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계기로 가수가 됐다는 한명숙씨 - RFA PHOTO/장명화
가수 한명숙씨는 서울을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수원을 아주 좋아합니다. 서울보다 한가하고 느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고향보다 낫겠느냐고 가수 한명숙씨는 말합니다.
한명숙: 나죠. 고향생각이. 특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참 고향생각이 많이 나요.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여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요. 못 나온 친구들, 왜냐면 사상이 틀렸으니까, 못나온 친구들도 있거든요.
한명숙씨는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입니다. 대동강 어귀로부터 39㎞ 올라간 상류에 위치한 이 항구도시는, 지금은 남북의 배편이 활발히 오가는 ‘남포’로 이름이 바뀐 지 오랩니다. 한명숙씨의 인기곡 ‘그리운 얼굴’에도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녀의 정이 깊이 느껴집니다.
(‘그리운 얼굴’) 별들이 하나둘 살아나듯이, 뽀얗게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눈감으면 고향 눈뜨면 타향
구름은 하늘에서 서로 만나듯, 강물도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고향 길에서 서로 만나서 조용히 고향노래 서로 불러요...
외삼촌 김재섭의 영향으로 한명숙씨는 진남포 가덕 초등학교 시절부터 늘상 서양의 고전음악을 접하며 큽니다. 일본의 명문 동경 우에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당시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외삼촌은 합창단원으로 있던 자신을 무척 예뻐해 주었습니다.
한명숙: “우리 명숙이는 앞으로 노래하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알토였어요. 소프라노, 그때만 해도 꾀꼬리 같은 소리만이 가수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때도 알토, 메조소프라노 그게 제 음이 중간쯤이 되서 애매하더라고요 남자소리도 아니고, 여자소리로는 조금 약하고...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춤사위에 반해 무용도 익혔던 꿈 많은 시절. 진남포 제 2여중땐 테니스 선수로까지 나가면서 외동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립니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한명숙: 내가 여학교 들어가는 해부터 영어를 중지하고, 한문도 중지당하고 이북에서 소련 말을 배웠어요. 소련 말을 곧잘 했어요. 지금은 혼자 하려니까 잘 안 돼요. 소련말. 선생님이 시키면 곧잘 일어나서 잘 했어요. (기자: 제가 아는 소련 말은 ‘스빠시바’인데요) 스빠시바, 까레스키, 하옇튼 많이 배웠는데...
고 2때인 1951년 11월. 한명숙씨는 전쟁을 피해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피난길에 오릅니다.
(‘우리 마을’) ... 우리 마을 살기 좋은 곳 경치 좋고 인심 좋아 봄가을엔 오곡이 풍성 주렁주렁 너울너울 무르익어요. 밤이 깊으면 소곤소곤 저마다 별이 소곤소곤...
한명숙: 배타고 왔어요. 배도 해군 군함타고 왔어요. 왜냐면 우리 집 바로 앞에 해군 통신대가 있었어요. 국군이 들어왔을 때 거기에 한 일개 소대정도, 한 열몇명이 하루는 우리 집에 왔어요. 바로 앞이니까. 자기네가 식사하는 게 불편하니까, 집에서 식사 좀 해줄 수 없겠냐고, 그러기에 우리 어머니가 왜 안 되겠냐고 그랬어요. 피난 간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배를 태워줘서 이남까지 왔어요.
어선이 깨져 오하도, 영호도 등을 두 달간 전전하며 온갖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이 인천. 노래를 좋아는 했지만, 막상 전쟁이 가수의 길을 걷게 해줄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명숙: 인천에 피난 나와 살 때, 옆집에 피난 나온 사람 중에 우리 외삼촌 제자가 살았어요. 어떻게 이야기하다보니까 김재섭 선생님이 어머 조카 되네요. 그렇다고 했더니, “내가 그 선생에게 배웠는데”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 하다보니까, 그때 제가 16살 때였는데, 노래하고 싶다고 하니까, 어떻게 세월이 지나서 하다보니까, 그럼 내가 노래 가르치는데 소개해줄게, 그래서 노래하게 됐어요.
외삼촌의 평양음대 제자인 임원근씨는 오르간을 치며 노래하는 한명숙씨에게 ‘태양악극단’ 입단을 주선해줍니다. 이 때 닦은 발성경험과 무용솜씨는 미 8군 무대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한명숙보다 더 꺼끌꺼끌한 미국 여가수들의 쉰 목소리는 당시 미군부대에서 인기였던 만큼, 한 명숙이 불러대는 페티 페이지의 모창은 대단한 인기를 불러 모았습니다.
(페티 페이지 -- “How much is that doggy in the window")
한명숙: 패티 페이지 노래 잘 불렀어요. 그래서 최희준씨가 하는 말이 있어요. 패티 페이지가 한국에 왔었거든요. 그때 같이 공연을 했거든요. “야, 행동까지 똑같더라! 그러더라구요. 어려서부터 8군 쇼 다니면서 페티 페이지 노래를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페이지 노래 좋아해요.
당시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동료가수로는 곽순옥, 이춘희, 로라성, 이금희, 현미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로는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최희준은 그의 노래인생의 평생은인이 됩니다. 그의 소개로 만난 작곡가 손석우는 필생의 최고 인기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선물했던 겁니다. 61년의 일이었습니다.
(노래 -- ‘노란 샤쓰의 사나이’)
한명숙: 갑자기 유명해지니까, 실감이 안 나고 나도 이제 유명한 가수가 됐다는, 이름을 벌은 거죠. 그러니까. 우선 이름을 벌었으니까 그 이상 바랄게 어디 있겠어요? 지금도요.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지금 46년인가 됐죠, 벌써. 1961년도면 그렇게 \x{b42c}는데오, 이 노래가 나오면, 가만히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일어나서, 젊은이고 노인네고 그냥 다 나와 춤추고 그래요.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가진 RFA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가수 역시 고향과 친구 앞에서는 그저 여느 실향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애절합니다.
한명숙: 자유아시아방송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노란사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입니다. 어릴 때 너무 너무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때 저와 친했던. 제가 동네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바로 진남포 역 앞에 ‘역전식당’이라고 해서 식당 했죠. 이름이 김영애인데 저하고 아주 단짝이었어요.
어디 사는지 참 궁금해요. 물론 내 생각에 남한에는 오지 않은 것 같고. 또 제가 친했던 ‘정철언’. 남자친구인데요. 그때 그 친구는 19살이었는데, 이 친구도 어디 사는지. 남한에 살면, 내 이름 석자 아니까, 어디서 만났을 텐데, 중국에 갔는지 소련에 갔는지 살아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진짜 모두 보고 싶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항상 건강하시고, 어디 계서도 내 나라를 잊지 마시고, 항상 내 나라를 사랑하면서 열심히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이 곡 올리려 했더니...역시 올려져 있군요^^
원곡 오리지널을 올릴 수 없어서 품질 떨어지는 버전을 올렸습니다. 오리지널 한명숙님 버전 있으면 올려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마는...
며칠 사이에 누가 내렸네요...그냥 마음으로만 들어야겠습니다!
저도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봐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