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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철학의 세계
이태수외 11인. 길(도서출판), 2024-01-03. P. 466.
* 단상:
올해로 박홍규 선생님이 자연으로 되돌아가신지 30년이 되었다. 우리 풍토에서 그나마 철학이 한쪽 길로 쏠리지 않은 것은, 선생님의 덕분으로, 그래도 서양철학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철학하는 이들 주변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심에 박홍규가 있고, 이를 기념하며 따르는 방통대교수였던 이정호가 “정암학당”을 만들어서 플라톤 번역으로부터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면서 학문의 장(마당)을 열었다. 이 학문이 삶에 스며들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만큼이나 우리의 입말과 문자가 일반화되고 공감되는 장이 가로지르기만큼이나 “세로지르기”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서울대 철학과에서 플라톤과 벩송을 강의하셨다. 사람들은 그의 강의에서 플라톤이 중심이었고 벩송이 보조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긴 철학사에서 다른 과학사들과 연관하여 실증적으로 탐구하고자 하신 선생님은 공시태로 철학에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다룬 플라톤의 철학이 있고, 공간의 사고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시간의 사유로서 벩송의 철학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보아,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문제들의 이중성을 종합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분화하여 분류가 시작되었고, 한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작하였으나 상식에 근거하는 사고의 한계로 정체되었는데, 서양철학사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하나하나 뒤엎으면서 제반 실증학문들이 도래한 19세기 후반에 벩송이 등장했다고들 한다. 사실은 철학사의 내면에서는 이 두 줄기가 꾸준히 엎치락덮치락 이어져왔다. 이 두 줄기를, 벩송전집 편집자인 앙드레 로비네가 말하듯이 이법(raison)과 신앙(foi)으로, 에밀 브레이어가 “철학사”에서 쓰듯이 우주발생론과 우주론으로, 쥘 들뢰즈가 보기에 차히와 차이로, 박홍규가 보기에 세로축(시간)과 가로축(공간)으로, 다시 말하면 형이상0학의 두 갈래, 자연의 기원과 원인의 탐구와 자연의 대상 체계의 학문으로 나누어져 이어져 왔다. 앙리 벩송에게서는 시간(운동)과 공간(정지)의 대립적 구도였다고 보았다. 세부적으로 설명은 복잡하고, 세기의 관심에 따라, 토지, 산업, 상업이라는 삶의 터전에 따라 어느 쪽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느냐는 것이지, 한쪽만 철학사를 이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얼핏 보아 이원적 구성 또는 구축 같지만, 실재성은 양면성을 마치 종이장의 앞면과 뒷면처럼 어느 쪽이 상위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영혼과 신체라는 이원성에서 정신과 물질로 대비시켜 갈라놓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를 삶에서 탐구할 경우에는 어느 쪽이 영혼의 사유이고 어느 쪽이 신체의 너비인지를 의식 속에서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함께 가면서 다른 두 길처럼, 두 실체니 두 속성이니 말했지만, 여전히 두 길은 문제거리로 남았다. 아마도 자기장에서 두 측면이 마치, 헤라클레이토스의 긴장(투쟁)과 같은 국면에서, 만물의 생성을 보아야 할 정도로 양면의 힘은 대등하고 상반되는 힘이 지구, 즉 땅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이 안 된다. 이런 양면성에서 어느 한 쪽을 기준으로 또는 우위로 나아가 절대기준으로 삼는가는 다른 문제였는데, 맹목적 신학이 온갖 피를 뿌리면서 개입하여, 철학하는 태도조차도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서양 사상사의 암흑기 1600여년이었다. 동양은 그나마 부처를 형상화하기 거부하는 선종이 있었으나 중국의 평천하의 사상은 견고하여, 여전히 인간의 삶에 행복과 자애를 바탕으로 황제체제를 이어갔는데, 그나마도 서양처럼 한쪽을 무시 또는 악마화로 가지는 않았다. 20세기에도 서양은 악마를 만들기로서 종교재판을 확장하는 식민지 전쟁을 두 차례나 치르면서, 아직도 자신들이 광기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이 광기를 뚫고 자연주의 또는 유물론은 세계사의 반쯤 탐구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렇게 슬쩍 스쳐본 통시적 세로지르기에서 각 시대에서는 여전히 공시적으로 가로지르기가 학문의 주류였다, 그 주류의 기원과 원인이 무엇인지, 이게 “뭣”이며 뭣으로 생각하였기에 이런 전쟁과 적대관계가 지금도 존속하는 것일까라는 사유의 실마리는 신화를 배격한 소크라테스의 사유에서 그리고 이를 정리해 보려고 글로서 남긴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플라톤을 평생연구하면서 몇 편의 글과 입말로서 남긴 기록으로 후학들은 우리말로 읽으면서 서양철학사의 진수에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박홍규의 철학 탐구의 여정은 우리들에게 기원이 될 수 있고 또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 자료들(les données)
박선생님은 우선 플라톤을 평생 다루시면서, 내가 생각하기로, 플라톤을 존재론과 우주론으로 보신 것이라기보다, 벩송에 견주어 현존론과 우주발생론을 겹쳐서 사유하려고 한 것 같다. 나로서는 문제제기를 화두처럼 생각하며 몇 가지를 염두에 두고자 한다.
그 중에 우선 중요한 의미로서 선생님은 철학한다는 것은 자료들을 전부 내놓고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들의 이루어진 전체성이 아니라 이루어지고 있는 총체성으로 함께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자료란 뭣을 대상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선생님은 플라톤의 자료가 문헌이라고 한다. 그것도 진품인지 가필이 보탠 것인지를 모르지만, 지금까지 전해오는 스테파노스 판을 기준을 삼는다. 문헌의 자료에서 플라톤의 용어가 전 저작에서 동일하게 쓰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 용어를 이렇게 읽을 수도 저렇게 읽을 수도 있지만, 원전 자체 안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게 잘 안되면, 그와 동시대에 쓰여진 원전들을 참조해야 하고, 또한 대상화의 경우에 다른 학문이나 문헌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어느 정도 정돈이 되었다고 해서 그 용어가 그 시대 제도와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의 철학자들과 이후의 철학자들의 용어와 대상에 걸 맞는지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한다. 이런 세 단계를 거치면서, 학자는 나름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정리한다. 아마도 선생님은 자료들을 다루는 방식을 세 단계로 설명한 것은 본인이 학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벩송은 자료들(les données)이란 용어를 여성형으로 썼다. 그런데 에밀 브레이어를 읽어보면 남성형 자료(le donné, les donnés)가 눈에 띤다. 선생님의 강의록을 다시 주의 깊게 검토해야겠지만, 공간적 자료와 시간적 자료를 달리 쓰면, 전자를 남성형으로 후자를 여성형으로 설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벩송식으로 표현하면 정지된 대상으로서 상징들(수학이든 추상관념이든)과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대상들로서 자료들을 구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의 제자인 에밀 브레이어의 글을 읽으면, 이 구별된 자료들은 철학사의 통시태를 갈라놓았다고 여긴다.
다른 한편 벩송에서 사실들과 상태들의 구별이 있다. 물론 사실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고 고정된 것으로 공간적 사고의 대상이다. 이에 비해 상태는 변화 중에 있고 생성하는 과정에 있기에 공간적 대상으로 정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시간적 기간의 상황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용어로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구별들을 선생님은 강의하신 것 같은데, 잘 구별하기 쉽지 않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생명체의 생명과정은 산술의 계열이나 기하학 연장(너비)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자료들을 실증과학들과 수학과학들 사이에 구별하면서 달리 설명하는 용어들을 사용했었다. 자체적으로이루어지는 것과 관계 맺음에서성립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설명이 수학과 영혼에서 어떻게 분화 또는 분류되어 사용했는지를 규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은 공간적 사고에서 전체(통일성)와 시간적 경험적 사유에서 총체성을 구별한다. 철학사적 배경을 갖는 용어이다. 벩송의 구분(분류)을 따라 거꾸로 고대 철학을 분류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분류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도구적 언어 또는 논리의 대상으로서 증명 자료와 내재의식의 공감과 직관을 통한 일반화(벩송의 용어이다)에 쓰이는 증빙 자료가 다를 것이다.
2. 우주 발생론(la cosmogonie), 물활론(hylozoisme)
수업에서 플라톤을 다루면서, 내가 들을 당시 티마이오스편만을 거의 2년간 했었는데, 매번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플라노메네 아이티다(아페이론)의 관계 또는 연관의 설명처럼 들렸다. 지나가듯이 들으면, 이데아는 원본이고, 데미우르고스는 (도구적, 논리적)지성처럼 들리고,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또는 휠레처럼 들린다. 서양 철학사에서 플라톤에서는 형이상학이란 용어가 없다. 그러면 플라톤은 학문의 대상으로 이데아와 데미우르고스가 중심이었고,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는 보조물 또는 치장물(악세사리) 정도였을까?
얼핏 생각해보면, 국가론에서 인간의 인격 형성방식인 머리, 가슴, 팔다리의 알레고리로서, 우주의 형성 작용으로서 세 가지들 사유했을까? 거꾸로 우주의 형성작용에 따라 인간도 생명체도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이런 형성에 관한 논의에서, 박홍규는 플라톤에서 우주론의 관심보다 우주발생론의 관심이 내부에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우주발생론이란 용어는 벩송의 창조적 진화 3장에서 나오지만, 플라톤에서는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박홍규는 플라톤에서는 우주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고민을 바로 들어가서 풀기 어렵기에 이런 저런 대화편을 거치면서 깊이로 들어 간 것으로 설명할 때가 있었다. 우주발생론에 관한한 에밀 브레이어도 플라톤에게 우주발생생론이 있다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자들은 우주론을 다루면서 우주발생론이 아니라고 여긴다.
여기에서 원인과 기원에 관한 논의가 있다고 했듯이, 선생님은 플라톤의 아르케라는 용어를 기원 또는 원인처럼 읽어야 하다고 한 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의 대상, 즉 소크라테스가 물었던 이뭣꼬의 “뭣”은 이오니아의 자연(휠레)인지, 엘레아의 존재(단어, 말, 언어)인지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이런 두 가지 대상화 용어들이 현대처럼 구별되어 있지 않고, 둘 다 양적이 아니라 (성)질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은 고대에서부터 행위의 일반화와 대상의 일반화를 달리 사유했다고 한다. 언어가 현대에 와서 기호(signe)의 총체이며, 그 중의 입말은 구강에서 기능하는 것이고, 손으로 쓰는 글쓰기, 도구(악기)를 사용한 방식은 입말의 음절과 다른 노래의 장단[리듬]과 화음은 다른 정보전달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반화 또는 규정화(규칙화) 방식들은 신체의 각 감각기관과 연관에서 달리 발현되고, 수렴(종합)된다. 이 종합이 전체의 통일성을 이룰 것이라고 여긴 것은 오관의 통합이 하나로서 인격을 이루는 것에 유비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설명에서 선분의 비유도 인격이라는 단위를 토대로 하여 설정하는 방식일 것이다. 인격, 즉 한 인간은 류적인간의 통일성(l’unité)인지 인간 류의 개체적 단위(l’unité)인지를 구별하여 본다면, 전자의 경우가 수학적 물리학적 대상화라는 일반화에 가깝고, 후자의 경우는 생물학 또는 심리학의 영혼의 일반화에 가깝다. 사람들은 물리학적이라는 의미에서 행동과 연관이 있고 심리학적이라는 내용에서 사유와 연관있다고 여기나, 거꾸로 인 것 같다. 전자는 지성의 사고의 용어, 추리, 논리를 다룬다면, 후자는 사유의 흐름, 단절, 배치, 배열을 다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주체인가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선별 또는 분화될 수 있다. 언어라는 도구적 입장에 익숙하고 또는 신학과 형상형이상학에 익숙하여,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주체라는 단위가 대상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하는 것이다. 사람은 터전과 관계 속에서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대상화 이전에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 또는 단위가 살아있고 또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고 대상을 다루는 것이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여길 때이다. 그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류적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불교처럼 깊이 생각해보면, 자기의 구원이 또는 불성의 성취가 타인과 연관 없이 된 것은 없다. 왜 큰 수레를 함께 밀고 끌고 당기며 가야 하겠는가? 어쩌면 플라톤을 소승의 차원에서 인간우위로 서양철학사가 다루어 왔다면, 그런 소승적 입장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적 사유를, 그 사유를 좀 배웠다고 오만과 허영에 빠진 플라톤주의자의 것이리라. 이런 플라톤주의를 잘 다듬은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일 것이고, 스토아 후기가 이런 사고를 제국주의 속에서 재산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유일 신앙과 만나서, 편파적이고 외골수적으로 흘러간 것이 크리스토스를 대상화한 것이리라. 최소한 대승 불교는 부처를 대상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와는 다른 한 길을 간다. 플라톤주의로 근세에서 양식(le bon sens, 좋은 방향) 즉 한 방향으로 간 것이 제국주의와 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사유와 플라톤주의의 사고를 구별하는 방식을 박홍규 강의록에 찾아낸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구별을 여러 곳에 낌새를 느끼는데, 이런 방향으로 전개할 경우에 박홍규의 플라톤 독해의 방법와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의 해석방식은 거의 닮았다고 본다. 우리가 양식의 양철학사에 익숙하여, 특히 일제의 독일철학과 해방 후 미제의 언어분석철학이 130여년이 일방향의 플라톤주의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는지를 되돌이켜 보면서, 다시 이뭣꼬를,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아니라 움직이는 대상을, 수학적 도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상태의 일반화의 방식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주발생론에서 보면, 모든 일어나는 현상들, 즉 상태들은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며,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삶의 일반화가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밝혀지겠지만 경험적 사물들의 일반화로서 개념작업을 거쳐서 추상화작업으로서 상징(기호든 표시든)이라는 대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삶의 일반화로서 개념작업(훌륭타, 붉다)은 모호하기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공감과 공유면이 있다. 사실, 이런 구분은 벩송이 플로티노스의 독해에서 나온 것이다. 벩송의 플로티노스의 강의록과 박홍규의 플라톤강의록의 대비, 대조, 차이, 차히 등 탐구할 것이 매우 많을 것으로 보인다.
3. 자연(physis) 아이티올로지
철학에서 신화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었는데, 자료 다음이라기보다 자연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우주발생론은 거꾸로 다음으로 밀린 것은, 자연의 대상화하는 방식이 전개된 것은 플라톤 다음으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자기 이전 시대의 자연을 다루는 방식들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물론 앞 시대 철학자들 자연의 자료를 그가 선별했기에, 조심해야 한다고들 한다), 자기가 다루는 방식을 만들었다. 자연학이란 긴 저술이 있고, 또한 자연의 기원 또는 이유를 포함하여 자연의 배후 또는 배경에 대해 다루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루는 방식이 한편 기원을 깊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대상화의 개념이 신화에 덮인 이데아에까지 추상화의 길로도 가지 않았다고들 한다.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용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의 견해는 조심히 읽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견해는 앞 시대 철학자의 진면목이라기보다 비판하며, 자기 생각을 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거리는 프쉬케(영혼)에 관한 것이라고들 한다. 이 학문 프쉬콜로지(심리학)가 생겨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과학들의 해석방식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19세기 말 심리학이 개별과학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로마시대 이후로, 제국화(uni-vers, 하나로)의 길에서 자연은 이상야릇한 종교가 개입하면서, 대상화 하면서 도구화로 전락해 버렸다. 자연은 만들기(포이융)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코스모고니든 코스몰로지든 코스모스의 용어(개념이 아니다) 대신에 우주(univers)라는 용어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코스모스든 우주든 인간의 오관을 통해본 것은 지구를 둘러싼 항성과 행성, 그리고 태양과 달이 지구의 두껑을 덮고 있는 듯한 천구에 대한 사고이다. 그래서 이런 천구와 지구의 연관을 세계(le monde)라고 하고, 망원경을 통해 천구 바깥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알게 되는 시기부터 세계와 우주가 달리 용어를 규정할 것이다.
코스모스를 다룬다는 것과 자연(퓌쉬스)을 다룬다는 것과 차히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별자리는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인데 비해, 지상의 동식물과 산천은 인간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인간은 저너머 또는 초월이라는 사고의 용어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후자에서 제작하고 조작하는 생산을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이 종합의 학문인데 이 둘을 종합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은 철학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초기의 천문학을 점성술이라고 하지만, 별에 빗대어 해석하는 점성술만큼이나, 천체의 동일한 운행방식과 농사와 기후의 연관에서 책력을 다루는 것은 삶의 세상사의 일이었다. 중국식으로 건과 곤, 양과 음의 관계를, 퓌타고라스에서 수의 대입의 추상화보다 훨씬 더 흥미 있고 체계적으로 전개한 것이 주역이라고 보며, 태양의 운행을 통해 농사를 짓기 위한 주나라의 24절기는 삶의 터전의 방식이었다. 점(占)은 천문과 지리의 상호연관을 다루어 한해의 과정을 미리 내다 보려는 것이리라. - 그래야 씨뿌리는 시기와 농작물의 생장을 관리하지.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오니아학파가 성립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삶의 터전에 대한 위계적 체제를 다룬 것이 엘레아학파에 가깝다고 보면, 이 양자 사이에 종합, 절충, 합의, 조약, 계약으로 나아가는 길은 도덕론과 정치학에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자연은 어떤 내재하는 규칙과 이치(이법)가 있음에도, 인간이 이것을 도구화하기에는 길이 멀었다. 그런데 체계화는 머리(사고)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과 자연의 대조와 비교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전혀 다른 면을 구성하려 하였다. 자연은 플라톤이 말한 플라토네메 아이티아인데도, 입맛에 맞는 체계를 세우는 것은 데미우르고스가 코라의 일부분에 겨우 속한다. 이런 코라의 부분이 아페이론 전체로 보면 겉모습일 뿐인 것이다. 사고의 체계는 겉모습을 자유재량(자유가 아니라)으로 옮기고 층위를 세워서 체계와 체제에 대해 진실인 것처럼 서술할 뿐이다. 그나마도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 있던, 필연성과 같은 능동적 자발성이 사라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에서이다. 이 질료라는 용어를 그가 이오니아학파에게서 받아들이면서도, 그가 자기 입맛대로 형상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사고는 ‘데우스엑스마키나’를 개입시키는 것과 닮았다. 이렇게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창조주 신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전체를 다루는 통일성이 먼저 있다는 사고의 것이다. 질료 속에 형상은 통일성에 해당한다. 자연의 도구화, 자연의 체계화는 인간 지식의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염원이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 ‘뭣’꼬의 뭣은 여전히 비결정성이고 정해지지 않았으며, 볼 수 없는 영역 또는 알 수 없는 영역은 현존한다. 그 자연에 자발성과 권능이 있으며, 자연 자체가 의식일반이라고 하면, 무슨 신비가나 범신론처럼 간주하는 일신론자들의 사고가 문제이다. 이런 사고가 정복과 전쟁에서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것이며, 유일신앙의 신(외디푸스) 신봉자라고 들뢰즈가 “안티외디푸스”에서 말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자들은 신, 황제, 국가, 제국을 신봉하는 통일성주의자들이다. 동어반복 속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외하고 성립하기 때문에, 이들의 사고를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런 사고가 인간을 얼마나 “뭣”의 탐구가 아니라, 절대자(크리스토스)에게 예속과 굴종으로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기복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솔한 “뭣”에 대한 탐구, 실재성에 대한 사유집중에 있을 것이다.
4. 실재성(réalité)
벩송은 강의록에서 서양철학사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고대는 상식의 시대, 근대는 양식(방향)의 시대, 제반 과학들이 실증적 발달의 시기에는 고등양식의 시대라고 보았다. 이런 구분을 실재성의 용어와 맞붙여서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실재한다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사에서 이오니아와 엘레아의 이중성을 거쳐서, 아테네 시대에 이뭣꼬를 물어보았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고 보았고, ‘뭣’꼬에 대한 질문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이런 논법을 아이러니라 한다. 우주, 세상, 삶의 현장에 뭣이 있잖아. 그런데 지식이라는 에피스테메와 지식이 아니라 견해 즉 독사라는 용어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구별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에피스테메를 찾으려 노력했다고 보는 것도 일리(raison)가 있다. 문제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하늘의 운행이든지, 그리고 지나간 과거의 행적 또는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착된 어떤 것이 있고, 그 고착된 것을 구별하는 일반화와 대상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변화하여 지칭할 수 있는 현실에서 현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화를 통해 다시 다룰 수 있는 것을 지식으로 삼자고 했을 것이다. 이런 사유에서 이분화의 경향이 있으며, 그 중에서 불변하고 또는 일정한 모습을 본래적으로 유지하는 무엇을 탐구했으리라. 그 모습에 이데아라는 용어를 썼다. 그 이데아의 불변과 부동의 설명은 엘레아학파에서 빌려왔을 것이고, 그 불변과 고정에서 영원과 불멸을 보태어, 진실로 있는 것이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후대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런 불변과 불멸의 대상을 수학에서 찾든, 논리적 용어에서 찾든, 실재하는 것으로, 실재성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박선생님이 보시듯이 플라톤은 이런 이데아와 변화하는 현실계 사이의 연관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실재성은 이데아니 우시아니 하면서 불변하는 요소에 찾았으며, 이것들을 통해서 현실에서 변화하는 상태 또는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변화하는 현존자들의 세계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어서 실재성이 없는 거짓 또는 허위의 세계였다. 이렇게 말하면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거짓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가 그 나마도 실재성을 가지려면, 이데아의 또는 우시아의 성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하지만 부분적으로 형상과 실체를 가진 세계를 현상계라고 부르면서, 잠재성을 지닌 가상성 정도로 보았다. 그러면 인간은 가상성을 넘어서 실재성을 실현하려는 능력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 능력에서 보면 인간 안에는 실재성이 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은 실재성을 지녔는가? 자연이 인간의 대상인데 무슨 실재성이 있겠는가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래도 퀴니코스에서 스토아학파에서 무슨 소리야, 자연이 자기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실재성이 있지.
그런데 고대에서 왜 자연이 실재성과 권능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상식(오관)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았고, 그 많은 것을 버리고 알 수 있는 대상만을 탐구하고 연구하여 체계화하기에는, 그 당대 인간의 지성 또는 기술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고대에서 왜 플라톤에서는 이중성 또는 이분화의 길이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에이도스와 우시아를 중심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도 논리학에서 자연의 관계 항들의 정립에서, 용어를 채택하고 용어에 맞추어 사고하는 체계가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시기에 현상에서 형태들을 설명하는 이데아와 닮은 도형들을 체계화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했다는 것이다. 이 두 학문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연관은 1859년 비유클드 학문이 나와서도, 산술학과 언어의 체계 관계가 동일성을 갖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단위의 설정과 동일성의 성립과 더불어 실재성이란 에피스테메에 있다는 것이 굳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천상의 세계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인간의 기복적 신앙의 대상을 올려놓음으로서 신의 지위까지 실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실재성과 현실성은 어떤 연관이 있지만, 실재성과 비실재성은 연관이 아니라 배척과 한 쪽의 무시이다. 이런 모순율에 해당하는 사고가 현실성이라는 문제에 들어와서, 변화는 것의 배경에는 또는 그 밑바탕에는 허무가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데, 이런 사고는 하늘나라의 실재성이 착각인 것만큼이 허무의 대상화도 착각이었지만, 현실의 삶에서 두 대립에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 멸시, 악마화로 갔던 것이 중세의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현실 세계를 가상으로 보는 사고라 하더라도, 그도 죽고 자연도 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삶에서 기하학과 논리학같이 도구의 제작에 편한 지식과 이것에 어긋나는 지식 사이의 구별은 삶의 터전에서 영토와 조직화의 배치에서 차이를 갖는다. 나중에 일어나는 것을 젖혀두고, 현재에서 도구적 방식(플라톤의 포이융)은 철기 문화이래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고들 한다. 그 도구적 사고에 맞는 현실계를 실재계로 여기고 이에 맞지 않는 것은, 중세에서 종교가 개입하면서 가상계가 아니라 허무계로, 무화로,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기의 변화 과정에서 인간의 현실계의 가까운 도구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 거리를 보는 망원경도 만든다. 이는 사고의 한계, 상식(오관)의 한계를 넘어서게 할 것이다.
자연 세계는 그 나름의 자기 방식이 있고 이치(raison)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사악한 종교인의 무리들은 하늘 너머 신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무한을 이야기한 브루노를 마남사냥으로 불태워 죽이겠지만, 망원경의 발명은 앞시대의 철기의 도구보다 더 확장적 사고를 가져온 것이다. 에피스테메에서 수학과 언어의 사고에서 에피스테메와 자연의 섭리라고 여긴 이법적(raisonnable)과 이치적(rationelle) 사유에도 에피스테메가 있다. 데카르트가 중세 용어를 빌려 두 개의 실체라는 할 때는 두 방향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도 그 시대에서 자연의 내부를 알 수 없었고, 게다가 인간의 인식(에피스테메)의 내부의 의식과정(벩송의 기억론) 같은 것도 잘 알 수 없었다. 어쨋거나 1600여년 자료들을 보았던 의식에서 사고의 방향을 한 방향으로 잡아야 산술학적 개념과 기하학적 정의를 함께 아우를 좌표를 만들었고, 그 좌표 상에서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을 실재성으로 보았다. 두 개의 실재성에서 한 방향(bon sens)이 사고의 통일성과 체계의 완전성에 서로 가깝게 진행해 나간다고 보았다. 물론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두 실재성의 주장이 데카르트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도구, 새로운 사유 방식(좌표, 방법적 의심)은 실재성의 폭을 넓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성이라는 사고체계는 완고하다. 스피노자도 하나의 자연, 라이프니츠도 전체라는 조화로 모나드라 하다. 물론 세부적으로 실재성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뉴턴 등장이다. 물질 속에 어떤 충력적인 힘(자발성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있다고 한 갈릴레이 이후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벗어나 물리학이 성립하였는데, 그 힘은 물체 내부에 있어야 하며 그래야 관성의 성질을 설명한다. 뉴턴은 그 중심에는 끌고 당기는 힘이 있어서 행성계인 태양 중심을 설명하였다. 자연의 실재성은 에피스테메의 체계와 신의 개입 아닌 자연 자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원리로부터 법칙이란 용어로 변화한다(물론 갈릴레이가 먼저이다). 그럼에도 우주를 설명한다고 해서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라는 움직임 속에서 개체들은 또 다른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과거 1600년이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근세의 160여년만 지나면 나온다. 지구의 움직임이 상반된 두 힘의 자기장을 형성한다. 길게 나가지 말고, 자연의 실재성은 사유의 실재성과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원자의 내부를 탐구하면서이다. 원자와 전자의 힘의 작용은 다른 자연계 또는 실재성으로 와 닿았다.
상식의 시대에서 양식의 시대에 진화에서 고등양식의 시대로 이르면서, 자연은 자연의 자기 움직임(운동)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자연에 자발성이 있다고 하게 되면, 신의 개입은 없어진다. 사고의 세계, 즉 체계와 원리의 세계의 실재성이 무너진다. 그러면 실재성은 무엇인가? 움직이는 상태가 실재성이 될 것이다. 이런 실재성에 대해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류들이 있다. 철학사적으로 자연의 실재성은 우주의 실재성과 연관 속에서,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또는 휠례의 실재성으로까지 연관을 짓는다. 실재로 그렇다. 왜 실재로 있는 것, 현존하는 것은 우주현상과 자연현상이고, 인간 지성(칸트가 페르눈푸트 하든지 간에)의 사고 는 원리와 체계는 실재성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고등양식의 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원리와 체계의 사고가 실재성이 아니며, 가상성도 아니라 상징성이라고 한다. 왜 상징인가? 이런 문제가 자기 학문을 옭아맬 줄 알지도 못하고서, 인간의 삶의 태도와 사유를, 또는 욕망과 인식을 다루면서 이런 삶과 욕망이 실재한다고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실재성을 논의하면서 인간의 삶은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실재한다고 해야 한다. 이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을 고대에서도 근대에서도 부정적이었으나, 현실에서 실재성을 부정하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학문의 지위뿐만이 아니라 자기 부조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원래 인간의 영혼에 대한 논의에서 변화와 과정을 다루어야 했는데, 저 세상이나 신을 도입한 것이 착각이었다고 지적한 것은 벩송이었다. 자연의 변화, 의식의 변화는 실재적이고 그 변화는 과정을 포함해야 하기에, 지층과 과거(기억)를 다루어 보면, 유전자를 통해서 삶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질적 반복이 실재성이 아닌가? 고대철학의 이데아는 상징계이며, 근대철학의 통일성과 단위는 실재성의 현실계이라는 것이다. 실재성은 이렇게 뒤바뀌었다(도치)고 보는 것은 벩송이었고, 들뢰즈는 전복이라고 보았으며, 박홍규는 가로축과 달리 세로축(관계맺음)이라 하였다. 이제 우주의 역사의 과정이 실재성이 된다. 그러면 누군가 우주발생의 최초 3초를 논하자고?, 그 폭발의 3초전에 우주점이 운동이며, 진동하는 강도이며, 점과 같은 것이 아톰이고 그 점의 폭발이 퍼져나가는 것이 원자론자들이 말하는 허공이다. 왜 스토아인가. 스토아학자들은 원자도 빈 것도 다 존재자로 본 것이다. 이것들 전체를 움직이는 우주라고, 그리고 우주 속에는 관통하는 흐름이 있고, 흐름은 지속한다하였다. 벩송은 우주점과 빈 것이 모두 흐름인데 둘은 강도가 다른 것이다. 이런 대상화(점)와 대상화의 표면(빈 것)을 구별하지 않은 스토아 사유에서 진솔한 실재론이 나올 수 있다. 흐름, 강도 있는 상태들의 상호침투하는 지속이 실재성이 된다. (57NKA)
5. 삶의 터전과 종교성 [문화론의 등장: 문명론은 제국주의였다.]
인간은 종교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유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간단히 플라톤의 플라노네메 아이티아의 필연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숙명 문제 때문에 플라톤이 추론과 추리로서 전개하다가 막다른 골목에서는
신화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런 신화에서 벗어나자고 논리체계를 만들었고, 중세는 기하학체계와 더불어 하나의 통일성과 위계를 만들려고 엄청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자연에는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식과 한계 안에서 법칙을 구성(구축)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자연이라는 필연을 벗어나는 길을 없을까? 없다.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정태적 종교에서 흥미있는 이야기를 세 가지 전개한다.
하나는 자연의 필연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연으로 해체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삶에서 죽음이라는 단절이 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삶에서 상태의 지속이 자신의 의도와 방향에 맞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여, 울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연의 방향인지, 인간의 탐욕에서 나오는 방향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터무니없는 탐만치가 인간에게 우울과 자기기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에서 다음에 대한 예견인데, 물리학적 현상과 같은 예측과 달리 인간사에는 예견과 예언이란 허구이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현해야할 것인가? 박선생님의 강의에서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철학사가 난제를 극복하는 것은 자연에 경과에 대한 어떤 예측이 있다고 해서, 인간사에서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벩송이 말하는 비결정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철학사를 보면 플라톤 이래로 아페이론이라 불리는 자연의 성격이 비결정론임에도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의 모조품을 만들려고 한다. 신의 작업까지는 아니라도 완전성의 복사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그게 답은 아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이뭣꼬를 탐구하듯이, 삶의 과정을 탐색하고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류가 이런 제한된 과정을 걷고 있어서 완전 또는 영생(불멸)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비결정론의 숙명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선생님은 이런 플라톤의 난제를 풀려는 방식이 쉬운 방식으로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답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신을 믿듯이 영생으로 저세상을 만들고 현세를 부정한다. 이 논법은 간단하다. 영생의 세상이 실재이고 현세가 무라고 하며, 게다가 유일 신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간단한 논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삶의 연속성을 사유하면서 이에 반하는 것을 허무라고 보았던 허무주의 견해인데, 허무주의가 종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현세의 고통과 고뇌를 벗어나는 노력에서 무엇인가의 완전성을 둘 수밖에 없을 경우에, 그 또한 정태적 종교, 기복의 종교에 의탁하는 것으로 그리 타당한 방법은 아니다. 현실과 터전을 받들고 있는 자연의 자기 생성을 인정하지 않는 두 가지 방식은, 선생님의 견해로, 쉬운 방법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그 종교와 허무주의 극복 철학은 모순과 갈등을 잘라내서 해결하려는 방식으로서 유럽사에서 전쟁과 마남사냥을 낳았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사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 소크라테스 후기학파들에게 있었다.
특히 삶의 지속과 영생에서 죽음은 무엇이며, 죽음 이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뭣꼬라는 문제제기에서 죽음은 무엇인가에서 퀴니코스학파와 스토아초기 그리고 퀴레네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들은 문제제기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데아가 실재가 아니듯이 죽음이라는 문제는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안다는 측면에서 논의하자면, 죽음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척하기에 생기는 문제이라 한다. 모르는 문제를 문제로 끌어내 신화와 신들을 끌어들이는 자들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인민을 호려서, 그자들이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라 한다. 게다가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가보았던 이야기거나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착각을 넘어서 망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사기꾼 또는 허위 약장수라는 것이다. 인간은 삶의 터전과 현실에서 삶을 논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두 학파는 이데아니 에이도스의 실재성을 허위 또는 착각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알렉산드리아학파를 거쳐서 로마에 와서는 변질하였다. 철학사의 전개에서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등장 때문이라기보다, 지구중심주의 사고, 즉 인간중심주의의 이기심의 과도한 주장이다. 이러한 것이 벩송이 보기에 비결정성의 문제를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플라톤에서는 다른 사유방식이 있었을까? 박선생님은 플라톤이 신화를 벗어나서 사유하다가 신화를 끌어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삶의 터전과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자연(아페이론)의 능동성에서 어떤 것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에서 창조, 허무주의 극복이 아닌 방식은 어째거나 한편 생물학과 진화론의 등장에서 이고, 다른 한편 지성의 해결 방식(한방향, 양식)만이 인간의 삶의 문제거리에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윤구병은 흥미롭게도 벩송에서 완전성을 찾아가는 삶의 노력이 먼저이고, 사변에서 찾는 방식은 다음이라는 논법을 주목했다. 이런 논법에 들어있는 사유로서 불교에서 아라한이 부다가 되는 길로 보는 측면도 박선생님은 종교적으로 보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래도 실증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능력의 향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것인데, 나로서는, 선생님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다시 조합해 보아야할 것이다. 박선생에게서 분명한 것은 유일신앙과 우리나라의 크리스트교는 기복신앙으로 벩송처럼 정태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며, 그러한 종교는 가족적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벩송이 우화적 기능의 종교들이 가족적이라는 것을 알린 것은, 정태적 종교가 가족체계처럼 국가체계로 가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런 견해를 분명히 한 것은 벩송을 넘어서 들뢰즈/가타리 인데, 들뢰즈는 유일신앙의 신(외디푸스)이라는 체계는 제도 속에서 억압으로, 가족 속에서 억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런 정태적 종교를 넘어서는 것은, 벩송은 삶이 먼저라고 한데 비해, 들뢰즈는 삶을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거리는 나로서는 전쟁과 더불어 보아야 한다는 데 박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황제(참주)의 식민지 지배와 연관시켜 보면, 체제 속의 가족제도와 국가제도와 다른 길로서 동맹과 협약의 방식이 삶의 터전과 과정을 달리만들게(되기) 될 것이다. 이런 후자의 길이 공동체 또는 공산주의 길인데, 박선생님은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를 누리는 사회가 가능할 것으로 본 것 같다. 공동체와 조직화된 국가 또는 제국이라는 측면은 들뢰즈식으로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말 프랑스 철학사전에서 문명이란 항목을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문화론이다. 아마도 들뢰즈/가타리는 자신들이 긴 소설을 쓴다고 했듯이 쓴 안티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철학사전 보다 앞서서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을 전개했는데, 이는 유일신앙의 서구중심이 타문화의 공동체를 식민지로 삼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탈식민지, 탈코드화, 탈영토화 등은 공간적 사고에 대한 반박으로 읽을 때, 시간적 사유로서 다양한 현실화의 실현은 세로지르기로 보면 박홍규의 사유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6. 자유
<자유에 관한 논의도 한 측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 본질론적 측면에서 보면 자유의 극치는 모든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벗어난 ‘영원한 무감동[정지]’에서 성립할 것이나, 생명의 측면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타성을 벗어나 모든 사물과 관계 맺음[상호침투]에서 성립한다고 논파하셨습니다. - 기종석 글>
신화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노력, 그리고 고대 이집트 제국이든 페르샤 제국이든 간에, 아테네가 황제(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자유의 시발점일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필연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생각보다 자연의 이법에는 수긍하면서도, 제도의 억압 또는 필연성에 대해 현자들이 거추장스러워 했을 것이다. 서양의 퀴니코스학파가 참주제가 아닌 민주제의 제비뽑기를 선호했던 것은 자유 시민이면 누구나 임의적으로 제도에 무료봉사하는 제도에 한정되기도 하지만, 평생을 자유롭게 살고자 했을 것이다. 동양에서 황제가 어느 산골에 현자에게 황제자리를 맡지 않겠소 하니 그 현자를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면 계곡에 귀를 씻는데, 그 이야기를 소를 기르는 현자에게 했더니, 그 우부(牛夫)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마시게 할 수 없다면서 소를 상류로 끌고 가서 물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현자들의 자유 또는 유유자적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기록상 5천년전(기원전 3천년전)경에는 체제를 갖춘 무리들이 정복을 일삼았다. 정복과 착취가, 자기 생산보다 백배이상의 잉여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체제는, 들뢰즈가 갑자기 도래한다고 하지만, 인류사에서 과정의 굴곡에서 어느 시기에 체제와 다른 방식의 삶이 간헐적으로 솟아나 만들어진 정점으로서 고원들도 있다.
개인이 자기완성의 실현을 노력한 이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제도와 국가제도 속에서 어떤 구속과 억압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싯달다처럼 왕자의 자리도 뿌리치고 구도의 길을 갈 수도 있었고, 제도 속에서 실현을 꿈꾸면 유학자들은 격물지치성의정심의 수련이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처럼 평천하를 위해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버리기도 했고, 소크라테스처럼 기꺼이 독배를 마시기도 했다. 개인의 실현이 대중 또는 인민과 함께 실현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동서양이 유사한 생각을 했다. 함께 실현하기 위해 지식을 수정하고 제도를 고치면서, 인류는 현시점 지구상에서 여러 제도들을 만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인간에서 자유의 실현이 “지금, 여기”라는 시점에서 이루었다고 하는 경우는 어쩌면 찰나의 것일 진데, 순간의 지속은 신체를 지닌 생명체로서는 그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터전과 삶에서 자유는 어렵더라도 사유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종교의 신앙과 학문의 진리 탐구는 이런 자유 실현의 노력인지도 모른다. 벩송은 자기와 세상의 상반된 연관에서 삶의 노력은 어쩌면 양분화된 열정, 상호 긴장의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자유의 실현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제도 사이에서 잘 혼성하는(composer) 작업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보았는데, 인류 역사상으로 이런 혼성체는 간헐적으로 솟아났다고 하면서, 그래도 이런 노력의 결실은 자연 또는 우주가 신들을 만드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인간이 자아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아의 완성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뭣”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탐구는 인간이 혼자서 수도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노력을 하는 이들도 소중하듯이,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제도와 체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주제는 인간이 먼저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자아든 타아든, 지구라는 터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인간의 자연/본성(la nature)라고 다룰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한 모습으로 인간을 탐구해야 할 때 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철학사에서 흥미롭게도 신의 자연(la naure de Dieu), 인간의 자연(la nature d’homme) 이라는 용어에서 자연이 먼저이다. 인간에서 삶이 먼저이고 사색은 다음이라고 벩송이 말하듯이, 어쩌면 자연이 뭣꼬, 그리고 인간과 신이 왜 부수적으로 나왔지를 달리 물어야 할 것이다. 박선생님이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서 기원과 원인에 대한 물음으로 보고, 플라톤의 전 저작을 다시 혼성하려(composer) 했던 것은 아닌지를 강의록들 속에서 깊이 읽어야 할 것 같다.
자연 속에서 인간, 터전 속에서 인간, 제도 속에서 인간이라는 탐구의 방식들을 나누어 보더라도, 자연(휠레) 즉 자연의 자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다른 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 벩송이었고, 이를 박선생님은 플라톤의 양면성 이후에 철학을 다루는 새로운 두 방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벩송 두 방향 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의 철학을 정립하는데도 매우 소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문자로서 잘 정립된 시기 이전을 제외하면, 동양이나 서양이나 종교적 체제, 사변적 체계, 물질적 세계를 정립하는 규칙화(법칙)에 대한 탐구는 시대적으로 조금씩 어긋난다고 해도, 걸어온 과정은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철학 또는 사유에서 양면성 또는 다면성의 시대로 고대의 선불유의 시대에서 불교의 전성시대 유교의 전성시대라고 한다면, 서양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찾는 노력에서 크리스트교 천오백년, 지성의 시대 삼백여년 다음으로 실증의 시대의 분화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분화의 시대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한자를 통한 지식인의 시대에서 한글로 급속한 전환의 시대로 이행에서, 거의 60여년 일본을 통한 서구문명의 일방 이식(식민화)를 넘지 못하고, 미 제국의 사상에 포획되었다. 서양이 자의식의 발현에서 자아의 자유를 찾아 나선 것이 오백여년 각국의 언어의 사용이었다면, 우리는 우리 언어와 문자를 우리식으로 말하고 쓰기 시작한 것은 거의 70년이 고작이다. 어쩌면 휴전중임에도 큰 긴장의 파열 없이 70여년이 분화의 다양성을 만들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 다양성이 제국의 식민에 한정되지 않으려면, 플라톤의 이분화의 길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의 길과 벩송의 사유의 길의 긴장과 노력이 맞물려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자유를 함께 실현하는 길로 갈 수 있는 타래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말, 우리글로 철학하기는, 이미 말해진 것을 달리 말하기의 길(가지치기)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때이다.
동서양의 철학을 맞대응 시켜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연 철학자는 누가 뭐래도 박홍규임이 틀림없다. 서철과 동철의 대비만큼이나 새로운 가지치기로서 우리의 길에서 실마리를 잘 이어가는 작업은 후학들이 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자유는 자기의 완성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터전과 인민의 함께 가는 길을 찾는 과정도, 과정의 노력과 탐색도 자유를 느끼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23, 57NKE) (12:36, 57NKF)
*** 박홍규 선생님에 관한 글들.
류종렬: 박홍규(朴洪奎, 1919-1994)에게서 벩송 {마실에서 천사흘밤 (2023, 04)}
류종렬: 20세기 철학자, 박홍규와 들뢰즈 {마실에서 천사흘밤 (2023, 02)}
류종렬: 박홍규의 「고별강연(1984)」 따라가 보기. {마실에서 천사흘밤 (2022, 07)}
류종렬: 이정우: "소은 박홍규 사상", 1. 플라톤편 2. 벩송편. {마실에서 천사흘밤(1: 2022, 04). (2: 2022, 06)} - 이정우의 ‘박홍규론’에 대한 단상(이 책, 2024, 01, 축소 재작성 수록, 261-278)
류종렬: 왜 철학을 배우고 익히려 하는가! {마실에서 천사흘밤(2020, 07)} - 소은 선사 강론을 화두로 철학을 묻다. (이 책, 2024, 01, 수정 수록. 209-236)
# 과제
1. 박홍규의 계승자들
대상: 제작과 능력 계통(이태수) 대 실재성: 삶과 권능 계열(윤구병)
플라톤에서 문제를 찾아서 끌어내기 선지자 대 아라한
터전: 남한이라도 진리를 차자 대 남북의 아픔을 큰수레 끌고 가려 한다.
기억; 미슐레가 말하듯이 왕조사를 읽는 이들 대 혁명의 소원수리을 읽는 자들
학문: 체계가 있어야하는 위계주의자 대 인민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실재주의자
2. 박홍규의 우리 철학 대 서양 철학
철학 수용에서 앵글로 색슨의 로마중심대, 원인과 기원에 사유로서 그리스철학
박홍규에게서 서양철학사의 관점 과 프랑스 철학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 선별과 분류,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플라톤의 아리스토텔레스 : 영혼(psyche, ame)에 관하여
3. 박홍규와 윤구병
[일단, 박홍규를 잇는 고대 그리스를 읽는 이들이 주류라고 하는 이들을 제외한다. 문헌학자는 사회와 연관이 없다. 강희 대자전의 도서관에 들어 있었던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정책이 승리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서, 우리 사유(철학)하기에 어떤 길 또는 깊이가 필요한가.
남북의 분단의 문제:
외래 사상으로서 서양철학학, 외래 종교로서 크리스트교
우리나라에서 철학적 사유의 현주소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에 대한 견해
실증성: 과학의 수용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영혼의 내재의식)
현존의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 충족이유율 (57M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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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철학의 세계(2024)
# 책의 목차
머리말 5
강연문
1. 소은 박홍규의 고전에 대한 생각(이태수) 15
2. 박홍규와 형이상학(최화) 37
논단
1. 언어와 존재(윤구병) 51
2. 박홍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읽기 방식(양문흠) 61
3. 소은 철학의 단편(斷片)을 징검다리로 (손동현) 73
4. 플라톤과 전쟁: 소은의 강연을 중심으로(강상진) 119
5. 소은 박홍규 철학 입문기(유형수) 151
회고와 철학적 단상
1. 소은 박홍규 선생을 추억하며(이창대) 185
2. 내 나이 일흔에 돌아보는 소은 선생과 나(이정호) 191
3. 소은 선사 강론을 화두로 철학을 묻다(류종렬) 209
4. 탐구의 드라마(김혜경) 237
서평
이정우의 ‘박홍규론’에 대한 단상(류종렬) 261
좌담
소은 박홍규의 삶과 학문(사회: 기종석) 281
자료 : 소은 박홍규 선생의 서울대 철학과 강의록과 친필 메모
1. 1972년도 2학기 중세 철학사 수강 노트 349
2. 1975년 1학기 데카르트 수강 노트 361
3. 1975년 2학기 아리스토텔레스 『생성과 소멸』 수강 노트 365
4. 1975년 2학기 제논 수강 노트 379
5. 1975년 2학기 제논 수강 노트 423
6. 1973년 1학기 [대학원 강의] 플라톤의 『파이돈』 수강 노트 439
7. 박홍규 교수 학술 관련 친필 메모 449
소은 박홍규 연보 455
찾아보기 457
# 글쓴이 및 좌담 참여자들 (연대순)
1941 이창대(李昌大, 1941-) 인하대 명예교수 서양고전철학
1943 윤구병(尹九炳, 1943-) 전남 함평 출생, 변산공동체, 보리출판사 대표. 1995년-1996년 서울대학교 교환교수 1981년-1995년 충북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75년-1977년 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 편집주간. 있음과없음: 윤구병의존재론강의(2003), 철학 다시 쓴다
1944 양문흠(梁文欽, 1944-) 제주, 전 교수 출생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 전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1944 이태수(李泰秀, 1944-) 인천, 괴팅겐 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7 김남두(金南斗, 1947-) 서울대학교대학원 소속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1947 손동현(孫東鉉, 1947-) 성균관대 교수, 박홍규 강의 수강.
1949 기종석(奇宗錫, 1949-) 서울대학교대학원 소속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1950 송영진(宋榮鎭, 1950-)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벨기에 ...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1952 박희영(1952-) 대전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학력 파리소르본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경력 서양고전철학회 회장,
1952 이정호(李政浩, 1952) 서울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정암학당 이사장, 한국철학사사연구회 이사 역임.
1953 류종렬(柳鍾烈. 1953-) 프랑스 철학 전공, 벩송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연구.
1958 최화(1958-) 구명 정식(晶植). 파리대학대학원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1965 강상진(姜相溱, 1965) 서울대 철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서양고중세철학, 서울대 교수
1968 강성훈(姜聖勳, 1968-) 서울대 철학과 미국 프린스턴 대학 박사, 고대철학 플라톤, 인재대를 거쳐 서울대 교수.
1971 김혜경(1971-) [비공개] 서울대. 인제대 교수, 서울대 철학박사.
1972 한경자(韓慶子, 1972-) 서울대, 서양고대철학(헬레니즘철학, 스토아철학), 서울대, 사단법인 정암학당 연구실장.
?-? 유형수(?-?),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최우수 졸업논문상, 택시운전사.
#“엄밀한 고전문헌 탐구 강조로 원전 번역 토대 쌓으셨죠”
수정 2024-01-24 14:34 등록 2024-01-21 18:42
[기억합니다] 30주기 맞는 박홍규 선생을 기리며
*고 박홍규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민음사 제공
해방 후부터 서울대 교수 재직하며
고전문헌 접하는 법 지도에 열정
원전 번역 요약물에 석·박사 학위 줘
철학과 동료 교수들과 갈등도
후학들 스승 뜻 따라 정암학당 열고
독회·토론 통해 고전 번역 확장
스승 별세 때 제자들 직접 ‘염’까지
최근 생애 엿볼 수 있는 책 나와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태어나서 1994년 3월9일 돌아가신 박홍규 선생님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시련, 굴곡과 함께였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수학해 서양 고전 철학의 기틀을 다지고, 해방된 이듬해 서울대 불문학과를 거쳐 철학과 교수로 취임해 1984년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후 10년의 수를 더하셨을 뿐이니 더 사셨으면 얼마나 많은 철학적 사유의 축복을 받았을까 아쉬울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고전 문헌의 천착과 대화를 통한 강의에 몰두하셨을 뿐, 저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선생님 사후 제자들은 선생님의 글을 모은 한 권의 논문집과 네 권의 강의록으로 이루어진 ‘박홍규 전집’(민음사)을 1995년부터 2009년에 걸쳐 출간하였습니다. 2015년에는 선생님 철학에 관한 연구서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이태수, 윤구병, 이정우 등 공저)가 나왔고 지난해 말에는 선생님 삶의 모습도 엿볼 수 있는 ‘박홍규 철학의 세계’(이태수, 최화, 기종석 등 공저)가 출간되었습니다.
* 고 박홍규(뒤 왼쪽 넷째) 교수 등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1970년대 초 찍은 사진이다. 뒤 맨 왼쪽이 필자 기종석 교수이다. - 기종석 교수 제공
대학을 입학한 지 반백 년이 넘었으나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와 그 이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그 우중충하고 비끗거리는 동숭동 강의실에서 두꺼운 책 몇 권을 교탁에 펼치고 바로 강독에 들어가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출석도 부르지 않고 서론도 없이 학생들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선생님은 책 읽기에 매몰되셨습니다. 막히거나 불분명하면 펼쳐놓은 주석서를 뒤적거리며 비평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학생들에게 “그래, 그래, 그렇지?” 하시며 동의 아닌 동의를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진도는 아예 염두에 없었으니, 선생님이 시작하시면 개강이고 리포트 하나 내라 하시면 종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바로 그 강의에서 받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학자는 바로 선생님 같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르치기보다는 텍스트를 접하는 법과, 읽고서 대상의 진상에 이르는 탐구의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엄혹하고 암담하던 시절에.
대학원 신입생에게는 강독의 책무를 주기 때문에 일주일이 어찌 지나는지 모르게 지났습니다. 강독자는 강의를 여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지만 개인으로서는 원전에 대한 입문 방법을 습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석사와 박사 과정 모두 원전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려면 먼저 플라톤 원전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이 대학원에서 강독한 플라톤 대화록의 정리가 곧 석사 학위였고 박사 학위였습니다. 대화편 한 편 읽고 요약한 것이 어떻게 학위논문이 될 수 있느냐는 동료 교수들의 질책에도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철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에요.” 고전 문헌 자체의 엄밀한 천착은 선생님의 학문적 방법이자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은 지금 정암학당으로 이어져 고전을 전공하는 젊은 학자들의 독회와 토론을 통하여 플라톤 철학을 위시한 또 다른 고전 철학의 전적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은퇴한 뒤에는 한 학기에 한두 번 날짜를 정하여 선생님의 모든 문하생이 모였습니다. 이른바 ‘박홍규 사단’이 회동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셨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를 자유롭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몹시 체계적인 강의였습니다. 이제 그 강의록이 전집에 수록되었으니, 그것이 선생님의 존재론과 형이상학 이해를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 고인의 제자들이 2015년 묘소를 찾았을 때 찍었다. 맨 왼쪽이 기종석 교수. - 기종석 교수 제공
선생님의 아호는 소은(素隱)입니다. 동료 교수이던 윤명로 선생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자신이 숨거나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는 선비쯤으로 불리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야를 방해하는 숲속에서 하는 철학이나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는 철학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항상 데이터(Data)와 프라그마(Pragma·데이터의 그리스어 대응어)를 강조하시고 실증주의를 옹호하며 관념론을 배척하신 점이 선생님 사상을 추적하는 단서가 되겠지요. 데이터들을 외면하고 관념 안에 노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상을 보되 한 면으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이데아를 설명하실 때도 인간은 저 뒷면을 보지 못하니 돌려봐야 하고, 돌려 볼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자유에 관한 논의도 한 측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 본질론적 측면에서 보면 자유의 극치는 모든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벗어난 ‘영원한 무감동’에서 성립할 것이나, 생명의 측면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타성을 벗어나 모든 사물과 관계 맺음에서 성립한다고 논파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선생님 철학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 어찌 한 줄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까만 제자들이 힘써서 선생님의 글과 강의 내용을 모아 전집으로 묶었으니 후학들의 탐구와 사유에 의해 밝혀지고 성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출간된 ‘박홍규 철학의 세계’ 표지.
올해가 선생님 가신 지 30년입니다. 그날 선생님이 가셨다는 소식에 제자들이 모여 직접 염을 하였고, 제자들이 찾아낸 공원에 묘비명을 세워 모셨습니다. 해마다 새봄이 시작하는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선생님을 만나던 양지바른 그곳, 삼십 년 머무셨으니 이제 그곳도 떠나야 한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은 원래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선생님이 남기신 가르침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원하십니다.
기종석/건국대 철학과 명예교수
책1919박홍규2024철학의세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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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야작성자
2024.03.10메뉴
첫댓글열여덟의 철학이 주제였는데: 자연학(우주발생론)과 존재론의 위계(우주론)에 대한 이야기와 운동에 대한 물리학 끝에 손선생님은 나에게 학부 전공이 뭐냐고 물었다. 학부에서 철학했습니다하고, 진의를 알아챘어야 하는데. 왠 잡학인가? - (이런 발언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박홍규 선생님은 수학책을 읽고 나면 물리학 책을, 그리고 생물학과 심리학 개론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덴마크 철학자 회프딩이 “창조적 진화(EC)”를 번역하겠다고 벩송에게 편지했을 때, 답장에서 수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와 더불어 번역할 것을 권했다. 열여덟 프랑스고교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각 학문에 대한 담론인데, 언어, 수학, 물리(물질), 생명(생물학) 의식(심리학)을 실증적으로 다루면서 사유의 깊이에 들어가게 한다. 이런 방식은 고교에서 배운 제반 과학의 실증적 방식이 다른 이유를 사유하게 한다. 열여덟에서 수학의 증명과 실증과학의 증거의 차이를 알 때, “신 현존 증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며,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성내에서가 아니라 성밖에서 떠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했어야 했다. 문헌학은 자료들 중의 일부이지만, 실증과학의 자료는 지층입니다 .
*출처 : 다음카페 마실에서 천사흘밤