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8
7월1일[연중 제1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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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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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IhcKyVEVww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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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
백인대장!>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 탄 인간, 접촉하거나 상종하거나 말을 섞지 말아야 할 존재로 완전 개무시하면서, 마주치면 재수 옴 붙었다며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병 환자들,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면서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이방인들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중죄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 한잔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의아하게 여긴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라든지, 딸의 치유를 청하는 이방인 여인을 향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의아한 발언 등이 그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세상 착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이방인인 자신의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겠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인대장의 깍듯한 예의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백인대장의 넘치는 인간미는 놀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치유, 아니면 부인이나 아들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종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6절)
당시 종이나 노예는 정식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물로서 가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값도 나가고, 좋은 가격에 매매도 할 수 있었지만, 늙고 병든 노예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보통 주인들은 노예가 병들면 병들었는가보다, 죽으면 죽는가 보다 하고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아들보다 더 끔찍이 여겼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인대장의 예수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한없는 겸손을 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성,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굳이 현장에 가시지 않더라도 원거리에서 치유할 수 있는 원격치유능력 지니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에 감동받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흡족해 하시며 그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길다고 뻐길거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교자 집안, 구교우 집안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줄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준 사람들,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크게 뒤통수를 치시고, 그를 곤두박질치게 만드십니다.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한사코 낮은 곳을 찾는 겸손한 사람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 나는 큰 죄인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은 가엾이 보시고, 총애하시고 위로 위로 높이 끌어 올려주십니다.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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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_v5YY02J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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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 대한 신뢰가 줄어들 때 성찬례의 효과도 줄어든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모범으로 성모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성모님은 잔칫상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많은 이가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첫 표징을 카나에서 일으키신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일어나게 한 원인은 성모님이 제공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모범입니다.
누군가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카나의 혼인 잔치를 봅시다. 여기에서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서 좋으신 분이시고 능력 있는 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이 영광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됩니다.
백종원 대표는 모로코에 이어 나폴리에서도 한국 식당을 내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이태리에 있었지만, 이태리 사람들은 한국 음식을 무서워합니다. 지금은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로마에서도 한국 식당이 몇 개 있는데 80% 이상의 손님이 한국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는 나폴리에서 그만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찾아보면 백종원 대표가 대표적으로 청년몰과 예산 국밥거리, 예산 시장 등을 도왔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예산 시장만 빼놓고는 지금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청년몰은 백 대표가 가격을 올리거나 메뉴가 타 가게와 겹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고 백 대표의 말대로 거의 망해간다고 보면 됩니다. 예산 국밥 거리도 고향이기에 분명 도와주겠거니 해서 부탁을 했고 도와주었지만, 장사가 제법 잘 되자 백 대표를 부담스러워했고 그래서 백 대표가 발을 뺐습니다. 그런데 예산 시장만은 상황이 다릅니다. 분명 그 이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겠지만, 백 대표의 말대로 했더니 예산 시장을 찾는 사람이 1,000% 증가하였습니다. 하루 100명 찾던 시장이 1만 명이 찾고 그래서 예산 지자체는 주차장을 위해 100억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백 대표는 분명 능력이 있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감히 그리스도의 마음과 능력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비유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산 군청은 성모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분명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고향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바대로 백 대표는 사비를 털고 회사 직원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종들입니다. 종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너무 큰 까닭에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백 대표의 영광은 줄어들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미사를 상징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에는 당신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성모님의 믿음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었듯이 분명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데는 성모님의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성모님은 승천해서 당신 믿음으로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당신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능력이 없다고 여겨 미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줄 알고 하느님 영광을 감소 시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부활을 믿지 않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예산 국밥 거리나 예산 시장이 망하지 않으려면 지자체가 백 대표를 제대로 보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섞이면 분명 망하게 됩니다. 교회가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에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셨고 교회는 그냥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생각이 섞여서 포기하면 개신교처럼 성찬례를 포기하게 되던가, 아니면 자기 멋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 영광이 줄어들고 그러면 믿는 이들도 줄어들게 됩니다. 예산 시장도 그러한 장사꾼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그래서 백 대표는 한동안 전체적으로 문을 닫고 재정비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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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에게 해’ 연안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빨간 지붕의 집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게 ‘에게 해’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했던 ‘에게 해의 진주’로 친숙했습니다. 순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에게 해의 진주’는 원래 노래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페넬로페(Penelope)’라고 합니다. 가이드는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아주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서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아빠 이카리오스는 딸과 사위를 보냈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20년이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기다렸습니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며,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것이 맞는다고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합니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에게 해의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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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5-17: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 장모의 치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신다.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예수님은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훌륭한 믿음을 알게 된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대답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했고 한 인간에 대한 백인대장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이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시도록 하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임을 보여준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시겠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겠다는 뜻이다. 백인대장은 상관이 있고 부하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 감탄하신다. 종에 대한 백인대장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해 가지신 사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가지고 자기 종을 위하여 이방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그에게 그의 믿음을 보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인대장과 같은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신다. 바로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3절)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다른 많은 병자도 치유해주셨다. 많은 일 속에서 피곤하셨겠지만,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여야 하며, 그분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5절) 라고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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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백인대장은 예수님 시대에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부하 백 명을 지휘하는 이는 백인대장, 천 명을 지휘하는 이는 천인 대장이라 불렸습니다.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두 번, 곧 오늘 복음 내용과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뒤에 등장합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몸소 종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배려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울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미사의 영성체 전에 함께 고백하는 이 백인대장의 응답은 그의 믿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는 계속합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태도에 감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인대장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하여야 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그는 믿음을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각자의 삶 안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삶 안에 함께하시는 분이 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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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웃음’에 관한 표현이 오늘 독서에서 네 차례 등장합니다. 모두 사라의 웃음과 관련됩니다. 물론 이 웃음은 나중에 ‘그가 웃다.’라는 뜻의 이름인 ‘이사악’의 탄생을 위한 복선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마음으로 사라의 웃음을 읽어 본다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라가 젊은 여인이었다면, 그의 웃음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기쁨의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라가 나이가 많고, 가임기가 지났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라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울러 사라의 웃음은 하느님을 향한 부족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가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이었습니다. 그의 상식과 판단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출생 예고를 들었을 때, 사라는 신앙의 응답이 아닌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라가 웃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 줄 뿐,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생각한 대로 또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간다면, 믿음이란 참으로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이 당신께는 가능하다고,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쓴웃음을 짓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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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에 대한 ‘아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내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 그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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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짝달싹 못 하는 꿈에 시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 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 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 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 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 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생각과 그분께 대한 신뢰를 우리는 믿음이라 합니다. 백인대장은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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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청년이 “이제 졸업인데 과연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라는 말을 합니다.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다면야 쉽게 일을 배우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잘하는 전공을 살려야 할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이과 쪽이 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이 훨씬 재미있었고, 또 다른 과목에 비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글을 쓰고 남 앞에 말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고 그래서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신부가 된 지 25년째의 삶을 사는 지금, 그래도 잘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토록 싫어했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글쓰기와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인생의 단계마다 나만의 특기를 발굴하라.’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고 전공도 아닌 것이 나만의 특기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행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배움이 다 쓸모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배움이든 나를 성장시키고 기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뒤에 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만큼 이 세상 안에서 할 일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그만큼 내가 할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실까요? 이 세상 안에 사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합니다. 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이 있을까요? 주인은 종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 주인을 위해 무엇을 할 뿐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주인의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종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시겠다고 했을 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면서 굳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역시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는 지휘 아래에서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와서라도 기적을 행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한 명의 종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모습. 이전까지의 자기 모습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기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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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심(下心)과 믿음의 관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이런 믿음이란 이 정도의 믿음은 본 적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깊이로 말하면 이스라엘인들의 믿음보다 훨씬 깊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깊은 믿음이란 자신을 아주 낮춘 자, 곧 하심과 하인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인대장은 下心과 下人의 대표입니다.
불교에서 하심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말하는데 자신은 땅바닥까지 낮추고 남은 하늘까지 높이는 그런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기를 낮출수록 믿음은 깊어진다는 겁니다. 사실 교만할수록 하느님을 믿지 못하니 겸손할수록 믿음이 깊어짐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방인인 그는 예수님을 보고 즉시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주님을 누추한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도 한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승 정도로만 알았고, 기껏해야 예언자 정도로 알았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으로 믿었던 것이고, 그런 주인을 종인 자기의 집으로 모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더 놀라운 믿음 고백을 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오셔서 제 죽은 딸을 살려달라거나 손을 얹어달라고 하는데 그는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만으로 다 이루실 수 있는 분이기에 그럴 필요 없다는 믿음을 보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은 2장의 하느님보다 초월적인 하느님이요 능력의 하느님입니다.
2장의 하느님은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사람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지만 1장의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는 곳에 계시며 그저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말씀에 생사가 달린 하찮은 존재임에 반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당신 말씀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백인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를 이런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믿은 것이고, 주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심과 믿음의 관계를 오늘 백인대장에게서 배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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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찾는 하느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시인은 떠났어도 시는 영원히 남습니다. 아니 시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 있는 시인입니다.
오늘은 7월 첫날, 7월이면 떠오르는 시, 이육사의 청포도입니다.
윤동주처럼 일제 강점시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시인으로 두분 다 시와 삶이 일치된 한없이 고귀하고 청순한 시인들이었습니다. 청포도 전문을 인용합니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결코 감상적 나약한 시가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청신淸新한 시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아마 우리 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이 인재를 배출했던 때가 선조시대 임진왜란과 그 전후와 영.정조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청포도를 읽으며 저는 청포를 입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의 환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그린 손님은 빼앗긴 곤고한 나라를 상징하겠지만, 저는 고달픈 몸으로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세상, 고달픈 손님들을 통해 부단히 수도원을 찾는 고달픈 주님이십니다.
베네딕도 규칙을 읽을 때마다 감동과 동시에 뉘우치는 참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성규53,1)
수도원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는 성 베네딕도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니 정주의 베네딕도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며,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정주 영성과 환대 영성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교회내에서 큰 가정 역할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베네딕도회의 자랑일 것입니다.
이에 근거한 제 사랑하는 좌우명시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수도원 앞문은 세상에 늘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고, 뒷문은 늘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을 환대하는 삶, 얼마나 멋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인지요!
환대전통은 예로부터 동서방이 일치합니다. 예전 어렸을 적 제법 산다는 집에는 손님맞이 사랑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제 아파트 문화가 대세라 사라진 환대전통이 참 아쉽습니다. 옛 서방은 물론 중동에서도 환대전통은 계속되었고 교회의 전통이 되었으며, 정주의 베네딕도회가 그대로 수도영성에 담아낸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아름다움...
환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환대의 기쁨은 짧지만 냉대의 아픔은 오래갑니다.
오늘 말씀도 환대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그 내용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선행하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하느님 찾기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강조하다가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더불어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가도가도 하늘은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짧지만 엄청난 깊이를 함축한 시입니다. 하느님을 찾기전 이미 와 계신 하느님안에 머무는 관상의 행복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향심기도를 비롯한 온갖 묵상기도의 수행입니다. 부단히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의 지극정성의 환대가 감동적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고달픈 몸으로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했는데 놀랍게도 하느님과 그 일행이었습니다.
제1독서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손님환대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환대에 감격한 하느님 일행은 아브라함의 늙은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축복하셨으니 환대의 축복입니다. 이어 사라는 못미더워 속으로 웃었고 전개되는 주님과 다툼이 참 유머러스합니다.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저는 이를 하느님의 유머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결정적 표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친히 병자를 방문하시어 치유하시는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어제는 나병환자, 오늘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 베드로의 장모, 많은 병자들 치유하노라 온힘을 다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오늘 백인대장의 주님을 맞이하는 겸손한 믿음, 환대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주님 환대의 정신으로 충일한 참 단순하고 순수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탄하신 주님의 고백에 이어 주님은 그에게 하늘 나라의 축복을 약속하시며 종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주님을 감동, 감탄시켜 종의 치유를 가져온 백인대장의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온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하면서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도록 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아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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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이방인의 믿음!>
오늘 복음(마태8,5-17)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탄하십니다. 백인대장은 말 그대로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군대 지휘관입니다. 그는 로마의 장수로서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그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이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8,11-12)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선택 받았다고 우쭐해 하고 있었던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의 말씀입니다. 선택받은 자신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함 그 자체이신 하느님, 그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은 모두가 이방인이지 않을까요?'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이방인!
너무나도 자주 주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방인!
아직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
세례와 서약이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아닙니다. 세례와 서약의 약속을 삶으로 살아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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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lQWo93jc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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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 13)
주님께
기도드리는
7월의 첫날
아침입니다.
믿음은 아프지만
믿음 하나로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되지않고서는
오늘의 믿음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입니다.
믿음을 아는 사람은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음을
나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실천이
있을뿐이지
계급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실천이
참된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이
시름시름 앓는
종의 아픔을
치유합니다.
믿음은 사랑의
인격성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인격성은
보편적 인격성이
됩니다.
사람의 진실한
구원이 바로
생명의
치유입니다.
생명은
잘못된 생각들을
버리고 올바른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눔은
믿음의 나눔입니다.
믿음을 나누시는
주님이십니다.
기꺼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진심을 가진
믿음이며
나눔과 실천을
가진
믿음의
정신입니다.
믿음의 방향이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믿은 대로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믿음과 실천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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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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