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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조(宋秉祚, 1877. 12. 23∼1942. 2. 25) 선생은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태어난 다음 해인 1877년 12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신창동(新倉洞)에서 재홍(再弘)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백범과 선생이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것처럼, 두 분 모두는 시종일관(始終一貫)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민족정권의 명맥을 잇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생의 호는 신암(新岩)이며, 이명(異名)으로는 송병조(宋秉祚)·송영석(宋永錫) 등이 있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30대 중반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이 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목사가 되었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한말 계몽운동지도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승훈(李昇薰)을 비롯하여 3·1운동 민족대표로 활약하였던 길선주(吉善宙)·이명룡(李明龍) 목사를 배출하는 등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학교 및 숭실전문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은 1917년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비밀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해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여 독립군 기지 개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분위기의 평양신학교를 다닌 선생 또한 민족 독립의지가 충만하여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향리인 용천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일 평양에서 전국 각 도의 대표 24명이 박인관(朴寅寬)을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를 창립할 때, 선생은 양석진(梁錫鎭)·채필근(蔡弼槿)·김태희(金泰熙) 등과 함께 평의원에 선임되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그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1년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안창호(安昌浩)의 주선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재무부 참사(參事)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선생은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한중 양국민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할 목적으로 신익희(申翼熙)·윤기섭(尹琦燮)·김홍서(金弘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목사 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특히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여 명실공히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제기되자, 선생은 1921년 5월 안창호·이탁(李鐸)·차리석(車利錫)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기성회(國民代表會期成會)를 결성하고, 그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대표회의 탄생을 도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부의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자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과거문제조사위원회(過去問題調査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과거 독립운동의 문제점을 조사하여 이를 바로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첨예화되더니 결국 파국으로 끝나면서 임시정부는 더욱 왜소화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민족적 정통성과 독립운동 통솔기관으로서의 법통성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을 수호하여 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5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이듬해인 1926년 2월 18일에는 여운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입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8일 최창식(崔昌植)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특히 이 시기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선생은 김보연(金甫淵)·조상섭(趙尙燮)·박창세(朴昌世)·엉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경제적 지원활동도 벌였다.
한편, 1926년부터 우리 독립운동계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을 결성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하여 ‘이당치국’의 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親疏) 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의 신국가 건설이나 민족사회의 재구성 방안을 정강(政綱)으로 제시하면서 민족정권에의 적극적 참여의지를 표출한’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하여 갔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안창호·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 등은 자파 세력의 단합과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옹호를 위하여 1930년 1월 25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라고 하는 항일 독립운동 방략을 제시하고, 이사장을 대표로 하는 이사제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은 이 같은 한국독립당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당을 대표하여 <상해신문(上海新聞)> <진광(震光)> 등의 기관지를 발간하면서 “대일동맹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확대하고, 민족의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하는데 앞장섰다.
나아가 선생은 1930년 8월 4일 조각된 국무위원제 내각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된 뒤, 재무장(財務長)을 맡는 등 임시정부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1940년 10월 임시의정원 제32회 회의에서 주석제 개헌으로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기까지 10여 년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로 인해 일경의 촉수가 눈 앞까지 미치던 때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와 그 각료들은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 1932)·진강(鎭江, 1935)·장사(長沙, 1937)·광동(廣東, 1938)·유주(柳州, 1938)·기강(1939)·중경(重慶, 1940)으로 옮겨 다니며 풍찬노숙하면서 투쟁하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한시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1934년 1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재선되어 1939년 10월까지 활동하면서 정부와 의회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1인 2역, 3역의 역할을 떠맡았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안창호가 1913년 5월 미주에서 조직한 흥사단(興士團) 원동(遠東)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32년 4월 29일 안창호 피체 이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흥사단 원동위원부 위원장을 맡아 건전한 독립운동 주체의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31년 10월에는 상해 한인동포들로 조직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임시모연위원(臨時募捐委員), 정무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교민들을 지도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특히 일제가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감행하자, 선생은 항일 투쟁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선생은 한국독립당 대표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열단(義烈團)·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혁명 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독립의연금의 납부를 독촉하는 통지서를 각지에 발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동맹은 임시정부 폐지론을 제기하면서 민족통일전선체로서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을 추진하여 갔고, 한국독립당 또한 1935년 5월 25일 임시대표회의에서 이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사수론을 주장하던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이사장 직을 사퇴하였고, 또한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도 불참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 김구·이시영·조성환(曺成煥)·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은,“적의 총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 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민족과 함께 공존 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은,
등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던 독립운동 정당이요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다. 이 같은 한국국민당에서 선생은 이동녕·조완구·차리석·김붕준(金朋濬)·안공근(安恭根)·엄항섭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수호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光復陣線)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民族戰線) 결성이었다.
이때 선생은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1937년 7월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 조선혁명당의 이청천(李靑天)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갖고, 3당 합동의 기초가 된 공동 결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 3당과 미주 등지에 산재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동지회(同志會)·단합회(團合會)·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이 모여 임시정부를 옹호, 지원하는 외곽단체로 광복전선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이후 1934년 1월 이래 6년간 재임해 온 임시의정원 의장직을 1939년 10월 사임하고, 같은 달 23일 기강에서 개선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김구·차리석·이동녕·홍진·조완구·조소앙·이청천 등과 함께 재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정부와의 활발한 외교 교섭 등을 통해 1940년 9월 중경에서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후 선생은 1941년 10월 15일 김붕준의 후임으로 다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고문, 회계검사원장 등으로 재직하다가 조국 광복을 눈 앞에 둔 1942년 2월 25일 신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