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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됩니다!
요즘 이런저런 육체노동을 자주 하면서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일이라는 것,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가끔 왜 사나? 싶을 때, 우울감에 젖어들 때, 만사 제쳐놓고 육체노동에 한 번 뛰어들어 보십시오.
일을 설렁설렁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몰입할 때, 완전히 헌신할 때, 거기서 오는 상쾌함이 얼마나 큰지요?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치료제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몰입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 노동, 근로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눈만 뜨면 매일, 그리고 평생토록 되풀이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정말 가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며, 더불어 동료 인간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또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일을 통해 한 존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로 인해 한 존재가 활짝 꽃 피어나며 충만한 인생을 엮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노동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암담하다 못해 참담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안에서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 그로 인한 극도의 차별대우와 상실감! 틈만 나면 자행되는 해고! 살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러 측면의 계측에서 불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국가별 노동시간을 따지면 최상위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이 우리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더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취직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면접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벼랑길의 끝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슬픔은 취직하고 나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직장,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받는 직장을 꿈꿨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근로자들은 경영인들의 부속품처럼 쉴새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청을 위해 먼저 그분의 청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복음: 요한 15,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다 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가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아야 청을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기 전에 그분의 청이 무엇인지 묻고 내 안에서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떤 청년을 제가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 청년은 점점 거짓말과 핑계로 일관하며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작지 않은 액수를 청하기에 그 사실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제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이번에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잘못하기는 하였지만,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핑계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나아지기 싫다는 표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고 그 사람은 교만함에 더 큰 사기를 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야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절대 거짓말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께 붙어있으라고 하시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고 하십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청한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절대 거짓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거짓이나 핑계를 절대 대지 말고 무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자기 마음에 담아 놓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며 계속 자신이 원하는 것만 청합니다. 다급한 처지만 제시하면서.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먼저 기름 두 방울이 든 숟가락을 들고 성을 한 바퀴 구경하고 오라고 합니다. 기름을 흘리지 않았다면 행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성을 돌다가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품에 정신이 팔려 그만 기름을 흘려버립니다. 성주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줍니다. 그때는 이 사람이 기름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성주는 행복의 비밀은 기름 두 방울을 흘리지 않으며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먼저 나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이 복권처럼 한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하여지려면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매일 행복하려면 매일 꾸준히 감사일기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감사일기를 쓸 사람인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을 주어도 쓸모없게 됩니다. 은총을 그렇게 소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고 나서부터는 돈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내가 그 청을 위해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분 안에 머무는 방법을 알아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위해 주님도 원하는 게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청하는 것을 위해 주님께서 나에게 청하는 게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먼저 하십시오. 그러면 내 청원이 무엇이든 이뤄질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죽고 당신의 모습으로 조금만 변화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면 당신 은총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는 참포도나무요.”(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고,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가지는 자신의 생명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우리는 나약하므로 우리가 선행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아드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다.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옛날 사냥을 너무 좋아하는 어느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이 어느 날 사냥 갔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게 되어, 곧바로 동행했던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임금이 “어떤가?”라고 묻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 후, 임금의 상처가 덧나서 다시 주치의를 불러서 괜찮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주치의는 정성껏 치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결국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서, 이 돌팔이 주치의를 감옥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치의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주 후, 임금은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곳에 사는 미개한 원주민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임금을 자기들 신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사장이 임금의 손가락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가만, 저 사람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신께 바칠 제물이 불경하구나. 그냥 풀어줘라.”
풀려나면서 임금은 생각했습니다. 잘려진 손가락을 하나의 불행이고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치의를 풀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느냐는 너의 말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대가 옳았다. 미안하다.”
의사는 “무슨 말씀입니까? 감옥에 가두신 것이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냥에 따라갔다면 제가 제물이 되었을 테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결과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주님께 더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새기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처럼 참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계획에 함께하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곁을 떠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 안에서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안네 소피 스웨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그분께서는
목수의 아들이기 이전에
신의 아들이셨다네.
그것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하느님의 권능이 떠나지 않고
그들 곁에 오래 머물려 계셨으리.
우리도
하느님의 권능이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란다면
이웃의 인성 안에 숨어계시는
하느님의 신성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랑은
가식과 위선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서 맺은 사랑의 열매가
우리를 살리는 열매입니다.
밀 알 하나가 땅에 묻혀야 열매가 생기듯
땅에 묻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머무름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서는
죽음을 각오할 수 없습니다.
복음 말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