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석(牛衣)
이제는 덕석이란 말을 아는 이도 점점 적어져간다. 덕석을 덮고 있는 소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 이젠 그것을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스치듯 지나가는 TV화면에 비쳐진 어느 시골의 황소를 보면서 불현듯 덕석을 생각하게 된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봄부터 가장 큰 일손이 되어주었던 누렁이도 휴식을 얻게 된다. 비로소 머슴처럼 일해준 누렁이에게 겨울 동안의 쉼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한 누렁이의 겨울나기를 위해서 농부가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덕석이다. 짚으로 멍석처럼 짜서 소등에 덮고 벗겨지지 않도록 가슴과 복부에 끈을 달아내어 묶어준다. 이름하여 쇠덕석(牛衣)이다. 요즘 애완견들을 치장시키는 옷이 몇 만원씩 하는 것에 비할 수 없겠지만 덕석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주인으로부터 하사받는 유일한 누렁이의 겨울채비다. 그 넓은 소등에 덮힌 덕석 한 장이 얼마나 소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한편 인간의 마음이 작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누렁이가 추울까 하여 덕석을 만들어 덮어줄 수 있는 마음은 우리네의 인간성이 아닐까.
비록 작은 배려지만 함께 사는 짐승이고, 한 가정의 한해살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져주는 누렁이에 대한 마음이 아닐까. 털옷을 입고 있는 짐승이 다른 옷이 필요하랴만 자신들이 추우니 누렁이도 추우리라 생각하는 것은 우리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이리라.
하기사, 추운 겨울날 아침 부엌과 이웃해 있는 외양간에서 홀로 밤을 지내고 주인의 인기척에 슬며시 내민 주둥이를 보면 춥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난히도 큰 콧구멍으로 뿜어내는 김은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하얗게 피어오른다. 그런가 하면 밤새 뿜어낸 김은 주둥이 주변의 긴 털들과 눈썹에 매달려서 하얀 서릿발되어 얼어붙었다. 누렁이는 춥다는 듯 주인의 인기척에 고개를 내민 채 흔들어댄다. 큰 눈을 꿈뻑거리며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일어난 주인의 마음에 미안함을 더하게 한다.
해서 농심(農心)은 일찌감치 볏짚으로 덕석을 만들어 녀석의 잔등에 덮어주었던 것이다. 허나, 짚으로 엮은 덕석 한 장을 얻어 덮은 녀석은 말이 없다. 싫다는 것인지, 좋다는 것인지. 그저 변함없이 주인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행동만 한다. 그래도, 농부에게는 가장 큰 재산이기에 아끼는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짚으로 덕석을 엮으면서 주인이 가지는 마음이 어떤 것이겠는가. 비록 돈이야 드는 것이 없어도 누렁이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리라.
요즘 애완견의 패션을 보면 화려하고,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패션이다. 하지만 누렁이가 덮고 있는 덕석은 그렇게 예쁘지도 값이 나가지도 않는다. 허나 그것은 농부의 깊은 마음을 담아 만들어준 것이기에 누렁이도 귀찮지만 마다치 않는다. 덕석에 담긴 누렁이를 향한 농부의 마음은 그렇게 애잔하다. 해서, 농부는 이른 아침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외양간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잘 잤니?” 그것도 속으로만 묻는다. 누렁이는 그런 농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주인의 인기척에 주둥이를 내밀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무언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리라.
비록 돈 안 드는 덕석 한 장이지만 주인이 아껴주는 마음이 고마워선가? 누렁이는 큰 몸을 움직여 주인에게 고마워하는 표현을 한다. 겨우 할 수 있는 표현이란게 씩씩거리며 머리를 아래위로 흔드는 것이지만···. 가끔 혀를 내밀어 주인의 마음을 더 오래 머무르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햇살이 좋은 날이면 농부는 양지바른 곳에 녀석을 내매고 덕석을 벗긴다. 그리곤 글개로 등을 긁어준다. 누렁이는 꼼짝도 않은 채 허리를 길게 느리면서 시원하다는 표현을 한다. 다 긁었다 싶으면 주인은 누렁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친다. “시원하냐?” 그리고 다시 덕석을 씌워준다. 그 마음에 고맙다는 듯 누렁이는 “음메~” 한다. 누렁이의 응답은 조금 더 여유있는 풍경을 연상케 한다. 이 땅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느끼게 한다. <2004.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