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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희주 서재 원문보기 글쓴이: 갈벌희주
* 난 솔직히 전문지식도 없는 분야의 글쓰기를 꺼려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도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이론의 나열이나 짜깁기도 경멸합니다. 그리하여 김정현 시인이 해설을 부탁했을 때, 내 분야의 글도 미숙한 처지에서 그런 '행위'가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무척 고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손을 댔던 것은 아는 만큼만 쓰고, 느낀 것만큼만 쓰자는 나름의 경계를 세운 다음이었기에 '시평'도 아닌, '해설'이라 하지 않은, '발문' 형태를 취했습니다.
* 이 분야의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부끄러움을 전합니다.
<발문>
소리를 그리거나 풍경을 들을 수 있는
-김정현의 시집 <복사골 춘향이>를 읽고
시인의 머릿수가 거의 일만 명에 육박한다는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시집이(몇몇을 제외하고) 출판되자마자 바로 사장되어버리는 나라, 또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되려는 사람들의 샘이 결코 마르지 않는 나라,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인이 되고나선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나라, 아니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며 겸손할 줄도 모르고 제 주제파악도 못하는 시인들의 천국, 이 찬란하고도 참담한 양면성 위에 수줍은 <복사골 춘향이>가 선을 보입니다.
먼저 사설을 풀어 놓을까요.
내가 김정현 시인을 만난 것은 어느 문학 단체의 세미나가 수안보에서 열렸던 2005년입니다. 그때 나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출신 소설가인 김준웅 선생과 방을 같이 썼고 정현(이 호칭을 이해하시압)은 발칙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끼 덩어리 신준희 시인과 룸메이트였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십 년은 연상이었던 김준웅 선생께서 정현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탄하여 며느리 삼고 싶은 여자라며 깜빡 죽었습니다. 오죽하면 뒤만 졸졸 따라다녔겠습니까. 덩달아 나도 같이 따라다닐 밖에. 그때 정현의 나이가 마흔 무렵이었지요, 아마. 지금에 비하면 청춘이었네요. 모르긴 몰라도 김선생의 며느리 운운은 의뭉한 소설가다운 핑계였을 겁니다.
내가 받은 정현의 첫인상은 ‘아이처럼’이나, ‘아이 같은’이었습니다. 아직 시를 단 한 편도 보지 못할 때였지요. 항상 눈가에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고 소리 내어 웃을 때면 그렇지 않아도 찢어진 눈이 더 한껏 찢어지곤 했습니다. 정현식 언어로 표현하라면 “까르르까르르”정도 될 겁니다. 당시 나는 시로 활동한 지 십여 년이 흘렀으나 내가 쓰는 시에 절망하여 소설로 방향을 바꾸어 막 등단할 때였지요. 문학판을 아주 떠날 수는 없었던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그 뒤로 문학지에서 정현의 시를 종종 접하여 관심 있게 읽을 수 있었고 얼마 안 가 첫 시집 <네가 손끝으로 말하면 나는 작은 눈으로 듣는다>(2005)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요. 그 시집 해설을 한 강기옥 시인은 “시는 곧 그의 삶이며 사랑의 실천”이라 했고, “시로 이루어낸 현실의 꿈”이란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어 정현은 제2시집 <그림자에도 색깔이 있다>(2009)를 펴냈고, 제3시집 <광야에 떨어진 풀씨>(2011)를 세상에 내놓아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했습니다. 2시집 해설을 한 김광길 선생은 “존재의 물음에 충실한 시인”이란 제목 하에 “무변광대한 자연과의 만남에서 진리의 자연과 교감”을 하고 “주체와 객체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객일치”가 되어있다고 평했지요. 누구보다도 시인을 잘 아는 1시집에 이어 3시집의 해설을 한 강기옥 선생은 “시편들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세월의식은 가슴 먹먹한 울림을 줄 만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하면서 “삶을 반추하는 깨달음과 자신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다짐”이라 했습니다.
이제 4시집의 발문은 내 몫이 됐습니다. 정현은 수화통역사입니다. 장애인을 돕는다는 천사 이미지가 강하지요. 그래서 그의 시도 천사의 작품이 될 수밖에. 이 모두가 사실은 나를 남감하게 했습니다.
정현은 솔직히 내가 감당하기 힘든 정서의 소유자입니다. 왜냐고요? 나는 불온하고, 불손하고, 불순하니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이니까. 불륜마저 또 다른 사랑의 미학이라 외쳐댄 음험해질 대로 음험한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거짓을 참이라고 아득바득 우겨대는 거짓말쟁이니까. 긍정적인 보통명사에 부정적인 접두사로서 비(非)나 불(不)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내가 천사의 작품을 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현의 언어는 시인을 닮아 정직하고 솔직합니다. 사물에 대한 솔직함, 시어에 대한 정직함, 시 앞에서의 솔직함, 시를 기다릴 때의 겸손함, 또 시인이란 데에 대한 겸손함, 시 쓰기의 고통에 대한 솔직함, 삶에 대한 정직함. 이러한 솔직함과 정직함과 겸손함은 진지함과 통합니다. 나는 인생에 진지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비뚤어진 눈으로 세상을 째려보는 악마적인 소설가에게 천사적인 시인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곧 악마적인 음흉함이 고갤 들었습니다. 그래? 두고 보자. 나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저 밑바닥 시의 근원까지 파헤쳐보리라는 각오 아래 정신을 집중하는, 렐리기오(religio)의 상태를 이 글을 쓰는 동안 유지하리라.
문학이 우선이야, 사람이 우선이냐.
많이 들어본 소리일 겁니다. 특히 문인들의 회합 장소에서 자칭이든 타칭이든 원로라 하는 분들이 격려사랍시고 곧잘 떠들어대곤 하는, “먼저 사람이 돼라, 글은 나중이다”라는 말. 꼭 무슨 고상한 잠언 같이 들리지요.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입이 가소롭습니다. 그런 물음 자체부터, 그런 말을 꺼내는 자체부터 경멸합니다. 그렇게 할 소리가 없어 문인들을 앞에 놓고 사람이 돼라? 그렇게 자신을 과시할 말이 없어 고작 한다는 게 글은 나중이다? 하나마나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보수주의 꼴통들입니다. 변호사들의 원로들이 변호사들의 모임에서 그런 말을 합니까? 의사들은? 교사들은? 농부들은? 안하지요. 너무나 빤한 말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를, 인류 전체가 추구하는 보편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그 말을, 모든 인문학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는 문학을 한다는 이들 앞에서 떠들어야 권위가 섭니까? 이것은 문인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저 나름의 독특한 색깔과 철학과 사고로 무장하여 작품세계를 펼치는 문인의 목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은 교훈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한테도 안 먹히는 그런 얘기를 자신의 생각이나 경륜에서 우러나오기라도 한 양 떠들어대는 치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도 고민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진부한 설전을 다시 하고 싶든지.
사람은 사람이고 문학은 문학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문학은 문학일 뿐입니다.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정현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현에겐 장애인을 돕는 수화통역사라는 천사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 이미지는 어떻게 보면 정현에 대한 찬사일 수도 있으나 희극보다는 비극, 행복보다는 불행, 평범함보다는 비범함, 빛보다는 어둠, 천사보다는 악마를 그리는데 익숙한 문학에서는 시인 자신이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선입견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선입견은 자칫 시인에겐 멍에가 될 수도 있고 독자에겐 편견에 사로잡히게도 합니다. 문학은 자유입니다. 문인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어떤 틀은 문학을 위축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의 김정현 문학이 문학 자체보다는 사람인 ‘김정현’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집 <복사골 춘향이>는 총 10부, 백여 편의 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 소제목 아래 십여 편의 시들을 묶어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지만 내 독법으로는 시에 대한 열망과 자세, 고통, 바람 등을 담은 「오월의 푸른 서사를 읽다」「오월의 나무」「너를 찾아」「도시」「겨울나무」등 삼십여 편, 시인의 내면과 자의식이 드러난 「나무」「첫눈」「광야에 떨어진 풀씨 이후」「복사골 춘향이」「울엄마」등 십오 편, 사회현상과 야유와 민족의식을 드러낸 「나팔꽃」「무궁화」「허새비」「귀족시대」「3.1절」등 오 편, 동심의 세계를 그려낸 「꿈」「팔월 한가위」「동피랑 이야기」「연애하는 아버지」「비누」등 십오 편, 그리고 다른 작품들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김정현 스타일이 보이는「단풍」「설에 하늘로 간 엄마」「펜 끝에서 네가 나온다」「나이 듦에 대하여」「학바위」등 삼십여 편,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무리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김정현 스타일이 아닌 것이 없고 동심의 세계 또한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정현의 매력은 진정성에 있습니다. 좋은 시란 일상에서 발견한 삶의 진정성을 ‘개성적인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개성적인 시어’로 재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현의 시는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관념어들과 시인 자신도 장악하지 못하는 난해한 이미지로 독자에게 의지하는 문법을 파괴한 시들보다, 요즘 대세라는 현실을 더욱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섬 속에서 현실을 다시 확인한다는 공감하기 어려운 시들보다, 거창하진 않지만 솔직담백하며, 어설픈 듯 하면서도 서글픈, 콩깍지를 씌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시 쓰기보다 시 읽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횡횡하는 요즘입니다. 시 쓰기의 기본은 글쓰기인데 그 글쓰기의 기본도 못 갖춘 시들이 난무합니다. 시는 비문(非文)까지도 허용한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묘사의 불일치나 주체의 혼란이 빤히 보이는데도 꿈보다 해몽을 들이대니 지적하는 이가 오히려 무안해질 지경입니다. 김광길 선생도 언급했지만 주체와 객체의 일치는 산문에서만 아니라 시에서도 유효합니다. 시의 애매성과 모호성과 난해함은 시가 시인의 파악하기 어려운 정신세계와 진정으로 일체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시만의 독특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혼돈과 무지, 주객이 전도되어 시인 자신이 시도 장악하지 못한 채 발표해놓고도 의뭉한 미소를 짓는 이들을 난 경멸합니다.
정현은 유려하지는 않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선명한 언어로 부조리한 현실 세계와 자본의 추악한 형태들을 야유하고, 그늘진 삶의 풍경들을 색칠이 덜 된 듯한 순수함으로 곧잘 드러냅니다.
“길 건너서 바라보는 그의 가슴에/ 불을 질러도 끌어안을 수 없는데/ 워메- 남세스러워라.”(「겨울나무」3연)
자신의 시를 겨울나무에 비유한 표현인데 이때의 ‘워메-’ 이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다고요? 나는 못합니다. 그야말로 남세스러워서. 만약 다른 이가 그랬더라도 닭살이 돋을 게 빤한데 정현이 하면 다릅니다. 끼의 천연덕스러움 때문일 겁니다.
정현의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의성어나 의태어, 중첩어의 활용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현은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의성어와 의태어를 가장 애용하는 시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광규 시인은 <시론>이라는 시에서 “언어는 불충분한 소리의 옷”이라고 언어의 한계성을 설파했습니다. 이 말은 내 안에 꿈틀거리는 그 ‘무엇’들을, 또는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느끼는 여러 ‘이미지’를, 소리의 옷을 입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하소연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정현은 봄이 와도 “사박사박” 오고, 나뭇잎도 “얍실얍실” 돋아나고, 달도 휘영청 떠올라 “방실방실”거리고, 아이들도 “올망졸망” 앉아있고, 식솔들도 “뭉그적뭉그적” 치대며 살고, 아지랑이가 “하롱하롱” 잠꼬대를 하고, 비도 “수런수런” 내리고, 해당화는 “새들새들” 꾸벅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면 바람에 살랑거리는 해당화의 모습을 ‘새들새들’ 꾸벅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죽하면 첫눈마저 “사랑해사랑해” 하며 내린다하고, 사랑도 “뜨겁게뜨겁게”, 겨울도 “사르르사르르” 녹아내립니다. 정현은 언어의 결핍성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밑바닥만큼의 시어는 간신히 찰박거리는데요/ 출렁출렁 넘쳐야/ 좋은 시어로 열과 행을 세울 텐데요/ 그 적은 시어가 가끔은 뽀글거리기도 하는데요/ 화력이 약해서 금세 푸르륵 식어버리는데요/ 어느 땐 식지도 않고 끓기만 하는데요(「늪」부분)
팔팔하게 살아있을 어휘를 찾지만/ 책꽂이에 꽂혀있는 수많은 언어는/ 이미 장례 치른 서사/ 새로 태어날 이야기 찾는 오늘(「너를 찾는다」2연)
언어에서 결핍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결핍감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흡족할 만한 언어를 찾으려 사전을 수시로 뒤적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을 겁니다. 정현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 가난한 시어에 대한 절망을 보충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사물의 이미지를 명징하게 표현해내는 데는 애매모호한 관념어보다 흉내말이나 시늉말이 훨씬 더 효과적이니까요. 의성어와 의태어의 세계는 리얼리즘이고 실존의 대상에 대한 끈질긴 탐구입니다.
내 원고에 뒹구는 그것이/ 살아 숨 쉬는 작은 詩語이기를(「死語」부분)
이렇게 생성된 시어들이 정현은 오래도록 살아 숨 쉬고 있기를 바라지만 시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죽은 언어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애도합니다. 이 시어의 숙명은 어머니의 시어 소멸(보통명사)로 이어지지만 새로운 형태(대명사)의 의성어와 의태어를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거기서 그것 가져와라/ 저기 가서 저것 좀 사와라/ 이말 저말 다 도망가고/ 거기와 그것, 저기와 저것만 남았다.(「나이 듦에 대하여2」2연)
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위한 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비슷하게라도 말하려는 사람들이 시인이지 않을까요. 소리를 그릴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나 정현은 소리를 그립니다. 풍경을 들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풍경을 들을 수 있냐고요? 정현은 풍경을 기가 막히게 들려줍니다. 뭔가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눈물이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웃음이, 몸짓이, 침묵이 말을 대신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의 눈물과 웃음과 몸짓과 침묵이 바로 시입니다. 정현은 이러한 눈물과 웃음과 몸짓과 침묵을 의성어나 의태어로 나타낼 줄을 아는 시인입니다.
마른 눈물 맺히게 하는/ 한낮의 햇살이/ 바닥을 끌어안고도 소스라치는 웃음/ 무릎에 상처라야 알 바 아니다// 푸른 바람에 실려 간 서방이 있던 자리/ 그 큰 상처를 어찌 꿰매랴/ 피, 눈물 낭자해도 짠바람만 술렁이는/ 헛웃음 수애수애 터트리는/ 매정한 바다.(「남당리」부분)
유한마담들이 전어 굽는 남당리에 모였습니다. 그 시끄러운 왁자지껄 속에 먹자판이 벌어지면서 술에 취해 엎어져 무릎에 상처가 생기는데, 그 상처는 어촌마을의 상처, 과부들의 가슴속까지 헤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다는 매정하게도 헛웃음만 ‘수애수애’ 터트립니다. 슬픔과 해학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 철썩철썩도 아닌 수애수애라니? 소리가 그려지고 풍경이 들리잖아요? 이 기막힌 의성어의 비밀을 정현은 귀띔해 줍니다. 무릎 깨진 이의 이름이 ‘수애’라고. 만약에 그이가 ‘영자’였다면 ‘영자영자’라고 했겠습니까. 파도소리를 ‘수애수애’라고 활용할 수 있는 재치와 감성의 시인이여, ‘헛것헛것’, ‘새들새들’과 함께 새로운 문학용어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시의 본령인 서정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정서와 사상을 표현한 것이며 문학의 가장 오래 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 형태는 시의 지배이데올로기 문법이 되었고 그걸 추종하는 이들에 따라서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다가 현대에 들어와서는 기이한 형이상학적 자의식을 표출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정현은 이 진화를 거부하고 그것도 가장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자신을 정착 시켰습니다.
성에 하얗게 낀 겨울에/ 그 앤,/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호오- 호오-/ 따뜻한 여름을 동냥했다// 한 김 두 김/ 받아 모은 훈기, 그 앤/ 두 손 두 팔 벌려/ 함박꽃으로 피었다(「너를 찾아」전문)
언 손을 녹이려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시인의 시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녹아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겨울엔 여름 같은 따뜻한 시를, 여름엔 겨울 같은 시원한 시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죽을 똥 살 똥/ 그래도 숨은 멈추지 않는다// 그건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았다는 것/ 허술한 모습/ 세상에 등을 돌리면 날아올 화살/ 화살촉 찰싹 달라붙을 과녁이 될 뒤통수/ 여름의 태양처럼 확확 달아오른다// 영광의 잔치 벌일 준비나 돼야/ 동그란 뒤통수 보이며 당당하게/ 그 분에게로 가지.(「이력」전문)
시인의 탄생은 비극입니다. 토마스 만은 “문학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까지 했습니다. 성공한 작가의 엄살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는 게 지금 이 시대 문인들의 실상이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시인의 길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써놓은 낙서가 감동으로 다가올 때 비극은 시작됩니다. 그 순간부터 문학이란 올가미에 걸려들고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올가미는 죄어들 뿐입니다. 그러나 문학은 쉽사리 품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소태처럼 쓰디쓴 좌절의 세월 끝, 절망에 배가 부르고 마침내 터져버릴 지경에 이를 때쯤이나 시린 옆구리 한쪽 겨우 내줄 정도이니, 어느 세월에 회심의 역작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무당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낙점한 자만이 무당이 될 수 있습니다. 낙점의 절차가 무기(巫氣) 혹은 신기(神氣)의 발현입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하다가 마침내 내림굿으로 무당의 길을 택하여 치유를 하게 합니다. 만약 내림굿 받기를 거부한다면 평생 앓다가 죽는 수밖엔 없습니다. 즉 무당 노릇은 죽음의 값인 것입니다.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정성을 다해 굿을 함으로써 나머지 생을 바칩니다. 자기 목숨이라도 자기 목숨이 아닌 자, 비극의 주인공은 무당 자신입니다.
여기에 자기 목숨이라도 자기 목숨이 아닌 자, 정현이 있습니다. 젊은 날에 뇌하수체에 이상이 와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시 「이력」은 정현의 아픈 과거이며, ‘시작(詩作)’에 대한 자세이고, 갈망하는 시의 모습입니다. 정현은 그 위기에서 절대자와 위험한 거래를 합니다. 그 거래는 곧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값, 이것이 바로 봉사이고, 수화통역이고, 시 쓰기입니다. 1%에게 99%의 고통을 통역하고 99%에겐 1%의 희망을 통역하는 제의의 길입니다. 진정한 무당에게 거부할 수 없는 무병이 오듯이, 시인에게 시병(詩病)은 어쩌면 당연한 통과절차입니다.
진정한 사제는 자기를 제물로 바치고 제의를 치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인간, 예수입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의 값은 인류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하고픈 말을 토해/ 후회할까봐/ 가슴에 꽁꽁 싸매두고서// 투명한 유리 같은/ 말 위에, 먼지/ 덮여버릴까봐// 두려워 떨던 그 밤/ 몰래 빚은 눈물 잔에/ 잘랑잘랑/ 채워지려 하네.(「어디를 보니」 전문)
행여나 뒷말이 무성할까봐 직설적인 말은 피하고 끙끙 앓던, 은밀하기에 더 외로운 그 밤, 결국은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킵니다. 어떻게? 눈물로. 눈물은 바로 진정성입니다. 시인의 시작행위는 시 탄생을 위한 제사입니다. 정현은 이 제사에 진정성의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저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자신을 울리고 벅차게 하는 증거의 진정성. 거기에 시에 대한 끊임없는 자격지심은 언제나 겸손함과 경건함을 동반합니다. 가짜 사제가 난립하는 시대, 그럴 듯한 제물로, 그럴 듯한 주술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그 빈한한 신심은 금방 들통 나기 마련이어서 더 강력한 최음제, 제물을 준비하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장단을 맞출 줄 모르는 남원골 춘향이/ 그네를 탈 때만 춤을 추더니/ 이몽룡의 장단에도 춤을 추었다(「복사골 춘향이」1연)
어느 장단이든 박수만 받으면/ 어깨춤부터 들썩이는 복사골 춘향이/ 얍실얍실 허리춤 추다가 엉덩이를 흔들흔들(「복사골 춘향이」3연)
인간뿐만 아니라 특정 동물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배반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작가는 고향에 대한 빚이 많은 족속입니다. 비록 조선천지가 부동산 광풍에 휩쓸려 있었지만 유독 그곳만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해 떼부자가 되는 행운을 주지 못했을지라도, 풋나물로 끼니를 연명하던 산골짜기거나 갯벌에서 난 갯것들로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갯가일망정, 빚을 졌다 생각하고 끊임없이 문학의 원천으로 삼으며 더군다나 배반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이제 정현은 새로운 터전이 될 복사골, 부천을 사랑하리라, 고향처럼 여기리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느 장단이든 어깨춤을 추고 엉덩이를 흔들 태세입니다. 정현은 그런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복사골이라는 터전이 자신이 발견한 곳이 아니라 이 땅이 자신을 발견한 것마냥 수용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복사골은 정현에게 제약과 속박일 수도 있지만 안식과 평화, 자유의 땅이자 삶의 구속이길 바라고 자신의 역사를 새겨넣어야할 땅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이제 정현은 분명 농아들처럼 눈이 밝아진 게 틀림없습니다.
수십 해 헤매어도/ 쉴만한 푸른 초장이 보이지 않아/ 아직도 개발 중인 나의 지경/ 미개발광야.(「나에게」3연)
정현은 자신을 위로합니다. 고속도로 같은 삶이 아니었다 해도, 가도 가도 오르막길과 자갈길뿐이었다 해도, 꿈의 지경이 될 미개발광야가 남아있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건 바로 밝아진 눈이 해야 할 몫이며, 아울러 간혹 가다 나타나곤 하는 미숙한 표현들도 걸러낼 것이라 믿습니다.
정현의 좋은 시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강렬한 지, 음험한 내 눈으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목숨 걸고 글을 쓴다고 자부했던 글쟁이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사골 춘향이>를 다 읽고 난 지금, 도대체 난 무얼 고민했던가, 공허할 뿐입니다.
마침내 시인이여. 두고 보자던 나의 다짐도 허세였으니, 이 글을 쓰는 동안의 위리안치는 이것입니다.
즐거운 형벌이네/ 행복한 벌을 쓰고 있네.(「나의 길」3연)
첫댓글 이번에 출간된 김정현 시인의 시집 발문을 제가 썼기에 올려봅니다. 김정현 시인은 <지구문학> 출신으로 수화통역사이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를 솔직히 싫어하는데 개인적인 부탁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