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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국민이 막가파 정권 지탱
우리 사회 도덕영역의 식민화와 도덕적 상처가 원인
청년 세대는 ‘경쟁의 압박’, 노년 세대는 ‘폭력의 기억’
군사정권 시절 도덕감각을 유보한 채 살았던 노년층
정의/부정의로 판단하는 정의감각 상실의 ‘상투성’
선거 밖의 정치·사회참여 기회 확대로 퇴행 막아야
윤석열 정부 들어선 이후 진행된 모든 사건 처리 방식과 인사, 특히 검찰의 모든 편향적 수사, 계속되는 비상식적인 정치범 사면 조치들, 채 상병 사망 사건과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뢰 관련 국가권익위원회 조사, 방송위 이진숙 위원장 임명, 독립기념관장을 비롯한 여러 역사 관련 기관의 인사 과정을 보면 불과 0.7 퍼센트 차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이렇게 전리품 분배하듯이 멋대로 권력을 행사해도 좋은가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군대와 경찰의 노골적 폭력행사, 국정원의 사찰과 고문이 없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지금의 윤석열 정치는 이승만 정권 말기, 유신 말기, 5공 말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
국가 존립 위협하는 거대한 직무유기
검찰권의 행사를 정점으로 해서 이 사회는 부정의의 극단까지 갔다. 권익위의 소신있는 반부패 전문가인 공무원이 김건희 수사 종결 처리 후 자살한 사건이 이 정권의 부정의한 행정집행을 가장 집약해 보여준다. 상황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미일 외교 정책에서의 극도의 편향성과 러시아, 중국과의 거리두기, 대북 노골적 흡수통일론 천명으로 인한 남북한 긴장, 기후위기, 저출산, 수도권 집중 등과 관련된 국가의 거시, 장기 정책에서의 퇴행은 국가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직무유기 사태가 진행된다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은 다음번 정권 탈환을 위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고, 시민사회는 1987년 헌법과 5년 단임 대통령제 자체에서 이런 일이 초래된 것으로 보고 헌법 개정과 선거법 개정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고, 일부 학자나 운동가들은 대의제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의 근본적 한계에서 이런 문제가 초래된 것으로 보고, 시민의회 담론과 직접민주주의 담론을 열심히 교환하고 있다. 나는 현재와 같은 거의 국가 파국, 정치 실종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이 모든 주체가 내놓는 대안들을 대체로 지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거의 막가파식의 정치가 자행되는 근본 이유는 국민의 저항, 견제력 부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권력을 승자의 전리품 분배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대통령과 측근들, 여당이 이런 식의 정치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야당, 언론, 그리고 국민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어이없는 발언과 인사 정책이 나올 때 마다 사람들은 “국민을 바보로 아는가”라고 흥분하면서 비판하지만, 바로 이 지점, 국민을 바보로 알기 때문에 이런 50년대식 퇴행정치가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즉 그들이 아무렇게나 해도 여전히 30%대의 국민이 지지하고, 반대하는 70%도 반대만 할 뿐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닐까?
도덕영역의 식민화와 도덕적 상처 탓 바보가 된 국민들
국민을 바보로 안다는 말은 국민이 무식하거나 사리분별력이 없다고 본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하는 국민이라 하더라도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만만하게 본다는 말이다.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까지 무력화하여 정치를 희극화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은 한국뿐만 아니라 트럼프를 또다시 유력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미국, 희대의 학살자 나타냐후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아무런 비전도 철학도 없는 자민당 체제를 지지하는 일본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정의를 비웃는 도덕영역의 식민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도덕영역의 식민화는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고 현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오랜 군사정권, 폭력, 연좌제, 학살을 겪은 한국에서는 그에 더하여 도덕적 상처라는 또 하나의 정치문화, 심리적 기반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유족이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그들 앞에서 피자나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을 조롱한 소위 ‘폭식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곡기를 끊은 유족들 앞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조롱하는 반인륜적인 행동은 어떤 논리에서 나온 것일까? 이들은 극우단체나 주류 언론이 퍼뜨린 가짜뉴스, 즉 유족들이 더 많은 보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그렇게 농성한다는 논리 위에서 움직였을 것이다. 이들 극우 언론과 일부 태극기 부대원들은 자식 잃은 슬픔에 공감하는 도덕적 자세보다는, 이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자식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인간들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것이다.
광주 5.18 유족,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항의에 대한 무관심과 폄훼는 모두 이러한 도덕감정의 진공, 이해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도덕감정이 마비된 사람들은 모든 항의를 정치적 배후가 있는 것으로 보거나,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전제 위에서 상황을 판단한다. 이처럼 정의/부정의에 대한 판단 자체를 중지하거나 유보하고 오직 이익을 중심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도덕영역의 식민화라 한다. 이것은 사회학자 바우만(Bauman)이 사용한 개념인데,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와 경쟁의 압박이 모든 사람을 금전의 추구와 생존의 압박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부정의한 사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잠재력을 완전히 박탈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기본적 도덕감정을 박탈하는 ‘시장’이라는 전쟁터
인간에게는 누구나 기본적인 도덕감정이나 도덕감각이 있는 법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누가 살해를 당하는 위기에 놓이거나 부당하게 두들겨 맞을 때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해자를 고발하거나 피해자의 편에 서려는 마음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이 모두 이런 도덕감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시장’이라는 생존경쟁의 전쟁터는 옆 사람을 돌아볼 여유를 박탈한다. 도덕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 혹은 사회적 협동과 연대의 영역인데, 시장만능주의는 바로 전 영국 총리 대처가 말했듯이 “사회, 그런 것은 없다” “오직 개인만 존재할 따름이다”라고 가르친다. 물론 개인과 개인 간에도 기본적인 도덕은 필요하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고, 법을 지키는 정도의 도덕률이 필요하다. 그러나 도덕감정이 마비된 상태, 도덕영역이 식민화된 상태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항의, 그리고 그들의 집단적 행동은 정치적 의도가 있거나, 이익추구적인 것이라고 공격을 받는다. 이런 경쟁만능의 승리자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전제한다.
탈핵시민행동,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의동맹, 종교환경회의, 핵발전소지역대책위협의회 관계자들이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2대 국회에 탈핵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4.5.30. 연합뉴스
이런 세상에서 정의와 부정의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된다. 즉 적자생존의 현장에서 생존하는 것이 정의이며 탈락하는 것이 부정의가 된다. 이제 정의보다는 공정이라는 말이 선호된다. 시험만이 공정의 유일한 잣대가 되기 때문에 부의 세습에 의한 원초적인 불평등은 문젯거리가 아닌 것으로 본다. 기업의 갑질이나 부당노동행위는 그들이 경제적 강자이기 때문에 행사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다른 사람이 그 피해를 입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만 않으면 그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함께하지 않는다.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처럼 같은 처지의 교사들이 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함께 시위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냥 개인들이 함께 모이는 집회로 끝나고 그들 간의 소통이나 생각을 교환하는 절차는 없다.
내 손해만 없으면 아무리 부당한 일도 외면하는 도덕의 진공
2021년 KBS의 세대인식 조사에 의하면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것이다”라는 설문에 대해 유독 청년만이 상층으로 갈수록 그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졌다. 능력이 신화처럼 받아들여지는 지금 청년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도덕이 식민화된 상태는 소비사회, 즉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소비자로서 참여하는 세상이다. 바우만이 말하듯이 소비의 행위는 이 부정의한 현실을 대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경감시켜 주는 신경안정제의 기능을 한다. 그런데 소비를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력이 필요한 데, 소비할 수 없는 상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도덕영역이 식민지화된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은 분노한 상태이나 분노에는 분명한 표적도 없고 목표도 없다. 몇 년 전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고급 매장을 부수고 불태운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소비사회에서 청년이 갖는 좌절감이 비뚤어지게 표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행사나 법의 집행에 대해 그 아무리 심각한 부정의와 부당한 일이 발생해도 자신이 경제적 손해를 입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넘어가 버린다.
도덕의 진공은 오늘의 물질만능, 경제만능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사실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도 도덕적 진공 상태다. 전자가 경제전쟁에 의한 것이라면 후자는 군사적 충돌,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가족애를 제외한 모든 도덕적 판단은 유보되거나 무시된다.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 군사정권 시기 내내 사실상 이런 힘의 논리가 법을 압도했다. 그래서 힘이 없기 때문에 죽었고, 다쳤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 억울함을 밝혀내지도 보상을 받지도 못했다.
노년세대의 도덕적 상처와 무도덕적 가족주의
이런 폭력질서에서 살아온 한국의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약간의 도덕적 상처를 갖고 있다. 즉 불가항력적인 폭력과 권력행사 앞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던 경험은 마음에 깊은 내상을 남긴다. 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친 듯이 열심히 살면서 가족의 복리와 돈벌이와 출세에 목숨을 걸고, 가족을 떠난 공공영역에서 부정의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더 이상 분노하거나 항의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부가 말기에 극심한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온 천지에 경찰폭력이 난무해도 전혀 항의하지 않았던 당시 한국인들의 행태는 바로 도덕적 상처가 준 가족이기주의의 결과였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유신 시절, 5공화국 시절 자신의 일상과 회사에서 수많은 부정의한 일을 겪고서도 대체로 모른체 하고 넘어갔으며, 항의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에게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는 범위는 오직 가족, 친족, 동문, 고향사람 등에 국한된다. 군대와 검찰 같은 상명하복 조직, 경상도 사람들이 강조하는 ‘의리’의 가치는 오직 이 범위에서만 의미 있게 작동한다. 도덕적 상처와 출세욕은 동시에 작동하는데, 그 상처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더 권력과 부에 집착한다.
지난 대선에서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줄기차게 70% 이상의 지지를 보이는 한국 노년층의 행태는 바로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도덕감각을 유보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의감각 상실, 세상의 일을 정의/부정의로 보지 않는 것이 상투(banality)적이 된 것이다. 이 상투성이 아렌트(Arendt)가 파시즘을 지탱한 평범한 독일인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보수로 분류하고 있으나, 그 보수의 실제 내용은 도덕영역의 식민화 상태에서 ‘도덕감각 상실’이 일상화되어 강자 추종, 강자 선망이 몸에 밴 결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정치적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한국처럼 노년 세대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지향을 갖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물론 한국 노년층이 이들 선진국에 비해 고등교육 이수자의 비율이 낮은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군대라는 폭력 질서에서 일방적으로 복종하고, 약육강식의 노동시장에서 생존하면서 체득한 논리가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점은 한국적 특성이다.
참여와 실천, 변화의 경험으로 도덕감각 회복해야
폭력과 경쟁은 모두 도덕영역을 식민화한다. 그래서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거나 무한경쟁에 노출된 사람은 세상의 일을 정의/부정의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노골적인 부정의를 목격하고도 방관하거나 주어진 현실을 추종한다. 한국에서 노년 세대는 폭력 체험의 일상화 때문에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부정의를 부정의로 느끼지 않으며, 젊은 세대는 시장에서의 경쟁 압박 때문에 경제적 강자의 행동을 부정의로 느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유로 이들은 도덕적 식민화의 포로가 되어 있다. 모든 정치적 여론조사에서 20대가 70대 이상과 결과적으로 비슷한 이유도 여기에서 주로 기인한다.
도덕영역의 식민화 상태는 교육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즉 이들에게 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백날 이야기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폭력, 권력과 시장력 앞에서 극도의 무력감을 갖고 현실을 추종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상론과 도덕적 설교는 거의 무의미하다. 도덕감각의 회복은 결국 개인적인 학습이나 자각을 통해서보다는 참여와 실천의 경험, 그것을 통한 변화의 경험을 스스로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흔히 정치적 효능감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심리적 정신적 변화는 참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선거도 참여의 중요한 창구인 것은 맞지만, 선거 밖의 정치참여, 사회참여의 기회 확대만이 이들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젋은 세대 소비자의 정체성, 그리고 노년 세대 선거 유권자의 정체성을 넘어서는 참여의 기회 확대가 필요하다. 40, 50대의 상대적 진보성은 그들이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은 것과 무관하다. 노동시장, 주거, 돌봄, 교육 영역에서 피할 수 없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퇴행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선거정치의 미신과 더불어 소비주의의 상투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시민의 직접 참여 공간과 기회 확대만이 이 퇴행을 막을 수 있다.
첫댓글 시민의 직접 참여와 기회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