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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묵상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 친구를 많이 만드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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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친구를 많이 만드는 법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가르침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저는 집사란 주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선심을 팍팍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선들 곧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재물을 불의하다고 단정하시고,
그러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재물은 그 자체로 불의한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럴 리가 없지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어찌 불의합니까?
영어에서 ‘Goods’란 말이 있습니다.
보통 ‘재산’, ‘재물’, ‘재화’, ‘상품’ 등의 뜻으로 쓰이는데
이 말이 어떻게 이런 뜻이 됐을까 제 나름으로 추측해보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신 것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All Good)이시고,
모든 선의 원천(Fountain of all goods)이시기에
그분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도 당연히 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물이 불의하고 어떤 경우 불의합니까?
한 마디로 불의한 사람의 재물이 불의합니다.
하느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한 자의 재물이.
또 재물을 하느님 대신 섬기는 자의 재물이.
오늘 복음에서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 말씀하셨지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렇게 재물을 하느님 대신 섬길 때 재물은 재물의 신 곧 물신(物神)이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어도 되지만 돈은 없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의한 것일 수도 있는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재물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불의한 것일 될 수도 있고 선행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께는 무가 반 트럭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늘 하듯 옆 식당과 이웃들에게 무를 나눠드렸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재물은 결코, 불의하지 않고 사랑의 도구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선들(goods)을 악용하지 않고 선용하면,
어제 말씀드렸듯이 선심을 팍팍 쓰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들을 또 주시고 더 주십니다.
지난 바자회를 통해 저희는 많은 장학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작년보다 더 많은 기금이 조성되어 올해는 작년보다
13명이 더 많은 40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회에서 의견이 갈렸습니다.
내년에 다시 줄어들지 모르니 작년 수준으로 주자는 의견과
쌓아놓지 말고 들어온 것을 모두 그대로 주자는 의견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의견은 금세 하나로 모였습니다.
대상을 우리가 조절하려 들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나누자는,
그러니까 많이 주시면 많이 나눠주고 적게 주시면 적게 나눠주자는 쪽으로.
우리는 선의를 가지고 선심을 팍팍 쓰면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을 악용하지 않고 선용하는 것이고,
불의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친구를 만드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많이 나눠주는 사람에게 많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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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 민중운동 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 회의)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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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물질을 섬길 것이냐? 답은 명확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5,37). 는 말씀을 기억하며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행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택
빠른 선택이란?
가까이 있는 것을 잡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확실한 것을 잡는 것이다.
정확한 선택이란?
좋은 것을 잡는 것이 아니다.
좋으면서도 내게 맞는 것을 잡는 것이다. -이규경-
쓰레기와 보물
욕심은 쓰레기와 같다.
버리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다.
양심은 보물과 같다.
잃고 나면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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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서울 ME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생각하니 휴가 중에 성지순례가 10일 있었고, 조카의 혼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ME 총회에도 참석했습니다. 저는 2005년에 ME 주말을 체험했습니다. 어느덧 18년이 되었습니다. ME 주말 발표사제를 했었고, 서서울 지역 ME 대표, 한국 ME 부대표를 하다가 2019년 뉴욕으로 왔습니다. 뉴욕에서도 2020년에 동북부 ME 대표사제를 맡았습니다. ME 총회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고, 더 나은 세상, 화목한 부부를 이루려는 ME 부부들의 열정도 보았습니다. ME 봉사의 ‘정년’을 맞이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막 ME 발표를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모임 중에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부부 중에 50%는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관면 혼배라도 한 부부는 30%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는 10%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활동하는 부부는 0.1%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이 부부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20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한 이들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나의 동포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뛰어난 사도로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나와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한 사람은 모두 10명입니다.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뉴욕생활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문사의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의 형광등을 LED 등으로 교체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차고의 천막을 새롭게 단장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매달 독자들에게 구독신청서를 보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저는 잘 지낼 수 있습니다. LA에 가면 언제나 기쁜 얼굴로 대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차량봉사를 해 주십니다. 덕분에 LA에 가서 편하게 신문홍보를 할 수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도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 줍니다. 가끔씩 사제관 청소도 해 줍니다. 맛있는 반찬도 마련해 줍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부르클린 성당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동북부 ME에도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부부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팬데믹의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피정, 소풍, 주말체험, 월례회의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실명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의 열정과 헌신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우리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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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고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또한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데 성실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재물을 섬기는 모습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오늘 복음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약해놓고 보니 어느 정도 주님 말씀의 의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는 말은 불의한 재물로 선한 친구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 재물이 사라질 때 선한 친구들이 너를 영원한 거처 즉 하늘나라로 초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물의 종류는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한 친구를 만들 것인지, 그렇지 않은 친구를 만들 것인지 말입니다.
또한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데 성실하라는 말씀은 그 재물이 불의하다 할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성실한 곳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것을 성실한 곳에 사용하는 사람은 참된 것 또한 성실한 곳에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선함이고, 빛입니다. 그 시작이 불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친구는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초대할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참된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렇게 늘 하느님을, 선함을, 빛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전 기둥은 모두 따로 떨어져 서 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전 기둥은 모두 따로 서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덕에 아름다운 천장을 떠받칠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거리가 필요합니다. 배우자가 상대에게 자유를 선물하면 할수록 자유롭고 흔연한 선물을 되받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자유는 선물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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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친구인데, 주로 그 친구의 집에서 매일 만나 놀았습니다. 왜냐하면 장난감이 가득했고, 책도 정말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계 문학 전집, 각종 위인전 등의 그림책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하나도 없는 것이었기에 ‘부럽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은 몇 년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습니다. 이사 갔던 곳에는 함께 놀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놀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어디를 가는 것입니다.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주산 학원, 태권도 학원 등등…. 학원으로 친구들이 떠나고 결국 혼자 남은 저는 집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풍요롭지 못한 것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어른이 되었고, 그래서 신부로 어렵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 많은 친구에 대한 부러움이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사랑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많았기에,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글도 뗄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재능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족해서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부족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불평불만도 감사의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면서 더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세속의 재물을 보고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재물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사람의 마음을 흩트려 놓아 하느님 앞에 있는 참된 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물이 있는지 없는지에 집중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부족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부족함을 가지고서, 많은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더 부족한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훨씬 더 부족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지금의 삶을 뛰어넘어 먼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반드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소홀히 하면서도 전혀 부족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과의 간격을 띄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부족함을 채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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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공하기 전에는 항상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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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11월11일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정말 다양한 가톨릭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없듯이 똑같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꽃마다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가 다 다르듯이 성인들도 그러합니다. 어제는 위대한 대 레오 교황의 축일이었고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교회는 기념일로 지내지만 수도 주교 성인이었던 성 마르티노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는 각별한 인연이기에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지닌 마르티노 성인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전 처음으로 서방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수도 성인으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대레오 교황이 61세를 사신 반면 마르티노 성인은 81세로 그 당시로는 장수를 누린 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반드시 생몰生歿연대를 확인하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새삼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봅니다.
마르티노 주교 성인의 인생 여정도 참 각별합니다. 고대 동방 수도생활에는 사막교부 “안토니오의 생애”란 책이 있듯이 경쟁하듯 서방에는 “마르티노의 생애”란 책이 있고 여기 소개된 성인에 대한 무수한 기적과 일화들입니다. 성인은 316년 헝가리 판노비아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제국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에서 소년 시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투르의 주교후 물러나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선종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하나이듯이 당시 유럽은 한 나라의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분이었고,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수가 없습니다.” 전장에서 싸움을 거부한 성인은 투옥되었다 풀려나 수도여정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의 개종에는 유명한 전설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군복무중 자기가 지닌 것은 외투와 칼뿐이었던 성인은 낮에 추위에 떨고 있던 걸인에게 지체없이 칼로 외투의 절반을 잘라 입혀 주었고, 바로 그날 밤 꿈에 자기 반쪽 외투를 걸친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옷을 입혀준 걸인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옷을 입혀주었다.”
그날 밤, 주위의 천사들에게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꿈속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라졌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목격했다는 일화입니다. 이런 일화가 그의 수도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8세에 세례를 받게 되고 군문을 떠나게 됩니다.
성인은 수도 주교가 된 이후로도 불굴의 열정으로 수도생활과 더불어 열렬한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미 생존시 많은 기적이 있었다 합니다. 성인의 죽음도 순전히 과로로 인한 병사입니다. 주님의 병사(兵士)로서 병사(病死)한 것입니다. 그의 선종시 전해지는 기도에 관한 일화입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
기도후 만류하는 신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8일 선종하셨다는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걸인에게 그의 외투를 잘라 나눴다는 전설같은 일화요 여기 근거한 오늘 복음 말씀의 선정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수님께 관한 예언이면서 파견받은 우리 신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다.”
고해인생을 기쁨과 자유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라 파견되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 하느님의 영을 우리 위에 내려 주시고, 당신 복음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서술하는 참 엄중한 서술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며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다음 여섯의 자비행입니다. 한 번 자신을 넣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에게 선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이어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십니다. 모두가 추상적 사랑이 아닌 몸과 관련된 구체적 자비행을 지칭합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외투에 관한 일화는 4항에 해당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느냐 묻고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울림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종파의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인류중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온 인류가 예외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한 전례도, 기도도, 온갖 수행이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주변에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피고 돕는 자비행이 심판의 잣대라 합니다. 새삼 정신 번쩍 들게 하며 우리 자신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를 부끄럽게 합니다. 참으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에 충실한 사람이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런 자비행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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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 사이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아낌없이 벗들과 나눕니다
그리하여
하염없이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벗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그저 제 안에서 썩힙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늘 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마저 썩혀 죽어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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