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조의 비밀 3 -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교정과 정서: 운영자
저작권 문제가 있어 원본 파일을 한방에 올리지 못한 점 양해바랍니다.
본인이 공부 하는데만 사용해 주십시요.
① 감숙성 경천현(涇川縣) 西北.
② 감숙성 예현(禮縣) 北15리.
③ 산서성 편관현(偏關縣) 東70리.
④ 하남성 무양현(舞陽縣) 西南40리.
⑤ 호북성 의창현(宜昌縣) 西北60리.
⑥ 호북성 포은현(蒲圻縣) 西2리.
⑦ 호북성 무창현(武昌縣) 南90리.
⑧ 호남성 봉황현(鳳凰縣).
⑨ 산동성 봉래현(蓬萊縣) 南15리.
⑩ 강소성 곤산현(崑山縣) 西北.
⑪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西北10리.
⑫ 강소성 남통현(南通縣) 南낭산(狼山) 西.
⑬ 복건성 장락현(長樂縣) 南.
⑭ 광동성 구룡(九龍) 北.
⑮ 광동성 오천현(吳川縣) 南80리.
광동성 성치(省治) 北.
운남성 은안현(恩安縣) 西南30리.
봉천(奉天) 금현(錦縣) 西南50리.
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70리.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70리.
흑룡강성(黑龍江省) 철려설치국(鐵驪設治局) 東北.
이와같이 지명이 옮겨진 것을 볼 수 있다.
※ 진주(鎭州)는 한나라 때 진주(鎭州). 후일 승격시켜 진정부(眞定府). 이곳은 하북성
정정현(正定縣)이다. 당나라와 오대(五代) 시에는 진정부(眞定府)이다. 특히 고려태조 왕건 때
홍유(洪儒) 장군과 유검필(庾黔弼) 장군이, 군졸 1,500명을 이끌고 진(陳)을 친 곳이 진주(鎭州)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고려사절요의 태조왕건 원년 6월에 적혀 있다.
※ 개주(開州)는 고려 경주(慶州)이며, 본시 예맥(濊貊)의 땅이며, 당나라가 이름을 고쳐
성산군(盛山郡)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사천성 개현(開縣)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 예산현(禮山縣)은 호북성 응산현(應山縣) 東南으로 되어있다.
※ 平壤은 섬서성 서경(西京)인 장안성(長安城). 즉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되어있다.
※ 강주(康州)는 당나라가 두었던 남강주(南康州)라고 했다. 그후 이름을 고쳐 진강군(晉康郡)이라
했다가 다시 강주(康州)라 했다. 송나라 때 승격시켜 덕경부(德慶府)라 했으며, 후에 고려의
강역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광동성 덕경현(德慶縣)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 명주(溟州)는 강릉(江陵)이다. 호북성 강릉현(江陵縣)에서 다스렸다. 또는 호북성 형주부
(荊州府)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이곳은 한나라 때 남쪽의 군(郡)으로 다스리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 일월사(日月寺)는 일월산(日月山)에 있으며, 이곳은 감숙성 서녕현(西寧縣)에서 다스렸으며,
사천성 바깥 입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월산(日月山)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며,
번이(番夷)들의 시장(市場)이 있던 곳으로 되어있다.
※ 서경(西京)은 섬서성 서안(西安)임. 즉 평양성(平壤城)과 장안성(長安城)이 있던 도시.
※ 순주(順州)는 호북성 수현(隋縣) 北80리.
※ 백제 연산진(百濟燕山鎭)은 하북성 계현( 縣) 東南. 즉 백제가 있던 곳은 주(周)나라
소공(召公BC.1152년)은 진당숙우(晉唐叔虞BC.1115년)에 이어온 사람으로,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
한 후 연산(燕山)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연산(燕山)은 흡사 긴 뱀과 같고, 1천리나 되며 이한(夷漢)
즉 한(漢)나라 사람으로 동이족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태조왕건 8년 10월에 고려 서대장군(西大將軍)이었던
유검필(庾黔弼)이 파견되어, 백제 연산진(燕山鎭)에 있던 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하여 뭇 병사를 죽이고 3천 명의 포로를 잡은 곳이 백제 연산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로 백제 연산진은 지금의 북경(北京) 지방인 하북성 계현( 縣) 東南이라고
되어있다.
※ 역주진(歷州鎭)은 역현(歷縣)으로 하북성 고성현(故城縣) 北.
※ 용주(龍州)는 후위(後魏) 때 두었던 강유군(江油郡)이나, 서위(西魏) 때에는 용주(龍州)라 함.
즉 사천성 강유현(江油縣) 西北을 말한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西北8리. 또는 산동성 낙릉현(樂陵縣) 西南30리.
산동성 임치현(臨淄縣)과 산동성 교동(膠東)의 길이라고 되어있다.
※ 공산(公山)은 문산(文山)과 같은 곳으로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문산(文山)은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길안현(吉安縣) 東南15리와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으로 되어있다.
※ 해주(海州)는 본래 옥저국(沃沮國)의 땅임. 고려(高麗)의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며
혹왈 비사성(卑奢城)이다. 발해(渤海) 때 남경(南京)이며 남해부(南海府)라 했으며, 명현(溟縣)을
위주(爲州)에서 다스렸다. 금(金)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했고, 명나라 때는 해주(海州)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東北을 해주(海州)라 했다고 되어있다.
※ 청구(靑丘)는 신선(神仙)이 살던 곳으로 장주(長州)라 했다. 이곳은 산동성 광요현(廣饒縣)의
북쪽이라고 되어있다.
※ 경산(京山)은 호북성 경산현(京山縣) 東10리로 되어있다.
※ 패강(浿江)은 패수(浿水)로서 한나라 위(魏)나라 시대 때의 패수(浿水)이다. 이곳은
압록강(鴨綠江)이며, 연(燕)나라 때에는 진번군(眞番郡)에 속했다. 조선(朝鮮)과 한(漢)나라와 더불어
어렵게 지켜졌으며, 당나라 때의 패수(浿水)이다. 도읍지가 있던 서경(西京)에는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다. 백제국의 북쪽 경계에는 패수(浿水)가 있었고, 패수를 예성강(禮成江)이라 하며, 일명
임진강(臨津江), 대동강(大同江)이라고도 부른다......
★ 삼국사기에는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라고 하여,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라고 하고, 이곳에
이르면 미추홀(彌鄒忽)이며, 미추홀은 즉 지금의 조선의 인천(仁川)이라고 되어있다. 한반도에
있는 인천(仁川)이 미추홀(彌鄒忽)이 아니라,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는 곳이 조선의
인천이며, 이곳이 미추홀(彌鄒忽)이라는 것이다.
※ 패수현(浿水縣)은 한(漢)나라가 두었던 패수(浿水)의 이름이며, 조선(朝鮮) 압록강(鴨綠江) 남쪽
물가에 있던 곳이 의주(義州)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한나라 때 요동(遼東)에 있던 낙랑군
(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여기서 의주(義州)의 주위에 있는 곳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고
했는데, 의주(義州)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동쪽이다. 즉 의주(義州)의 주변에서 샛강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鴨綠江)이다.
※ 압록강(鴨綠江) 일대를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부터 낙랑군(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는데, 이때의 낙랑군은 하남성 낙양(洛陽)에 있었다.
※ 갑여산(甲如山)은 갑산(甲山)으로 산동성 치천현(淄川縣) 西南30리로 되어있다.
※ 탕정군(湯井郡)은 탕산(湯山)으로, 섬서성 서경(西京)으로 경조(京兆) 완평현(宛平縣) 북쪽이라
했다. 그리고 소탕산(小湯山)의 남쪽에는 평양성(平壤城)이 가운데 있는 탕천(湯泉)이라고
되어있다.
※ 옥산성(玉山城)은 옥산(玉山)으로 직예성(直隸省) 만성현(滿城縣) 북쪽 15리로 되어있다.
한편 옥산(玉山)은 주(周)나라 때까지 서왕모(西王母)가 살고있던 곳으로 숙주(肅州), 즉 감숙성
주천현(酒泉縣ㆍ郡) 西70리로 되어있다. 또한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산록이며,
이곳에 염전산(鹽田山)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백주(白州)는 한나라 때 남주(南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백주(白州)라 했다. 그후 다시 지명을
남창군(南昌郡)이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만현(萬縣) 서쪽으로 되어있다.
※ 노주(路州)는 노현(路縣)으로, 한나라가 두었던 곳인데, 섬서성 서경(西京)인 경조(京兆)로
통하는 현(縣)으로서 동쪽 8리라고 되어있다.
※ 진주(眞州)는 사천성 무현(茂縣) 西北. 일면 진부(眞符).
※ 양주(陽州)는 양현(陽縣)으로 주나라 때의 양국(陽國)이다. 한나라 때는 양현(陽縣)이며,
옛 성(城)이 있던 곳은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東南15리이다. 수나라가 도읍지를 옮겨
홍동현(洪洞縣)에서 다스리다가 이름을 고쳐 홍동(洪洞)이라 했다.
※ 황주(黃州)는 수나라가 이름을 고쳐 옥주(玉州)라 했다.
이곳은 옛날에 다스리던 곳이 호북성 황피현(黃陂縣) 동쪽이다. 수나라 때 이름을 고쳐
영안군(永安郡)이라 했다가, 다시 제안군(齊安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고쳐 황주(黃州)라 한 곳은
호북성 황강현(黃岡縣)이며, 원나라 때에는 고조선이 있던 서경(西京)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 과주(過州)는 과(過)나라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산동성 액현(掖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 경주(慶州)는 수나라 때 다시 찾아 홍화군(弘化郡)이라 했다. 당나라 때에는 안화군(安化郡)이라
했다가 다시 순화군(順化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찾아 경주(慶州)라 했으나, 송나라는 경주안화군
(慶州安化郡)이라 했다. 그후 승격시켜 경양부(慶陽府)라 했는데, 그곳은 감숙성 경양현
(慶陽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주(肅州)는 감숙성 예천군(醴泉郡ㆍ縣)임.
※ 경성(京城)은 강소성 진강현(鎭江縣)에서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천(利川)은 이천현(利川縣)으로, 본래 만이(蠻夷)의 땅을 말한다. 원나라, 명나라때 다스리던
곳이며, 청나라 때 이름을 고쳐 이천현(利川縣)이라 했는데, 이곳은 호북성 시남부(施南府)라 했다.
이곳이 속한 곳은 지금의 호북성 형남(荊南)의 길이다.
※ 삼한(三韓)은 주무왕(周武王)의 아들 대부한만(大夫韓万)과 성왕(成王)의 동생 진당숙우
(晉唐叔虞)가 제후왕 때 합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후 주(周)나라 말기 진(晋)나라에서 한(韓)ㆍ
위(魏)ㆍ 조(趙) 나라가 독립하여 세운 나라가 삼한(三韓)이다.
★조(趙)나라는 산서성 조성현(趙城縣) 西南에 도읍했다. 이곳은 산서성 태원현(太原縣) 북쪽이다.
★위(魏)나라는 하남성 낙양(洛陽)에 도읍했다.
★한(韓)나라는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東南으로, 한(漢)나라 때 삼한(三韓)의 땅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 적고 있다. 다시말해 진(晋)나라가 한(韓)이며, 위(魏)ㆍ조(趙)나라도
같다. 그후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들어와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남쪽 18리에 도읍했다.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BC.425∼402년) 23년 진(晋)나라에서 한(韓)ㆍ위(魏)ㆍ조(趙) 나라가
나누어진 것이 삼한(三韓)이며, 평양(平陽)에 도읍한 곳은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에서 다스렸다.
그후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옮겨졌으나, 구한(九韓), 즉 아홉의 한국(韓國)으로 되었다가
진(秦)나라 때 망했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서 한(韓:三韓)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AD.537년) 17년 癸酉二月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황룡사(皇龍寺)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울주(蔚州)인 곡포(谷浦)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하곡현(河曲縣)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에 의하면,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東南7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로 황룡사는 산서성 하곡현 東南70리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연산(連山)은 연주(連州)로서,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隋)나라 때는 연현(連縣)이라 했으며, 남조(南朝) 때 양(梁)나라가 양산군(陽山郡)이라 했다.
수나라는 양산군(陽山郡)을 파하고 연주(連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연산군(連山郡)이라 하다가
연주(連州)로 고쳤다. 송(宋)나라 때 와서 연주연산군(連州連山郡)이라 하다가, 원나라 때 승격시켜
연주(連州)라고 했다. 청(淸)나라 때는 직예주(直隸州)라 했다. 이곳은 사천성 균연현(筠連縣)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한편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이라고 했는데, 두양현(杜陽縣)은 호남성
침주( 州)이며, 이곳은 호남성 형양(衡陽)의 길목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連山)에
있는 연주(連州)는 지금의 호남성 침주( 州)임을 나타내고 있다.
※ 황산군(黃山郡)은 황산궁(黃山宮)으로, 한나라 혜제(惠帝) 때 세운 곳으로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西南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황산군(黃山郡)은 황산(黃山)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75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① 섬서성 무공현(武功縣) 북쪽.
② 산서성 호관현(壺關縣) 남쪽 28리.
③ 하남성 급현(汲縣) 西北10리.
④ 산동성 액현(掖縣).
⑤ 하남성 확산현(確山縣) 東南.
⑥ 강소성 강음현(江陰縣) 북군산(北君山) 北5리.
⑦ 강소성 무진현(武進縣) 西北70리.
⑧ 안휘성 흡현( 縣) 西北.
⑨ 안휘성 합비현(合肥縣) 東129리.
⑩ 호남성 안향현(安鄕縣) 北60리.
⑪ 절강성 여항현(餘杭縣) 西南25리.
⑫ 운남성 여강현(麗江縣) 西2리
★ 백제의 계백장군과 당나라 소정방, 그리고 신라군이 맞서 싸운 곳이 황산(黃山)의 들이라고
했는데, 그럼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산은 과연 어느 곳인지,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케 한다.
※ 평주(平州)는 진(晋)나라 때 나누어 둔 유주(幽州)라 했다. 이곳은 전 연(燕)나라 때 하북성
처용현(處龍縣)에서 다스려졌으며, 양평(襄平)이라고 되어있다. 후일에 지명을 옮겨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 동쪽 45리라고 적고 있다.
※ 원주(原州) 흥법사(興法寺)는 감숙성 고원현(高原縣)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외에 고려태조 왕건 때의 지명을 총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위주(爲州).
② 삼문산(三門山).
③ 삼능산(三能山).
④ 금산(金山)은 7군데나 된다.
⑤ 금산사(金山寺)는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北이다.
⑥ 지리산(地理山).
⑦ 무주(武州)는 백제 땅으로, 호남성 상덕현(常德縣)과 산서성, 그리고 감숙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⑧ 전주(全州)는 광서성 계림(桂林)이다.
⑨ 공산(公山)은 문산(文山)으로,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복건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⑩ 고주현(故州縣).
⑪ 계림( 林)은 옛 신라의 이름이며,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9년에 시림(始林)이라 했으며,
감숙성 성현(成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⑫ 순주(巡州)는 서경(西京)에 있는 순주진(巡州鎭)이다.
⑬ 기주(基州)는 호북성 종상현(鐘祥縣) 남쪽이다.
⑭ 강주(剛州)는 강현(剛縣)으로,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東北35리이며, 진(晋)나라 때의
강평현(剛平縣)이다.
⑮ 가은현(加恩縣). 고창군(古昌郡). 모산성(牟山城)은 백제 땅으로, 산동성 모평현(牟平縣)
東北3리이다.
현도주(玄 州)는 서경(西京). 범주(犯州). 서천축(西天竺).
신흥사(新興寺)는 신흥군(新興郡)에 있으며, 이곳은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3리.
흥법사(興法寺), 세달사(世達寺), 흥교사(興敎寺), 흥선사(興善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50리.
하주(下州). 목포(木浦). 도산성(島山城). 예산현(禮山縣). 대흥사(大興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오관산(五冠山). 배산성(拜山城). 부산(負山). 탕정군(湯井郡). 벽진군(碧珍郡). 곡성(谷城). 곡죽령(谷竹嶺). 진국성(鎭國城)은 진국군(鎭國郡)으로, 섬서성 화현(華縣).
통덕진(通德鎭). 흥덕진(興德鎭)은 흥덕현(興德縣)으로, 광서성 흥업현(興業縣) 南.
아차성(阿次城). 재암성(載巖城). 병산(甁山). 동주군(東州郡). 안수진(安水鎭). 능도(陵島).
연주(連州)는 연산(連山)으로, 사천성 균연현(筠連縣) 경계.
저산도(猪山島). 대우도(大牛島). 혹도(鵠島). 영청현(永淸縣) 혜산성( 山城). 아불진(阿弗鎭).
성주진(省州鎭).수완성(修完城). 예성강(禮成江). 양주(楊州), 천왕사(天王寺). 개태사(開泰寺).
탐라국(耽羅國). 선교사(禪敎寺). 백성군(白城郡). 외주(外州). 죽주(竹州). 당현(唐縣). 괴양(槐壤).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는 봉주(峯州)이며, 섬서성 약양현(略陽縣).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50리 번천(樊川) 北.
이천(利川). 치악산(雉岳山). 미리사(美理寺). 성산진(星山陳). 마리성(馬利城). 청천강(淸川江).
저족성(猪足城). 성천성( 川城). 부약성(夫若城). 거성(居城). 내성현(奈城縣). 악곡성(岳谷城).
어진현(御珍縣). 울도현(鬱島縣). 의성부(義城府). 주천현(酒泉縣)은 감숙성.
진보성(眞寶城). 한도강(恨島江) 등.
모두 합쳐 148개소의 지명과 성(城), 그리고 절과 강(江)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태조왕건과 궁예(弓裔), 견훤(甄萱) 등이 활동한 지역과 강역 등을 보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중국에는 많은 지명을
옮기고 바꾸고 없애버리는 바람에, 더 많은 고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타나
있는 지명과 강역, 현군(縣郡), 그리고 절과 강(江) 등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의 혈통과 활동무대가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국대륙임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특히 궁예(弓裔)가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궁예(弓裔)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
※ 삼국사기 열전 제 10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사람이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AD.856∼859년)의 빈(嬪)의 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날 때 집 위로
흰빛이 무지개처럼 길게 하늘로 향한 것을 본 관리가 말하기를, 5월 5일에 태어날 때 이가 나
있었고, 연기같은 이상한 빛이 있었으므로 장차 나라에 불리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중사(中使)라는 관리를 시켜 궁예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는 궁예를 취하여 강보에 싸
다락에서 아래로 던져버렸다. 이때 유모가 궁예를 밑에서 받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궁예의 한
눈을 찔렀는데, 그대로 안고 도망쳤다. 궁예는 이때부터 한 눈을 실명한 채 10여 세가 되었는데,
노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위험스러워, 유모가 노는 것을 중지시켰다. 유모가 나라에서 버린
자식임을 실토하자, 궁예는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모는 이 일이 알려지면 궁예가 위험함을
느끼고 떠나자고 하자, 궁예는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세달사(世達寺)인 흥교사(興敎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36쪽에 의하면,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로 되어있고, 번천(樊川)의 북쪽에는 당나라 때 세운 현장탑(玄 塔)이
있다고 되어있다.
※ 궁예의 출생한 연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필자가 조사해 보니, 후당(後唐) 대순(大順)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연대를 추적하여 고증해본 결과 후당(後唐) 대순(大順)의
연대가 AD.890년이며, 대순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을 계산해 보니, 그가 태어난 해는
AD.865년이었다. 간지(干支)로 따져보면 기유년(己酉年) 음력 5월 5일 생으로 밝혀지는 셈이다.
④ 견훤(甄萱)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 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
※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에서 출생한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상주(尙州)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 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에 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서 농사꾼이라 했다. 들에서 밭갈이를 할 때 아이를 나무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고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李氏)로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힘은 장사였다고 되어있다.
견훤은 당나라 소종(昭宗) 때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기원후 892년이며,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라면, 역시 AD.892년에 해당된다. 고로 견훤은 AD.892년 임자생(壬子生)에 해당된다.
견훤은 진(晋)나라 천복(天福) 원년인 45세 때 멸했는데, 진나라 천복원년은 AD.936년이다.
※ 견훤이 활동한 지역을 살펴보면, 경서남주현(京西南州縣), 진주(珍州), 무주(武州), 공주(公州),
한남군(漢南郡), 완산주(完山州), 금마산(金馬山), 철원(鐵圓), 지리산죽전(地理山竹箭),
대야성(大耶城), 진례성(進禮城), 조물성(曹物城), 거창성(居昌城). 전주(全州), 등주(登州),
성산진(星山陳), 미리사(美理寺), 평양(平壤), 패강지수(浿江之水)란 패강(浿江) 또는 패수(浿水)의
뜻을 말한다.
부산(負山), 금성(金城), 갑여산(甲如山), 조어성(造於城), 연산군(燕山郡), 마리성(馬利城), 경산(京山),
강주(康州), 오강(烏江), 청구(靑丘), 양산(陽山), 악곡성(岳谷城),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순주(順州), 하지현(下枝縣), 예성강(禮成江),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저산도(猪山島),
운주(運州), 웅진(熊津), 금산(金山), 금성(錦城), 양주(楊州), 이천(利川), 황산(黃山), 고주현(故州縣),
진주(眞州) 등이다.
※ 견훤이 태어나서 활동한 지명이 많이 있는데, 지명 중에 한반도에 지금까지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륙백제, 대륙신라에 대한 비정은 간략하게나마 앞서 재야 민족사학자 오재성의 입장을 밝힌 바
있지만 이와 관련해 다음 송준희의 문제제기를 하나 제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 장보고 관련 지명도 >
http://www.coo2.net/files/장보고1.27gif.gif>
< 지명설명 >
- 무령 :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었던 곳
- 정해위 : 청해진 추정
- 법화원 : 정해위 북쪽에 장보고 관련 절인 법화원이 현존
- 진해 : 염장에게 피살당한 장소
- 사, 연수 : 절친한 친구였던 정연 살았던 곳
- 서주 : 장보고 관련 지명
- 무주 : 염장은 무주사람
▣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 ~ 841)에 대한 기록은 두목(杜牧)의 『번천집』과 『당서』에 있었고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1.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고려강역에는 없었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3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수서인용)"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현재는 장보고(? ~ 841)의 기록을 고려땅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으나
김부식(1075 -1151) 은 『삼국사기』김유신전에서 高麗땅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혹자는 김부식이 조사를 아니해서 그럴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장보고가 유명하였다면 소문이 없을
수가 없다. 장보고와 김부식의 사이 연대차이는 310년으로 이순신(1545∼1598)과 현재 우리와의
년대 차이(403년)보다 적다. 만약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없어서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 이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가
반도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은 그만두고 소문도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반도에서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당서』東夷강역 내에 있었을
것이다. 반도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어서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하였는데 중국 기록에는 어디에
있는가 ? 중국 기록에는 『당서』신라 기록에 있고 두목의 『번천집』에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같은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신라본기의 기록은 어떤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을까 ?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영 호징이
쓴 『신라국기』를 인용하였을 것이다. 『당서』에 있다는 것은 『당서』의 동이전을 포함한 『25사』의
동이강역을 벗어나서 장보고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3. 장보고 기록에 있는 지명은 중국에만 있다.
장보고와 관련된 기록에 있는 지명이 중국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무령은 덕안 서쪽에 있고,
서주는 항성 주류성 동쪽에 있고, 泗와 漣水는 동명 백마하 항서 덕안 동쪽에 있고, 진해는 덕안
동쪽에 있다. 武州와 발음이 같은 撫州는 무령 덕안 남쪽에 있으며, 완도는 산동성에 있는데
백제의 諸城城陽의 동쪽에 있다.
4. 淸海鎭은 장보고 때 생긴 이름이 아니라 신라에서 제사 지내는 곳 중의하나.
우리가 청해진하면 장보고의 군사 주둔지로써만 살펴온게 사실이다. 또 문성왕 13년 2월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들을 碧骨郡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주 청해진이 황무지로써
인식되어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군사적인 것이었다면 신라에 있어서는 청해진은 사독제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였으니 예사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것은 상쇠되어도 제사를 지내는 것조차
폐지하겠는가? 또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였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四瀆祭를 지내는 곳이 동쪽으로는 吐只河남쪽으로는 黃山河, 서쪽으로는 웅천하, 북쪽으로는
한산하 그리고 俗離岳推心上助音居西鳥西岳北兄山城淸海鎭에서 지냈다.]고 하여 청해진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정에서 지내는 제사의 풍습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던 청해진이
사독제를 지내던 곳이므로 신라의 본래 관경(영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百濟땅으로
추정되어온 지금의 완도가 제사를 지내는 신라의 신성한 곳이었을까 ? 만약 완도가 청해진이라면
군사적인 유적지 뿐만 아니라 제를 지낸 유적지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
5. 신라방은 반도신라에서 진출한 신라인의 진출지가 아니고 [25사]동이전에있는 사로 신라를
숨기기 위한 명칭
지금까지는 신라방은 반도에서 신라인이 진출하여 모여 사는 거류지로 알려왔으나 동이전 위치
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고 古今지도에 맞추어 보면 사로 신라가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일식 관측지와 5월이전 홍수기록과 일치하는 신라를 감추기 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 신라방으로
왜곡한 것은 아닐까 ?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 것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민족은 고조선 이전 九黎시대 부터 신라 말까지 요의 동쪽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인
것이다.
더 이상 사로 신라를 숨기고 황해 동쪽신라인의 활동으로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6. 전남 완도가 청해진이 아니라 산동성 완도(灣島)나 그 북쪽 靖海衛가 청해진일 가능성이 있다.
청해진을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에서 전라남도 완도로 비정하여 왔는데 청해진의 기록과
일관성을 보이는 곳은 전남완도가 아니라 산동성 완도에 가깝다 할것이다. 그러나 완도보다는
동북쪽에 있는 청해위가 청해진에 가깝지 않은가 ?
靖海衛를 淸海鎭으로 볼수 있는 것은
첫째 衛나 鎭은 군사적인 명칭이다
둘째 靖海衛의 靖海가 淸海鎭의 淸海와 비슷하다.
셋째 정해위 북쪽에는 적산원의 흔적이 있고 자급자족을 할수 있는 전답이 있다고 한다.
넷째 정해위 서쪽에 百濟지명이 있다.
다섯째 정해위 서쪽에 고조선 九黎관계 지명이 있다
이로 미루어 산동성 완도 동북쪽에 있는 정해위가 전남 완도보다 청해진의 조건에 합당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7. 『삼국사기』잡지 地理에 今이란 어느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 현존 필사본의 필사시대는 조선시대인가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단어의 시대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본기에는 유일하게 청해진에만 今이 표기되어 있으나 지리에는 今이란 단어가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15세기 필사본이니 그 때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많은 지명 중에 유일하게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이 있으니 필사시대로 의심을
할수도 있다.
( 주 : 中宗壬申年刊本(世稱正德本)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고려시대인가 ?
『삼국사기』가 김부식시대에 편찬되었으니 이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 주 : 김부식의 『삼국사기』편찬(서기1145년) )
今이란 ? 『삼국사기』가 원본을 인용했으니 원본의 집필시대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참고한 사료가 집필될때 그 시대를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今이란 ? 唐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할때의 당시인가.?
당나라때 당나라 사람인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하였으니 그 시대의 今일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당나라말기 인물인지 아니면 후당의 인물인지 알 수 없으나
장보고 기록으로 보아 후당인물로 보이는데 이때의 今일수도 있다.
왜 유독 청해진만 今이라는 표현을 빌어 완도라고 표현 하였을까 ?
혹여 대륙신라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필한 것은 아닐까 ?
이또한 "삼국사" 정본이 발견될 수 있다면 쉽게 풀릴수 있는 부분 일진데 ~ ~
http://www.coo2.net/files/장보고1.gif>
< 장보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
1.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대입하고 고지도 (송나라대의 우적도 )에
맞추어 본결과 현재의 중국에 동이의 나라 韓이 있고 駟盧, 斯盧, 伯濟가 있으니 바로 신라가
있다는 뜻이다
2. '당서' 동이전 위치배열도에 삽입한 것이 현대 중국지도에는 일치하지만 반도에는 백제 및
高句麗패망때의 지명이 없다는 것이다.
3. 김부식의 高麗에는 '삼국사기'가 쓰여지기 이전에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도 소문도 없다고 한점
4.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당서' 및 杜牧의 '樊川集'에 있는 것이 원본이라는 점
< 결 론 >
왜는 7세기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삼국과 같이 활동하였던 같은 동이족의 일부였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의 합작품으로 우리는 지금 지리적 개념에 혼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장보고 시절 왜구가 출몰하였다고 하는 바 그 왜가 현재의 일본이 아니다는 것이다.
당연히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가 지금의 대만으로 축출당하면서 잃어버린 왜국의 땅을 찾기
위해 양자강 유역으로 다시 진출하려고 하는 수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대만으로 축출을 당하였으니 양자강 유역의 고토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장보고를 더 이상 반도에서 산둥 반도로 진출한 인물로 변경시키지 말고 우리민족의 활동 강역이
대륙임을 떳떳히 밝혀 위대한 동이민족의 후예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이상 송준희 글)
이상에서 제기한 대륙 청해진의 주장은 정용석이 주장하는 대륙사에 대한 문제 제기(「고구려,
백제, 신라의 터전 중원」청노루 刊,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동신刊참조)와 결코
다르지 않다. 가령 정용석은 대륙을 쓸었던 슈퍼메뚜기의 명확한 기록을 인용해 현재의
반도사관에 의하면 남해 차차웅조의 경주 초토화 기록이 같은 연조의 고구려, 백제 기록에는
메뚜기 피해가 전혀 없었으므로 지형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먼저 도착한 불합리성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신라에 2 번의 강력한 화산폭발과 잦은 지진(46회의 소 지진과 10회의 큰 지진;고구려는
19회지진, 백제는14회 지진중 큰 지진은 4회) 발생을 들어 현재의 경주 토함산은 화산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진이 오히려 대륙의 섬서성에 많이 일어났음을 들고 있다. 또 삼국의
가뭄과 홍수를 비교하여 백제만 혹심한 가뭄을 겪고 신라, 고구려는 가뭄이 없었던 사실과
신라만 홍수가 진 기록을 예로 들어 대륙 삼국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린
기록을 근거로 한반도에 그런 기후대는 없으며 일년 중 10개월 동안 서리가 내리고 7개월 동안
눈이 내릴 수 있는 곳은 대륙의 넓은 스텝기후대와 건조기후대라 결론 내리고 있다.
그 외에도 정용석은 하남 위례성이 한반도가 될 수 없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을 누비고 싸웠다고 말한다. 김춘추는 정벌군 총사령관 소정방 밑에서 우이도(嵎夷道) 행군
총관으로 일개 야전군 사단장으로 참여해 애초에 신라가 백제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당고종
이치가 소정방을 정벌책임자로 보내 그를 돕는 일개 사단장 연락만 했으며, 김춘추가 책임을
맡은 우이(嵎夷)라는 지명 역시 서경 요전에 나오는 전통적인 지명으로(命羲仲宅嵎夷曰暘谷)
지금의 산동성 봉래시라 하고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서안의 동쪽 우이라는 곳에서 동에서
서쪽으로 출발했고, 당나라 및 다른 제후국의 지원병은 서쪽에서 동쪽 또는 동남쪽의 백제
땅으로 진군했다고 말한다.
권력의 속성은 어떠한 집권자가 특정한 유형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으면 아랫것들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를 맡고 지속적인 권력향유를 위해 그를 충족시켜줄 아이디어를 내놓는
법이다. 그것이 천리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다음 조박의 상소는 바로 친명사대주의자
이성계에 걸맞는 정책이니 바로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조선호텔 앞에 있는 원구단은
저물어 가는 조선 왕조말기, 청에 대한 조선의 종주권을 배제하기 위해 일본에 의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광무 연호를 선포했던 씁쓸한 곳이다.
*태조1년 조박(趙璞)의 상소: 북벌파를 치고 등장한 반역정권의 수장 친명사대주의자 이성계의
비위를 맞추어 친명 사대주의 사상으로 천자로 자처하여 천제를 지낸 고유의 원구단을 없앨 것을
상소하여 없앰 “원구(圓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이외 참고자료
* 야대에서 고려사를 강하다가 이 극기가 불교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고 말함(유교의 명분을
합리화 함)
야대(夜對)에 나아가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홍경(洪慶)이 중국 민부(쮆府)로부터
《대장경(大藏經)》1부(部)를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렀는데, 왕(王)이 몸소 이를 맞았다.
함에 이르러서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극기(李克基)가 아뢰기를, 이것이 고려[前朝]가 망한
까닭입니다. 창업(創業)한 임금이 비록 바른 것으로써 자손(子孫)에게 가르친다 하더라도 잃지
않는 자가 적거든, 하물며 이렇게 계통을 전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때부터는 숭신(崇信)함이 더욱
두터워지고, 사사(寺社)가 여염(閭閻)의 반(半)이나 되었으며, 전장(田莊)이 관부(官府)보다
많았으며, 세가(世家) 대족(大族)으로부터 종실(宗室)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말계(末季)에 이르러서는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가히 경계할 바입니다. 다행히 우리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여
열에 하나만 남겨 두었고, 노비(奴婢)와 전택(田宅)도 모두 다 관청에 몰입(沒入)시켰으니, 이는
가히 본받을 만합니다.하였다.
*성종 12년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절을 짓고 탑을 쌓았다는 말에 이르러서,
검토관(檢討官)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고려가 불법(不法)을 숭신(崇信)한 것은 전적으로
태조(太祖)가 주창한 것이며, 이 때문에 신돈(辛旽)이 5백 년의 왕업(王業)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세종(世宗)은 성군(聖君)입니다만,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한 것은 끝맺음을 잘못한 것입니다.
다음은 최영을 위시한 북벌파를 물 먹이고 친 명 사대주의를 호도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고려를
도매금으로 난도질할 필요가 있으니까 고려말의 북벌 파 우 왕 정권을 비 정통으로 몰아가는
사관정립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돈의 아들이 우 왕이라는 역사왜곡이다. 대명제국이
있어 조선이 존재한다는 유명조선(有明朝鮮)의 사대주의 사관에 입각하면, 일개 제후국의 우 왕이
감히 천자국인 명을 친다는 것은 역모에 불과하므로, 우 왕의 북벌은 존 중화 사대주의의 유교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다. 참 그럴싸한 논리니까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 역사의 왜곡처럼 왜곡의 역사는 또 다른 역사왜곡을 불러오는 거고. 정도전을
비롯해 이성계 주위에 몰려든 상기 조 박 같은 썩은 유가 지식층이 이성계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잘 인식하고 그의 통치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주는 대가로 권력을 얻었다.
이것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숭유억불의 조선 초기 통치이데올로기였다. 우 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의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조 기록에서 성종이 그 정답을 내렸다. 그리고
북벌파 우 왕을 비롯해 같은 북벌파 최 영과 신 돈을 비틀어보려 한 세종 충녕의 사관을 엿보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종이 야대(夜對)에서 신우, 신돈의 행적을 논하는 대목: 우는 신돈의 아들인가? 에 대한 성종의
대답; 신돈이 신임하는 능우(能祐)란 자가 타인(他人)의 아들을 취하여 신돈의 아들이라 속인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전(傳)을 보건대, 우(禑)는 신돈(辛旽)의 아들이 아닌 것 같다.하니,
현석규가 말하기를,이승손(李承孫)은 세종 조(世宗朝)에 벼슬하고, 세조(世祖)에게 역사(歷仕)하여
이상(貳相)이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우리 증조(曾祖)에게 아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을 적에 이름을 능우(能祐)라는 자가 있어, 신돈이 신임하던 터였는데, 은밀하게
말하기를,「도첨의(都僉議)가 아들을 낳아 나에게 부탁하여 기르게 하였는데, 불행히 죽어서 내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이제 이 아이를 보니 모양이 닮았는데, 이 아이를 받들어, 첨의(僉議)에게
색책(塞責)을 하여야겠다.」하므로, 이승손의 증조(曾祖)가 화(禍)가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도망하였다. 하고 하는데, 이승손은 독실(篤實)하여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부자(父子)가 서로 전(傳)하였으니, 진실로 무언(誣言)이 아닐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승손(李承孫)이 친히 보았다더냐?하니, 현 석규가 말하기를,친히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집에서 대대로 서로 전하는 말이라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능우(能祐)는
타인(他人)의 아들을 취하여 신돈의 아들이라 속인 것이 명백하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1년 4월 고려조에서 태조 이성계를 치하하는 교서: 태조1년 반야를 죽인
이유(반야는 공민왕의 노국공주 인덕왕후를 비롯해, 혜비 이씨, 익비 한씨(노국공주사후 왕비),
정비 안씨, 신비 염씨와 함께 6부인 중 하나로 우왕을 낳았다. 신비와 혜비는 공민왕의 명에
의한 홍륜 등의 강간에 강력 반발해 물리쳤으며 공민왕 사후 머리 깎고 승려가 되었다. 후사가
없던 공민왕은 노국공주 인덕왕후가 산고로 죽자 자주 술에 취하고 김흥경(金興慶), 홍륜(洪倫) 등
미색의 남성과 남색을 즐겼으며, 심지어 홍 륜 한 안(韓安) 등을 불러 왕비들을 강간토록 하고,
후사가 생기면 자기자식으로 삼으려 했다. 마침내 익비 한씨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소식을 전한 내시 최 만생에게 왕비와 동침한 홍 륜과 그 일당을 죽이라 밀지를 내린다. 그러나
최 만생은 거꾸로 홍 륜과 공모해 공민왕을 죽이고 말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아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才)를 기다리게 되며, 만세(萬世)의 공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한이 없는 보수(報酬)를
받게 마련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는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대실(大室)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거의 5백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현릉(玄陵)에게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인도하여 상상(上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임금에게
원망을 돌아가게 하여 마침내 갑인년의 변고를 초래하여 사자(嗣子)가 없게 하였다. 인임(仁任)은
이에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도적질한 계책을 써서, 현릉조(玄陵朝)의 요망스런 중[僧]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로써 거짓으로 현릉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고 일컫고 이를 왕으로
세우니, 현릉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고 했으며,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의 종친(宗親)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인임이 따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했으며,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에
차 있어 햇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禑)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현릉을 장사할 적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으며, 증제(烝祭)를 주관할 적엔 올빼미가 대실(大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했으며, 그가 현릉의 아버지인 의릉(毅陵)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적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과 번개하며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작(爵)을 물려받을 적엔 바람이 조묘(?廟)와
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대실(大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쬎)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禑)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를 죽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없애었는데 사평(司平)의 새 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죽은 후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장사하여 우(禑)의 어미라 하였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룻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萬歲)에
우(禑)가 반야(般若)의 아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우(禑)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마는,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하여 거의 죽음을 당할 뻔 하였으나, 현릉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가 우(禑)는 왕씨(王氏)가 아님을 황제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선뜩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禑)의 아내는 인임(仁任)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으니, 이에 왕씨(王氏)의 흥복(興復)될 희망은 끊어졌다. 인임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었는데, 우(禑)가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징발하여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卿)과 부관(副官) 조민수(曺敏修)가 행군(行軍)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卿)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매여 있다는 계책으로써 깨우쳐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우리 백성들의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살게 한 것이오.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다만
경에게 힘입었소.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에 높았으며, 공명(功名)은
세상에서 뛰어났으나 자랑하지 않았소. 《강목(綱目)》과 《연의(衍義)》를 읽기를 좋아하여
유후(留侯)ㆍ 강후(絳侯)ㆍ 무후(武侯)ㆍ 양공(梁公)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으로, 군사를 돌이켰던 그
즈음에 흥복(興復)을 의논하니, 민수(敏修)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소.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 친척 인임(仁任)과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경(卿)의 의논은
저지시키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총재(?宰)가 되었으니,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일이 한번의 큰 기회를 잃게 되었소. 경은 속으로 견디고 참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공의(公義)로써
민수(敏修)를 개유(開諭)하고, 이에 대간(臺諫)의 인선(人選)을 철저히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켰소. 이에 헌사(憲司)에서 민수를 탐욕이 많아 법을 남용(濫用)했다고 탄핵하여 쳐서
제거하였소.
경은 밤에 생각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 마름과
같이 하며,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조그만 이익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조그만 해로움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며, 언로(言路)를 열어 민정(民情)을 통하게 하고,
일민(逸民)을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소.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奔競)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휘권[鉞]을
주고,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출척(黜陟)을 행하매, 번진(藩鎭)이 감히 구적(寇賊)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감히 백성을 해하지 못하며, 여러 소인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사전(私田)을 여러 도(道)에서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하여, 넉넉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지경으로 올려 놓았소. 규전(圭田)ㆍ 채전(采田)의 법을 채용하여 서울에 벼슬하는
사람에게 전지(田地)를 공급함으로써 군자(君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하게 하니, 관작을
주되 사정(私情)이 아니고, 형벌을 쓰되 노(怒)한 것이 아니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명백하여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함께 보는
바이니, 그 경영해 하는 일이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터전이 아닌 것이 없었소.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으로 보낸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왕위는 자손이
끊어져서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로 꾸몄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위(官位)에 있어 군신(君臣)의 본분(本分)을 지킨다면,
비록 수십 대(代)나 조회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엇이 걱정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싫겠는가? 동자(童子)는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현릉(玄陵)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제사(祭祀)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王氏)의
신자(臣子)에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소. 창(昌)의 외조부(外祖父)인
이임(李琳)이 총재(?宰)로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여, 흉악한 꾀가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신씨(辛氏)의 변고는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발생하게 되었소. 왕씨(王氏)는 이미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만번 죽을 고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소 대의(大義)를 잡아 지켜, 우리 왕씨(王氏)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하니,
덕부(德符)ㆍ 몽주(夢周)ㆍ 용기(湧奇)ㆍ 장수(長壽)ㆍ 석린(石璘)ㆍ 조준(趙浚)ㆍ 박위(朴츂)ㆍ 도전(道傳)
8명의 장수가 서로 따라 도와서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의 정비(定妃)의 뜰에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후사(後嗣)로 삼아, 한 사람도 처형(處刑)하지 않고 새벽에서
조반(朝飯) 때가 되기 전에 16년 동안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제거하였소.
그 인친(姻親)과 지당(支黨)들이 온 나라에 뿌리가 서려 얽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떨어져 면모(面貌)를 고치고 향순(向順)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며, 햇빛은 봄과 같았소. 위로는 31대(代)를 서로 계승하던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千萬億) 대(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열어 놓았으니, 경의 흥복(興復)한 공은
강후(絳後)와 오왕(五王)에게 비길 바가 아니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요,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홀로 도타이 낳았[篤生]으니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바이오.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을 수복하고, 요망스런
중[僧]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하게 하고, 나씨(納氏)을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패퇴시켜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을 겁내게 했는데,
경은 현릉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에 통하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祖宗)에
통하였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대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애(仁愛)하고 지극히 은혜로움은 만백성의 환심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은 이에 현릉의 지우(知遇)를 진실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에 훈공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얼굴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에게
무궁한 세대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오. 아아!
경이 우리의 억조 백성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하게
한 공로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는가?
경이 중흥(中興)의 원신(元臣)이 되어 명망은 배태사(裵太師)와 같으나,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보다 무겁도다! 경륜(經綸)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의 법칙으로 삼고,
준수한 인재를 좌우로 구하여 우리 조정을 무겁게 함으로써, 나의 덕이 적은 사람을 보필하였소.
우리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하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이 만년 동안에 조상의 제사와 함께
제향(祭享)하게 된다면, 나의 덕이 적은 사람도 함께 빛이 있겠소!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忠良)을
법받아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고서, 나의 후사왕(後嗣王)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경사를
누린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포장(褒獎)하고 전지(田地) 1백 결(結)을 내려 주었다.-
조선 태조 이방원의 혈통은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명을 건설한 주원장과 함께 다름 아닌
여진족의 신분으로 대륙과 반도의 왕국을 건설해 제위에 오른 인물로, 두 인물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혈통을 숨긴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킬레스는 반도사관으로 보면 큰 흠이 될 수
있으나 대륙사관으로 시각을 넓혀보면 여진족은 발해의 중심종족이기도 했던 바로 같은
동이족으로 큰 흠이 될 수 없다. 임진왜란때 구원하러 온 이여송이 바로 여진족이었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공자와 사마천이 지나족 존 주 사대주의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그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깎아 내리고 왜곡 필삭 했거니와 일본은 그 중심이 되는 천황가의 혈통을 숨기기 위해 고천원
신화로부터 신무동정으로 해서 2600년 만세일계로 역사를 두 배 길이로 뻥튀기를 하며 위조했다.
어쩌면 인류역사의 본질이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 일상사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에 비해 고려와 조선왕조의 비밀은 약과일 수도 있다. 하긴 여진족의 핏줄을 가진
대명제국의 황제 주원장이 본 마당 대륙에서조차 한(漢)족으로 신분을 숨기는 터에 역시 당시
존중화 사대주의의 반도사관으로 보면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은 경천동지 할 사건임에는
틀림없어서 주원장과 같이 그 혈통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노출된 조선초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병자년에 벌어진 소위 사육신 사건이다.
사육신은 김종서가 문종을 독살했음을 알리고 조선왕조의 혈통과 관련해 역사왜곡에 대한
복잡다단한 역사수탈과 왜곡편찬, 개찬에 전말을 폭로하려던 것이었는데, 사육신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세조는 태종과 김문기, 세종만 알고 있는 왕실 가문의 아킬레스건의 비밀을 알고,
사육신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묻어버린다. 그런데 이성계 가문에는 치명적인
유전병이 있는데 정종, 양녕, 효녕, 문종, 노산군(단종), 일찍 죽은 세조 큰아들 등이 바로 그
희생자들이었다.
세조가 소위 노산군 복위라는 엉터리 대역죄로 변질된 사육신사건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핵심을
알자 세조는 이 사건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말았지만 문종이 독살당하자 노산군은 즉위한 적도
없고 세조에게 손위(遜位)한 적도 없이 비밀리에 신병을 요양하다가 돌연 신병을 비관했는지
내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유전병은 당시 유일하게 왕실의
핵심비밀을 알고있던 김문기도 채 몰랐던 왕실의 흠결사항이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단종애사의 왜곡사는 숙종(숙종24년조)이 왜곡한 것이다. 처음에는
시정기(時政記)로 하였지만 세조의 명으로 노산군 일기를 실록으로 편찬하였고 후세의 숙종이
단종실록으로 개명하여 노산군 일기의 일부인 <유응부가 세조에게 올린 상소>를 삭제했다.
유응부 상소는 계유정난을 극찬한 내용이었다.
(이는 단종 복위의 반역으로 몰고가는 정당성을 주기 위해 삭제한 것) 세조실록에는 어느 곳에도
사육신 용어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붙들려 죽은 사람은 여럿이었고 '사육신'이라는
말은 없었다. 당시 두 살이던 남효온 (南孝溫)이 훗날 '육신전(六臣傳)'을 씀으로써 '사육신'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그 뒤 남 효온 등은 '생육신' (生六臣)이 돼 사육신과 대비되었다.
후세 숙종, 영조, 정조가 자신들에게 필요하고 명분론에 휩싸인 유생들이 절실하게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절의를 명분으로 사육신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세조가 예종에게 바친
훈사(訓辭)를 이용해 오늘의 난신이 후일의 충신이라고 세조가 말했다고 사실을 조작하여
이용하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했다( 見세조 2년 6월 9일 조서) 즉, 사육신이 충신이라는 평가에
대해 세조의 계유정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육신의 비유교적ㆍ반시대적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숙종이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국가가 관리하도록 한 것은
본래 세조의 성덕(聖德)을 빛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여섯 신하를 처벌할 때 이들이
당세에는 난신(亂臣)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했던 세조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비밀을 마지막으로 알았던 세조는 그런 입장에서 말한 충신이 결코 아니었다.
숙종 24년 9월 전현감(前縣監) 신규(申奎)의 상소문은 당시 현실정세 속에서 단종의 양보는
불가피했고 선양(왕위를 물려줌)이 중국의 사례에 못지 않게 훌륭한 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여섯 신하의 변이 뜻밖에 발생하여 세조가 상왕의 은혜에(찬탈이 아니라 선양받은 것)
보답하고자 한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육신들의 음모가 결국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단종 복위와 관련, 사육신이 택한 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집현전 출신으로 유능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한 사육신이 자신들의 계획을 현왕인
세조를 살해함으로써 실현하고자 한 것은 비유교적ㆍ반시대적이라고 지적한다. 즉, 연산군ㆍ광해군과
같은 소위 포악한 군주들도 폐위와 반정 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 숙종이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서원까지 내린 것은 세조의 영명함과 성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당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은 침체된 사회분위기와
국정을 일대 쇄신하기 위해 여러 시책들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정신적ㆍ 사상적으로 절의와
명분이 강조됐는데 사육신은 그 대표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사육신의
내막은 왕실의 비밀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럼 그 내막을 알아보자.
다음은 고려 현종(顯宗)인 지웅의 친구이자 이성계를 도운 김목경의 손자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김문기는 고려 왕조의 비밀과 이성계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김목경의
가문 혈손으로 태종 이방원이 장차 후일 충녕의 보필자로 낙점하여 충녕의 어린 시절부터 충녕의
학우로 인연 맺게 하여 충녕의 측근으로 극비명령을 실행한 사람으로 충녕 사후 세조때 이
비밀을 밝히려다 4육신의 병자년 사건에 얽혀져 죽은 사람이다. 필자와 충녕 세종의 학우이자
측근 신료 김문기의 21대손 김기태와 나눈 대화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2001.12.16일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와 두어 시간 통화한 대화)
안원전: 지금 춘추는 어떻게 되시고 생업은 뭘로 해 오셨습니까.
김기태: 44년생으로 농협에도 근무했고 농사도 짓고 두루두루 했습니다.
안원전: 가문의 전후관계를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기태: 우리 가문은 21대손이라 칭하지 않고 장손으로만 따져 10대손입니다. 맞 장손만 따지죠.
전 조부 사후 2년 뒤 태어났으며, 아버님 몰래 어머님으로부터 가문의 비밀을 듣게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안원전: 유훈을 받은게 정확히 몇 살때입니까.
김기태: 13살때입니다.
안원전: 8살때라고 한 것은 무업니까.
김기태: 그건 잘못된 겁니다.
안원전: 왕건 도종을 우리가 알고있는 도선이라 하셨는데...
김기태: 도선국사는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에 대한 기록은 모두 거짓말 역사입니다. 왕건은
대륙에 가 있다가 들어와 중국의 혜능 등 고승의 일화를 듣고 흉내내고자 했습니다.
안원전: 고려사의 기록이 전부 날조된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저도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오는 것 만 봐도 잘 알 수 있고. 그런데, 가문에서 전해지는 선생이
말하는 대진국은 대조영의 대진국 발해와 어떻게 됩니까.
김기태: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대진국의 시조는 온조왕이고, 동진국의 시조는 동명왕입니다.
안원전: 세종이 제일 겁낸 것이 가야가 지나 한족이라는 사실이라 했는데 제가 보기엔 세종이
같은 동이족인 소호금천씨의 후예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 후손-왕망의 후예들이 후한 광무제를
피해 들어와 9가야 알사건과 김수로왕 구지가 사건을 지나 한족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요.
김기태:...전해준 글을 읽어보시죠...
안원전: 황제를 내세운 친 중화사관 중심이 아닌가 하는데...
김기태: 안선생님은 좁은 테두리인 민족에 빠질 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문의 역사를
내려받은 것 뿐이고 제 비밀을 전 할 분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기자일 꺼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바로 그 분이 안 선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원전: 조선왕조의 핵심키인 김문기 가문의 비밀이므로 있는대로 전하겠습니다. 밑도 끝도없이
말하면 황당해 하겠죠.
김기태: 정신문화연구원 모 교수와 문화일보를 비롯한 언론계 인사들에게 말했더니
미친 놈 취급하는지 일언반구도 없습디다.
안원전: 대웅은 어딥니까. 또 개루왕은 누굽니까
김기태: 대웅은 백제고 남이국은 남쪽에 있던 왜입니다. 여진족이 세운게 동진이며, 개루왕은
의자왕입니다.
이외 한시간 이상 김문기 선생의 모동 이야기 및 적지않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지면상 생략...(2001년 12월16일 양력)
조선왕조의 비밀을 알고 있던 유일한 증거자 김문기 가문의 후손 직계후손 김기태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500년 전부터 장손(손자에서 손자로)에게만 비밀히 지켜온 유훈이 저(9대)에게까지 내려와,
연구하니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고,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알려진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알리려 합니다. 이는 연구한 것이 아닌, 그저 영적인 지시에 의해 쓰여졌을 뿐입니다.
절대 개인의 논리가 아님을 밝힙니다. 잘못된 역사를 알리고 진실된 하늘의 역사를 공개하여
천도를 행하도록 하는 이 역사는 연구한 것이 아니라 천신 님들이 내게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고, 지금도 계속 깨달음을 주시고 계십니다. 제가 유훈을 받은 것은 8살 때이고 약 50 여 년
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약 3년 전, 불현 듯 생각났고, 신기하게도 그 많은 유훈의 내용들이
갑자기 생생히 떠오르며 그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라면 도저히 못했을
엄청난 진실들이 쏟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할아버님들이 제게 들어오시게 되어 직접 제가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어디를 가라면 가고, 또 그곳에서 여기가
이러한데, 역사는 이렇게 써있다.
하시고, 다른 할아버님들께서도 들어와 많은 것을 얘기해 주십니다. 하지만 아직 공개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들이 대부분 입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충치하나 없던 치아가 모두 헐어 빠져나가는
고통이 있지만 제 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繼勳
살아서도,
죽어 혼(魂)이 되어서도,
내 무덤을 지켜라!
계 훈
1. 나의 핏줄은 장손뿐이다
1. 자식은 하나만 낳아라
1. 벼슬을 하지 마라
1. 과거를 보지 마라
1. 유학(儒學)은 하지 마라
1. 문자(文字)를 만들지 마라
1. 생업(生業)은 농(農)을 하라
1. 장손은 모동(茅東)을 떠나지 마라
1. 장손은 문상(問喪)을 가지 마라
1. 장손은 매년 자식중에 하나를 한성으로 보내라
1. 모동(茅東)은 나의 영지(領地)이며 영지(靈地)이다
1. 동지들의 시신(屍身)을 거두어라
1. 내 혼(魂)과 장손들의 혼(魂)은 연결(連結)되어 있다
1. 장손은 나의 혼령(魂靈)이 보호(保護)한다.
1. 내 무덤을 지켜라!
- 다음편에 계속 –
[출처] 110. 왕조의 비밀 3 - 7|작성자 집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