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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名待後日(명대후일)-이름은 뒷날을 기다리고
利付他人(이부타인)-이익은 남에게 미룬다.
在世如旅(재세여여)-세상을 살아감은 나그네처럼
在官如賓(재관여빈)-벼슬에 있을 때는 손님 같이.
이곡(李穀)
이름을 제대로 불리기(呼名)가 참 어렵다 !
일상(日常) 사회생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 상대방으로부터
“사장님, 어쩌구 저쩌구”하는 말을 쉽게 듣는다.
필자는 사장도 아니고 사장 이력도 없기 때문에 듣기가 불편하고 어색하여
“나는 사장이 아닌데---”하면
달리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아 듣기 좋은(?) 사장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사장소리가 듣기 좋다 !?
1960~70년대 가수 현미가 불러 히트한 “몽땅 내사랑”이라는 노래 제목에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한창 유행한 유행가가 떠오르는 “사장”칭호다.
우리 국민은 자기의 고유(固有)한 이름보다 관직 명칭이나 직책을 이름 앞에 불러주기를 바라는 경향(傾向)이 많다.
물론 그 사람의 신분이나 하고 있는 일을 표시하기 위한 당위성(當爲性)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나는 이런 사람인데”하는 우쭐하고 싶어 하는 느낌도 갖게 한다.
직책이름은 아니지만 명색이 우리나라 정치 9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애칭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까지는 정치인들은 주로 아호(雅號)로 불렸다.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죽산 조봉암…
1970년대에는 영문 이니셜 호칭이 등장했다.
미국에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있었다.
미국 국민은 케네디 대통령을 줄여서 애칭(愛稱)으로 “JFK”라고 불렀다.
필자 기억으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우리나라 정치인으로선 처음으로 영문이름
이니셜로 JP라 불렀다 생각된다.
5.16혁명 주체들이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1962년 11월 12일 한국의 대일 전쟁 배상 등에 대한 청구권과 민간경제협력(상업차관)에 관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외상 회담”과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최고회의 고위 장성들과의 불화가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 혁명주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김종필을 대통령 명령으로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으로 1963년에 외유(外遊)를 내보냈다.
외유(外遊) 8개월후에 돌아온 후로 김종필을 정계에서는 “JP”라 불리는 신문기사가 기억된다.
그 후로 HR(이후락), SK(김성곤)등 공화당 실세들이 영문 약자로 불리며 위세를 과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청와대 안팎에서 “프레지던트 박”을 뜻하는 “PP”로 불렸다.
3김 시대엔 YS(김영삼), DJ(김대중)으로 이어 MB(이명박)등으로 불렸다.
어떤 정치인은 자기도 영문약자로 불려 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다는 참 우스운 일화의 신문기사도 기억난다.
한국 지방자치의 역사는 1949년 7월 4일 제헌국회는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치안 확보와 민심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보류하였다.
그 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장면의 민주당정권이 집권하여
1960년 11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시·도·읍·면에 대한 지방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때 필자의 고향에서 김(金) 모라는 사람이 면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로 그분이 70여세로 돌아가실 때가지 이름대신 “김의원”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였다.
어그제 5월 22일 부처님 오시는 날 한 신문에 생존해 계시는 고승(高僧) 한분을 소개 하였는데 온통 불교 조계종의 직책 이름뿐이었다.
고승(高僧)이다 큰스님이다 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깨달음의 과정을 소개하여 중생들의 사표(師表)가 되는 것이 고승의 명성(名聲)다움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름보다 직책을 앞세우는 것을 보니 필자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명 목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의 과정보다 교계(敎界)의 큼직한 직책을 앞세운 것이 이름을 빛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름 명성(名聲)의 글을 쓰게 되니 그동안 이름에 관련된 글을 읽은 내용들을 소개한다.
▲명나라때 학자인 사조제(謝肇淛)가 쓴 문해피사(文海披沙)란 글에
“호명자표(好名自標)”란 말이 있다.
“자기 이름 알리는 것을 좋아해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를 염려해 제 이름을 직접 들어내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중국 서진(西晉)시대의 정치가인 두예(杜預)는 비석 두 개에 자신의 공훈을 새겼다.
하나는 양자강의 하류인 한수(漢水) 속에 가라앉히고
다른 하나는 만산(萬山) 위에 세웠다.
두 곳에 세운 이유를 말하기를
“후세에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짝이 언덕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강이 언덕이 되고 언덕이 강이 되어도 자기의 비석은 존재 한다는 뜻이다.
중국 중당(中唐) 시기의 최고 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자신의 시(詩)를 모아 정리한 시집을 불상(佛像)의 뱃속(腹藏)에 넣게 했다.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와 동도(東都)의 성선사(聖善寺)로 보냈다.
어느 하나가 잃어버려도 다른 것은 남게 하는 안전 대책이다.
이에 대해 사조제(謝肇淛) 말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남에게 알리기 좋아함이 너무 심하다.
백거이(白居易)의 공적과 문장이라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내세우기를 이처럼 한단 말인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스승은 청(淸)나라 중기 최고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이다.
옹방강(翁方綱)도 백거이의 일을 본떠 자신의 시집(詩集)인 “복초재집(復初齋集)”을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에 보관케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부를 제자인 추사 김정희 편에 초상화와 함께 보내 전남 해남
대둔사(大芚寺·지금의 대흥사)로 보내 보관케 했다.
혹시 중국에서 천재지변을 만나 책이 다 사라져도 조선의 남쪽 끝에는 남아 있을 것이란 안전(安全) 방책(方策)이었다.
추사는 스승의 시집을 대둔사로 보내면서 “해동(海東)의 영은사(靈隱寺)”란 뜻으로
“소영은(小靈隱)”이란 세 글자의 편액을 써서 함께 보냈다.
필자는 위의 “소영은(小靈隱)”에 대하여 감히 추사 선생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중국 항주에 영은사(靈隱寺)가 있다면,
조선 두륜산(頭輪山)에 대흥사(大興寺)가 있기 때문에 “해동영은(海東靈隱)”이라 했으면 얼마나 보기 좋은 이름 아닌가?
“소영은(小靈隱)”은 대국인 중국에 비하여 조선은 스스로 “작은 나라”라고 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느낌을 갖게 하는 이름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그 소식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친구이며 제자인
초의선사(艸衣(禪師)에게 꼬드기를,
“양근(楊根현재 양평군 옥천리) 소설산(小雪山)에 남아있은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머물던 절터에 암자를 세워 그 책을 옮겨 와 중노릇을 하면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저시 말하기도 했다.
위의 두예(杜預), 백거이(白居易), 옹방강(翁方綱) 세 사람은 역사 속에서 세상이 기릴만한 큰 자취를 남겼으니 없는 것을 만들어 내세운 것(標榜)은 아니다.
요즘 6월 지방자치제선거를 앞두고 도처에 나붙은 후보자들의 현수막에 저마다
제 이름을 걸고 “나밖에 없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구승비(口勝碑)”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을 입에다 새기는 것이 돌에 새기는 것 보다 더 오래가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안분편(安分篇) 격양시(擊壤詩)에 아래의 구절이 나온다.
平生不作皺眉事(평생부작추미사)-평생에 남의 눈 찡그릴만한 일 안하고 살면,
世上應無切齒人(세상응무절치인)-세상에는 나를 향해 이를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大名豈有鐫頑石(대명기유전완석)-당신의 이름을 어찌 그 큰 돌에 크게 새기려 하는가?
路上行人口勝碑(로상행인구승비)-길 가는 행인의 입에 당신 이름을 새기는 것이 돌에다
새기는 것보다 훨씬 오래갈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역사책인 춘추좌전(春秋左傳)에
“화이부실(華而不實)”이란 말이 나온다.
꽃은 피었으나 열매가 없다는 말로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실이 없다는 뜻이다.
진(晋)나라 대부(大夫) 양처부(陽處父)는 유명세(有名稅)를 탄 정치인이었는데
그가 머물렀던 여관 주인이 그의 명성(名聲)에 혹하여 양처부를 따라 다녔지만
이름만 유명했지 실제로는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고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역사가인 범엽(范曄)이 편찬한
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에 “명수죽백(名垂竹帛)”이란 말이 나온다.
이 뜻은 “이름을 오랜 후세까지(千秋)에 전한다”는 뜻이다.
죽백(竹帛)은 대나무와 비단인데, 옛날에는 종이가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 기록을
대나무조각(竹)이나 비단에 했으므로 죽백이라는 말은 곧 역사의 기록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백(竹帛)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이름이 그냥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에 나오는 말로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의 한 사람인 맹상군(孟嘗君)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은
“맹상군(孟嘗君)이 천하의 협객(俠客)과 간사(奸詐)한 자들을 불러 모았으니 설(薛)땅에 들어온 사람이 대략 6만여 가호(家戶)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고 난 후,
“세상에 전하기를 맹상군이 객(客)을 좋아하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고 하니 그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 名不虛矣)”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이름은 헛되이 전(傳)해지지 않는다”는 뜻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표현의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름(名聲)이 널리 알려진 데는 좋은 뜻이나 나쁜 뜻이나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한말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찾았다.
필자도 답사 한적이 있지만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다.
가을에 붉게 물든 단풍과 낙엽이 계곡물에 반영되어 계곡 전체가 붉은빛으로 붉게 물이 들어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생겨난 났다고 한다.
홍류동(紅流洞)은 계곡이 깊고 길며, 풍광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의 풍광을 즐기던 심재(深齋)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절벽이든 물속이든 바위와 빈 공간만 있으면 붉고 검은 먹물로 이름을 새겨 놓았다.
“나 아무개는 이 명승지(名勝地) 홍류동을 왔다 가노라!”고
수백년 세월을 겪은 바위의 각자(刻字)다.
거창하게 글자를 새겨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는 부질없고 개탄스러운 어리석은 욕심의 흔적은 그저 아름다운 풍광만 더럽힐 뿐이다.
홍류동을 나오며(出紅流洞)
石面紛紛墨間紅(석면분분묵간홍)-바위 위에 여기저기 검고 붉은 먹물 글씨
山頭日日雨和風(산두일일우화풍)-산 위에는 하루하루 비 뿌리고 바람 부네.
人生自有傳名處(인생자유전명처)-인생에는 본래부터 이름 남길 곳 있나니
不在鼪林鼯穴中(부재생림오혈중)-날다람쥐 숲과 굴은 그런 데가 아니라네.
조긍섭(曺兢燮)
이름이란 날다람쥐가 오르내리고 누천년을 개울물이 씻은 산중의 바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야 할 것이다.
천년 전 최치원(崔致遠)은 바위에 이름 각자자(刻字)를 남기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해인사 홍류동(紅流洞)의 명사(名士)로 유명하지 않은가!
자기 존재를 알리는 방법이 무엇인가 깊게 생각해야 한다.
홍류동(紅流洞)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릴까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최치원(崔致遠)
▲며칠 전 인라인 갔다가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오랜만에 가슴에 이름표를 단 초등학생을 보았다. 필자가 잘 몰라서인지는 몰라도 교복도 없어지고 이름표도 없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이름표를 보니 세월의 변함 속에 이상한 감회가 들었다.
초 중·고등학생과 군인은 명찰을 달고 다닌다.
공무원은 물론 공기업과 사기업의 직원들도 근무처에서는 명찰을 단 것을 쉽게 본다.
그뿐만 아니라,
TV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도 참석자 모두 명찰을 달고 있다.
명찰은 소속과 이름을 밝히면서, 자신의 인격과 기관의 명예를 대변한다.
명찰은 공동체 의식, 직위와 직분에 맞는 책임 이행, 그리고 언어와 행동을 순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명찰 단 것을 보지 못했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고 한다.
그럴수록 명찰을 달고 국민이 위임한 권한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지 확인받을 의무가 있다. 국회의원들은 권위를 상징하는 금배지를 달 것이 아니라 국회활동을 할 때에 지역구가 표시된 명찰을 달아야 민의(民意)의 전달자임을 표시하는 것이 옳게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런 대사가 있다.
What's the use of names?
Roses are still fragrant, even if they are called by other names.
“이름이란 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로운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았던 중세의 베로나(Verona)라면 이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한국에서 안 통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전통에서 이름(姓名)은 매우 중요시 했다.
가족 친족집단 내에서의 계보상의 종적(縱的)인 세대(世代)관계를 “항렬(行列)”로서
관리할 정도다.
조선시대에 이름은 너무 귀하기 때문에 본명(本名)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름은 본인 스스로 짓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지어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다른 사람은”은 임금(君), 스승(師), 부모(父)이 세 사람만
작명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위의 군사부(君師父)뿐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에게는 이름이 여러 개 있었다.
호적에 오르는 정식 이름인 관명(冠名)
어릴 때 부르는 아명(兒名)
관례(冠禮)를 올리며 성년에 받는 이름인 자(字)
관명(冠名)이나 자(字) 대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호(號)
왕과 왕비를 비롯해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은 뒤 그의 행적에 따라 임금이 내리는 이름을 시호(諡號)가 있다.
그 밖에도 별호(別號), 택호(宅號), 법명(法名), 예명(藝名), 가명(假名), 당호(堂號)등이 있다.
모두 본 이름을 대신하는 호칭이다.
“명함(名銜)”이라 할 때 함“銜”은 재갈함자다.
재갈(銜)은 말(馬)을 부리기 위하여 아가리(입)에 가로 물리는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말한다.
말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통제를 받기 함이다.
즉 사람의 이름은 무겁고 귀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이름대신에
어릴 때는 아명(兒名), 성인(成人)이 된 후에는 자(字)나 호(號)를 지어서 부른다.
세상에서 이름을 불리면 그 책임도 같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고 노래했다.
대통령을 지낸 이명박 박근혜도 교도소에서 이름대신 “503 박근혜” “716 이명박”의
수인번호(囚人番號)로 불린다.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라도 본명(本名)으로 불릴 때 정상적인 신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논어(論語) 제15편 위령공(衛靈公) 19장
子曰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칭송되지 않음을 꺼린다”
군자란 자기의 학덕(學德)을 바탕으로 허명(虛名)이 아닌 정명(正名)을 남겨야 죽은 후에도
이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제6편 옹야(雍也) 23장
子曰 觚 不觚 觚哉觚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난(觚) 술잔이 모(觚) 가 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어찌 모난(觚)술잔이라 하겠는가?
*고(觚)-모가 난 술잔으로 예기(禮器)의 일종(一種)
모가난 술잔은 모난 술잔 값을 해야 하고
사람은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름이라는 내용으로 장황한 이 글은 사실은 필자의 입장 때문이다.
나도 느끼지 모르는 사이에 내 호칭은 “어르신 할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호칭이 달라졌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고정화된 명칭에 너무 오래 습관 되면 전철 안에서 눈치코치 모르고 앉을 자리만 찾게 되는 정말 “어르신 할아버지”가 된다.
필자는 점잖은 사람도 아니고 교양과 학식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다.
면서기 한사람도 배출하지 못한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이다.
청바지에다 T샤츠만 걸치고 여름에는 반바지를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이어린 초등학생 중학생에게 부탁한다.
나를 “어르신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그냥 “농월”이라 불러 다오
농월님도 농월 선생님도 필요 없다.
그렇게 불려야 “꼰대”의 명칭을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다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