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구원론
제7장 칭의-3
제4절 칭의의 개념-1
칭의는 ‘의롭다고 불러준다.’라는 뜻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시는 법정 행위입니다. 판결이라는 말입니다. 무죄라는 것은 그가 한 행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죄인이 범한 행위를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칭의의 판결은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다고 인정해주는 것,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우리가 죄 없다고 선고하시며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신 것뿐입니다.
[사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도말은 칠해서 가린다는 뜻입니다. 흠이 있는 것 위에 덧칠해서 흠을 가리는 것이니까 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덧칠을 해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도말해 주시고는 덧칠 속에 있는 죄는 보지도 않으십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아예 죄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칭의의 개념은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1) 칭의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범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그 진노의 결과는 이생에서의 고난으로도 나타나지만, 더욱 크게는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에 대해서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죄인이 의롭다는 판결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永罰에 떨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영벌에서 구원받을 칭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구원받기 전의 죄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을 아시니까 당신의 진노를 사랑으로 억누르시고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마음으로 죄인을 부르셔서 의롭다고 선고하시겠다는 작정을 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셔서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고 판결을 하십니다. 죄인은 의롭다고 여겨져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라는 복음성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은 죄인이 칭의의 선고를 받아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2) 칭의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칭의가 법적인 선언이라는 말은 칭의가 하나님의 판결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판사가 여러 정황을 종합해서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지 그 죄인이 행한 죄 자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한 사람이 정당방위로 살인을 했다고 증명되었을 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살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판결이지 살인행위 자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칭의도 그렇게 죄인에게 죄 없다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고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법정 용어라고 합니다.
이 선언이 없으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법정 변호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 없다고 변호하시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고하셔야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모사라고 했습니다.
모사라는 말은 권모술수로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어로는 충고하는 사람, 권면하는 사람, 조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Counselor로 번역했는데, 상담자, 또는 법정 변호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상담사와는 달리 우리가 상담한 내용, 즉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한 내용을 성부와 성령님께 외에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무엇이든지 의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담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법정 변호사는 법정에 나가서 판사 앞에서 죄인을 변호하는 변호사입니다.
예수님은 법정 변호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서 있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우리 죗값으로 피 흘리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보혈을 믿으니까 무죄라고 변호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무죄를 판단하시는 근거는 오직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법정 변호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증언하시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증언을 모두, 언제나 받아들여서 우리가 의롭다고 선고하십니다.
3) 칭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납니다.
칭의는 우리 평생에서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단 한 번만 받는 판결입니다. 그 한 번의 판결로 우리는 영원토록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모든 죄에 해당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죄 한 가지씩에만 효력이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의롭다는 선고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지은 죄를 모두 불러내서 일일이 속죄를 받아야 하고, 또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받고 다시 칭의를 선고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지 않다고 기록했습니다.
[히히브리서 10:10,11]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보혈로 한 번 제사 드린 것으로 믿는 자들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말씀이니까, 그 한 번의 제사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해 전부 속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한 번의 제사로 다 사하시는 것은 우리가 칭의의 선고도 한 번만 받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4)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으며,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는 어떤 방법으로도 칭의를 받는 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의 죗값으로 흘려야 할 피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선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는 이것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에 죄인의 어떤 조건도 참고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돈이 많든 적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유명하든 유명하지 못하든, 결정적으로는 착하든 악하든, 그 어떤 것도 구원하시는 조건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사실 우리가 의롭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죄인이라는 것만이 구원받는 조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으로 보시는 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자신을 위한 속죄의 피라는 것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죄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영혼 속에 넣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비기독교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이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점이며, 기독교가 독선적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가장 우월한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와 비교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기독교 외에 세상의 어느 종교도 남의 힘을 빌려서 구원받는 종교는 없습니다. 모두가 스스로 노력해서, 선행을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세상 도덕과 윤리에 따라 생활하든지 하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自力 종교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내 힘과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공로를 덧입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아닌 남–他人의 힘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타력 종교라고 합니다. 내 힘으로 받는 것이 아니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비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들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비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열심히 빌고 선행을 해도 구원받았는지를 알 수 없는데, 기독교인들은 그냥 믿기만 하고서는 구원받았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