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픔의 역사가 끝나지 않은
보스니아
-동유럽
7개국
여행기 (2)-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4월
19일이다.
숙박지
아드리해안에서 일몰이 아름다운 크로아티아의 세 번째 도시, 자다르를 떠나 보스니아의 매주고리예로 향하는 날이다.
자다르
해안에는 크로아티아의 유명 설치예술가 Nikcola
Basic가
바닷가를 따라 파이프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바다파이프오르간이 유명하다.
파도가
부딪히는 것이 35개
파이프의 울림으로 음악처럼 들려 이 소리를 듣기 위해 관광객이 몰려드는 도시다.
어제
오후 자다르에 도착한 일행은 바닷물이 바닷가에 부딪힐 때마다 “우웅”하는 소리를 들으며 신비로움에 놀랐다.
더불어
해가 구름 뒤로,
수평선
뒤로 몸을 숨기고 붉은 여운을 드리운 아름다운 하늘을 선사받기까지.
황홀한
해안도시 자다르를 뒤로하려니 아쉬웠지만,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내전을 겪은 나라다.
동유럽은
지리적으로 서부유럽,
서남아시아,
러시아
연방 등과 인접하고 있어 주변지역으로부터 자주 침입을 받아왔다.
5세기경에는
게르만족의 침입,
15~17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 등 주변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국경선의 변화가 심했으며,
인구이동도
많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 등 7개국이
독일군을 물리친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고 말았다.
평등한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주장한 사회주의 체제의 거짓을 알게된 이 나라들이 1948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반소련
또는 반사회주의 사건이 전개되었고,
민족분쟁으로
다민족 연방국가들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1991년
6월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1991년
9월
마케도니아,
1992년
3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1일
연방 체제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했다.
우리나라도
주변국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지만,
동유럽은
민족과 종교 등에 의한 침략이 잦아 역사가 복잡한 지역이다.
그중
보스니아는 1992년
3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보스니아 내전을 겪었다.
내전은
3년
8개월
동안 이어졌다.
보스니아는
한반도의 약 25%에
해당하는 51,000㎢의
영토에 약 380~390여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국가이다.
이
중 보스니아계(이슬람교)는
48%,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는
37%,
크로아티아계(가톨릭)는
14%로
복잡한 인구구성만큼이나 분쟁의 역사도 거칠고 길었다.
EU와
UN이
여러 차례 평화안을 제시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마침내
현실주의적 힘을 바탕으로 내전에 개입한 미국의 중재로 1995년
12월에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내전은 끝을 맺었지만,
NATO의
감시를 받는다고 하니 아직도 끝난 게 아니다.
이
나라의 매주고리예가 성모 발현지發顯地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순례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자다르에서
3시간여를
달려간 매주고리예
성모
발현지는 인근의 높은 산이며 성모상이 세워졌다고 하여 바라보니 거리가 멀어 보일 듯 말듯했다.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곳은 아니지만,
순례자들의
기도는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메주고리예
발현은 1981년
6월
24일에
처음 시작되었다.
지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토인 지역의 한 마을인 매주고리예의 여섯 아이들이 동정 성모마리아의 발현이라고 주장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다.
이런
발현들은 첫 발현으로부터 거의 매일 계속된다고 알려졌으며,
시현示現한
여섯 명 중 세 명의 아이들은 매일 오후에 발현을 본다고 알려졌다-그들에게
예정된 “비밀”들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세 명이 지금은 성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고리예를 순례하러 와서 기도하고,
어떤
이는 그곳에서 기적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환시가 믿을만한 곳이 못 된다고 주장하면서,
매주고리예
발현은 첫 시작부터 논란과 변화의 근원이 되었다.
루터(Luther)는
기도에 대하여 ‘제화공이 신을 만들고 재단사가 옷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매일의 직업’이라고 했다.
가톨릭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유럽으로서는 성모 발현지로 알려진 매주고리예가는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성
야곱 성당 마당에는 수천 개쯤 되어 보이는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만큼
순례객들로 북적인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성당
마당 옆에는 예수님 청동상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의 오른쪽 무릎에서 계속 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그
물을 찍어 아픈 곳에 대고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에 나도 줄 서 있는 행렬에 동참했다.
왼쪽
어깨가 낫지 않고 있어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하면서 손을 얹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보스니아의 또 다른 도시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란다.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으며,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중세
건축물이 많으며,
로마
시대의 성城,
1556년
건설된 다리,
터키령
시대의 이슬람교 사원 등이 유명하다.
1878∼1918년
오스트리아 지배 때는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모스타르는
한때 이슬람종교를 가진 터키가 지배했을 당시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건축물에는
여기저기 총탄의 흔적이 있어 전쟁의 아픔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상점마다
수제공업제품들이 상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고,
골목
바닥은 동글동글한 돌들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반질반질해져 넘어질 위험이 있어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골목을
지나 유명한
아치형
스타리 모스트 다리에 당도했다.
다리의
제일 높은 곳에서 한 사람이 다이빙을 할 기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알아보니 자기가 다이빙을 할 테니 25유로를
내라는 말이었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같은 패거리인 듯 그쪽에서도 흥정하고 있었다.
주변사람들이
관심 없어 하니까 10유로까지
떨어졌다.
그보다는
깊은 계곡의 에머랄드빛 강물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아름다움에 빠져 감탄사를 연발하며 카메라에 포즈를 취했다.
날씨가
25도를
오르내리니 몹시 갈증이 나던 참에 인천에서 온 양씨 부부가 맥주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미안할
겨를도 없이 대뜸 대답했다.
양씨
부인은 순간을 놓칠 새라 탁자에 놓인 컵을 우리에게 맞춰 이리 놓고 저리 놓으며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나이는
20여
년 아래인데 부부가 나를 장형처럼 깎듯이 대해주니 고마웠다.
동유럽에서
가장 늦게까지 내전을 겪어야 했던 아픔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보스니아다.
강대국들의
힘을 빌려 평화를 찾았지만,
다시는
내전이나 이웃의 침략이 없는 평온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매주고리예의 성모 발현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가 아픔의 역사를 다시는 쓰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드렸다.
(2019.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