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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지 탈환을 위한 우크라이나 반격 작전이 당초 기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하면서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꼭 80년전 '그 곳'에서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의 교훈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러-우크라군이 대치중인 최전선 일원과 그 주변(우크라이나 접경 쿠르스크주와 벨고로드주)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과 소련 붉은 군대가 맞붙은 '쿠르스크 전투'는 우크라이나 반격 흐름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미국 안보정책 센터 및 요크타운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스티븐 브라이엔 전 국방차관은 지난달 19일 '무기와 전략' 사이트 기고에서 "러-우크라 간의 자포로제(자포리자) 전투가 '독-소(獨-蘇) 전쟁'의 향방을 가른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와 비슷하다"며 "우크라이나가 자포로제 탈환에 실패할 경우, 80년 전의 히틀러와 같은 처지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같은 관측은 브라이엔 연구원이 처음은 아니다. '독-소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독일의 일간지 디벨트는 지난 4월 19일 우크라이나의 봄철 반격 작전이 계속 늦어지자, '쿠르스크 전투'의 재연을 우려하고 나섰다. 나치 독일군이 당초 계획한 '쿠르스크 공격' 계획을 몇 달간(4월에서 7월 까지로) 늦추면서 소련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대패했다는 것이다. 디벨트는 "지금의 러시아군도 1943년 봄 소련군이 사용한 전술을 차용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쿠르스크 전투의 교훈을 되살린 독 디벨트/웹페이지 캡처
무기와 전략 사이트 홈페이지/캡처
우크라이나군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독일군과 비교하더라도, 군사력 측면에서는 러시아군(당시 소련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할 수 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에 전투기와 폭격기, 지상전 항공기 등을 대거 동원했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소련은 1,130대, 독일은 711대의 전투 항공기를 '쿠르스크 전투'에서 잃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현재 반격 작전의 제공권을 러시아 측에 넘겨준 상태다.
쿠르스크 일원에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탱크전이 펼쳐졌다. 독일은 2,700대, 소련은 3,600대를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다. 그 결과, 독일은 1,536대, 소련은 2,471대의 탱크를 잃거나 손상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서방 측으로부터 레오파드-2 탱크와 브래들리 장갑차 등을 지원받았지만, 기갑부대의 규모 면에서 러시아군에 아직 못미친다는 평가다.
특히 '디벨트'는 '쿠르스크 전투'를 되돌아보면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당초 계획보다 늦어지는 데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늦어지는 사이, 러시아군은 최전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초반부터 주춤거리는 가장 큰 이유다.
그렇게 교착상대가 지속되면 러시아군(80년 전에는 소련군)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할 수도 있다.
◇왜 쿠르스크 전투인가?
제 2차 세계대전의 판을 바꾼 전투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동서 냉전시절엔 진영 별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대립 등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냉전 종식 이후에도 스탈린그라드 전쟁을 비롯,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 전투, 쿠르스크 (벌지)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놓고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 반격 작전을 전후해 소환되는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다. 공교롭게도 지난 4일 (혹은 12일)로 '쿠르스크 전투'는 80주년을 맞았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가 때맞춰 '불타는 아치(반원 형태로 툭 불거졌다는 뜻/편집자), 80년전 쿠르스크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은 어떻게 일어났나' (Огненная дуга. Как под Курском 80 лет назад произошел перелом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라는 기획 기사를 쓴 이유다.
이 매체는 '전쟁의 전환점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도권이 상대에게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계기가 됐는지 여부"라며 "엘 알마메인은 주 전장이 아니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미 나치 독일이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남은 것은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인데,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체 흐름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전환점이 된 것은 '쿠르스크 전투'라고 스트라나.ua는 판단했다.
그같은 결론은 1968~1971년 소련에서 제작된 대하 드라마 '해방'(Освобождение, 전체 5편)으로 확인된다. 이 시리즈는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가 아닌, '쿠르스크 전투'에 맞춰진 제 1편 '불타는 아치'(Огненная дуга, 1968년)로 시작됐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건, 스탈린그라드서 패주한 독일군이 회심의 '쿠르스크 반격'에 실패하면서 확연히 드러났다는 뜻이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해방' 대하드라마의 1편 '불타는 아치'/출처:키노포이스크.ru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권이 바뀌는 시발점이였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의 판을 완전히 바꾼 대회전(大會戰·총력전)었다. 소련군은 쿠르스크전 승리 이후 파죽지세로 서진(西進)하게 된다.
◇쿠르스크 전투의 배경
시작은 볼가강 전투였다. 1942~43년 겨울, 하르코프(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넘어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독일군은 이미 지쳐 있었다. 소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독일군의 전열을 무너뜨린 뒤 한 달만에 볼가강에서 '세베르스키 도네츠크' 강변으로 치고 들어갔다. 소련군은 곧 드네프르강에 도달할 태세였다.
당황한 독일 총통 히틀러는 1943년 2월 중순 자포로제(우크라이나 자포리자)로 급히 날아와 '베르마흐트'(Wehrmacht, 독일 나치군)의 방어작전 계획 수립에 나섰다. 그 때까지 소련군은 쿠르스크와 벨고로드, 하르코프, 보로쉬로프그라드(현재의 루간스크주)를 휩쓸고, 하르코프를 지나 드네프르강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2월 하순경에는 히틀러가 있는 자포로제에 거의 다가섰다, 소련군 내부에서는 '히틀러를 생포하자'는 소리까지 나왔다고 한다.
1943년 2월 자포로제에서 히틀러를 영접하는 폰 만슈타인 장군/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러나 군사 전략적으로는 (히틀러를 생포할 있는) 자포로제보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가 더 중요했다. 돈바스 지역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주둔 독일군의 핵심 보급로였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당시 소련군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를 손쉽게 점령했다면,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대재앙을 맞을 뻔했다. 소련의 니콜라이 바투틴 장군이 남서부 전선의 주력 부대를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급히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은 상대적이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향하는 소련군에게도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병참 문제'가 불거졌고, 나치군에게도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다. 당시 독일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현지 지역 사령관)이다. 게다가 독일군 최정예 SS기갑 사단이 2월 말 지원군으로 현지에 도착했다.
만슈타인 장군은 역시 영리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측면을 치고들어가면서 포위망을 넓게 펼쳤다. 소련군은 그 포위망에서 급히 빠져 나와야 했고, 만슈타인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하르코프로 짓쳐 들어갔다(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 그렇게 하르코프는 다시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소련군이 그해 2월 16일 어렵사리 탈환한 하루코프는 한 달만에 다시 독일군에게 넘어간 것이다.
뒤이어 벨고로드를 독일군에게 빼앗기면서 그 일대는 '쿠르스크 아크(돌출) 전선'(나중에 Kursk Bulge로 역사에 기록)이 만들어졌다.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반원형 전선이었다.
◇독일군의 반격작전 수립
이 전선은 1943년 상반기(3월 말~7월 초) 내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독일군 만슈타인 사령관은 그해 3월 중순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으로 소련군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린 뒤, 하르코프에서 타간로그(러시아 로스토프주 도시)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포위망을 짜자는 안을 냈다. 1년 전인 1941~42년 겨울, 시몬 티모셴코 소련군 원수가 하르코프에서 마리우폴, 타간로그로 공격해 돈바스 주둔 독일군에게 타격을 안겼던 바로 그 작전이었다.
만슈타인 사령관은 히틀러에게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약했지만, 독일 수뇌부는 경제 및 외교 정책상의 이유로 돈바스를 다시 소련군에게 넘겨준다는 건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소련과 휴전 협정을 맺도록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로서는 무솔리니의 주장을 거부하려면, 돈바스 지역의 전략적 양보가 아니라, 새로운 영토의 점령이 간절한 때였다.
고심 끝에 히틀러는 만슈타인 사령관의 작전 제안을 물리치고, 다른 참모의 안을 받아들였다. 쿠르스크 돌출 전선을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돌파한 뒤,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작전 계획이었다. 그 유명한 독일의 '시타델'(Citadel 성채) 작전이다.
독일의 '시타델 작전' 계획을 누가 스탈린에게 알렸는 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비밀 해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정보원인 존 캐른크로스(John Cairncross)가 그 해 3월 말 스탈린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고, 베를린의 소련 정보 요원으로부터 '시타델 작전' 계획을 귀뜸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베를린 주재 요원은 암호명 '베르테르'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신원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벨고로드에 진입한 독일 '티거 전차'/사진출처:스트라나.ua
노련한 야전 사령관인 만슈타인 장군도 작전 지도를 보면서 '시타델 작전'이 성공할 경우, 모스크바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다만, 소련군이 방어벽을 구축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이 반대했다. 우크라이나의 땅이 녹는 4월 진흙탕(라스푸티차 현상/편집자) 속에서는 독일군이 자랑하는 티거(Tiger), 판터(Panther) 전차(탱크)와 페르디난트(Ferdinand) 자주포 등 강력한 중화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자꾸만 연기되는 시타델 작전(성채 작전) 개시
히틀러는 '시타델 작전' 계획을 승인하면서도, 작전 개시 D데이는 20일 가까이 뒤인 5월 3일로 정했다. 그러나 D데이가 가까워지자 또 미뤘다. 히틀러는 티거, 판터 전차와 페르디난트 자주포의 추가 도착을 기다렸다.
반면, 소련군은 섣불리 공격하기 보다는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1년 전의 짜릿한 승전과 불과 한달 전의 하르코프 패배를 곱씹으며, 독일군의 다음 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스타델 작전' 계획을 보고 받고도, '먼저 움직이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했다. 대신 두가지 명령을 내렸다. △쿠르스크 전선 돌출부에 주둔한 군대가 자칫 독일군의 포위망에 빠질 것을 우려해 동쪽으로 이동 배치하고,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 방어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스트라나.ua는 "스탈린의 이같은 지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 이후에도 전략적 주도권이 소련군의 손에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쿠르스크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독일군도 소련군의 '방어 작전'을 재빨리 파악하고 작전 재점검에 들어갔다. 5월 초에 열린 작전회의에서 발터 모델 원수는 선제 공세를 포기하고, 소련의 반격을 기다려 적의 병력과 군사장비를 최대한 소진시킨 뒤(공격과 방어의 손실 비율은 3대1이다/편집자) 공격하겠다고 주장했다. "쿠르스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 세계에서 누가 그 전선을 알고 있겠느냐?"고 무시하는 표현도 나왔다고 한다.
발터 모델 원수의 계획대로라면 전선의 교착 상태가 1943년 여름 내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유일한 변수가 날씨였다. 그 당시만 해도 소련의 '동장군'에 혼이 난 독일군은 여름에 공격해야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철로 접어들면 공격 기회가 스탈린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히틀러는 판단했다. 또 무솔리니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빠른 승리가 필요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면, 뭇솔리니가 소련과의 휴전을 독촉할 게 분명했다.
러시아군 진지를 돌파하는 독일군 전차/대하드라마 '불타는 아치' 영상 캡처
히틀러가 믿은 것은 세계 최강의 '티거 전차'였다. '티거'가 소련군이 구축한 강력한 방어선을 돌파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틀러는 공격 D데이를 6월 12일로 연기한 뒤, 또다시 7월 5일로 미뤘다. 그 정보는 모스크바에게도 알려졌다. 7월 4일~5일 밤, 소련군 정찰대가 지뢰 제거 작업을 하던 독일 공병들을 체포했다. 독일 '시타델 작전'의 개시 시간은 새벽 3시였다고 했다.
독일군의 공격 개시 40분 전인 새벽 2시 20분, 소련군 포대가 어둠을 사르면서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독일군에게 '우리는 당신네 작전 계획을 이미 알고 있으며, 방어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 심리적인 효과도 컸다.
기습을 당한 독일군은 당초 작전 계획보다 3시간여 늦은 오전 6시에야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시타델 작전'에는 34개 탱크및 기계화 사단, 16개 보병 사단, 4개의 독립 탱크 여단 등이 참여했다. 각종 추정에 따르면 총 80만~90만 병력에 2,700여대의 탱크와 자주포, 각종 야포(티거 295대, 판터 230대, 페르디난트 자주포 100대 포함)가 동원됐다. 지휘는 북쪽에서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귄터 폰 클루게 장군이, 남쪽에서는 폰 만슈타인 장군이 맡았다.
◇시타델 작전의 전개 과정은
당시 병력의 수적 우위는 소련군이 점했다. 그러나 정보및 작전에서 뒤졌다. 소련군은 북쪽의 오렐 지역에서 독일군의 주력이 밀고 내려올 것으로 보고, 방어 진지를 구축했으나 아니었다.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남쪽 부대가 화력면에서 더 강력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토텐코프(Totenkopf) 나치 친위대및 라이크(Reich) 사단을 포함하는 제 2SS기갑 군단이 합류한 곳은 남쪽이었다. 결과도 남쪽과 북쪽 전선이 서로 달랐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독일군 공격 루트/사진출처:스트라나.ua
발터 모델 원수가 직접 통제한 폰 클루게 장군의 북쪽 독일군은 공격 5일 만에 큰 손실을 입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남쪽 전선에서는 제 2SS 기갑여단을 앞세운 독일 제 4기갑 군단이 러시아 방어막을 무너뜨렸다. 비록 러시아 방어진지 두 곳을 따로따로 돌파한 뒤 합류해 북동쪽으로 진격하는 당초 계획은 무산됐으나, 제 4기갑 군단은 러시아 방어선을 뚫고 쿠르스크로 향하는 전략 요충지인 쿠르스크주 남부 오보얀(市)로 다가섰다. 미하일 카투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 제 1 전차군단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게 분명해졌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가장 큰 문제는 탱크의 성능이었다. 소련군 주력 T-34 탱크는 '티거 탱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티거 전차'의 88mm 포는 멀리서 소련군 T-34 탱크를 제대로 타격했고, 근접전에서 T-34 탱크의 76.2mm 포가 티거 탱크의 견고한 장갑을 뚫지 못했다. 소련군은 급히 지원군을 보내 오보얀으로 향하는 독일 제 4기갑군단의 측면을 치도록 했다. 이에 독일군은 '오보얀'에 진입하지 못한 채 동쪽의 벨고로드주(州) '프로호로프카'(Прохоровка)로 진격 방향을 틀어야 했다.
◇프로호로프카의 최후 결전
베를린은 반격 첫날부터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일 언론 매체(라디오)는 반격 작전의 개시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대 국민선전을 담당하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은 소련군이 공격을 가해왔으며 독일군은 이를 물리쳤다고만 발표했다. 독일은 반격작전의 성공을 기다려 대대적으로 승전을 알리고 싶었으나, 정작 전황은 기대와 달랐다.
'쿠르스크 돌출 전선'의 북쪽에서 독일군의 공격이 중단된 뒤 무솔리니가 급전을 보내왔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7월 10일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이었다. 히틀러에게는 만슈타인 장군이 남쪽에서 소련군 방어벽을 넘어 쿠르스크로 진격을 계속하는 게 승전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겨졌다. 독일 제 2기갑군단이 곧바로 '프로호로프카 전투'에 투입된 까닭이다.
쿠르스크 전투/대하드라마 '불타는 아치' 영상 캡처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지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탱크전이었다. 양측에서 병력 약 200만명,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동원됐다.
전환점이 된 날은 7월 12일이었다. 독일의 '시타델 작전' 개시 1주일 만에 스탈린은 드디어 '쿠투조프 작전' 명령을 내렸다. 이날 새벽부터 양군은 '프로호로프카'에서 대충돌했다. 마을 서쪽에서는 독일의 '토텐코프' 나치 친위대와 소련군 제 5근위대가, 남쪽에서는 독일 제 3기갑군단과 소련 제 69군이, 동쪽에서는 독일 '아돌프 히틀러'와 '라이크' 사단과 소련 제 5근위 탱크 여단이 맞붙었다. 소련의 T-34 탱크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독일의 '티커 탱크'와 접근전을 적극적으로 벌였고, 소련 공군은 '에어 폭탄'으로 독일군 탱크 파괴에 앞장섰다.
전력 손실은 소련군이 훨씬 컸다. 소련군은 최소 328대의 전차를 잃었으나, 독일군은 약 70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끝내 '프로호로프카'를 점령하지 못했다.
'불타는 아치' 영상 캡처
이튿날(13일) 히틀러는 '시타델 작전'을 중단하고, 일부 병력을 이탈리아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만슈타인 장군은 소련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공격 재개를 주장했다. 독일 제 2SS기갑 여단이 히틀러의 동의를 얻어 이틀 더 전진했지만, 전황은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다. 소련 예비 전력이 속속 전선으로 투입됐기 때문이다.
만슈타인 장군은 훗날 그의 회고록 '빼앗긴 승리(Потерянные победы)'에서 공격을 중단한 히틀러를 날카롭게 비난했다. "승리가 가까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는 군사전문가들은 별로 없다. 만슈타인 장군은 소련군의 예비전력을 과소 평가했으며, 곧바로 루만체프(Румянцев) 사령관의 부대와 맞딱뜨렸다. 하지만, 공격 위주의 독일군은 수비와 방어에 약점을 드러냈다.
소련군은 여세를 몰아 8월 5일 쿠르스크 돌출 전선의 북부 오렐과 벨고로드, 하르코프 등을 해방시켰다. 뒤이어 돈바스 지역과 자포로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키예프 등을 차례로 수복했다.
◇ 독일 제 3제국의 최후
독일군의 여름철 반격작전(쿠르스크 전투) 실패는 곧 외교적 문제로 이어졌다. 무솔리니는 이미 7월 25일 로마에서 쫓겨났고, 뒤이어 들어선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 이탈리아 정부는 연합군과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기세도 꺾이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스탈린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이란 테헤란에서 만났다. 유엔 창설을 포함한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했다.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쿠르스크 전투(1943년 7월)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의 아르덴에서, 또 1944~45년 겨울 한차례 반격에 나섰지만, 동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소련군의 공세에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의 제 3제국은 이제 서서이 종착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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