을 헌신짝같이 던져버리고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험난한 만주벌판을 향하여 표연히 떠날 수 있었던 결심은 실로 이때에 한 것이다.
그녀의 나이 이십세가 되던 해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있던 남편 현정건이 친구 박세봉과 같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몰래 서울로 잠입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숨어 다니는 몸이었는지라 서울에 온지 4·5일 만에야 현계옥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애타게 그리던 남편을 만난 현계옥은 그 남편의 계획을 알고자 주야로 졸랐으나 조심스러움이 많았던 현정건은 여러 동지와 계획하고 있는 중대한 경영을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 하더라도 알게 할 수 없다 하며 끝끝내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정건의 태도를 보고서 그녀는 비로소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하여 하여오던 모든 준비를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을 다만 애인으로 혹은 한 개의 여자로만 사랑하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하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현계옥의 제안은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여러 동지들도 이 색다른 일꾼을 새롭게 얻은 것을 매우 기꺼워하여 장차 올 시국의 변동을 서로서로 이야기하기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기생집에 오히려 경찰의 주목이 적다하여 당시 인사동에 있던 현계옥의 집에 모여 모든 것을 의논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사동 거리에는 젊은 청년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남모르게 남편 현정건의 일을 돕고 있을 때에도 현계옥의 집에는 소위 <지휘>라는 것이 3·4일전부터 와서 싸일 정도로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는 남정네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남편이 중국 吉林에 근거를 둔 비밀결사대의 단장인 것을 알고 난 뒤론 자기의 몸 역시 이제부터는 돈에 팔려 다니는 기생 몸이 아니라 생각하여,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요리집에 나아가질 않았다. 따라서 노래에는 거칠 것이 없고 일흔 두 가지 춤을 출 줄 안다고 하며, 한문 알고 글씨 잘 쓰기로도 당시의 기생 중에 대적이 없었다는 특히 말 잘 타기로 유명한 이 기생을 아무리 애를 써도 보지 못하게 되자 풍류객의 애가 탈대로 타서 심지어 황금정 승마구락부에서 남자처럼 승마복을 입고 말 타는 그녀를 찾아다닌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남복을 입고 모자를 둘러쓰고 키보다 높은 말 위에 앉아 살같이 달리는 늠름한 모양은 완연히 여장군의 풍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그가 스물한 살 기미년 2월에 남몰래 가산을 정리하여 길 떠날 준비를 마친 현계옥은 그 동생 계향, 월향과 그 오라비 현수명 내외를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고자 하던 중에 같이 가려던 그만 남편 현정건이 경찰에 잡혀 유폐의 몸이 되고 말았는데, 잡혀갔던 현정건이 얼마 되지 않아 무사히 나오게 된 것은, 조선 민족 모두가 독립만세들을 부르고 경찰서로, 감옥으로 잡혀가던 3월 중순경 이었다. 그녀는 밤을 새워 남편과 잡히지 않고 교묘히 강을 건널 방법과 함께 중국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한 후, 남편이 지시하여 주는 李某란 청년의 뒤를 따라 일행 다섯 사람이 정든 고국을 등지고 낯선 남의 땅으로 발을 옮겼다. 안동현에서 이틀 밤을 자고 봉천에 이르러 皇寺後樓라는 곳에서 보름동안이나 있다가 일본 관헌의 주목이 심하고 그를 알지 못하는 여러 청년들이 그의 행색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눈치를 알고 북류어화원 이라는 곳에 옮겨서 남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애인이며 동지였던 현계옥을 친구에게 부탁하여 먼저 떠나보낸 현정건은 독립운동 자금을 다소간이라도 만들어가지고 뒤를 따라 곧 떠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고 그에게 오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겠다고 하던 모 부호에게서는 孫某라는 청년이 먼저 삼만 원을 받아 가지고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실망이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대로 앉아있을 처지도 아니었고, 독립운동을 빙자하고 삼만 원이란 거액을 가지고 간 손모의 행동도 감시를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는 그의 친구인 박세봉과 같이 조선을 벗어나서 길림으로 가게 된다. 그리하여 봉천에 있는 현계옥에게 오라고 통지를 하였다.
그 당시 吉林에는 기미전년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간 김원봉, 김좌진, 홍범도 등이 있어서 義烈團, 光復團 등을 조직하고 각종 기관을 만들어 내외의 연락을 도모하고 동지를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등 과격한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남편의 부름을 받아 만주벌판에서 가장 산수가 아름답다는 길림에 이른 현계옥은 秘傳 革命傳記 중에서나 보던 인물들과 서로 만나게 되자 지금까지 사귀어오던 값없는 사나이들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으므로 힘껏 그들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랑하는 남편 현정건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지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심 많은 세상과 시기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정든 고토를 떠나서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과거 기생이었다는 사실만을 듣고는 요망한 여자를 거저 들일 수 없다 하여 집을 습격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이에 더욱 자극을 받아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결심을 드러내려 노력하였고, 타국에서 외로움에 절은 이들 청년의 고달픈 심령을 위로하고자 하여 조국에서 가지고 갔던 가야금을 송화강변에서 타기도 하였다.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시간이 흐르자 만주 사회에서도 차차 그녀의 정성을 알게 되고 그녀의 활동하는 범위도 점점 넓어져 갔다.
새로운 인생의 희열을 맛보며 독립지사로서의 생애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그녀는 데리고 갔던 올케가 아이를 낳게 되어서 조선으로 내보내고, 월향은 머리를 깎이고 중국옷을 입혀 계향과 같이 데리고 長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장춘 생활이 가장 곤란하였고 비참 하였다. 이 곤란한 생활 중에도 현계옥은 의열단에 가입할 결심을 하고 그 단장 김원봉을 만나보려고 많은 애를 썼다. 왜냐하면 그녀는 의열단 중 오직 한 사람의 여자가 되어 남자에게 지지 않는 활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이 창자를 마르게 하던 장춘생활을 뒤로하고 이듬해 봄에 상해로 향하여 떠났다. 운동의 중심이 차차 상해로 몰리고 큰돈을 횡령하여 달아났다는 손모의 자취가 천진, 상해 등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 현정건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찾아간 것이다. 번화한 세계요 화려한 도시인 상해에 오자 그녀는 자기가 희망하는 일을 하기위하여 먼저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원래 영어를 잘 하는 남편에게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한편 때때로 열리는 거류동포의 음악회에 출연하여 가야금을 타서 비분을 품은 여러 동지의 수심 많은 심령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현계옥이 그처럼 만나고자 열망하였던 김원봉을 다시 만나게 되자, 그녀는 의열단의 한 분자로 일을 시켜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요청이 여자의 한때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차차 알게 되자 폭탄을 제조하는 법과 육혈포 놓는 법을 가르쳤다. 상해 신공원 사격장에서 흰옷 입은 그녀가 단총을 들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양을 보고는 외국 사람도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의 특출한 재능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영어도 상당히 알게 되고 사격법도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黃浦灘강에서 배를 젓고, <제스필> 공원에서 말을 달리는 모습이 얼른보기에 여자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씩씩하였던 그녀였지만, 때때로 교묘한 꾀를 내기도 하여 의열단의 일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천지에 있는 폭탄을 상해로 가지고 오고자하나 관헌의 주목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양복을 입고 폭탄을 가지고는 단신으로 배를 타고 상해로 돌아가다가 관헌의 취체가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사람 옆으로 가서 공연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남이 보기에 부부가 여행하는 모양을 꾸며서 무사히 운반한 일도 있었다.
한계옥은 그 남편과 같이 상해, 프랑스 조계 望志路란 곳에 있으면서 동생 계향과 월향을 조선으로 내보내게 된다. 그 후 계향은 박세봉과 같이 일본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월향은 청진실업가와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남편 현정건이 1928년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가 출옥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현계옥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행동파 사상기생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의 근거였으며, 전부였던 사랑하는 남편이 없는 곳은, 그녀에게 있어 이미 조국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사망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현계옥은 갔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으니 이것이 기구한 사랑과 전쟁이다.
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하! 명기 현계옥이 독립군이 되었군요.
그야말로 의기이고 정열의 화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의기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