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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일론과 에테르 |
어항을 보면 물 속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공기발생기를 통해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구슬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구슬이 공기로 되어 있는 걸 안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를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대기 중의 공기와 성분은 다를 것이 없건만 그 공기가 어항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우리는 공기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가 물고기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인간이 공기를 마시듯이 물을 마시고 새가 날개짓을 하듯이 지느러미를 퍼득거린다. 우리가 한평생 바다 속에서만 사는 어종이라면, 인간이 공기의 존재에 무뎌지듯이 물의 존재에 무뎌질 것이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듯이, 물의 흐름을 느끼고서야 물의 존재를 이따금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우리 눈앞에 어디선가 동그란 풍선 같은 것이 나타나서 흔들거리면서 위로 올라간다고 해보자. 그 표면은 반들반들해서 우리의 툭 튀어나온 눈이 반사되어 보일 정도이다. 가슴지느러미로 그 풍선을 건드려 보지만 모양은 찌그러져도 터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공기방울은 물고기가 된 우리에게 하나의 실체라는 인상으로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평생 단 한번도 해수면위로 올라가보지 못한 우리는 공기방울의 정체가 본래 형태가 없는 기체라는 사실을 ― 물고기 과학자가 있어 그 성분을 분석해보기 전에는 ― 알기 어려울 것이다. "물고기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공수증(恐水症)이 있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컬트화학을 보는 순간, 나는 인간이 한 마리 물고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또 하나의 질문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나는 앞에서 아누가 물질계의 궁극원자임을 다양한 검토를 통해 주장해왔다. 그런데 궁극원자라고 하는 아누는 왜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는가? 스파릴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물질계의 궁극 원자를 조사해보자. 이 원자에는 나선 혹은 철사 같은 것이 열 개 있는데, 나란히 있지만 결코 서로 접촉하지는 않는다. 원자에서 이 나선을 하나 끄집어내어 펴면 완전한 원형이 되는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코일 형태의 스프링이 된다. 1,680바퀴 회전하는 코일로 이루어진 스프링이다. 이 코일 하나하나를 제1스파릴라(전체를 나타낼 때는 제1스파릴래)라고 부른다. 이 제1스파릴래를 펴 늘이면 훨씬 더 큰 원이 된다. 각각의 코일 역시 그 자체가 더 작은 코일 형태의 스프링이다. 이것을 제2스파릴라(스파릴래)라고 부른다. 이렇게 제7스파릴라(스파릴래)까지 존재한다. 각각은 앞의 것보다 더 정묘하며, 그 축이 앞의 것과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고리들을 펴는 과정을 계속 진행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줄 위에 있는 진주들처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을 보게 된다. 이 점들은 너무나 작아서 궁극의 원자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백만 개의 점이 필요하다. 이 점들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물질의 기초인 것 같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위에서 하나의 나선은 1,680개의 코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 하나하나의 코일(제1스파릴라)은 7개의 더 작은 코일(제2스파릴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스파릴라는 또 다시 7개의 제3스파릴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7스파릴라는 7개의 작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들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보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초이다. 하나의 아누 속에는 이러한 점들이 약 140억 개가 있다. 이 작은 점들은 모든 물질의 토대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물질이 아니다. 오컬트화학에서는 이 점들을 거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단위들은 모두가 똑같으며, 모양은 구형(球形)이고 그 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이들은 모든 물질의 토대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물질이 아니다. 이들은 덩어리가 아니라 거품들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이 거품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비누방울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비누방울은 얇은 막을 가지며 이 막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면서, 막 자체가 내면과 외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누의 스파릴래를 구성하는 거품은 공기 중의 거품보다는 차라리 물 속에서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거품과 비슷하다. 물 속의 거품은 단지 하나의 면만 가지고 있다. 즉 거품 속에 담긴 공기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물의 면(面)만 있는 것이다. 물 속의 거품이 물이 아니고 물이 없는 지점인 것처럼, 모든 물질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는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이다. 즉 코일론이 없는 유일한 지점이며, 코일론 안에서 떠도는 무(無)의 점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간-거품의 내부는 우리의 눈에는 하나의 절대공(absolute void)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어항 속의 공기방울처럼, 스파릴래를 이루는 거품도 코일론(Koilon)이라고 부르는 바다 속에 생겨난 공기방울이다. 우리가 소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코일론이다.
"이 물질을 코일론이라 부르자. 이것은 우리가 소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라프라크리티 혹은 '모물질(母-物質)'이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우주들의 총합이듯이, 코일론은 우리가 속하는 특정한 우주의 총합이다. 즉 우리 태양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태양을 포함하는 광대한 단일체다. 코일론과 물라프라크리티 사이에는 아주 많은 단계들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수를 추정하거나 그 단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6)
물 속의 공기방울이 물이 아니라 물이 없는 영역인 것처럼, 아누를 이루는 거품도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물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거품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 거품이다. 역으로 우리는 코일론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본질이 거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그것,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없다고(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있는 것이다. 코일론은 비현현의 상태여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코일론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때 과학자들이 가정하였던 에테르(ether)란 개념이다. 신비학의 우주론에서는 에테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에테르(ether), 에테르(aether), 아스트랄광(astral light), 아카샤(akasha)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코일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에테르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테르란 개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공간을 충만(Fullness)을 의미하는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렀다. 진공을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머리 속에는 힘을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에테르란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뉴튼 역학은 에테르의 가정 없이도 천체의 운행을 아주 잘 기술하였지만, 정작 뉴튼 자신은 에테르의 존재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한편 음파나 수면파와 같은 파동은 반드시 매질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토마스 영(1791∼1865)의 이중 슬릿 실험과 오거스틴 프레넬(1788∼1827)의 빛의 회절 이론, 장 푸코(1819∼1868)의 물 속에서의 광속도 측정, 그리고 제임스 맥스웰(1832∼1879)의 전자기 이론에 이어 헤르츠(1857∼1894)가 1888년에 실험적으로 전자기파의 검증에 성공하는 등 빛이 파동성을 지닌 전자기파인 것으로 밝혀지자, 빛을 전달하는 매질로서 에테르의 존재가 상정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에테르의 존재는, 에테르의 존재를 그토록 확인하고자 열망하였던 알버트 마이켈슨과 에드워드 몰리의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약 30㎞/sec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은 다시 다른 별들에 대해 운동을 하고 있으며, 태양계 전체는 약 250㎞/sec의 속도로 은하의 핵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하고 지구가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지구에서 보았을 때는 에테르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이 에테르의 흐름을 에테르 유동이라고 하자. 그런데 어떤 물체가 매질 속을 움직일 때에는 저항을 받게 된다. 물 속에서 수영하거나 공기 중에서 뜀박질을 할 때 물과 공기의 저항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열어 놓으면 그 효과를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테르라는 매질이 존재한다면, 비록 우리가 그 효과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빛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1887년에 마이켈슨과 몰리는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빛의 속도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실험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광 간섭계의 나트륨 등에서 나온 빛이 거울을 통해 서로 수직으로 갈라져, 일부 광선은 에테르 유동에 대해서 수직방향으로, 나머지 광선은 에테르 유동과 같은 방향으로 동일한 거리를 일주하게끔 한 다음, 이 두 갈래의 빛이 하나로 합쳐지게 하였다. 일주하는 데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난다면 합쳐진 두 개의 빛은 간섭무늬를 만들어낼 것이다. 따라서 실험장치의 방향을 돌려가면서 실험한다면, 어느 한 광선의 방향이 에테르 유동과 수직을 이룰 때 간섭효과는 최대가 되고, 두 광선 모두 에테르 유동과 45도의 각도를 이룰 때 최소의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따라서 장치가 회전함에 따라 간섭으로 인한 주름무늬는 계속 변화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림 6.1>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장치 개요 (<빅뱅을 넘어서> p.245)
그러나 마이켈슨과 물리는 아무런 간섭효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에테르의 증거를 찾기 위해 실험장치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끈질기게 실험하였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을 반복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실험결과는 에테르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이었고, 과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에테르에 대한 해석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헨드릭 로렌츠가 새로운 가설을 내놓음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기존의 에테르가 다분히 기계적인 개념이었던 데 비해, 1904년에 로렌츠가 내어놓은 에테르의 개념은 전자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원자 입자들이 에테르와 구별되는 일종의 당구공 같은 것이 아니라, 에테르 그 자체로부터 형성된 파동의 여기(勵起)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물질 자체가 에너지파와 같은 전자기적인 본질을 가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조지 피츠제럴드(1851∼1901)와 로렌츠는 빛의 속도에 근접한 속도에서는 물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수축될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만약 그렇다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장치 자체가 에테르 유동이 있는 방향으로 수축되어 실험결과가 무의미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피츠제럴드-로렌츠의 가설대로 수축이 일어난다면 빛의 신호가 에테르 속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나가든지 일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렌츠의 방정식은 또한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 느리게 갈 것이고, 시계의 기계장치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물리적인 움직임은 더 느려질 것임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츠는 한동안 시계의 지연 현상을 실제적인 물리 효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현상을 처음으로 지적한 영예는 아인슈타인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 효과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말았다. 즉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시계의 지연 현상을 시간 그 자체의 지연 현상으로 결론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속도에 따라 물체 자체가 수축된다는 피츠제럴드-로렌츠 수축 가설은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바뀐다는 내용으로 변해 상대성 이론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한편 구스타프 미에는 물질에 대한 로렌츠의 전자기적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전자와 같은 기본 입자들은 전기와 자기장의 강도가 특별히 높은 곳에 해당될 뿐이고, 그 위치에서는 통상적인 전자기 역학 방정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새로운 유형의 비선형 행동이 나타나 물질이 된다고 추론했다. 로렌츠와 미에, 그리고 전자기적인 에테르의 개념을 갖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여전히 에테르를 유일한 실재로 보았다. 사실 이미 19세기에 켈빈 경을 비롯해서 톰슨과 올리버 롯지 경 등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867년에 보텍스-원자 이론을 발표한 켈빈 경은 물질의 원자란 건 보텍스링 운동을 하는 에테르 질료의 어떤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하였던 것이다. 또 전자를 발견한 톰슨은 모든 질량과 운동량, 운동에너지는 결국 에테르의 질량과 운동량, 운동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올리버 롯지 경은 1882년에 하나의 연속적인 질료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것은 빛의 형태로 진동할 수 있으며, 양전기와 음전기로 전단(剪斷) 변형을 일으킬 수 있고, 소용돌이 형태가 되었을 때에는 물질을 구성하며, 충돌에 의한 충격이 아닌 연속성을 통해서 물질의 모든 움직임과 반응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에테르에 대해서 썼다. 이렇게 에테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에너지파를 비롯한 모든 물리 현상과 물질 입자들은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에테르가 여기되어 외형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으며, 에테르와 입자를 단절적으로 구별해서 이분법으로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렌츠와 미에의 에테르 이론은 물리학계에서 확실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 바로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만일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일정한 상수값을 유지한다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가정(즉 광속 불변의 법칙)을 받아들이면 관찰자가 속해 있는 좌표계의 속도에 관계없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아인슈타인의 해석은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인 기준계를 가정하는 고전적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대신에 아인슈타인은 공간상의 두 지점이나 시간상의 두 사건간의 간격이 관찰자가 얼마나 빨리 두 지점을 상대적으로 움직여가느냐에 따라 무한하게 변할 수 있는 탄성적인 양이라고 이론화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자의 속도를 시공간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직관에 반해 매우 복잡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중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서로 다른 백 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관측한다고 해보자. 상대성 이론대로라면, 이 백 명의 사람들은 각각 그 자신만의 척도를 가진 백 개의 서로 다른 시공의 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또한 쌍둥이 시계 패러독스나 광원속도의 패러독스와 같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전자기적 에테르 이론이라면 이런 모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전자기적 현상을 오로지 수학적인 기술로만 이해할 뿐이고, 구체적인 실체의 개념과 분리시켜 장 방정식으로 다루는 데 익숙해져서 이런 패러독스들을 기꺼이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수학적 우아함에 기초하여 상대성 이론을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직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암시들도 너그럽게 보아 넘기려 한다. 어쨌든 1910년경에는 이미 특수상대성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상대성 이론의 성공은 곧 에테르 가설의 실패를 뜻하였다. 상대성 이론은 에테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게다가 광속 불변의 법칙과 그에 따른 무수한 시공의 틀을 가진 상대성 이론은 단지 하나의 공간과 시간의 척도만을 수반하는 에테르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상대성 이론이 최대의 찬사와 함께 확고한 지위에 올라섬으로써, 에테르 가설은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실패에 이어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을 때 이미 영원히 종말을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과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비록 권위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았다. 주목할 만한 첫 번째 반론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3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게오르그 사그낙이 실험을 통해 제기했는데, 이로 인해 상대성 이론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그낙은 광원을 회전반 위에 설치하였다. 사그낙은 거울을 사용하여 그 빛을 두 개의 광선으로 나누어, 회전반의 페리미터(perimeter) 주위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 다음 두 개의 광선을 재결합하여 간섭 무늬를 만들어내었는데, 회전반이 시계방향으로 돌 때 광선의 간섭무늬가 회전반의 속도에 비례해 변화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회전반의 회전에 따라, 시계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선이 그 일주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시계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선의 일주 시간보다 적게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그낙은 이것을 빛이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직접적인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사그낙의 발견은 나중에 유도장치 기술에 중요한 진보를 가져다주었는데, 오늘날 보잉 757기와 보잉 767기 같은 여객기들을 유도하는 링-레이저 자이로스코프는 바로 이와 똑같은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사그낙의 실험은 한때 상대성 이론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상대성 이론의 지지자들은 곧 그 실험결과를 해명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1921년에 폴 랑제방이 상대성 이론의 시간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사그낙의 실험 결과가 무효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번에는 벨연구소의 허버트 아이브가 랑제방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논문을 1938년에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적어도 회전하는 좌표계에서는 사그낙의 해석이 정당하며, 특수상대성 이론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아이브의 반증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랑제방의 논문 발표 이후 에테르 가설은 점차로 낡은 것이 되어갔다. 물리학자들은 특수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에테르에 관한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장 방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에테르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다. 1951년에 아이브는 다시 한번 아인슈타인 이론의 중대한 결점을 폭로하였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에 상대성 이론의 푸엥카레 법칙을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계에서 빛의 한 방향 속도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항상 상수인 c(광속도)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히려 한 좌표계에서 다른 좌표계로 이동할 때 상수로 남는 것은 자와 시계의 눈금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기술한 용어를 포함하는 매우 복잡한 수학적 함수였다. 아인슈타인의 결과는 정상적인 물리 방법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양을 사용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특수상대성 이론의 불안정한 관찰상의 근거를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진 물리학계에 화가 난 아이비는 "측정기구에 의지하지 않고 권위적인 명령에 의해 미지의 속도(빛의 한 방향 속도)에 한정된 값을 할당하는 것은 참된 물리 작업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일종의 의식(儀式)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광속 불변의 원리는 단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지도 않다"고 비판하였다. 아이브는 1940년대와 1950년대초를 통하여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자기적인 에테르 이론이 보통 특수상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용되는 실험결과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논문들을 연속해서 발표하였다. 로렌츠의 이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오늘날 '잣대수축-시계지연 에테르 이론(rod-contraction-clock-retardation ether theory)'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다른 과학자들의 상대론적인 견해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특별히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일정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은 틀리게 될 것이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은 단지 빛의 양방향 왕복속도의 평균이 일정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실험결과는 반드시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어느 방향을 향하든지 일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특수상대성 이론은 마이켈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훨씬 넘어서 불확실한 외삽법(外揷法) 위에 세워진 셈이다. 비록 아무도 빛의 한 방향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1987년에 어네스트 실버투스는 빛의 파장이 빛이 전파되는 방향에 따라 변하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실버투스는 파장을 측정하기 위한 특별한 종류의 레이저 간섭계를 만들었는데, 이 장치에는 조정이 가능한 거울과 광선 스플리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서로 반대 방향의 두 레이저 광선을 서로 간섭하게 하여 일정한 간격의 밝고 어두운 띠나 무늬로 나타나는 정상파형(定常波形)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다. 그는 이어서 특별히 제작된 TV 카메라를 이용하여 이 무늬의 간격을 측정하였다. 이 검출기에는 그 유효 두께가 레이저 광선의 파장보다도 10% 이내로 작은 투명한 감광층이 있어서 매우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였다. 실버투스는 로 반대 방향을 향하도록 조정된 레이저 광선이 천구의 사자자리와 일치하도록 정렬되었을 때 간섭무늬의 간격이 가장 좁아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이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지구의 방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실버투스는 최소가 되는 간섭무늬의 이 간격을 측정하여 지구가 사자자리를 향하여 약 378(±19)㎞/sec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몇 년 후에 더 개선된 장치를 만들어 실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천문학자들은 태양계가 주위의 3。K 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의 복사장에 대하여 365(±18)㎞/sec의 속도로 사자자리의 남쪽 부분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실버투스의 실험 결과와 상당히 일치하며, 마이크로파 배경복사가 국부적인 에테르 정지계에 대하여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실버투스의 발견은 방향에 따라 빛의 한 방향 속도 역시 변화한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그낙의 실험이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이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었다면, 실버투스의 실험은 특수상대성 이론이 선형 움직임에서도 적용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림 6.2> 실퍼투스의 파장 측정 장치 (<빅뱅을 넘어서> p.251)
에테르의 존재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리스의 물리학자 파나지오티스 파파스와 미국 물리학자 피터 그라누가 수행한 전기역학적인 실험으로부터 얻어졌다. 이 실험 결과는 하전된 입자들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왔던 상대론적인 로렌츠 수축의 법칙이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며, 대신 좀더 정확하고 비상대론적인 암페어의 힘의 법칙으로 바뀌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암페어의 힘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전기역학적인 상호작용은 우선하는 절대적인 좌표계, 즉 에테르 정지계와 관련되어 있다. 실버투스와 사그낙, 아이브, 파파스,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의 발견은 우리가 에테르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성 이론과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현대 우주론을 다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현재 일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에테르의 개념이 새롭게 부활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한참 유행했던 기계적인 개념의 에테르 이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이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난해한 로렌츠의 '전자기 에테르 이론'과 아이브의 '잣대수축-시계지연 에테르 이론'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폴 라비올레는 1995년에 펴낸 <빅뱅을 넘어서>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에테르 이론을 내세우면서 보다 구상적인 에테르를 가정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위의 책에서 일반 시스템 이론과 카오스 이론을 응용하여 에테르가 물질로서 현현하는 과정을 도식화하면서, '반응-확산 파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파동을 제안하였다. 이 반응-확산 파동은 수동적이고 불활성인 기존의 기계적인 파동이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데 반해(따라서 이 기계적인 파동의 매질은 단순히 파동을 전달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일정 상황 하에서는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파동이다. 반응-확산 파동은 매질의 접혀진 질서가 외부로 드러난 표현이기도 하다. 반응-확산 파동, 또는 화학적 파동(chemical waves)의 쉬운 예로 벨로소프-자보틴스키 반응을 들 수 있다.
<그림 6.3> 벨로소프-자보틴스키 반응
라비올레는 또 그의 변성 에테르 이론을 이집트의 창조신화와 서양 트럼프의 원형이자 역시 이집트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타로(Tarot)카드, 그리고 점성학과 연계시켜 흥미로운 풀이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변성 에테르 이론이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원초적 유동(primal flux)'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헤라클리투스는 에테르를 불에 비유하면서 에테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자신의 구성성분의 동시 발생적인 창조와 파괴를 지탱하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질서정연한 우주(코스모스)는 얼마간은 켜져 있고, 얼마간은 꺼져 있는 영원히 사는 불이다. 그런데 오컬트화학의 코일론은 전자기적인 에테르 또는 라비올레의 변성 에테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일어나는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자신은 물질과는 다른 질서와 유형에 속한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투시를 통하여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코일론이 실제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동질(同質) 혹은 균질(均質)적인 것으로 보인다. 코일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물질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조밀한 점에서는 과학에서 말하는 에테르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코일론은 물질과는 전혀 다른 질서와 유형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상황을 이해하려면 물질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거의 180도 수정해야 한다. 비어 있음은 곧 비어 있지 않음이고, 비어 있지 않음은 곧 비어 있음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6∼17)
기존의 에테르 이론들은 물질과 에테르를 모두 실체로 보고 있는 반면에, 오컬트화학의 코일론-에테르 개념은 물질의 실체를 부정한다. 비록 아누라는 구상적인 물질의 최소 단위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공(空)한 것이다. 통상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진공은 어마어마한 밀도로 꽉 차 있고 물질은 비어 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을 1902년에 오스본 레이놀즈 교수가 제안한 바 있다. 물질은 에테르의 질료 속에 생긴 일종의 결함이나 갈라진 틈, 또는 잘 맞지 않고 어긋난 열 같은 것으로, 어떠한 질료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료가 결여된 상태가 물질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믿고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똑똑한 물고기라면 바다의 수면 위로 떠올라 바다의 존재를 깨우칠 수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일론이라는 바다를 보려면 날치나 돌고래처럼 수면 위로 뛰어올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코일론의 바다를 빠져나갈 수가 없다. 우리의 우주는 '바깥'도 존재하지 않고 '수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공기방울로 지어진 용궁을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코일론의 바다 속에 영원히 묻혀 사는 심해 어족에 불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